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카서(독서묵상)
http://cafe.daum.net/FiatLove/mCrC/761
제21주간 월요일 제1독서 (1테살1,1-5.8ㄴ-10)
"그것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5)
테살로니카 1서 1장 5절은 바오로 일행이 테살로니카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때, 그들을 복음화시킨 근원적 수단이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앞의 1장 4절의 테살로니카 교인들이 하느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선택을 받은 그 근거를 드러내고 있다. 먼저 바오로는 자신들이 전한 복음이 단지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 복음'에 해당하는 '토 유앙겔리온 헤몬'(to euanggelion hemon)은 바오로와 그 일행에게서 기원한 복음이라는 의미로 오해될 수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전했고, 또 전하고 있는 하느님의 복음'이라는 뜻이다. 바오로는 여러 곳에서 복음은 하느님에게서 기원한 것으로서 그분께서 그들에게 전하라고 위탁하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로마1,1; 15,16; 2코린11,7; 갈라1,7).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테살로니카 교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바오로가 전한 복음이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테살로니카 1서 5절에서 영어의 'not only ~ but also'구문과 같은 '우크 ~모논~ 알라 카이'(uk ~monon ~ alla ~ kai)라는 구문을 통해서 그것이 드러난다. 그리스의 이 구문은 뒷부분(alla kai; but also)을 더욱 강조하는 표현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 '엔'(en)이 반복 사용되어 사람을 복음화시키는 근본 수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힘과'로 번역된 '엔 뒤나메이'(en dynamei)는 '능력으로'(with power)라는 뜻이다.
여기서 '뒤나메이'(dynamei)의 원형인 '뒤나미스'(dynamis)는 기적(영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아니라, 죄인으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권능을 말한다. 이처럼 이것이 인간의 구원과 관련될 때 그 근원은 오직 하느님이시다(로마1,16). 그 다음으로 '성령과'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en pneumati hagio)역시 '성령으로'(with the Holy Spirit)라는 뜻이다.
복음이 성령으로 전해진다는 것은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께서 역동적으로 역사하신다는 뜻이며(사도10,44), 듣는 사람들의 영혼 안에서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키시는 주체가 바로 성령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낸다(1코린12,3).
마지막으로 '큰 확신으로'에 해당하는 '엔 플레로포리아 플레' (en pleroporia polle; with deep conviction)는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께서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서 일하신 증거로서 복음의 진리에 대한 내적 반응을 말한다. 이러한 확신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자의 삶의 초기에 강하게 나타난다.
제21주간 화요일 (1테살2,1-8)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여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합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4)
바오로와 그 일행이 테살로니카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하느님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이런 사실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여' 이란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를 인정하여'로 번역된 '데도키마스메타'(dedokimasmetha;we are allowed; approved)의 원형 '도키마조'(dokimazo)는 원래 금속의 순도를 불로써 시험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그러나 여기서 '단련하다'(1베드1,7), '확인하다'(2코린8,8), '시험하다'(1요한4,1),'시험하여 옳다고 여기다'(로마14,22)라는 보다 폭넓은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오로는 이 단어를 여기서 현재 완료 수동태로 씀으로써, 하느님의 시험에 통과해서 자격있고 옳은 사람으로 인정된 상태가 과거로부터 지금 이 서간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계속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로 번역된 '휘포 투 테우'(hypo tu theu; by God)에서 전치사 '휘포'(hypo)는 이 시험이 '하느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감독 아래에서' 수행되었다는 뉘앙스를 준다. 전치사 '휘포'(hypo)가 인격체의 소유격과 함께 쓰일 경우는 움직이는 원인(동인; 動因)과 권세 아래에 있음의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바오로와 그 일행이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시험에 합격해서 복음을 전할 사명을 위탁받은 것이기 때문에, 바오로의 복음은 테살로니카 전서 1장 3절에서처럼 불순한 동기나 속임수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한편, '맡기신'으로 번역된 '피스튜테나이'(pisteuthenai; to be entrusted with)는 '믿다'라는 뜻을 지닌 '피스튜오'(pisteuo)의 수동태 부정사로서 '하느님께로부터 믿어졌다', 즉 '하느님께서 신임하고 맡기셨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바오로와 그 일행이 하느님께로부터 그 진가를 인정받아 복음을 전할 부탁을 받았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인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이들이 전하는 복음을 전해 듣는 자들이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을 체험하고, 마음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와 그 일행을 본받는 자가 되었으며, 또한 주님을 본받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테살1,5.6).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오로와 그 일행은 자신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예나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들을 시험하여 옳다고 인정하시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복음을 전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내 서간에서도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갈라1,10)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복음 전파 사명이 오로지 하느님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복음 전파에 대해 사람들의 평가에 좌지우지 되지 않았다. 만약 그런 것에 좌우되다면, 그가 전하는 복음은 본질에서부터 변질될 것이 틀림없다.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1티모2,4) 하느님의 마음을 따라 복음을 순수하게 온전히 전하려고 몰두했다.
