히브리서(묵상)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히브1,1~6)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5)
히브리서 1장 5절부터 13절까지는 7개의 구약 인용 성구가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구약 성경의 일관된 사상임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히브리서 1장 5절은 시편 2장 7절의 인용으로 하느님께서 '내 아들'이라고 칭하신 유일한 존재는 그리스도 뿐이심을 보여준다. 물론 한 부류의 천사들이 넓은 의미에서 '엘로힘'(elohim)의 아들들로 불리워진 경우는 있지만(시편29,1), 어떤 특정 천사가 좁은 의미에서 메시야를 나타내는 하느님의 아들로 칭해진 적은 결코 없다. 그래서 시편 2장 7절은 천사들 중에 누구에게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이 선언은 영원 세계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선언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난 선언이기도 하다. 즉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마르1,11), 그리고 타볼산의 현성용 때(마태17,5) 예수님께 들려온 선언인 것이다. 한편 '오늘'에 해당하는 '세메론'(semeron; today)은 '오늘'(this day)이라는 뜻이지만, 하느님의 시간적 관점에서 '오늘'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역이다.
즉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라는 선언은 예수님께서 베틀레헴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탄생하신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영원으로부터 발출하셨음을 말하는 구절이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시요 지혜이신 성자께서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영원으로부터 발출하셨다는 말이다. 인간의 이해 개념으로는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느님간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어서 그것을 단지 '낳았다'로 표현하는 것뿐이지, 이것을 신학적으로 '영원 발출(발생)'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다윗이 낳은 아들 솔로몬을 지칭하여 예언하신 사무엘 2권 7장 14절의 상반절을 인용한 구절이다. 사무엘 2권에 나오는 이 말씀의 주인공이 일차적으로는 솔로몬을 가리키지만, 여기서 솔로몬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즉 신정(神政) 왕국인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솔로몬은,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임금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는 유일하신 분이시므로, 여기에 천사가 개입될 자리는 없는 것이다.
특히 원문에 '나는'에 해당하는 '에고'(Ego; I) 혹은 '그는'에 해당하는 '아우토스'(autos; he)과 같이 생략되어도 좋은 주격 인칭 대명사가 사용된 강조적 문장이며, 동시에 완벽한 평행 대구 구조로서 하느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부자(父子) 관계가 이중으로 매우 강조되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강조 구문을 사용해서 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우월하심을 부각시킨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천사들이 하느님과 가지는 관계와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것이며, 이러한 '하느님과 중재자 그리스도 사이의 부자(父子) 관계'는 구원하시는 하느님과 타락한 인간 사이의 모든 은총의 관계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히브2,5~12)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10)
히브리서 2장 5~9절에서는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한시적으로 천사보다 낮아지셔서 고난을 당하셨음을 밝혔다. 이제 이어지는 히브리서 2장 10~1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도를 형제로 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내용의 도입부인 본절의 전체적 의미는,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자녀들인 성도들을 하느님 나라의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성도들의 구원의 영도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고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많은 자녀'로 번역된 '폴루스 휘우스'(pollus hyus; many sons)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해 죄사함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된 자들을 말한다. 특히 '휘우스'(hyus)의 원형 '휘오스'(hyos)는 부모의 기업을 상속할 자격이 있는 아들을 일컫는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서 '많은 자녀'는 장차 하느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을 의미한다(로마8,15~17; 갈라4,5~7). 또한 본문에 언급된 '영광'이란 장차 유업으로 받게 될 하느님 나라를 말한다. 영광은 본래 하느님과 그리스도께만 있는 것이며, 죄인들에게는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과 수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그 영광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보다 정확히 원문 '톤 아르케곤 테스 소테리아스 아우톤'(ton archegon tes soterias auton; the author of their salvation)을 번역하면, '저희 구원의 우두머리 혹은 창시자를'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구원 얻은 자들의 '우두머리' 즉 '아르케고스'(archegos; captain; author)가 되신다는 것인데, 이 명사는 예수님께 대해 사용된 참으로 고귀한 칭호이다. 이것은 본절 이외에도 히브리서 12장 2절과 사도행전 3장 15절, 5장 31절 등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칭호로 나타난다.
'아르케고스'(archegos)라는 단어는 '첫째', '처음', '시작'을 의미하는 '아르케'(arche)를 어근으로 삼고 있는 단어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첫째 가는 자', '우두머리', '영도자'이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제우스'(Zeus)가 여러 신들의 '아르케고스'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이 명사는 '창시자', '개척자', '설립자'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즉 '아르케고스'는 남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처음으로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구원의 아르케고스'라고 하는 히브리서 저자의 증거는 우리가 뒤따라 들어갈 수 있도록 그분이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유일한 지도자요, 안내자가 되신다. 따라서 그분의 지도와 안내를 받는 사람들만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전치사 '디아'(dia)는 소유격을 수반하여 수단, 방법, 매개의 뜻을 나타내어 쓰였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 구원의 '아르케고스'가 되실 수 있었는지,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영광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는지 알게 된다.
즉 그분은 이 일을 위해 고난이라는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셨다. 여기서 '고난'에 해당하는 '파테마톤'(pathematon)는 '파테마'(pathema)의 복수형이다. 이 단어가 복수형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그 고난이 십자가의 죽음만을 지칭하는 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육화(강생)와 지상에서의 모든 수난과 삶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구원의 영도자로서 완전하게 되신 것이다.
한편 '완전하게 만드신 것'으로 번역된 '텔레이오사이'(telleiosai)는 '텔레이오오'(telleioo)의 부정사이다. '텔레이오오'는 '완전하게 하다' 혹은 '완성하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동사의 어원인 형용사 '텔레이오스'(telleios)는 신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쓰였는데, 기본적으로 의도된 계획이나 목적을 완전하게 이루는 것을 나타낸다. 동사형인 '텔레이오오'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시고 하나이시며 (필리2,6; 요한10,30) 본래 완전하신 분인데, 어떻게 그가 더 이상 완전해질 수 있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인격적, 도덕적으로 부족하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해졌다는 의미를 나타내지 않는다. 여기서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구속 사업의 측면에 관한 것이다. 즉 구원의 영도자, 구원의 주로서 완전하게 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데, '고난'이라는 필연적인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고난을 통해서만 그는 구원의 영도자(주)로서 완전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이후로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지고, 피를 쏟지 않고서는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는 하느님의 원칙이 세워지고(히브9,22), 죄인들의 피는 그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었기에, 무죄하신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해 피를 흘리셔야만 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육화(강생)하여 인간이 되셨다해도, 대속의 피를 흘리는 고난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구원의 영도자(주)로서 완전하게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히브리서 저자는 구원의 영도자(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완전케 하심이 '당연한 일'(합당하고, 마땅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히브2,14~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18)
히브리서 2장 18절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이 당하는 모든 유혹을 경험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매우 유명한 구절이다.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셨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4,15)
히브리서 2장 18절의 본문 '아우토스 페이라스테이스'(autos peirastheis)를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그분 자신이 유혹을 받아'가 된다. '아우토스'(autos; himself)는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재귀적 용법으로 쓰였다. 또한 '유혹을 받아'로 번역된 '페이라스테이스'(peirastheis; being tempted)는 '유혹하다', '시험하다' 등을 뜻하는 '페이라조'(peirazo)의 과거 분사 수동태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생동안 사탄의 유혹의 대상이었고,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서 2장 18절, 4장 15절, 그리고 루카복음 4장 13절, 22장 28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당신의 제자들이 유혹을 당할 때에 친히 도와주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인성적 차원에서 하나의 유혹이었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동일하다. 단지 다른 것은 그러한 유혹 가운데서도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분께서는 여러가지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으셨다. 따라서 히브리서 2장 18절에서 유혹은 유혹(was tempted)이었지, 시험(test)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인간들과 동일하게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하라는 유혹, 사탄에게 굴복하라는 유혹, 육체의 고통을 피하라는 유혹 등이 끈질기게 따랐지만, 이것들과 싸워 이기셨으므로 그러한 유혹에 직면한 성도들을 도우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하셨는데, 공관 복음서 저자들은 한결같이 그때에 그분이 '호 페이라존'(ho peirazon), 즉 '유혹하는 자'인 사탄과 만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마태4,1; 마르1,13; 루카4,2). 사탄은 '계속해서 유혹하는 자'이다. 사탄은 유혹의 손길을 그리스도에게까지 뻗치고 있다.
광야에서 그는 세 가지로 그분을 유혹하고자 시도했다. 첫번째 유혹은 예수님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 이외의 목적으로 능력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돌을 빵이 되게 하는 극적인 기적을 행하라는 것만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유혹은 주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위해 양식을 제공하시리라는 구약의 약속의 배경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사탄은 그분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했으며,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불신앙과 욕심, 불만족과 의심 등에 사로잡혀서 하느님께 범죄했던 그 전철을 그분도 따르기를 원하였음이 분명하다.
두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며 그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라는 것이다. 이 유혹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랑할 때에 하느님께서 보호를 약속하신 사실로 보인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에 축복과 저주를 제시하셨는데(신명기11,26; 27,10~30,20),축복에는 모든 종류의 위험으로부터의 보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번째 유혹은 하느님 대전에 사탄 자신을 따르면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를 줄 것이라는 유혹이었다. 이런 유혹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차원에서 매우 빈번하게 당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혹자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의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당한 유혹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이스라엘이 민족 공동체의 생활에서 당한 유혹들을 되풀이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한 사탄의 유혹은 이처럼 그분이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시작되어 겟세마니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겟세마니 기도에서 할 수만 있다면 그 고난의 잔이 자신에게서 비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이다(히브5,7; 마태26,39). 한편 유혹과는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그분께서 최고의 시험을 받으신 순간은 십자가상에서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마르15,34;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십자가 위에서의 외침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과 고통의 크기를 잘 표현해 주며,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의 궁극적 결과에 직면하신 것도 바로 이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받아 고난을 많이 겪으셨다.
인간 중에 예수님보다 더 큰 유혹과 시험을 당한 자가 어디 있는가?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셨기 때문에, 성도들이 어떤 유혹과 시험을 당하더라도 능히 도와주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시험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유혹은 마귀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두 경우를 모두 인성(人性)으로 극복하셨다.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로 번역된 '뒤나타이 토이스 페이라크메노이스 보에테사이'(dynatai tois peirazomenois boethesai)는 '그는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우러 도실 수 있다'는 뜻이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것을 모두 이기신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유혹에 직면한 당신 백성들을 언제든지 도우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로 번역된 '보에테사이'(boethesai)는 '도우러 오다', '돕다'를 뜻하는 '보에테오'(boetheo)의 부정사이다. '보에테오'는 본래 위험에 빠진 자의 울음 소리를 듣고 도우러 급히 달려가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마귀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달려가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 사용되었으며(마태15,25;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아시아로 선교 여행을 계속하고자 미시아를 지나 트로아스로 내려간 사도 바오로에게 환시 중 나타난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을 때도 사용되었다(사도16,9). 이러한 의미과 용례를 가지는 이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심각한 유혹에 직면하여 도움을 청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지체하지 않으시고 달려오셔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유혹과 시련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야고보는 성도들이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라고 말했으며(야고1,2), 베드로는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1베드4,12) 라고 말했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유혹과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가 낙담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동일한 유혹을 당하신 바 있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히 도와주신다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유혹과 시련을 당할 때에 낙심하여 심지어 하느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살까지 한다. 그러지 말고 솔직히 잘 극복하기 힘을 때에는,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유혹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라고 겸손하게 도움을 구할 것이다.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히브3,7~14)
형제 여러분,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 " (7~8)
히브리서 3장 1~6절에서는 진리 자체이시고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권면과 더불어 예수님의 존재론적 우월성과 그 사명의 우월성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견주어 설명한 바 있다. 이제 이어지는 히브리서 3장 7~19절은 히브리서 3장의 두번째 단락으로서, 모세 당시 이스라엘의 사례를 통한 불신앙의 결과에 대한 경고 및 복음의 진리를 견지할 것에 대한 권고이다. 이 가운데 히브리서 3장 7~11절에서는 우선 모세가 활동하던 시기, 즉 출애굽 이후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말씀은 시편 95장 8~11절인 이 인용구를 제시하기에 앞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라고 표현한 것은, 인용된 시편 말씀이 성령의 영감(Inspiration)으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도구로 사용받은 인간 대신에 성경에 영감을 불어넣으신 성령을 직접 성경의 저자로 언급함으로써, 구약 성경이 성령의 감도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신의 순수한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라고 번역된 '카토스 레게이 토 프뉴마 토 하기온' (kathos legei to pneuma to hagion; as the Holy Spirit says)에서, 성령에 대한 표기로서 본절에서처럼 일반적으로 '거룩하다'라는 뜻의 형용사'하기온'(hagion)이 사용되지만, '영'이란 뜻의 '프뉴마'(pneuma) 한 단어만으로도 성령을 지칭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구약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게 역사(役事)하셔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기록하게 하셨다.
또한 본절에서 '말씀하시는'으로 번역된 '레게이'(legei)의 원형 '레고'(lego)는 일반적으로 '말하다', '이야기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에서 기록된 말씀들과 성령의 관계를 알 수 있는데, 성령께서는 주님의 입이 명하신 것들을 예언자들의 영과 가슴에 말씀하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것들을 모아서 인간 저자를 통해 기록으로 남겨 주셨다.