여기서 테살로니카 전서 2장 4절의 '기쁘게 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아레스콘테스'(areskontes; pleasing)의 원형 '아레스코'(aresko)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봉사의 의미가 담긴 단어인데, 당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공공의 복지를 위해 공을 세웠던 자들의 묘비에 새겨지기도 한 단어였다. 이처럼 바오로 사도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의식하는 하느님의 종임을 밝혔던 것이다.
한편,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험하시는'으로 번역된 '도키마존티'(dokimazonti; tests)는 상반절에 나오는 '데도키마스메타'(dedokimasmetha)와 그 원형이 '도키마조'(dokimazo)로 똑같다. 여기서는 '시험하여 그 진위 여부를 판별하고 그 진가를 인정하시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서 17장 10절의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는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드러난 외적 행위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마음의 내적 동기로 판단하신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사무16,7).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복음 전파자의 복음을 전하는 목적과 동기를 정확히 아신다. 바오로와 그 일행은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여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21주간 수요일제1독서 (1테살2,9-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3)
테살로니카 전서 2장 13-16절은 2장 1-12절까지 계속되어 온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복음 전파 활동에 대한 회상의 연속이다. 복음에 대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진실한 자세를 회고하며, 이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에서 '끊임없이'라는 의미의 '아디알레입토스'(adialleiptos; without ceasing)와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투멘'<eucharistumen; thank;'유카리스테오'(eucharisteo)의 직설법 현재 동사>은 테살로니카 신자들로 인한 바오로와 그의 동역자들의 감사가 잠시라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
복음 전파자들에게 근심과 염려가 되었던 코린토 신자들(1코린4,18-21)과 달리 복음 전파자들에게 감사의 제목이 되었던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1테살1,3).
히브리서 13장 17절에는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복음 전파자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일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감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으니, 그들의 영혼은 영적으로 많은 유익을 덧입었던 것이다.
테살로니카 전서 2장 13절의 두번째 구절은 이유 접속사 '호티'(hoti)로 연결되는데, 오로와 그 동역자들이 테살로니카 신자들에 대해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하느님의 봉사자들로부터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말씀의 권위는 사람의 권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권위이다. 하느님 대전에 겸손한 자들이라면, 이러한 하느님의 봉사자들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의당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게 마련이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봉사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원래 그대로, 때로는 상세히 해설하여 전하는 중개자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 자신도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자기 것인 양 주장할 수 없고, 그 말씀을 받는 자들도 당연히 그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그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여 하느님 나라와 영광에 참여할 수 있으며(1테살2,12) 그 말씀이 자신 안에서 역사(役事)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말씀'('로고스'; logos; the word)을 '받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단어가 두 개이다. 첫째는 '들을 때에'로 번역된 '파랄라본테스'(parallabontes; when you received)라는 부정 과거 분사이고, 둘째는 '받아들이지'로 번역된 '에덱사스테'(edeksasthe;you accepted it)라는 직설법 부정 과거 동사이다. 전자는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수용을 뜻하고, 후자는 환영과 찬성을 동반하는 주관적이고 내적인 수용을 뜻한다.