말하자면, 인간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을 인간 언어로 기록하게 하신 편집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신 셈이다. 특히 본문에서 '레게이'(legei)는 직설법 현재 시제로서 '말하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말씀하셔서 기록된 성경 말씀이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현재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성경 시대에 예언자를 통하여 혹은 성경 기록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신 성령께서 오늘날에는 우리 각자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그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이 구절은 시편 95장 8절의 인용인데, 이 시편은 광야의 출애굽 1세대가 걸어간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본절에서 '오늘'로 번역된 '세메론'(semeron)이 서두에 나와 강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세메론'이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에서는 '하이욤'(haiyom)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종종 '오늘' 이나 '이날', '어떤 특별한 날'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때로는 하느님에 의해 회개가 권고되고(시편95,8), 하느님에 의해 구원이 부여되거나(시편118,24), 양자로 채택되는(시편2,7) 구원의 때를 나타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이 하느님의 주도적 권세와 관련된 수많은 신학적 주제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본서 저자는 이러한 특별한 의미를 지닌 단어를 과거 구약적 상황에서 신약적 상황으로 옮겨 사용한다. 즉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대사제이시라고 한 고백을 확고하게 다지고자 하는 사람들의 시대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본서의 독자들이 자기 당대에 듣게 될 '그분의 목소리'는 모세를 통해서 들려주신 지난 날의 음성과 대조가 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해 들려오는 오늘의 음성이다.
본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행해야 하는 현재적 책임을 부과하기 위해서 '세메론'이라는 단어를 채택하였음이 분명하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오늘'이라고 하는 시간에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신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음성은 대부분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심령과 영혼에 울려퍼진다.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행진하던 도중에 르피딤에 진을 쳤을 때에 있었던 사건과 관련된 진술이다. 이스라엘은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하자 모세와 다투고 주님을 시험하며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하며 의심하기까지 했었다(탈출17,1~7).
'반항하던 때처럼'으로 번역된 '호스 엔 토 파라피크라스모' (hos en to parapikrasmo)의 의미를 알아보자. 이 단어의 원형 '파라피크라스모스'(parapikrasmos)는 '격분','반역','반항'을 뜻한다. 히브리서 맛소라 본문에서는 '므리바'(mriba)로 되어 있다. '다툼', '논쟁'으로 번역되는 이 히브리어 명사는 '싸우다', '다투다', '경쟁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리브'(rib)의 파생어인데, '리브'(rib)의 일차적 의미는 육체적 의미에서의 '싸우다'이다. 이것이 후에 '말다툼'이라는 의미로 변화되었고, 더 나아가 법률적, 사법적 의미까지 취하게 되었다.
또한 흔치는 않지만 '불평하다'(complain)라는 의미로도 나타나는데, 특히 이것은 본문의 맥락과 관계된 이 동사의 핵심적 의미가운데 하나이다. 르피딤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그들이 모세와 육체적으로 치고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격렬하게 따졌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떄문이다. 그들이 취한 이러한 행동은 하느님을 향한 격분, 하느님께 대한 반역과 반항으로 규정되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과 순종인데, 그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기들을 구원하신 그분을 분노케 했던 것이다. 그분은 그들의 이러한 태도를 모반(rebellion)으로 받아들였다.
당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세를 방해하고 해하려 한 일체의 행위들을 당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반역으로 받아들이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불순종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신다. 즉 본서 저자는 그리스도를 버리고 과거 유대교로 돌아가는 행위가 하느님께 대한 반역임을, 본서의 일차적 수신자들인 당시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이러한 과거의 사건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카타 텐 헤메란 투 페이라스투 엔 테 에레모; kata ten hemeran tu peirasmu en te eremo; the time of testing in the desert)에서 '시험하던'으로 번역된 '페이라스무'(peirasmu)의 원형 '페이라스무스'(peirasmus)는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에서는 '마싸'(massa)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의 질을 검토하거나 또는 누군가를 믿지 못해 시험해 보는 것을 의미하는 '나싸'(nassa)에서 유래하였다. 본문에서는 후자의 의미와 연관된다.
이스라엘이 르피딤에서 취한 행위는 하느님께 대한 시험이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건지시고 홍해를 건너가게 하신 전능하신 분임을 체험했으면서도, 일시적으로 당하는 어려움 가운데서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시험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구원자 하느님께 대한 모독과 다름이 없었다. '므리바'와 '마싸'의 두 지명은 인간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면, 하느님의 임재와 축복을 상실하고, 마음이 완고해져서 멸망하고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실증된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마라'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시험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졌기 때문이었다. 본서 저자는 현재 히브리서 독자들 역시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그런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메 스클레뤼네테 타스 카르디아스 휘몬'(me sklerynete tas kardias hymon;do not harden your hearts)이 본문인데, 여기서 '굳게하다'를 뜻하는 '스클레뤼노'(skleryno)의 가정법이 부정어 '메'(me)와 함께 쓰여 금지 명령법 구문을 이룬다. '스클레뤼노'가 본절에 인용된 시편 95장 8절의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에는 '타크슈'(thakshu)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단어의 원형인 히브리어 '카샤' (qasha)는 완고하고 고집이 세어 하느님의 인도하심(신명10,16; 2열왕17,14; 느헤9,16)이나 성령의 인도(시편7,51)에 대해 무감각했던 이스라엘의 심령 상태를 나타낼 때에 쓰인 말이다.
본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경계하기를, 마음에 하느님 모시기를 싫어함으로써 그 마음이 완고하게 되는 불행한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일의 위험성은 '마음'으로 번역된 '카르디아스'(kardias)의 원형 '카르디아'(kardia)의 의미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일반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생명의 중심을 지칭하며 인간 전체의 지적, 영적 중심 자리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대응어인 '레브'(leb)도 마찬가지다.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히브4,1~5.11)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3~4)
히브리서 4장 3~10절까지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영원한 안식의 약속에 대해 진술한다. 본문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안식을 놓치고 말았지만, 신약 시대의 믿음을 지닌 성도들은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본문에서 '들어갑니다'로 번역된 '에이세르코메타'(eiserchometha)는 직설법 현재시제로서 변할 수 없는 사실을 나타낸다. 즉 믿음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하느님의 '안식처로'에 해당하는 '에이스 텐 카타파우신'(eis ten katapausin; into the rest)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직설법 현재 시제가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믿음이 없어서 실패했지만,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이 약속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진 우리'를 본문은 '호이 피스튜산테스'(hoi pisteusantes)로 표현한다. 이것은 '믿다', '신뢰하다', '확신하다', '맡기다' 등을 뜻하는 '피스튜오'(pisteuo)에 관사를 가진 과거 분사이다. 이것은 이미 믿는다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로서 그 믿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본서 저자는 그들이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간다고 단정짓고 있다.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영적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믿음은 인간이 하느님의 약속들에 참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반응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은총의 수단이기도 하다.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라고 번역된 '카토스 에이레켄'(kathos eireken)은 직역하면 '그분이 미리 말씀하신 것처럼'이 된다. '말씀하신'으로 번역된 '에이레켄'(eireken)은 '이야기하다','예고하다' 등을 뜻하는 '에이폰'(eipon)의 3인칭 단수 완료 시제로서, 하느님께서 이미 전에 말씀하신 사건을 가리킨다. 여기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사실에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기록될 말씀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이므로, 우리는 그 말씀만으로도 현재 우리 자신의 상태를 진단하는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시편 95장 11절을 인용한 히브리서 3장 11절의 말씀을 본절에서 재인용한다.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이미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귀를 기울여 경청하고, 그 내용을 하나 하나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귀하고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라고 번역된 '카이토이 톤 에르곤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게네텐톤'(kaitoi ton ergon apo kataboles kosmu
genethenton)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들이 이루어졌다'가 된다. 새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지만, 접속사 '카이토이'(kaitoi)는 '그럼에도 불구하고'(although)라는 의미이다. 이 양보의 접속사가 나타내는 것은 비록 과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진 자가 그 안식처에 들어간다는 그 약속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으로 번역된 '톤 에르곤' (ton ergon; the works; 그 일들)은 하느님의 안식의 원리 혹은 그 안식처에 들어갈 약속을 가리킨다.
저자는 '세상 창조 때부터' 즉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apo kataboles kosmu)라는 표현을 통해 오늘날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는 근거가 이미 창조 때부터 있었음을 밝힌다. 또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로 번역된 '게네텐톤'(genethenton; were finished)는 '되다','만들어지다','이루어지다'등을 뜻하는 '기노마이'(ginomai)의 수동태 과거 분사이다. 여기서 수동태는 하느님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6일동안 세상의 창조사업을 완성하신 후, 제 칠일째에 만족한 상태로 안식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 안식은 사람들이 믿음과 순종으로써 동참할 수 있도록 모든 세상에 열려 있는 안식이다. 이 영원한 안식은 이스라엘이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나,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못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거기에 다 동참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실'로 번역된 '가르'(gar)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3절에서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이유가 본절에 나온다는 사실을 말한다. 정확히 번역하면, '왜냐하면 그분께서 어디에선가 이와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가 된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로 번역된 '에이레켄'(eireken)은 이미 3절에서 설명했다. 저자는 본절에서 창세기 2장 2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마치 인용한 구절의 출처를 모르듯이 '어디에선가', '어느 곳엔가' (somewhere)를 뜻하는 '푸'(pu)라는 부사를 사용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4장 4절이 '호 테오스 엔'(ho theos en)이 첨가된 것 외에는 70인역(LXX) 창세기 2장 2절과 똑같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코 성경 구절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A.D.1세기 당시에는 저자는 물론 독자까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굳이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인용하는 방법이 유행하였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쉬셨다'로 번역된 '카테파우센' (katepausen)은 '카타파우오'(katepauo)의 과거시제로 쓰여 '멈추셨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뒤에 이어지는 전치사 '아포'(apo)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하던 모든 일을 끝마치자 그 일들로부터 손을 떼고 편히 쉬셨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그리고 안식일의 휴식, 즉 '카타파우오'(katapauo)는 그 의미가 굉장히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이 휴식의 특징은 그 대상이 종교적 예배 공동체와 특정 계급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남종이나 여종은 물론 이방인과 심지어는 가축까지도 편히 쉬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것이다(신명5,14).
히브리서에서는 신약에서의 안식에 관한 개념이 풍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느님의 백성을 그들의 안식처인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도록 여호수아에게 맡겨진 임무가 단지 제한적으로 성취된 것으로만 보며(히브4,8), 그것을 창조의 일곱째 날인 하느님의 참 안식과 연결시킨다. 천지 창조라는 대역사를 이루신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는데, 처음 엿새 동안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고 기록한 반면에, 그분이 안식하신 일곱째 날에는 저녁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당시 랍비들은 처음 엿새에는 종말이라는 것이 있었으나, 하느님의 안식에는 종말이 없으며, 그 안식만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날은 우리가 상식으로알고 있는 개념인 24시간의 하루와는 다르다. 하느님의 안식에는 저녁이나 종말이 없다.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비록 이스라엘 광야 세대가 이 안식처에 들어가는 데 실패하기는 했어도,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안식의 효력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며, 오늘날 믿음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연중 제28주일 제2독서 (히브4,12-13)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2)
12절과 13절은 앞 부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구절이다. 저자는 1-11절에서 성도에게 남아있는 참 안식의 약속과 순종함으로써 그 안식처에 들어갈 것을 권면했는데, 이어지는 12절, 13절에서 바로 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지의 이유를 들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흔히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느님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문맥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된 오해이다. 여기서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꿰찔러 가르는 하느님의 말씀의 운동력과 통찰력은 결국 불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영적이며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본서 저자는 이러한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여, 하느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는 그 모든 행위가 하느님의 불꽃같은 말씀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본서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살아 있고' 라고 번역된 '존'(zon)이라는 단어를 문두에 둠으로써 특별히 강조한다. '존'은 '자오'(zao)의 현재 분사로서,지금 현재 살아 꿈틀대고 있는 듯한 영상을 준다. '자오'(zao)란 단어는 '생수'(요한4,10.11 ;7,38), '살아있는 말씀'(사도7,38), '살아있는 길'(히브10,20),'생생한 희망'(1베드1,3) 등과 같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졌거나, 또는 그것을 가져오는 모든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본서 저자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모든 말씀은 항상 살아있다는 표현을 사용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주어진 이상, 아무도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음을 주장한다. 이것은 유다인들이 '말'에 대해 가지고 있던 특별한 생각과도 관련이 있다. 그들은 한 번 말을 하고 나면, 그 말은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다. 말이란 어떤 의미를 가진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여러 가지 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인간의 말이 이와 같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예언자 이사야는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사55,11)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본절이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 말씀의 근원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시기에 언제든지 그 말씀이 유효하게 작용한다.
하늘에서 내린 비는 반드시 땅을 적시게 되어 있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분의 뜻을 이루며, 그분이 내린 사명은 의도하셨던 대로 완수되고 성취되게 되어 있다. 예컨대, 하느님은 어두움이 휘감고 있던 태초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고, 그 살아있는 말씀은 어두운 우주에 빛이 생겨나게 하였다.(창세1,1-3) 또한, 하느님의 신성을 지니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죽어 관속에 들어있던 나인성의 청년을 향해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는 말씀을 하셨고, 그 생명의 말씀은 그 죽은 청년에게 생명을 주어 일어나게 하였다.(루카7,11-18)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헛됨이 없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라도, 그가 죽은 뒤에 그의 말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가 살아서 힘을 발휘할 때에만 그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능력이 있고 유효하다. 그분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진다.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절대적 구속력을 가지며 피할 수 없는 의무를 부여한다.따라서 인류에게 성경이 있다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지만, 이를 업신여김은 죄가 되는 것이다.
'힘이 있으며' 로 번역된 '에네르게스'(energes)는 '활동적인', '힘있는', '효력있는' 등을 뜻하는 단어인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형성된 형용사 '에네르고스'(energos)와 동일 계열에 속한다. 오늘날 영어에서 '힘', '활동력'을 의미하는 '에너지'(energy)도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본서 저자는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던 철학적미여 물리학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활동적이고 힘이 있으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만큼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처럼 효과적이며 강력한 것은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해 자신의 뜻을 표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단순한 언구 혹은 독서에 대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고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것이 운동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다소 다른 점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가진 감동의 능력보다는 심판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이를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놀라운 구원과 축복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저주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의 운동력은 하느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제시되고 있다.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사제들은 희생 제물을 절단하기 위해서 좌우에 날선 검을 사용했다. 본서 저자는 유다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익숙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이 사용하는 쌍날칼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잘 베어지는 예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로 번역된 '토모테로스 휘페르'(tomoteros hyper)는 '~이상으로 더 잘 베어지는 ' 이란 뜻이다. 전치사 '휘페르'(hyper)는 본절처럼 목적격을 지배할 때에, '넘어서', '이상의' 란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토모테로스'(tomoteros)는 '날카로운', '잘 베어지는' 이란 뜻을 지닌 형용사 '토모스'(tomos)의 비교급이며, '더 잘 베어지는', '더 예리한' 이라는 의미이다.
이 세상의 칼은 살을 벨 수는 있어도 마음과 심령을 베지 못한다. 즉 육적 생명을 없앨 수는 있어도 영적 생명을 죽일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의 칼은 육적 생명은 물론 영적 생명까지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가공할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본서 저자는 비교급 형용사를 사용하여 이런 사실을 지적하며, 불순종의 결과에 대한 독자들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꿰찔러' 라는 의미로 번역된 '디이크누메노스'(diiknumenos)는 '관통하다'를 뜻하는 동사 '디이크네오마이'(diikneomai)의 현재 분사이며, 현재 분사로 사용된 것은 그 관통함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또한 '가르고' 에 해당하는 '메리스무'(merismu)의 원형 '메리스모스'(merismos)는 '분리'(separation)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나누기까지 계속해서 꿰뚫고 들어간다.
한편, 본절은 테살로니카 전서 5장 23절과 더불어 인간생명의 삼중구조(삼분설)의 근거로 자주 사용되는 구절이다. 인간의 구조를 영과 혼, 몸으로 나누는 삼분설은 고대 희랍 및 알렉산드리아 교부들과 독일, 영국 학자들이 심취한 학설이었다. 이에 대립되는 학설이 사람의 구조를 영과 육으로 보는 이분설로서, 이것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라틴 교부들과 스콜라 시대의 정설이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학설이다.
본서 저자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인간의 구조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의 동작을 깊이 관찰하시며, 아울러 가장 깊고 은밀한 생각까지도 예리하게 판단하여 불순종하는 자에게 어김없이 멸망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절에서 언급된 '혼' 과 '영' 은 인간에게 있어서 비가시적인 영적 요소로서 이어 나오는 가시적인 육적 요소를 나타내는 '관절'과 '골수' 란 단어에 대응시키기 위한 표현이다. 즉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에 대한 심판은 인간의 육체만을 파괴시키는 데 그치는 이 세상의 징벌과는 달리, 영혼과 육체를 포괄하는 전인적인 심판이며, 완전한 종말론적 심판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의 속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가려냅니다' 로 번역된 '크리티코스'(kritikos)는 '구별하다', '판단하다', '판결하다' 등을 뜻하는 동사 '크리노'(krino)의 형용사형으로서 '구분할 수 있는', '판단할 수 있는' 이란 뜻이다. 본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속 생각과 속셈을 판단할 수 있음을 나타내어 쓰였다.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숨길 수 없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면서, "주님께서는 모든 마음을 살피시고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신다" (1역대28,9) 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생각'으로 번역된 '엔티메세온'(enthymeseon)의 원형 '엔티메시스'(enthymesis)는 '생각', '반성', '관념' 등을 뜻하나, 여기서는 주로 애정이나 감정의 활동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주목할 것은 신약에서 이 말이 대부분의 경우, 나쁜 혹은 어리석은 생각을 뜻하는 부정적 의미로 나온다는 사실이다.(마태9,4 ; 12,25 ; 사도17,29)
또한 사도행전 17장 29절을 제외하고는 본절처럼 인간이 스스로 간직하여 드러내지 않고자 하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인식하고 드러내시는 감추어진 비밀스런 생각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런 인간의 비밀스런 생각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또한 '속셈'(뜻)으로 번역된 '엔노이온'(ennoion)의 원형 '엔노이아'(ennoia)는 '생각', '지식', '통찰력' 등을 뜻하는 말로서, 앞에 나온 '엔티메시스' 와 달리 이성(理性)활동을 나타낸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개념'이라는 철학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생각' 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본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살펴지고 판별되는 대상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생각들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감정과 지성을 살펴서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감추고 은밀하게 위장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내면적 동기에 대해 예리하게 판단하여 정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연중 제1주간토요일 제1독서(히브4,12~16)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4~15)
히브리서 전반부인 1장 1절에서 10장 18절까지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시고 완성시키신 예수님께서 구약에 나오는 여러 신분들에 대한 우월성을 지니고 계심을 증거한다. 히브리서 1장 1절에서 4장 13절까지는 특히 예수님의 신분과 구원자로서의 우월성을 증거한다. 구체적으로 당시 유대출신 성도들이 능력의 존재로 섬기기까지 했던 천사들 보다 우월함을 증거한다. 또한 하느님의 율법을 수여받았으며, 가장 탁월한 민족의 영도자로 여김을 받았던 모세보다 더 뛰어난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이어지는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10장 18절까지는, 예수님의 대사제로서의 지위와 사명과 일의 우월성에 대하여 증거한다. 그 가운데서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7장 28절은 예수님께서 레위 계통 사제들보다 더 뛰어나신 대사제되심을 밝힌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16절은 이러한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는 서론 부분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대사제임을 밝힘과 동시에, 본 서간의 수신자들에게 성도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사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권면하는 부분이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우리에게는~계십니다'로 번역된 '에콘테스'(echontes)는 '가지다'(have),'취하다'(take)등을 뜻하는 동사 '에코'(echo)의 현재 분사 1인칭 복수이며, 문장 서두에 나와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우리가 대사제 예수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대사제되신 예수님이 우리 신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우리가 그분의 완전한 제사로 하느님께 나아 갈 수 있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미 3장 1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지칭한 바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사제직을 비중있게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번에 영원한 효력을 나타낸 완전한 제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속죄를 위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음을 히브리서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강조가 불가피했던 것은 히브리서의 일차 독자인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적 제사, 즉 율법 중심의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유혹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서 저자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대사제'라는 단어 앞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여기서 '위대한'에 해당하는 '메간'(megan)의 원형 '메가스'(megas)는 지위 및 품위과 관련하여 인격적인 존재에 대해서 쓰일 때에 '높은', '위대한', '큰'등을 뜻한다. 저자는 본서에서 그리스도의 대사제직이 구약의 레위 계통의 대사제보다 훨씬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단어를 쓴 것이다. '대사제'로 번역된 '아르키에레아'(archierea)의 원형 '아르케이류스' (archiereus)는 '첫째', '시작', '우두머리'를 뜻하는 '아르케'(arche)와 '사제'를 뜻하는 '히에류스'(hierues)의 합성어로서 '대사제'(우두머리 제사장)라는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 시인 Herodotus가 이집트의 주요한 사제를 나타낼 때 그 사제는 왕 다음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 철학자 Philo는 유대 사회의 대사제란 백성을 대표하며, 속죄시에는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또한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들이 히브리서 저자에게 대사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대사제는 자신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려고 하면, 하느님과 인간을 완전하게 아는 자여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하고, 하느님의 임재하심을 인간에게 보이며, 인간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자이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이 역할을 완전하게 할 수 있는 위대한 대사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저자는 본서에서 밝히고 있다. 이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레위 계층의 사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두 가지가 나온다.
①하나는 그분이 '하늘 위로 올라가신'(승천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디엘렐뤼토타 투스 우라누스'(eielelythota tus uranus)를 직역하면, '하늘들을 통과하여 지나간'(who has gone through the heavens)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들을 지나가신, 즉 통과하신 위대한 대사제이시다. 저자가 '하늘'(uranus)을 복수형으로 표현한 것은, 하늘이 3층 혹은 7층으로 되어 있고, 그 하늘들의 정상에 하느님의 옥좌가 있다는 유대 사상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믿는 하늘들의 정상에 올라가신 것이다(마르16,19; 사도1,10).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행했던 일이요, 동시에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놀라운 일이다.
②두번째로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 구별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한다(요한14,9.10). 특히 본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쓰지 않고, 역사적 인물인 예수님의 이름만을 기록함으로써, 그분이 우리를 위한 대사제의 직무를 수행하실 수 있는 완전한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다. 말씀으로 존재하시던 하느님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요한1,14).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으로서(요한1,3), 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본문에서 '고백하는 신앙'으로 번역된 '호몰로기아스'(homollogias)의 원형 '호몰로기아'(homollogia)는 '신앙 고백'을 뜻한다. 이것은 내적으로는 마음에 품어지고, 외적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되는 신앙, 즉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 신앙을 말한다(로마10,9.10).
'우리가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로 번역된 '크라토멘'(kratomen)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굳게 붙들다'를 뜻하는 '크라테오'(krateo)의 현재 가정법이며 권유를 나타낸다. 이 동사 '크라테오'(krateo)는 '힘', '권능'등을 의미하는 '크라토스'(kratos)에서 유래했으며, '강하다', '힘을 소유하다', '승리하다'라는 의미외에도 우위를 점함으로써 붙잡는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서 꽉 잡는 것, 간직하는 것 등의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고수했는데, 이러한 습관을 잘 아는 저자가 히브리 그리스도인(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교 교회의 전승으로 신앙 고백을 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여기서 '연약함'으로 번역된 '아스테네이아이스'(astheneiais)의 원형 '아스테네이아'(astheneia)는 '약함'(weak), '허약한'(infirm), '연약한'(feeble)을 의미하는 형용사 '아스테네스'(asthenes)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신체와 영혼과 심령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의학 및 종교적 용어이다(루카13,12; 요한11,4).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목마름 등을 느낀다든지 또 다른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도 경험하셨음을 나타낸다.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이중 부정문('우 ~메'; u ~ me)을 사용해서 저자는 예수님께 대해 동정심이 많은 분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동정하지'로 번역된 '쉼파테사이'(sympathesai)의 원형 '쉼파테오'(sympatheo)는 '같은', '동일한'을 뜻하는 전치사 '쉰'(syn)과 '겪다', '고난을 당하다'를 뜻하는 동사 '파스코'(pascho)에서 유래한 합성어로서 '다른 이와 동일한 느낌을 받다' '공감하다', '동정하다'라는 뜻이다.
이 동사의 어원이 나타내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가지셨으며, 우리에 대해 동료 의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지니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일하게 느끼셨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감정을 공유하신 분이라고 증거한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한 완전한 인간이었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해주는 내용이다. '유혹을 받으신'으로 번역된 '페페이라스메논'(pepeirasmenon)는 어떤 것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하다', 혹은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다'는 뜻을 가진 '페이라조'(peirazo)의 수동태 완료 분사이다. 저자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유혹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당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유혹은 그분으로 하여금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불순종하게 하기 위한 사탄의 철저히 계산된 술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성도로서 우리가 당하는 것은 대부분 유혹(temptation)의 경향을 띠고 있어서 (야고1,14), 아담처럼 단지 인간의 연약한 의지와 감정으로서 이에 대응한다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유혹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함으로써 사탄의 세력에 대응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유혹을 이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죄는 짓지 않으신' 예수님의 무죄성과 흠이 없음을 보여주는 경험적인 구절이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고자 하셨을 때, 세례자 요한이 말린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마태3,11~14).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기 때문에 죄인들만 그 대상이 되었는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요청하셨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받으신 격렬한 유혹들은 내적 욕망에서 비롯되지 않고, 단지 밖에서 온 것들일 뿐이다. 이 점이 인간이 당하는 유혹(야고1,14)과 다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어떤 경험을 하셨다 해도, 그것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는 것과 달리 단지 밖에서 즉 사탄에게서 오는 것일 뿐이므로 그분께서는 죄를 범하는 일이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받으면 촉발되는 잠재적인 본성도,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죄의 습성도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히브5,1~10)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7)
'이 세상에 계실 때'로 번역된 원문에서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없고 '육체'라는 단어가 나온다. '육체로 계실 때' 혹은 '육체를 지니고 계실 때'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육체'로 번역된 '사르코스'(sarkos)의 원형 '사륵스'(sarx)의 기본 의미는 '살'(flesh) 이지만, '몸', '혈육을 가진 인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인간성' 등 다양한 의미들을 나타내어 쓰인다.
본절에서는 이 '사륵스'(sarx)가 '인간 그 자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강생(육화)하신 예수님의 지상 존재, 즉 인격적인 본성 전체를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가진 인간이셨던 동안 그분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을 느끼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유혹과 고통을 모두 당하셨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죄가 없었으므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륵스'(sarx)의 생각에 지배되는 사람들의 특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실 때에나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항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마음에 드는) 아들이었다 (마태3,17).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본문은 생명을 독점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보여준다. 여기서 '죽음에서 구하신다'는 표현의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예수님을 갈바리아 언덕에서 죽기 이전에 건져내신다는 의미가 된다.
'구하실'에 해당하는 '소제인'(sozein)의 원형 '소조'(sozo)는 어떤 위협을 당하지 않게 미리 건져 내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에크 타나투'(ek thanatu; from death)와 함께 쓰이면, 죽음의 위험에서 건져 낸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에크 타나투'(ek thanatu)와 함께 '소조'(sozo; to save)가 쓰였다는 사실은, 본절에 기록된 기도가 겟세마니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지도록 간절히 바치신 예수님의 기도임을 말해 주며, 예수님께서는 그때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죽음의 위험에서 능히 건져 내실 수 있는 하느님께 드렸던 것이다.
둘째로 위와 같은 의미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구하신다'라는 표현이 죽음 이후의 부활 사건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그 기도가 '들어 주셨습니다'라는 본절의 후반절의 표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겟세마니의 기도를 염두에 두고서 그 기도의 장면을 묘사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경험하신 분이다.
본문을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심한 통곡(요란하도록 큰 부르짖음)과 눈물(울음)로 ~ 드렸고'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그 당시 기도 모습을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라고 기록하였다.