즉 전자는 귀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듣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람의 입에서부터 흘러 나온 말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들린다는 사실과 관련되며, 후자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서 사람에 따라 그 반응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바오로 일행의 입에서 나온 복음을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반드시 순종하고 지켜 행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바오로의 언변이 탁월하고 좌중을 압도하는 능력이 있어서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코린토 후서 10장 10절에는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하면 그는 몸이 약하고 말도 보잘것 없다." 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은 감동시키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며, 바오로가 개인적 사상이 아닌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 그대로'로 번역된 '카토스 에스틴 알레토스'(kathos estin allethos;as it is in truth; as it actually is)는 직역하면 '그것은 진실로 그와 같다' 이다.
이것은 '너희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사도들로부터 전파된 하느님의 말씀이 갖는 본질적 가치를 알고 있었으며, 또한 복음에 대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신자 여러분 안에서'라는 표현은 '믿음의 형제들'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 여러분들'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말씀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활동(역사)하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에네르게이타이'(energeitai; is at work; ffectually works)는 현재 직설법 동사인데, 여기서 현재 시제는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첫째로, 그리스어에서 직설법 현재형은 진리나 격언 및 변함없는 진리를 나타내는 '격언적 현재'(Proverbal Present)로 쓰인다는 점에서,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증거되는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 믿는 자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그 말씀이 역사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영적 원리로 정해 놓으신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만 충족되면 이 역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어에서 직설법 현재형은 과거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지속적 현재'(Durative Present) 용법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당시 영적인 삶에 그 역사가 나타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바오로가 말씀을 전하던 때 뿐만 아니라, 본 서간을 쓰고 있는 현재에도 그와같은 역사가 믿는 이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활동(역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원형 '에네르게오'(energeo)는 죽은 자의 영이 다른 사람 안에서 되살아나 '운동하다'(마태14,2) 또는 무법의 신비가 '작용하다'(2테살2,7)라는 의미로 사용된 동사이다. 즉 운동력있게 활동함으로써 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본절에서 이러한 활동의 주체는 '하느님의 말씀'인데, 이것은 즉각적으로 히브리서 4장 12절을 연상시킨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믿는 이들 안에서 운동력있게 활동함으로써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에제키엘 예언자도 체험한 바가 있다(에제37,1-14).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것을 그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의 심령에 역사하여 자신의 죄악된 실체와 직면하게 하며, 그로 인해 그 죄스런 생각과 본성을 변화시키고, 자신에게만 이기적으로 집중하던 관심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열게 하며, 그들의 삶 전체를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바꾸어 놓는 것이다.
http://cafe.daum.net/FiatLove/mCrC/765
제21주간 금요일 제1독서 (1테살4,1~8)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7~8)
테살로니카 전서 4장 7절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로 문장이 시작된다. 이 '가르'(gar; for)는 테살로니카 1서 4장 3~6절 전체에 대한 이유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음란(불륜)과 같은 성적 범죄에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그 뜻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불러내신 자들이다.
여기서 '부르셨기'에 해당하는 '에칼레센'(ekallesen)은 '부르다'(call)라는 의미를 지닌 '칼레오'(kalleo)의 부정(不定) 과거 능동태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과거에 능동적으로 부르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성적 음란과 여러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부터 특별히 몇몇을 구별하여 불러내셨다는 의미를 뜻한다. 이러한 부르심은 죄와 죽음에서 의로움과 생명에로의 부르심이요, 희망없는 삶에서 영원한 산 희망의 삶에로의 부르심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원하신 뜻에 따라 세상에서 불러낸 자들의 모임이 바로 '엑클레시아'(ekkllesia)이다. '엑클레시아'는 교회로 번역되지만, '밖으로'란 의미의 전치사 '에크'(ek)와 '부르다', '호출하다'란 의미의 동사 '칼레오'(kalle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밖으로 불러낸 자들의 모임' 이란 의미가 있다. 즉 교회는 세상의 '더러움'(부정;不淨)을 떠나 새로운 거룩함의 세계로 들어온 성도들의 모임인 것이다.