이보다도 더 이상 간절하고 애절할 수 없는 마음으로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어디에 나오는가!
예수님의 얼굴에서 떨어진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얼굴에 있는 모세 혈관이 터져서 피부 밖으로 나온 피가 땀방울에 섞여땅에 떨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간절하게 기도하셨던 것이다.
한편, '큰 소리로 부르짖고'로 번역된 '크라우게스'(krauges)의 원형 '크라우게'(krauge)는 '고함', '큰 부르짖음'이란 뜻이다.
이것은 자신이 억지로 외치려 해서 나는 소리라기보다 극도의 긴장이나 고통의 가운데서 마음을 쓰지 않음에도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소리(통곡)이다. 더군다나 '심한'이라고 번역된 '이스퀴라스'(ischyras; strong; loud)라는 수식어가 있다는 것은 그분이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분의 심정을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은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태26,38)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전해주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상처가 깊은 사람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 소리가 터져나오고,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찬 사람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듯이 그 순간 예수님은 그와같은 상태에 빠지셨음이 분명하다.
참을 수 없는 긴장과 고통 가운데서 그분은 흘러 나오는 신음 소리만 낸 것이 아니라 울기까지 하셨다. 그분은 아버지께 울면서 기도와 탄원을 드린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한 인간으로서 두려움과 혼란, 절망감에 싸여 우리와 마찬가지로 내적 혼란을 겪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진지하고 애절하고 뜨겁게 기도하셨으나 저자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기도와 탄원'을 올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탄원'에 해당하는 '히케테리아스'(hiketerias)는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과 원통함을 탄원하는 자'를 의미하는 '히케테스'(hikete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탄원', '간청'이라는 뜻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 기도와 탄원의 내용을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로 전해주고 있다(마태26,42; 마르14,36; 루카22,42).
예수님은 그 기도를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셨다(마태26,44). 히브리 사상에서 '세 번'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횟수이다. 히브리인들의 공식 기도가 하루 세 차례였다는 사실도 그들이 하느님께 온전한 기도를 드린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예수님께서 같은 내용으로 세 번이나 동일하게 기도하셨다는 것은 더 이상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간절하고도 완벽하게 기도했음을 나타낸다.
'그 경외심 때문에' 예수님의 기도와 탄원의 응답을 받은 결정적인 동기와 배경에 대한 언급이다. 하느님께서 중시하시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경건에서 우러나오는 복종 때문에 그의 기도가 아버지께로부터 응답을 받았다는 진술을 하고 있다.
'경외심'으로 번역된 '율라베이아스'(eulabeias)는 '두려움', '경건'을 뜻한다. 기원전 3~4세기 이후부터 사용된 이 단어가 처음에는 '신중함', '세심한 주의', '사리분별'등을 의미했으나, 후기 희랍어에서는 '공경'을 뜻하게 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명사가 나타나는 곳은 본절과 히브리서 12장 28절 뿐이다.
라틴어 성경은 이것을 '존경', '경외'(reverentia), 그외 다른 성경은 '경건'(piety), '공손한 복종'(reverent submission)등으로 번역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아버지 앞에 엎드릴 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러한 태도이다. 그분의 이러한 복종은 비굴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공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들어 주셨습니다' '들어 주셨습니다'로 번역된 '에이사쿠스테이스'(eisakustheis)의 원형'에이사쿠오'(eisakuo)는 방향 또는 진입의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eis)와 '듣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쿠오'(akuo)의 합성어로서 '요구에 따르다', '요구를 들어주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과거 분사 수동태로 쓰였으며, 영어로는 'he was heard'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슨 기도가 어떻게 응답받았는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는 기도는 '대속의 십자가 죽음'으로서 응답받았고, '죽음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는 십자가 죽음 후 '부활'을 통해서 응답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으셨고, 또한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부활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와 탄원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히브6,10~20)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13~15)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6장 9~12절에서 끝까지 믿음과 인내를 지켜 약속된 상속을 받으라고 권고한 바 있다. 이어지는 히브리서 6장 13~20절에서는 이러한 목표를 세우고 추구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다룬다.
특히 이 단락을 시작하는 히브리서 6장 13~15절에서는 히브리서의 일차 독자들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인내를 통해 약속을 성취 받았다는 사례를 제시하여 용기와 격려를 주고 있다.
본문에서 '약속하실 때'로 번역된 '에팡게일라메노스'(epanggeillamenos)의 원형 '에팡겔로'(epanggello)는 '공언하다', '약속하다'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인간의 약속과 제의는 물론(2베드2,19; 마르14,4) 하느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쓰였다(로마4,21).
저자는 본절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근본으로 삼아 생활했던 아브라함에 대해 언급한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창세12,1~7; 17,5~6; 18,18; 22,16~18), 히브리서 저자가 염두에 둔 것(히브6,14)은 창세기 22장 16~18절의 내용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주실 때에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심으로써, 이것이 확실하고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임을 보증하여 주셨던 것이다. '맹세하시면서'로 번역된 '오모센'(omosen)의 원형 '옴뉘오'(omnio)는 원래 성전의 뿔이나 제단과 같은 거룩한 대상들을 '굳게 잡다'라는 뜻을 나타내었으나 후에 '맹세하다'는 의미로 발전되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는 은총의 맹세로서 그 효력이 끝없이 미친다. 절대로 변함이 없는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은 모두 축복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육적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고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말하며(갈라4,7),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축복을 이어받는다.
한편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담보로 하여('카타'; kata; by) 맹세의 약속을 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담보로 내어놓으신 당신 자신은 얼마나 믿을 만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아니시므로 실언하지 않으시고(민수23,19) 거짓말하지 않으시며(히브6,18) 변함이 없으실(야고1,17)정도로 믿을 만하다. 이보다 더 믿을 만한 맹세의 담보는 없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담보로 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는 것은 그 약속이 천지가 진동하더라도 지켜질 것임을 말한다.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정녕코'로 번역된 '에이 멘'(ei men)은 '참으로', '확실히', '틀림없이'라는 뜻으로 서약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틀림없이 어떤 것을 이루어주시겠다고 맹세로 약속하셨는데,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22장 17절을 70인역(LXX)에서 인용한 말씀이다. 신구약 성경을 모두 알고 있는 우리는 그분의 이 약속이 이사악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갈라3,16; 4,26.28; 사도3,25).
한편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너를 복 주고 복 주며)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동사 구문법에서 강조를 나타내는 형식으로 '틀림없이 복을 줄 것이다'란 의미가 된다. 영어로 하면, 'I will surely bless you, and I will surely multiply you.'이다.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로 번역된 '플레튀논 플레튀노'(pllethynon pllethyno)에서 본문에 두 번 쓰인 동사의 원형 '플레튀노'(pllethyno)는 '가득 참'(fullness)을 의미하는 '플레튀스'(pllethy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가득하게 하다', '번성하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번성하게 하신다는 약속은 본래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창세22,17)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2인칭 단수 대명사 '쎄'(se), 즉 '너'(you)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나타내는 비유법적 표현(제유법; 사물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또는 한 말로 그와 관련되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이 약속은 이사악이나 이스라엘 시대에 성취되지 않고,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신약 시대의 교회를 통해 성취되고 있다(갈라3,9).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로 번역된 '마크로튀메사스'(makrothymesas)는 '마크로튀메오'(makrothymeo)의 과거분사이며, '마크로튀메오'는 '인내하다', '오래참아 기다리다'는 뜻이다. 이 단어속에는 '질긴 기질'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마크로튀메오'는 '(무엇을) 묵묵히 기다리고자 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끝에'에 해당하는 '후토스'(hutos)는 '이같이'(so)라는 뜻을 강조의 의미로 쓰인것 같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이 당장 성취되지 않는다 하여도 체념하지 않고, 믿음으로 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으므로, 하느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에서 '받았습니다'로 번역된 '에페튀켄'(epetychen)은 '얻다', '도달하다'를 뜻하는 '에피튕카노'(epitingchano)의 부정 과거로서 결과를 나타낸다.
물론 아브라함이 사는 날 동안에 그 약속의 성취가 있었지만, 그 기간에는 매우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가 죽어서 천국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동안, 이 약속은 신약 시대의 교회를 통해 더 많은 성취를 맛보고 있다.
그의 약속은 점점 더 충만하게 성취되었는데, 메시아의 강생과 그의 영적 후손의 번성이 그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참된 것이었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충실했으므로 이같은 놀라운 일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하느님의 약속은 변경되거나 취소되는 법이 없다. 그분은 언제나 성실하시며(2티모2,13), 변함이 없으시므로(야고1,17) 그분의 입으로 내신 모든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성취된다(이사55,10~11). 설사 그 약속의 대상인 인간의 성실성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주님의 약속이 무효가 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수요일 제1독서(히브7,1~3.15~17)
멜키체덱은 "살렘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 로서, "여러 임금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에게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1~3)
히브리서는 크게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고 완성시키신 예수님의 여러 가지 구약적 요소들에 대한 우월성을 논증하는 1장 1절에서 10장 18절까지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을 다룬 10장 19절에서 13장 25절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전반부의 4장 14절에서 7장 28절까지는 레위 사제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의 대사제로서의 지위에 대해 언급한다.
히브리서 7장은 이러한 맥락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약의 성취로 이 땅에 오셔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구원을 이루신 분임을 논증하는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는, 히브리서 전체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께서 멜키체덱의 반열을 쫓아 완전한 대사제되심을 다룬다. 그 가운데 히브리서 7장 1~10절은 멜키체덱이 레위 계통의 사제보다 우월한 영원한 사제임을 밝힌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레위 사제들보다 우월함을 밝히기 위하여 먼저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멜키체덱의 우월함을 논증해 나가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7장 1~3절에서 우선 멜키체덱의 약력을 밝힌다. 멜키체덱은 살렘의 임금이다. '정의의 임금'(the king of righteousness)이라는 이름 뜻을 지니고 있는 멜키체덱은 창세기 14장 17~20절에 등장한 인물로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그에게서 십일조를 받은 살렘의 임금이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당시의 '살렘'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예루살렘'의 별명이라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 멜키체덱은 임금일 뿐 아니라 주 하느님의 사제였다. 그는 제정일치(祭政一致)사회에서 임금 겸 사제였던 것이다.
그는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의 사제였고, 최초의 임명직 대사제 아론이 있기 이전의 사제였으며, 아브라함이 그를 알기 이전부터 사제였던 인물로서 이스라엘의 종교 제도 너머에 존재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임금이면서 사제였다는 사실이 레위 계통 사제들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이다.
레위 계통의 사제들은 임금의 직무를 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멜키체덱은 사제이면서 임금으로서의 직무도 수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은 히브리어로 '엘 엘리온'(el ellion)이며, 하느님을 지칭하는 이름들 가운데 하나이다. '엘리온'은 '가장 높은'(most high)을 뜻하는데, 영어 성경들은 이러한 고유 이름으로 사용하여 대문자 'the Most High'로 표기했다.
'엘리온'은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 특히 하느님의 존귀하심과 압도적인 위엄을 드러내는 명칭이다. 이것은 특히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나타내는 신명(神名)이다. 멜키체덱은 유일신이신 주 하느님의 사제이며 평화를 뜻하는 살렘의 임금이다. 고대 제정일치의 세계에서 임금과 사제직을 겸하는 것이 생소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존재는 많은 신비에 둘러싸여 있다.
고대 근동의 셈족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는데, 이 많은 신들 가운데 멜키체덱이 어떻게 주님을 섬기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의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갈대아 우르라는 이교적인 우상 숭배가 성행했던 환경에서 아브라함이 주님을 섬기게 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은 하느님의 선택과 예정이라는 보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그 답을 찾는 것이 적절하다.
어느 시대나 이 세상에 하느님의 백성이 없었던 때는 없었으며, 그리스도 이전과 모세 이전도 예외가 아니다(사도18,10; 에페1,4.5).
'아브라함을 만나 그에게 축복하였다' 이것은 멜키체덱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동기에 관한 언급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엘람 임금 크도를라오메르와 연합한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네 임금에게 사로잡혔을 때, 아브라함이 훈련받은 장정 318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쳐부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그를 만났으며, 그를 축복하였다(창세14,13~20).
여기에서 '축복하였다'로 번역된 '율로게사스'(eullogesas)의 원형 '율로게오'(eullogeo) 동사는 '잘', '훌륭하게'를 뜻하는 부사 '유'(eu)와 '말하다'를 뜻하는 어근 '로그'(log)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문자적으로는 '좋은 말을 하다', '좋게 말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러나 구약의 희랍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서는 '축복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빠라크'(barak)의 역어로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이 히브리어 동사는 기본적으로 생산, 장수, 번영, 부귀와 같은 '유익한 능력을 부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세 가지 의미로 쓰였다.
첫째는 '칭찬하다', '찬양하다'라는 뜻이고(마태14,19; 루카1,64) 둘째는 '축복하다'라는 뜻이며(루카24,50.51; 요한12,13), 셋째는 하느님이나 그리스도께서 '복을 주신다'라는 뜻이다(마태25,34).
희랍어의 원래 의미로 보면 첫째 의미로도 볼 수 있으나, 70인역(LXX)의 용례나 문맥에서 볼 때 둘째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명백하다.
멜키체덱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을 복을 받으리라. 적들을 그때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창세14,19~20)라고 기도함으로써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것이다. 이처럼 멜키체덱이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그가 아브라함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는 것과 아브라함을 위한 중재자(중보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믿음의 조상이요 하느님의 약속을 가진 아브라함이 멜키체덱의 축복을 받았다면, 멜키체덱이 아브라함 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단정할 수 있다(히브7,7).
히브리서 저자는 멜키체덱의 반열을 따른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난 레위 계통의 사제직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이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성도들 사이의 중재자(중보자)로서 성도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심으로써 성도들을 축복하신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리품으로 얻은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떼어 멜키체덱에게 준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창세기 14장 20절의 인용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멜키체덱이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이브라함의 품 속에 있었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레위 계통 사제들보다 더 큰 자임을 알 수 있다.
야곱이 하느님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기도한 것처럼(창세28,22), 아브라함이 멜키체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는데, 이것은 자신의 소유가 멜키체덱에게 속한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창세28,22; 레위27,30). 십일조는 '나의 모든 소유가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표시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의 절대권과 주권을 인정하는 표시로 소산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나누어 주었습니다'로 번역된 '에메리센'(emerisen)의 원형 '메리조'(merizo)는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마아셰르'(maasher)의 역어이다.
아브라함의 이 행위가 당시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던 관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멜키체덱을 하느님의 사제로 알고 이렇게 한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을 십일조의 기원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히브리서 저자가 특별히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멜키체덱의 사제직이 레위 계통의 그것보다 뛰어남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유대의 사제들은 자기 동족들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았다. 또한 이것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사제의 법적 권한이었다(민수18,21; 신명14,22). 하지만 멜키체덱은 혈통적으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십분의 일을 받았으며, 더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율법에 따라 주어진 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권위 혹은 하느님에 의해서 주어진 권위에 의해서라는 점이다. 이 사실만 가지고도 그가 레위 계통 사제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사제 직분과 레위 계통의 옛 사제 직분을 비교하는 말이다.
'아버지도 없고'로 번역된 '아파토르'(apator)는 고전 희랍어 문헌에서 고아, 주운 아이, 사생아, 부랑자, 불량배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들의 경우 '아버지도 없다'라고 묘사될 때는 그들의 초자연적인 출생을 의미하는 말이된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 단어는 '어머니도 없고'에 해당하는 '아메토르'(ametor)와 함께 쓰여 신의 속성, 즉 신성과 영원성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신약에서 '아파토르'(apator)는 여기에만 나온다.
히브리서 저자는 '토라(율법; 모세오경)에 언급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랍비주의 원칙을 염두에 두고, 이 논의를 전개시켜 놀라운 결론에 이른다.
구약 어디에도 멜키체덱의 혈통이나 부모, 출생, 죽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점을 들어 그는 임금이자 사제인 멜키체덱의 사제 직분이 하늘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영원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하늘의 존재로서 멜키체덱은 사제직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사제의 혈통을 가져야 한다는 절대적인 전제 조건을 가진 레위 계통의 사제들보다 우월하며(느헤7,64), 아울러 그는 레위 계통에 속하지 않고 선재하는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표상인 것이다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히브7,25~8,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7,26)
히브리서 7장을 마무리하는 26~28절은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는 다른 멜키체덱의 반열을 따르신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대해 언급한다. 즉 우리 인간들의 필요를 완전하게 충족시켜 주실 대사제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하였습니다'로 번역된 '에프레펜'(eprepen)의 원형 '프레포'(prepo)는 '적당하다', '어울리다'는 뜻이다. 비슷한 단어들 중에 '데이'(dei)는 필연성, '오페일로'(opheillo)는 의무를 표현하는 반면에, '프레포'(prepo)는 적당한 것, 알맞는 것을 표현한다. 이 단어에는 외부적 강제나 절대적 필연성이라는 요소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자세의 직무를 수행하신 것은 외부의 강제나 절대적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쁘신 뜻에 따른 결단이란 사실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 한편 대사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신 이유가 본절에서 다섯 가지로 나온다.
이러한 특징은 레위 계통의 사제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영적, 도덕적 욕구를 정확하게 충족시켜 주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이런 열거를 통해 한층 더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먼저 그분은 거룩하시다. 여기서 '거룩하시고'로 번역된 '호시오스'(hosios)는 원래 '신의 법이나 자연법에 의해 재가된 혹은 허용된'이란 뜻이다. 신약에서 '호시오스'(hosios)는 하느님께 대해서 뿐 아니라 사람(티토1,8), 기도하기 위해 드는 손(1티토2,18) 등과 관련하여 쓰였으며, 이때에는 '경건한'이란 뜻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예수님의 '호시오스'는 신적인 거룩함을 나타낸다. 그분이 가지신 거룩함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으로서의 거룩함이라는 것이다(사도2,27; 16,35).
그분은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시다. 이에 대한 증거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이사9,6; 요한1,1~3.14; 3,16; 10,30; 14,9; 20,28). 레위 계통의 사제들이 가지고 있는 경건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거룩함을 대사제 예수님께서는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는 천사도 가지지 못한 거룩함을, 모세와 여호수아, 아론도 가지지 못한 거룩함을 독점적으로 지니고 계신 분이다.
둘째, 그분은 순수하시다. 여기서 '순수하시고'로 번역된 '아카코스'(akakos)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악'을 의미하는 '카코스'(kakos)의 합성어로서 '죄없는', '악의가 없는', '교활함이 없는' 등의 뜻을 가진다. 여기에는 제3의 세력으로부터 받는 영향 및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고려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악이 전혀 손을 댈 수가 없는, 순수한 분이시다. 인간은 누구나 악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예외이다. 그분은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로우시다. 또한 그분은 사람들에게 전혀 악한 일을 행하시지 않으시며, 결코 그들을 악으로 이끌고 가지고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점은 레위 계통의 사제들이 '악' 즉 '카코스'(kakos)의 영향을 받아 타락하고 그릇되게 행하였던 것(레위10,1~7; 1사무2,12~17)과 대조를 이룬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시 악의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라면 절대 구원자가 될 수 없다.
세째로,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순결하시다. 여기서 '순결하시고'로 번역된 '아미안토스'(amiantos)는 부정 접두어 '아'(a)와 '더럽히다', '흠을 내다'등을 뜻하는 '미아이노'(mia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형용사로 종교적으로든지 도덕적으로든지 '순결한'(pure)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는 흠이라든지 더러움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하늘에서 받게 될 성도의 약속의 상태(2베드1,4), 혼인 관계에서 요구되는 성적인 순결(히브13,4), 실천적인 종교의 순결성(야고1,27)등에 대해서도 쓰였다. 레위 계통 사제들은 정결 의식을 치르지 않고서는 하느님께로의 접근이 불가능한 흠이 있는 자들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한 점의 흠도 없는 순결한 분이시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지상에서 비록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친교하셨지만(루카15,1.2)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분이셨다. 여기에서 '떨어져 계시며'로 번역된 '케코리스메노스'(kechorismenos)는 '코리조'(chorizo)의 수동태 완료 동사로 분리된 상태를 가리킨다.
고전 희랍어 문헌에서 이 '코리조'동사가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였다는 사실은 문자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신약에서 '코리조'는 공간적인 분리(사도1,4; 18,1.2)라든지 감정적인 분리(로마8,35), 이혼(마태19,3)등을 나타내어 쓰였는데, 본절에서 저자가 이해시키려는 것은 정신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양면적 분리성이다.
즉 하나는 그분이 무죄하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악한 세상에서 떠나 계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심에도 죄는 없으셨으며(히브4,15), 이 세상에 오셨지만 결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다(요한17,14). 또한 지금은 완전히 거룩한 하늘 옥좌에 계신다.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최고의 지위에 오르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분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으며(사도1,9~11), 하느님 아버지 옥좌 오른편에 앉으셨다(마르16,19). 스테파노는 순교 직전에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이에 대해 증거하였다(사도7,36).
'~보다 더 높으신'으로 번역된 '휩셀로테로스'(hyselloteros)는 '높은'을 뜻하는 '휩셀로스'(hysellos)의 비교급으로 '더 높은'(higher)이란 뜻이다. 하늘은 지상의 모든 피조물보다 높은 곳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 하늘보다도 더 높아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천사들과 레위 계통 사제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분이심을 잘 알게 한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옥좌 오른편이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신 것이며, 그분의 사제직이 아래에서 난 레위 계통 사제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얼마나 우월하신지를 잘 보여준다.
토요일 제1독서 (히브9,2~3.11~14)
"첫째 성막이 세워져 그 안에 등잔대와 제사 빵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고 하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2~3.11~12)
구약은 신약의 예표요 암시이며 약속이고, 신약은 구약의 완성이요 성취이며 실현이다. 탈출기 26장에 나오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들어 있는 '계약 궤'를 모시는 '성막' 혹은 '만남의 천막'에 대한 계시는 바로 신약의 교회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
성막의 울타리의 문은 동쪽에 있는데, 그것을 열고 들어가면 (번)제단(탈출27,1~8; 38,1~7)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바쳐지는 여러 가지 제사(화목의 친교제사, 속죄제사 등등)에 바쳐지는 동물을 살라 바쳐지는 곳으로, 신약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갈바리아를 예표한다.
그리고 만남의 천막에 들어가기 전 물두멍(탈출30,17~21; 38,8)이 있는데, 만남의 천막 안에 들어가 봉사할 레위 족속들이 손과 발을 씻는 곳인데, 수족(手足)을 정화하지 않고 만남의 천막 안에 들어오면 그들은 죽게 된다. 말하자면, 번제단과 물두멍은 가톨릭 교회의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 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이 은총을 얻어입는 세례성사와 고백성사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제 만남의 천막 안에 들어가면, 휘장을 사이에 두고 지성소와 성소로 나뉘어진다.
성소는 지성소를 모신 휘장을 앞에 두고, 왼쪽에는 등잔대(탈출25,31~40; 37,17~24), 오른쪽에는 제사상(탈출25,23~30; 37,10~16)이 있으며, 휘장 앞에는 분향제단 (탈출30,1~10; 37,25~28)이 놓여 있다.
왼쪽에 금으로 된 일곱 촛대로 만들어진 등잔대는 시편119장 105절의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라는 말씀대로 영혼의 양식이며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는 계명을 상징하는 신,구약의 '말씀'을 의미한다.
성막을 비추는 등불은 올리브 기름에 의해 유지되므로, 이스라엘의 주요 농산물인 올리브 나무의 열매는 이스라엘의 생계를 어느 정도 책임져 주므로, 그들의 생사대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가리키며,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계명의 실천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 현세적이고 육신적인 생명도 계속 축복받음을 상징한다.
오른쪽에 있는 제사상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수대로 광야 생활에서 아침에 해뜨기 전에 수거한 만나로 만든 빵을 제일 먼저 만들어 하느님께 봉헌하여 제사상 위에 6개씩 두 줄로 올려 놓으면 일주일에 한번 씩 갈아 놓는데, 이것은 신약의 '성체성사'를 상징한다. 그리고 지성소가 모셔진 휘장 앞의 분향 제단(탈출30,1~10; 37,25~28)은 제사상보다 높은 데, 대사제가 바치는 '기도'가 피어오르는 '향'으로 상징된다.
바로 이것은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치는 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부 하느님께 바쳐지는 기도를 의미하는데, 성막 밖의 번제단과 물두멍이 가리켜 주듯이 대죄의 사함을 온전히 받아 은총의 지위에서 바쳐지는 기도와 미사만이 무죄하시고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 하느님께 올려짐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휘장에 대해서는 탈출기 26장 31~37절(탈출36,35~38)에 나온다.
1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대사제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잘못을 벗기 위해서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이것은 레위기 16장 1~34절에 나온다. 대사제는 자신과 자기 집안을 위한 속죄 예식을 거행하기 위해 휘장 안으로 들어가 황소의 피를 얼마쯤 가져다가 속죄판 동쪽 위로, 그 피를 손가락에 찍어 속죄판 앞에 일곱 번 뿌린다(레위16,14).
그리고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될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져와 황소 피를 뿌릴 때와 마찬가지로 속죄판 앞과 위에 뿌린다(레위16,15~16). 이것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상징하는 율법이 계약의 궤 안에 들어 있는데,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십계명이 들어 있는 계약의 궤의 두껑(증언판 혹은 증거판) 위에 또 하나의 두껑인 속죄판을 씌웠는데, 속죄의 날에 대사제가 번제단에서 잡은 황소와 숫염소의 피가 바로 그 속죄판 위에 떨어져 율법으로 말미암아 지은 죄를 씻어 준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속죄판과 그 속죄판 위에 뿌려지는 피는 신약의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속죄판 위로 양 옆에 만들어진 케루빔(한글 새 성경에는 커룹) 천사들이 그 피가 뿌려지는 속죄판을 바라보며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 속죄판 위의 케루빔 천사들 사이에서 당신의 현존과 임재를 드러내시며, 모세와 대사제와 대화하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데, 이 하느님 현존과 임재의 자리를 '셰키나'(shekinah)라고 한다. 바로 이 '셰키나'로 부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성막 천정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며 나타나는 것이다.
이 만남의 천막(성막)의 '계약의 궤'를 모신 지성소가 있는 곳이 서쪽인데, 여기 '계약의 궤'위의 '셰키나'로 부터 나오는 구름기둥(불기둥)을 보고 하느님께서 자신의 진영에 함께 머물고 계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알아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만남의 천막(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천막을 치고 초막(장막) 생활을 하다가,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만남의 천막과 자신들의 천막들을 거두어 구름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계약의 궤'를 모시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요르단강(죽음을 상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천국을 상징)을 향해 행진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상의 순례 생활을 상징하는 광야의 초막 생활은 무조건 제멋대로 사는 생활이 아니라, 구름 기둥(불기둥)의 안내로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Go & Stop)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순종 생활이었던 것이다.
바로 오늘 히브리서 독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못박혀 운명하셨을 때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처럼, 무죄하신 예수님의 단 한번의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의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인류가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아버지의 옥좌가 계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다. 참고로, 번제단의 짐승이 태워지는 속불판과 만나가 놓여진 제사상과 계약의 궤의 속죄판의 높이가 같다는 것은 엄청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희생과 사랑의 신비를 계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계약의 궤'(The Ark of Covenant)에는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십계명이 세겨진 돌판', 그리고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만나가 들어있는 금항아리', 그리고 '사제직과 성사 은총'을 상징하는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은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다.