테살로니카 1서 4장 7절에는 전치사가 두 개 쓰였는데, '더러움' 앞에 쓰인 '에피'(epi)와 '거룩' 앞에 쓰인 '엔'(en)이 그것이다. 전자는 '~의 기초 위에서' 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의 상태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이런 의미와 더불어 전치사 '에피'(epi)는 목적의 의미를 나타내며 (갈라5,13; 에페2,10), 전치사 '엔'(en)은 궁극적 지향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더러움'으로 번역된 '아카타르시아'(akatharsia; uncleanness; impure)는 성적 더러움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느님 대전에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부정을 가리킨다. 또한 '거룩'으로 번역된 '하기아스모'(hagiasmo; holiness)도 성적인 거룩한 순결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종류의 도덕적 거룩한 순결로서의 거룩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간택한 자들을 불러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구별시킴으로써 모든 악에서 떠나게 하시며, 모든 면에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나아가 그러한 거룩의 상태 안에 항상 머물러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는~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로 번역된 '토이가룬'(toigarun; therefore)은 특별한 강조로서의 결론을 도입하는 불변사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느님의 구체적인 뜻으로서 '성적 순결'에 대해 권면하는 테살로니카 1서 4장 3~8절 전체를 결론짓는 문장이다.
여기서 '무시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아테톤'(atheton)의 원형 '아테테오'(atheteo)는 원래 어떤 법규정이나 계약 등의 효력을 폐지하고 무효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갈라3,15; 히브10,28).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거부(거절)하다', '무시하다'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마르7,9; 루카7,30; 10,16; 1티모5,12). 여기서도 후자의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무시하는 데 무엇을 무시한다는 것인지, 원문에는 '호 아테톤'(ho atheton)의 목적어가 없다.
한글 새 성경은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 영어 성경은 '이 교훈을 저버리는 자'(he who rejects this instruction)로 '호 아테톤'을 번역했다. 말하자면, 성적인 더러움을 버리고 거룩한 순결을 포함한 모든 거룩함을 따라 살라는 이 교훈을 무시하는 자는 단순히 이것을 가르치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무시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는 지금 이 교훈을 개인적 소견이나 권위에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그분의 권유를 힘입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도 바오로가 당시에 이렇게 말하는 배경에는 영지주의자들이 테살로니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서, 성윤리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금욕적 교훈들을 잊어버리도록 유혹하고 희석시켰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성윤리에 대해 보다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하느님의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유혹했기에,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엄격한 교훈이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의도에서 테살로니카 1서 4장 8절을 기록하였다.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 사도 바오로는 무시의 궁극적 대상인 '하느님'을 수식하는 문구, 즉 '여러분에게 (그의) 성령을 주시는'이라는 문구를 덧붙인다. 여기서 '주시는'으로 번역된 '디돈타'(didonta)는 '주다'라는 뜻을 지닌 '디도미'(didomi)의 현재 분사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지속적으로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사도 바오로는 이런 표현을 통해, 성적 순결을 가르치는 사도 바오로의 이 교훈(1테살4,3~8)을 경시하며 성적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는 자들은 곧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을 무시하고 훼방하는 자들이며, 그분의 성령을 통해 거룩한 정결의 삶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자라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http://cafe.daum.net/FiatLove/mCrC/766