이것은 이 땅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체험하는 세 가지 방법인 '말씀'과 '성체성사', '사제직과 성사은총'를 계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성체'가 모셔진 '감실'(Tabernacle)을 예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약의 궤'는 우리가 몸담고 사는 신약의 '감실'을 의미하고, 동시에 예수님을 수태하신 성모님(성모님의 자궁)을 상징하고 있다.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히브10,1~10)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5~7)
히브리서 10장 5~7절까지는 시편 40장 7~9절을 인용한 것이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로 번역된 '튀시안 카이 프로스포란 우크 에텔레사스'(thysian kai prosphoran uk ethellesas; sacrifice and offering you did not desire)에서 서술어 '에텔레사스'(ethellesas; you desired)라는 2인칭 단수 부정(不定) 과거에 '우크'(uk; not)가 붙었다. 구약 성경에는 본문과 유사한 표현들이 있다.
호세아 예언자의 입을 빌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6,6)라고 말씀하셨다.
사무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임의로 제사를 드린 사울 왕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15,20) 라고 지적하였다.
제사 제도를 제정하고 허락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었다. 그 제사 행위를 통해 당신 백성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범죄하지 않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다.
무수한 제사를 드리면서도 죄에서 떠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이사1,11~13)라는 충격적인 책망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제사 자체를 목적으로 착각하고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제사드리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서간의 수신자들 역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믿음을 버리고, 구약의 제사 제도로 회귀하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소마 데 카테르티소 모이'(soma de katertiso moi; but a body you prepared for me)는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오즈나임 카리타 리'(oznaim karitha li)로 표기되어 있고, 새 성경 시편 40장 7절에는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본래 '순종하도록 했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는 히브리인들의 관습에서 나왔다. 즉 유대인들은 종을 부릴 때 6년 동안만 일하게 하고, 일곱째 해에는 자유로이 놓아주어야 했다(신명15,12).
그러나 종이 주인을 평생토록 떠나지 않겠다는 자유의지를 밝히게 되면, 주인은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어 평생 종이 되게 할 수 있었다(신명15,16.17). 따라서 종이 자발적으로 자기 귀를 뚫도록 주인에게 맡기는 것은 그가 평생 기쁨으로 주인의 뜻을 받들어 섬기겠다는 표시였다. 이런 측면에서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뚫으셨습니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 다음으로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한 70인역(LXX)의 경우를 살펴보면,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이 '주님의 뜻을 기꺼이 복종하겠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이런 측면에서 이 말이 '귀를 열어 주셨다'라는 표현과 같다는 견해를 가진다.
이러한 뉘앙스를 살려 본문을 설명하면, '내가 주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고 순종하도록 주님께서 그 수단으로써 한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가 될 것이다. 한편, '마련해 주셨습니다'에 해당하는 '카테르티소'(katertiso)는 2인칭 단수 동사로서 그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여 속죄의 제물을 드리도록 새 계약의 제물, 곧 '몸'을 준비하신 분은 구속 사업의 경륜을 주관하시는 성부 하느님이신 것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번제물'에 해당하는 '홀로카우토마타'(hollokautomata)는 '전부'를 뜻하는 '홀로스'(holls)와 '불사름'을 뜻하는 '카우토스'(kautos)의 합성어인 '홀로카우토마'(hollokautoma)의 복수형으로서 '모두 태워 드리는 번제물'을 의미한다. 이 제사에 대한 규정은 레위기 1장 8절, 9절, 12절, 13절 등에 잘 나와 있다.
또한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로 번역된 '우크 유도케사스'(uk eudokesas; you were not pleased)는 '만족하지 아니하신다' 또는 '동의하지 아니하신다' 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구약의 제사 제도에 대해 나타내시는 반응이다. 구약의 제사는 모두 동물을 제물삼아 드린 제사였다. 이 제사들로는 인간의 죄를 제거할 수 없었다.
종교 혹은 예배의 본질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인데, 구약의 제사들은 한 사람도 하느님께 인도하지 못했던 것이다(히브10,1).
사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제정하신 분은 하느님이신데, 바로 그 하느님께서 제사 제도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제사를 미워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약 제사로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제사의 한계성을 밝히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을 완전하게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구약 제사와 다른 그 무엇이 요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 구속 성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이다. 이것만이 완전한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엄중한 죄의 결과를 경계하며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측면에서, 그리고 장차 올 새 계약(신약)에 대한 일시적인 예표를 삼고자 하는 측면에서 제사 제도를 명한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제사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담긴 순종을 원하셨고(1사무15,22.23; 시편51,18.19), 백성들이 그 제사 제도를 통해 죄에서 떠나는 것 (이사1,11~17; 호세6,6)과 장차 올 온전한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두루마리에' '두루마리'로 번역된 '엔 케팔리디 비블리우'(en kephallidi bibliu; in the volume of the book; in the scroll; the roll of book)는 '두루마리 책'을 가리킨다. 본절에 언급된 두루마리 책은 임금이 지켜야 할 규정을 기록한 신명기 17장 14~20절, 또는 순종에 대해 기록한 신명기 28~30장을 지칭한다는 견해들이 있다.
이 견해를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모든 성경의 중심이라고 말씀하신 점에 비추어 볼때(요한5,39), 이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사실 몇몇 성경 구절들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께로 집중되어 있다. 성경의 어떤 책, 어떤 장이든지 그것을 해석할 때에 그리스도를 배제하고서는 구원사를 전개해 가시는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필리2,8).
따라서 '이루러'로 번역된 '포이에사이'(poiesai; to do)는 '포이에오'(poieo)의 부정사이다. '이루다','행하다', '만들다'를 뜻하는 '포이에오'(poieo) 동사는 모든 활동을 포괄하여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측면에서 하느님의 '뜻'에 해당하는 '텔레마' (thellema; will)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께서 아버지와 갖는 관계의 일면을 본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셨다. 특히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번민에 싸여 기도하신 내용 가운데도 그분의 이러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마태26,39).
수요일 제1독서(히브10,11~18)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1~12)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0장 5~10절에서 당신 몸을 속죄 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에 대해 언급한 뒤, 히브리서 10장 11~18절에서 그리스도의 제사는 더 이상의 제사를 불필요하게 만든,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사임을 진술한다.
히브리서 10장 11~19절은 히브리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주장해 온 여러 구약적 요소들에 근거한 예수님의 우월성에 대한 논증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더 이상의 제사를 필요없게 만든 완전하고도 영원한 그리스도의 제사에 대하여 간단 명료하게 논증한다.
히브리서 10장 11절 본문의 요지는 레위 계통 사제들의 자주 반복되는 제사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에 대한 지적이다. 그 제사의 문제점은 결코 어떤 죄도 제거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없애지 못합니다'로 번역된 '페리엘레인'(periellein)은 '페리아이레오'(periaireo)의 부정사이다.
동사 '페리아이레오'(periaireo)는 '주위', '둘레'를 의미하는 전치사 '페리' (peri)와 '빼앗다'(마태25,24), '치우다'(요한19,31)라는 뜻의 동사 '아이로' (air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주위에서 발견되는 것을 치워버리다', '철저하게 없애버리다', '완전하게 제거하다' 등의 매우 강한 뜻을 가진다. 만약 구약의 동물 제사가 인간의 죄를 제거할 능력이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이 요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했으므로 완전한 제사 곧 그리스도의 제사가 필요했다. 죄를 제거하지 못하는 희생 제사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완전하지 못하다.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율법에 근거한 제사에 의존하고 있던 사람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여전히 죄중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자주 반복되는 많은 제사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 있는 죄는 결코 씻겨지지 않았다.
구약의 사제들이 드리는 제사는 날마다 반복되었다. 성막 혹은 성전이 존속하는 한, 그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과 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민수28,3~8).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의 제사는 죄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거듭 강조하는 내용이다. 그러한 제사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다시 구약의 제사 제도로 되돌아가려고 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은 말할 수 없이 잘못된 것이었다.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구약의 사제들이 매일 반복하여 같은 제사를 드린 것과 대조된다. 히브리서 10장 11절의 구약 사제들이 드린 '제물'에 해당하는 단어는 '튀시아스' (thysias)로서 복수형인 반면에, 본문의 '한 번 제물'에 해당하는 단어는 '미안 튀시안'(mian thysian)으로 단수형이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의 제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또한 '바치시고'로 번역된 '프로세넹카스'(prosenengkas)도 '바치다','드리다'를 뜻하는 '프로스페로'(prosphero)의 과거분사로서, 앞의 히브리서 10장 11절에 나오는 '프로스페론'(prospheron)과 대조를 이룬다. '프로스페론'(prospheron)은 현재분사로서 반복되는 동작이나 지속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나타내며, 이것은 구약의 사제들이 드린 제사의 특징이 반복에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프로세넹카스'(prosenegkas)는 과거 시제로서 현재 분사처럼 진행의 개념이 없는 일회적 차원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제사의 특징이 일회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반복될 필요가 전혀 없는 일회적 행위였고 완전한 제사였다(히브12,18). 그분은 이 한 번 제물 즉 '미안 튀시안'(mian thysian)을 통해서 구약의 사제들이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죄를 없애시는 일을 해내셨다.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본문은 완전한 제사를 바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안식과 영광을 표현한다. 히브리서 10장 11절에 따르면, 구약 시대 레위 사제들은 제사를 다 드리고 나서 앉았다는 기사가 없고, 오직 매일 서서 직무를 수행했다는 기사만 있다. 사실 그들은 제물을 바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 앉을 뿐 아니라 눕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서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다음날이면 또 다시 일어나서 성소에 들어가 서서 전날과 똑같은 제사를 반복적으로 바쳐야 했던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제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반복된 제사였던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 완전한 제사를 바치신 후에 하늘에 오르셔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심으로써 다시 제사를 바치시고자 일어나실 필요가 없다. 골고타 언덕에서 바친 단 한번의 제사가 영원한 효력을 지닌 제사였기 떄문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다는 사실 및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완수하지 못했거나 불완전하게 또는 부분적으로 이행하였다면, 그는 안식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후 안식을 취하신 하느님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구속사업을 완벽히 수행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그리스도에게 천지창조 이전에 누렸던 그분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준 것이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그토록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참으셨는지를(히브12,2) 짐작하게 한다.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히브10,19~25)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사제가 계십니다." (19~21)
히브리서 저자는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면서 서두에 인과 접속사 '운'(un; therefore)을 사용한다. 이것은 지금부터 진술할 내용이 앞에서 언급된 내용의 결과이거나 거기서 추리된 것임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단어를 통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논의한 신학적 요지 곧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로 한번에 영원한 제사를 바치신 것과 이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하느님과의 직접적 친교의 길이 열렸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확신을'로 번역된 '파르레시안'(parresian)은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서 자주 나타나는 중요한 단어이다(히브10,35; 3,6; 4,16).
'파르레시안'은 '모든'을 뜻하는 '파스'(pas)와 '연설'을 뜻하는 '레시스'(resis)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는데, 문자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자유'를 나타낸다. 이것은 원래 정치의 영역에 속했던 단어로서 그리스 도시 국가의 완전한 시민이 누리는 발언의 권리를 뜻한다. 그들은 공적 집회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자유롭게 터놓고 말할 수 있었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이러한 권리가 없었다. 이런 자유 시민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나타내는 '파르레시아'(parresia)라는 단어를 통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가 하느님 대전에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밝힌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는 지상 성막의 지성소에 조차도 일반인들은 물론 사제들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대사제만이 일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피를 가지고서 들어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인 지상 성막의 지성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신 참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음을 이 단어가 보여주는 것이다.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이자 권리이며, 구원의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임을 이 단어가 보여준다.
'성소에 들어간다는' '성소에'로 번역된 '톤 하기온'(ton hagion)은 레위 계통의 대사제가 일년에 한 번씩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던 지상 성막의 지성소와 비교되는 원형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 하느님의 옥좌를 지칭한다. 히브리서 9장 11절과 12절에는 이것이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약의 대사제들은 일년에 한 번 그것도 정해진 날에 제물을 가지고서야 지상 성막의 지성소에 겨우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언제든지 살아계신 하느님의 옥좌 앞에 나아가 그분과 대화할 수가 있다(에페3,12; 히브4,16). 구약의 대사제들조차도 꿈꿀 수 없었던 특권이 신약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들은 실체가 아닌 모형에조차 자유로이 출입할 수가 없었으나, 우리는 모형이 아닌 실체에 언제든지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자녀의 권리를 누리게 된 것이다. 새 계약 아래에 있는 자녀들은 언제든지 직접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으며 일체의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열어 주셨습니다'로 번역된 '에네카이니센'(enekainisen)은 '새롭게 하다', '신성하게 하다'를 뜻하는 '엥카이니조'(engkainizo)의 과거 시제이다. 본절인 히브리서 10장 20절 이외에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히브리서 9장 18절에서 '세우다','시작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이 길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성도들, 곧 우리를 위해서 새롭게 봉헌하신 길이다. 봉헌된 그 길을 통해 믿는 이들은 언제든지 아버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구약 시대에는 아직 이 길이 열리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하느님 옥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을 통하여 완전한 제사를 한 번에 바치신 이후에는 그를 믿는 누구라도 거룩하신 하느님의 옥좌로 나아갈 수 있다.
'그 휘장을 관통하는' '휘장' 즉 '카타페타스마토스'(katapetasmatos)의 원형 '카타페타스마'(katapetasma)는 '펼쳐진 베일'(a veil spread out) 또는 '휘장'(a curtain)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성막의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던 휘장을 지칭한다. 이것은 지성소의 모습을 철저히 가리는 것이었으며, 그 안으로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오직 대사제만 1년에 한 차례씩 속죄의 피를 가지고, 그 휘장을 열고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철의 장막과도 같던 휘장이 마침내 위에서부터 아래로 두 갈래로 완전히 찢어졌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둔 직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마태27,50.51).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지성소를 굳게 가리고 있던 튼튼한 그 휘장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찢어버리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보여준다. 첫째, 히브리서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그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그림자였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즉 그의 몸이 실제로 찢기자 그림자였던 휘장 역시 찢어져 버렸던 것이다.
둘째, 찢어진 휘장이 지성소의 접근을 허용한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은 성도들이 하느님께 접근하는 길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한편 본문에서 '관통하는'으로 번역된 단어 '디아'(dia)는 '~을 통하여' (through)라는 의미이며, 새롭고도 살아있는 길이 찢어진 휘장을 통하여 봉헌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http://cafe.daum.net/FiatLove/mCrC/1303
토요일 (히브11,1~2.8~19)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1~2)
히브리서 11장 1~3절은 '믿음이란 무엇인가?'인지 믿음의 정의에 대한 서론적 설명이다. '믿음은 ~이다'라는 표현에서 '~이다'에 해당하는 동사 '에스틴'(estin; is)은 직설법 현재 시제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항구적으로 항상 그러함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다'라는 사실이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임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1장에서 핵심어인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티스'(pistis; faith)는 고전 희랍어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 혹은 신에 대하여 갖는 '신뢰' 또는 '진실성'이나 사업상의 '신용', '보증', '증명'등을 의미하여 다양하게 쓰였다.
원래 이 어군의 단어들은 '계약이나 약정을 존중하는 행동'을 나타냈지만, 헬레니즘 시대의 회의론과 무신론이 난무하는 시기에는 '피스티스'가 신들의 존재와 행위에 대한 '신념'(conviction)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라고 번역된 '엘피조메논 휘포스타시스'(elpizomenon hypostasis)에서 우리는 '보증'으로 번역된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substance; realization; assurance; guarantee)에 주목해야 한다.
이 단어는 '밑에 놓다', '기초를 두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휘피스테미'(hyphistemi)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문자적으로는 '아래에(hypo; 휘포) 서 있는 것(stasis; 스타시스)', 즉 '토대','기초'라는 의미이다. 이런 뜻 외에도 '본질', '실체', '확신', '확고성', '보증'등의 다양한 의미가 있다. 이제 교회의 전통 안에서 이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① 일부 파피루스에서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는 '보증'이라는 의미에서 소유권을 입증하는 문맥에 쓰였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권리 증서이다', 또 '믿음은 우리가 바라고 있는 천상의 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확실하게 보증해 주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즉 믿음이라는 보증물을 내보일 때 천상의 것들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확실하게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② 초대 교회 몇몇 교부들은 이 단어를 '현실화'(realization)의 개념으로 보았다. 믿음이 장래의 바라는 것들을 현실적으로 발생하게 해준다고 본 것이다.
③ '실체', '실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믿음이란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바라는 것들을 실질적으로 확실한 것으로 붙잡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④ 초대 교회 교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 스콜라 신학의 대부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견해로서 '토대', '기초'(foundation)라고 보는 견해이다. 말하자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바라는 것들')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하면, '믿음이란 희망을 지탱해 주는 토대로서 희망하는 것이 허상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을 보증해 주는 실체'라는 의미가 된다.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라고 번역된 '프라그마톤 엘렝코스 우 블레포메논'(pragmaton ellengchos u bllepomenon)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일들의 증거'라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에 해당하는 '우 블레포메논'에서 '블레포메논'(bllepomenon)은 '보다'(see)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블레포'(bllepo)의 수동태 분사이다. 따라서 '우 블레포메논'은 인간의 눈에는 가리워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또한 '실체들의'로 번역된 '프라그마톤'(pragmaton)의 원형 '프라그마'(pragma)는 고전 희랍어에서는 '행위', '사물', '사업', '논쟁'등의 의미로 쓰였으며,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일'(사도5,4), '사실', '일'(루카1,1)등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란 '보이지 않는 사실들'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일들이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 등은 믿음이라는 장치를 가져야만 신뢰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확증'에 해당하는 '엘렝코스'(ellengchos)는 '밝히 드러내다', '폭로하다', '납득시키다' 등을 뜻하는 동사 '엘렝코'(ellengch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고전 희랍어에서는 '증거', '확인'등의 의미를 지닌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겉으로 밝히 드러내주는 것, 확실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실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누가 못 믿는가?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을 누가 못 믿는가? 그리고 관찰, 실험, 검증에 의해 과학적으로 이미 사실(fact)로 밝혀진 것들을 누가 못 믿는가? 그러기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믿음의 어두운 차원을 뛰어넘어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 태양이 어두운 먹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두운 먹구름 넘어 태양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차원인 것이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2) 여기서 '옛 사람들'로 번역된 '호이 프레스뷔테로이'(hoi presbyteroi)에서 '프레스뷔테로이'의 원형 '프레스뷔테로스'(presbyteros)는 '늙은', '나이 많은'을 의미하는 '프레스뷔스'(presbys)의 비교급으로서 '나이가 더 많은', '노인' 또는 '장로', '원로' 라는 의미이다(마태26,3; 사도2,19). 고전 희랍어에서는 처음에는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더 늙은'(older) 이라는 뜻을 나타냈지만, 후에는 '더 존경받는'이라는 의미가 첨가되었다.
본절에서는 신약에서 흔히 쓰이는 '원로'의 의미가 아니라(1베드5,1), 히브리서 저자와 독자들의 공통된 조상, 즉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구약 시대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살았던 모든 조상들'을 말한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11장 4절 이하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대별 믿음의 영웅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며, 동시에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고 증거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인정을 받았습니다'로 번역된 '예마르튀레테산'(emartyrethesan; were well attested; were commended)은 '마르튀레오'(martyreo)의 과거 수동태이다.
이 '마르튀레오'동사의 뜻은 '증언하다', '어떤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되다', '어떤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어떤 사실을 확증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동태로 쓰인 것은 거명된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증인이 바로 하느님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증거하셔야만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속임을 당할 수도 없고 속일 수도 없는 진리의 근원이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그들의 믿음을 확증해 주셔야만 진정한 신앙인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연중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히브12,1~4)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1)
히브리서 12장 1~3절은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인내하며 달리는 신앙의 경주에 대해 말하고, 12장 4~13절은 훈육의 의의와 유익 그리고 훈육받는 성도의 분발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본문을 좀 더 정확하게 직역하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렇게 많은 증인들의 구름을 가지고 있다'가 된다. 신약의 성도들은 시련가운데서 믿음의 경주를 하지만, 수천 수만의 옛 선조들로 이루어진 관중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 성경을 통해 이미 따라야 할 신앙의 모범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며, 또한 천국에서 응원하고 격려해 주는 후원자들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본문에서 '이렇게 많은'으로 번역된 '토수톤'(tosuton)은 '이렇게 많은', '큰'을 뜻하며 '구름처럼'으로 번역된 '네포스'(nephos)를 수식한다.
새 성경에서 부사적 의미로 번역된 '네포스'는 명사 목적격 단수로서 '구름을'이라는 의미이다. '네포스'는 단 하나의 구름을 의미하는 '네펠레'(nephelle)와 달리 온 하늘을 빽빽하게 가리우는 구름(밀운)을 가리킨다.
'증인들의 구름'은 경주가 펼쳐지고 있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스탠드를 가득 메우고 있는 꽉 들어찬 관중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며, 그들은 신앙의 경주를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고 있다.
여기서 '증인들'로 번역된 '마르튀론'(martyron)은 원형 '마르튀스'(martys)의 소유격 복수이며, '마르튀스'는 '증거', '증인' 그리고 '순교', '순교자'라는 뜻을 나타낸다. '순교',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martyr'가 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순교자'란 죽음을 무릅쓰고 증거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마르튀스'(martys)가 전달하는 '증인'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물론이고 오늘의 세상에서도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증인들은 종종 고통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어두운 세상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미워하게 마련인데, 그것은 성도들이 바로 그 빛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요한15,18~20). 따라서 세상은 성도들을 대적하는 것이고, 그 증거를 히브리서 11장 34~37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의 옛 선조들이 당한 세상의 핍박과 환난을 생각하면서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서 싸움에 임해야 한다. 그들이 참아낸 것은 우리도 참아낼 수 있고, 그들이 극복한 문제들을 우리들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들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이 달리고 있는 경기장의 관중석에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주며, 이미 자신들이 경주한 그 코스를 달리고 있는 우리를 향해 격려와 조언, 응원을 보내주는 수많은 증인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경기장에서 경주를 하는 선수들이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듯이 신앙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도 신앙 생활에 방해되고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벗어버려야 할 것을 권면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벗어 버리고'로 번역된 '아포테메노이'(apothemenoi)의 원형 '아포티테미'(apotithemi)는 분리, 이탈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포'(apo)와 '두다', '놓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 '티테미'(tithemi)의 합성어로서 '낡은 옷을 벗어버리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포테메노이'는 요청적 명령을 나타내는 분사형이므로, 이것은 '벗어버리자', '던져 버리자'등의 의미를 지닌다.
고대 그리스 지역에서는 운동 경기가 매우 성행하였고,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경주자들은 옷을 다 벗고 달렸다. 오늘날 학교 체육관을 의미하는 단어 'gymnasium'은 원래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운동 선수들의 옷을 다 벗은 모습을 나타냈던 단어 '귐노스'(gymnos)에서 유래하였다. 그래서 당시 경기장에는 여자들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아무튼 남보다 더 빠르려면 입는 옷의 무게를 가능한 줄여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한편 벗어버려야 할 것이 본절에서 두 가지로 지적되고 있다. 첫째는 '온갖 짐'이다. '짐'으로 번역된 '옹콘'(ongkon)의 원형 '옹코스'(ongkos)는 '짐', '방해물', '부피가 있는 덩어리', '무거운 것'등을 뜻한다. 짊어지고 있는 짐이 많을수록 빨리 달리기란 더 어렵다. 앞을 막는 장애물이 많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신앙 경주를 잘하고자 하는 성도는 모든 방해 요소를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옹코스'(ongkos)를 경주자가 몸에 걸치면 배의 돛처럼 바람을 끌어 모아 속력을 내는 데 지장을 줄 뿐 아니라 경주자를 쉽게 지치도록 만드는 겉옷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경주자의 지나치게 많이 나가는 체중으로 보기도 한다. 어쨋든 신앙의 경주를 하는 성도가 빨리 벗어버려야 할 '옹코스'에는 의심이라든지, 교만, 나태 등이 포함된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신실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전진하고 진보하는 신앙인이 될 수 없다. 또한 교만의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말씀을 통해 이루어야 할 성화(聖化; sanctification)를 이루지 못한다.
또한 나태의 장애물을 치워버리지 못하는 자들은 그 신앙의 활력을 잃게 되며 침체에 빠지고 결국 퇴보하게 된다. 신앙의 경주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히 제거해 버리는 결단이 필요하다. 썩어가는 부위나 암세포를 제거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것처럼, 신앙의 달리기를 방해하는 요소들은 단호히 제거하지 않으면 얼마가지 않아 주저앉을 수 밖에 없다(마태5,29.30).
둘째는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이다.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으로 번역된 '유페리스타톤'(euperistaton)은 '잘', '좋게'를 뜻하는 부사 '유'(eu)와 '주위에 놓다'를 뜻하는 동사 '페리이스테미'(periist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쉽사리 함정에 빠뜨리는', '유혹하는'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란 '쉽사리 함정에 빠뜨리는 죄'를 말한다.
그리고 본절의 '죄'로 번역된 '하마르티안'(hamartian)은 '죄'로 일컬어지는 일체의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쉽사리 함정에 빠뜨리는 것'으로 한정된다. 형용사인 '유페리스타톤'이 관사 '텐'(ten)을 취하여 한정적인 용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죄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형태의 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이 죄를 '불신앙'으로 보기도 한다. 믿음의 반대인 불신앙은 신속하게 우리의 발을 휘감는 것이 사실이다. 신학적으로도 이것이 모든 죄의 기초이다(요한16,2~9).
밤중에 밀림에서 모닥불 주위를 배회하는 야수의 무리가 경계심을 늦추고 있는 사람에게 달려들려 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알아들을 수 있겠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이 죄가 항상 우리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와같은 것들은 지체없이 벗어버려야 한다.
의심이라든지 교만, 게으름 같은 장애물들 신속히 벗어버리고, 불신앙의 요소들을 부단히 경계하여 우리의 발목을 못잡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히브 12,4~7.11~15)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6)
주님의 훈육은 영적 자녀가 된 성도에 대한 진정한 부성애의 표시이다. 그분의 훈육은 사랑하시는 이에게만 내리기 때문에 누가 주님의 훈육을 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있음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증거이다.
여기서 '훈육하시고'로 번역된 '파이듀에이'(paideuei)의 원형 '파이듀오'(paideuo)는 본래 '어린이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었는데, 여기에서 '양육하다', '가르치다', '습관을 들이다' 등의 의미가 추가되었다. 구약 그리스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는 주로 '응징하다', '교정하다', '훈계하다' 등을 뜻하는 히브리서 '야싸르'(yasar)의 역어로 나온다. 따라서 70인역에서는 '파이듀오'(paideuo)가 '가르치다'라는 의미보다는 '훈육하다'라는 의미에 보다 가깝다. 이 단어가 본절에서는 하느님의 훈육을 통한 교육이라는 개념을 나타내어 쓰였다.
유대 사상에서는 훈육을 '최후의 심판에서 보호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행동'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히브리서의 저자도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의 훈육이 성도들로 하여금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이기 때문에, 고난 중에 있는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실망하지 말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자녀가 된 당신 성도들을 멸망하는 악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치고 교정하시는 일시적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으로 인한 고난으로 침체에 빠졌을, 당시 히브리서 일차 독자인 히브리 출신의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릇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부모는 실상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나 불의에 가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전혀 상관하지 않으신다면,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내버려 두셨다는 것과도 같다.
하느님께서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되면 계속해서 훈육하심으로써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신다. 가르침이나 교정에는 꾸짖음이나 훈련이 불가피하다. 언제든지 그분께서는 우리 곁에 계시면서 당신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를 교육하며 훈련시키신다.
'채찍질하신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영적 자녀들에게서 허물이 발견될 때에 나타내시는 반응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채찍질하신다'로 번역된 '마스티고이'(mastigoi)는 현재 시제로서 '계속해서 매질하다' 혹은 '계속하여 응징하다'라는 지속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마스티고이'의 원형 '마스티고오'(mastigoo)는 끝에 납덩어리가 달려있는 '채찍'을 의미하는 명사 '마스틱스'(mastik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문자적으로 살점이 떨어지도록 심하게 '채찍질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육체적 폭력 행위를 뜻하는 여러 그리스어 단어들 중에 더욱 가혹한 형태의 처벌을 나타내는데, 후기에는 중대한 범죄에 뒤따르는 로마의 징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의 명령으로 이 형벌을 받으셨고(요한19,1),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사도5,40) 역시 채찍질의 형벌을 받았다. 그 채찍질은 참으로 가혹한 형벌로서 본문에서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무엇때문에 인정하시는 아들, 즉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아들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채찍질하시는가? 그 이유는 그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또한 그 아들을 상속자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본절의 '아들'에 해당하는 '휘온'(hyon)의 원형 '휘오스'(hyos)는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하는 아들이라는 법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내려지는 주님의 채찍이 아프다고 생각될 때, 이것은 그분이 나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증거임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그 채찍은 바로 아들된 우리를 향한 아버지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인 것이다.
목요일 제1독서(히브12,18~19.21~24)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나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22~23ㄱ)
옛 계약을 가졌던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대하여 품고 있었던 공포감에 대하여 기록한 히브리서 12장 18~21절과는 달리, 히브리서 12장 22~24절에서는 성도에게 부여된 새 계약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가지는 새로운 관계가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으로 번역된 '알라 프로셀렐뤼타테'(alla prosellelythate)는 히브리서 12장 18절과 첨예한 대조를 이룬다. 옛 계약 아래에 있는 성도들은 지상에 임재하신 하느님 대전에도 나아가지도 못했고 그 음성 듣는 것도 두려워했지만, 새 계약 아래 있는 성도들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 대전에도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에 대해 말한다. 그는 지금 자신의 독자들 중에 영육간에 지친 사람들, 피곤한 사람들, 배교의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탁월한 영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그 최후의 승리의 자리에서 뒤로 물러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마라톤 선수가 풀코스를 거의 다 달려와서 결승점이 보이는 트랙의 마지막 지점인 직선 코스에 접어들어 주저앉으려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자신의 독자들이 지금 이 직선 코스에 접어 들었다고 격려하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기술해 주고 있다. 즉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다시 뒤로 돌아가거나 주저앉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과거 옛 계약 아래 있던 백성들은 그렇게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가지 못했던 반면에, 새 계약 아래있는 성도들은 하느님 대전에 너무나 손쉽게 나아갈 수 있다.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지상의 시나이산 그리고 지상의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하늘의 시온산,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한 표현이다. 그곳은 계속해서 살아계시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도성으로서, 사도 바오로가 증거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갈라4,26) 및 사도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 (묵시21,2)과 일치한다.
여기서 '도성'에 해당하는 '폴레이'(pollei)의 원형 '폴리스'(pollis)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리스의 자유 시민은 '폴리스'에 개인의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고, 행정과 통치에 관여하였다. '폴리스'는 아무에 의해서도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정치적 의지의 독립된 표현이었다.
그러나 구약 희랍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히브리어 '이르'(yr)의 역어로 나타나며, 이 '이르'(yr)는 그리스의 '폴리스'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는 모든 요새화된 고지가 '이르'로 지칭되었다. 즉 이것은 외적이 침입하지 못하는 안전한 곳이란 의미가 강조되는 단어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구약 시대에 '이르'로 지칭되었던 예루살렘은 특별한 곳으로 언급된다.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요(2역대6,38), 하느님의 도성(시편46,5; 48,2), 대왕의 도읍이다(시편48,3). 그러나 이 찬란한 명성을 지닌 지상의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새 계약 아래 있는 성도가 이른 곳은 그림자가 아닌 실체, 곧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그곳은 하느님께서 지배하시는 곳이요, 새 계약 아래 있는 모든 성도는 그곳의 자랑스런 시민이 되었다(필리3,20).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 하늘의 도성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하느님 대전에서 그분을 모시고 있다. 여기서 '무수한'으로 번역된 '뮈리아신'(myriasin)의 원형 '뮈리아스'(myrias)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수(an innumerable multitude), 무제한적인 수(an unlimited nember)를 의미한다.
사도 요한은 그 숫자가 '수백만 수억만'라 했으며, 그렇게 어마어마한 숫자의 천사가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찬미하고 있다고 진술했다(묵시5,11.12) 그 많은 무리의 천사들이 날마다 찬양하는 광경을 통해 하늘 예루살렘의 축제의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다. 예언자 다니엘도 환시 가운데 천국을 보았는데, 그가 볼 때 하느님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다니엘7,10) 이라고 하였다. 천사들은 또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성도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 이들이기도 하다(히브1,14).
'축제 집회'로 번역된 '파네귀레이'(panegyrei)의 원형 '파네귀리스'(panegyris)는 '모든'을 뜻하는 '파스'(pas)와 '집회'를 뜻하는 '아귀리스'(agyris)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명절의 모임'이나 '축제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고전 그리스 문헌에서는 사람들이 신들을 축하하기 위해 즐기는 축제일을 가리켜 쓰였다. 이 축일에는 국민 모두가 모여 신들을 축하하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한 그리스 개념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천사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를 묘사했다고 본다.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 '맏아들들의 모임'에 해당하는 '엑클레시아 프로토토콘'(ekkllesia
prototokon)은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이 두 단어는 모두 택한 백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어휘이다.
먼저 '교회'를 뜻하는 '엑클레시아'는 '~에서 밖으로'를 뜻하는 전치사 '에크'(ek)와 '불러내다', '소환하다'를 뜻하는 동사 '칼레오'(kalle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구원받은 모든 이들을 지칭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왕국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마태16,18; 에페5,24~32; 콜로1,18). 또한 '맏아들들의'로 번역된 '프로토토콘'의 원형 '프로토토코스'(prototokos)는 '처음'을 뜻하는 '프로토스'(proto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그 기본 의미는 '장자의', '처음 태어난'이다.
구약 희랍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서 문자적 의미(창세25,25; 탈출13,2)와 전이된 의미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후자의 경우는 은총을 받은 자들 또는 선택된 자들을 가리키는 영예의 칭호로 나타난다. 신약에서도 이 단어는 예수님께 대한 영예의 칭호로 나오며,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행동의 불변성을 명확하게 표현한다(로마8,29; 콜로1,15.18).
그리스도께서는 구원받은 모든 이들의 맏아들이시다(로마8,29). 이 말은 그가 하늘의 영광을 상속하는 모든 이들의 첫째가 되심을 뜻한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복수형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맏아들로 본 것처럼(탈출4,22.23)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상속하는 모두를 맏아들(장자)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도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계승한 공동 상속자라고 가르친다(로마8,17). 이것은 성도가 일시적인 고난 때문에 주춤거리거나 달음질을 포기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금요일 제1독서(히브13,1~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8)
원문은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엑테스 카이 세메론 호 아우토스,카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Iesus christos ekthes kai semeron ho autos, kai eis tus aionas ;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이다.
과거에 믿음의 옛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모든 믿는 자에게 동일하게 위로와 힘이 되신다. 그분은 변치 않는 분이며,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한편 원문에 동사가 없는 것을 들어서 어떤 이는 '이에수스'와 '크리스토스' 사이에 '에스틴'(estin)을 보충해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 성경이나 영역본들이 번역한 것처럼 '크리스토스'(christos) 다음에 동사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서 '예수 그리스도는~이시다'라고 읽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13장 8절은 그리스도의 불변성을 말하며, 이것은 우리의 희망이 헛되지 않음을 알게 한다. 이같은 사실은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휴즈(P.E. Hughes)는 "과거에 조상들과 함께 계셨던 그 동일한 그리스도께서 지금 너희와 함께 계시고, 장차 우리 뒤의 세대와 함꼐 종말까지 계실 것이다. 어제 여호수아를 확실하게 도우셨던 그 주님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오늘도 신실한 당신 백성들을 도우시며 영원토록 도우실 것이다."고 해설했다.
믿음의 옛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역할을 마친 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셔서 전에 믿음의 옛 사람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인도하신다. 따라서 신약의 성도들은 앞서 살다 간 믿음의 영웅들이 그리스도께 대해 가졌던 믿음과 신뢰를 본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시고 '영원한 현재' 밖에 없으신 살아계신 주님이신 것이다. 인간은 수평선을 따라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가지만, 주님은 수직으로 역사(役事)하셔서 과거도 현재, 현재도 현재, 미래도 현재인 분이시다.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히브13,15~17.20~21)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15~16)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3장 15절, 16절에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찬미와 선행의 제사를 드릴 것을 권면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히브10,12.18) 이후로 다시 문자적인 의미의 제사가 바쳐질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이제 성도가 하느님 마음에 바칠 제사는 바로 찬미와 선행이라는 성도 개인의 신앙 표현인 것이다.
본절에서 언급된 성도들이 항상 계속해서 바쳐야 할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제사는 찬양의 제사이며, 랍비들의 격언대로 다른 모든 제사는 없어질지라도 이 제사만큼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유대 철학자 필로(Philo)는 이것을 '최선의 제물'이라고 표현했다.
즉 찬양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최선의 제물이므로 이것을 계속 바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바칩시다'로 번역된 '아나페로멘'(anapheromen)은 '아나페로'(anaphero)의 현재 가정법으로 권유를 나타낸다.
'아나페로'동사는 '위쪽으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전치사 '아나'(ana)와 '가지고 가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 '페로'(phero)의 합성어로서 '위쪽으로 올려드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제물을 제단에 올려드리듯이 찬양을 올려드리자는 의미인 것이다.
또한 '찬양'으로 번역된 '아이네세오스'(aineseos)의 원형 '아이네시스' (ainesis)는 '명예롭게 말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이네오'(aine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하느님께 합당한 명예를 올려드리는 찬양'을 의미한다.
한편 히브리서 저자는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행위와 관련하여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예수님을 통하여'바치는 것이 그 하나이고, '언제나' 바쳐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먼저 '통하여'로 번역된 전치사 '디'(di)의 원형 '디아'(dia)는 본절에서처럼 소유격을 지배할 때 수단, 방편, 매개의 뜻을 나타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제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바칠 수 있으므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은 이 제사를 바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 또한 '언제나'로 번역된 '디아 판토스'(dia pantos)는 '계속적으로'(continually)라는 뜻이다.
찬양은 곧 하느님을 명예롭게 말하는 것이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찬양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모든'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 '판토스'(pantos)가 나타내듯이 어떤 환경속에서도 찬양을 할 수 있는 성도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며,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을 기대할 수 있다(사도16,25.26).
하바쿡 예언자는 정치, 사회, 경제, 종교적 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구원의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노래하였다(하바쿡3,16~19).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찬양의 제사는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찬미하는'으로 번역된 '호몰로군톤'(homollogunton)의 원형 '호몰로게오'(homollogeo)는 '고백하다','시인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 희랍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서는 '찬양하다'를 뜻하는 '야다'(yada)와 '서원하다'를 뜻하는 '나다르'(nadar), '맹세하다'를 뜻하는 '샤바'(shaba)의 역어로 한 번씩 나온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외적 표현 중에서 입술의 표현, 즉 고백인 것이다.
'입술의 열매'는 이사야 57장 19절과 호세아서 14장 2절에도 나오는 것으로서 히브리서 독자인 히브리 출신의 성도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다. 이같은 입술의 열매, 즉 구체적인 감사의 찬양은 하느님의 은혜를 아는 이들이 결코 중단해서는 안되는 너무나 고귀한 참된 제사이다.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16)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찬양의 제사와 함께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요구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섬김(봉사)의 희생 제사인데,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선행와 나눔으로 요약한다.
'선행'으로 번역된 '유포이이아스'(eupoiias)의 원형인 '유포이이아'(eupoiia)는 '잘' 또는 '좋은'을 뜻하는 부사 '유'(eu)와 '행하다'를 뜻하는 동사 '포이에오'(poie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좋은 일'을 뜻한다. 신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나는 이 단어는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 좋은 일을 도모하는 것을 지칭한다(마태5,13~16; 로마15,2; 에페2,10). 또한 '나눔'으로 번역된 '코이노니아스'(koinonias)의 원형 '코이노니아'(koinonia)는 '친교','교제','참여','교섭'등을 의미한다. 로마서 15장 26절에서는 '구제'란 의미로 쓰였다.
그리스 세계에서 이 단어는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분명하고도 깨어지지 않는 친교를 나타내는 용어였고, 인간들 사이의 '밀접한 결합'과 '친밀한 결속'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를 다른 말로 바꾸면 '형제애'가 된다. 이러한 대신(對神) 및 대인(對人) 관계에 있어서의 친교가 초대 교회 안에 모범적으로 이루어 졌다. 그들은 밖으로는 전교와 함께 구제를 힘썼으며, 안으로는 유무상통하는 친교(사도4,32~35)에 힘썼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편지를 기록하던 때에도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좋은 관행은 계속되어야 함은 물론 더욱 확산되어야 했기에 히브리서 저자가 이것을 소홀히 하지 말도록 촉구한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22,39)는 계명은 여기서처럼 선행과 나눔을 통해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선행이나 나눔이 외인들 보다는 성도들 사이에서 먼저 행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교회 밖의 사람들도 선을 행해아 할 대상이기는 하지만 우선 순위는 주님 안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있다(갈라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