제21주간 토요일 제1독서 (1테살4,9-11)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11)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1절과 12절에서 자기 일에 충실하고 근면하게 일하라고 권고한다. 사도 바오로는 부지런하게 일할 것을 전에도 권고한 적이 있었는데, 문과 테살로니카 후서 3장 11절과 12절에서 거듭하여 권고한다. 이러한 거듭되는 권고는 당시 테살로니카 교회에 주님의 재림이 그들 세대에 바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오해하여 신자들 사이에 생업의 포기와 같은 현상이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날이 멀지 않았으니 일상 생활에 매여 있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과 신앙을 지키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시한부 종말론을 외치는 집단에서 직장과 학교를 버리고 오직 그날만을 기다리며 집단 종교 생활을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테살로니카 교회가 시한부 종말론을 믿는 사교 집단은 아니었지만, 당시 팽배해 있던 임박한 종말에 대한 의식으로 말미암아 일부 신자들이 생업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 자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에게 바오로는 자기 손으로 힘써 일할 것을 권고한다.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1절은 등위 접속사 '카이'(kai)로 시작되고, 네 개의 현재 시제 부정사로 구성되어 있어,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0절의 '더욱더 그렇게 하고'라는 부정사와 더불어서 '권고합니다'라는 직설법 동사에 걸리는 문장이다. 따라서 4장 11절은 4장 10절에 논리적으로 연속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조용히 살도록'에 해당하는 부정사 '헤쉬카제인'(hesychazein; to be quiet)의 원형 '헤쉬카조'(hesychazo)는 '고요하다', '잠잠하다'라는 의미이다(사도11,18). 여기에서는 조용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 즉 이리저리 동요되지 않고 차분히 자기 중심을 지키고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였다. 말하자면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흥분되고 들떠 일상적인 일을 내팽개치는 자들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 일에 전념하고'라는 표현에서 '이디아'(idia)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또는 '다른 사람과 조금도 상관없는 자기 자신만의' 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프랏세인 타 이디아'(prassein ta idia; to mind your own business)는 다른 사람의 일에 무례하게 간섭하지 말고 자기의 일에만 전념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시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일상적인 일을 저버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동시에 당시 교회 직원이 아닌 몇몇 형제들이 교회 운영권에 간섭하려 했다는 사실까지 암시하는 대목으로 보인다. 사도 바오로는 그릇된 종말 사상을 퍼뜨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자들에 대해 '자기 일에 전념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이 표현은 당시 그리스 세계의 노동관을 반영한다.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손으로 일한다는 것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으로서 자유민들은 그것을 천박하게 여겼다. 따라서 이교도에서 회심한 자들은 이전의 이런 사상을 버리기 힘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본문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권고이다. 더구나 '(제)일을 하십시오'로 번역된 '에르카제스타이'(erqazesthai)가 '힘써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힘쓰며'로 번역된 '필로티메이스타이'(pillotimeisthai)의 원형 '필로티메오마이'(pillotimeomai)는 '좋아하다','사랑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필로스'(pillos)와 '명예'를 의미하는 '티메'(time)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본래 '명예를 좋아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점차 '명예심의 동기로부터 어떤 일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다', '~하기를 열망하다'라는 뜻으로 발전했다. 본절은 부정사 목적격을 동반한 명령적 부정사로 쓰였으므로, '~하기를 열망하다'는 뜻으로 번역된다.
제31주일 제2독서(2 테살 1,11~2,2)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가 그분께 모이게 될 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2,1~2)
테살로니카 후서 2장 전체는 본 서간의 본론부인 1장 5절~3장 15절의 연속 부분으로서 당시 신앙 생활 가운데 가장 혼란스러운 문제였던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테살로니카 교인들의 오해를 시정하며, 그들에게 재림의 징조와 심판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가질 것을 교훈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사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망라해서 본장만큼 재림 전(前) 적 그리스도의 활동에 대하여 상세하게 다룬 곳도 없다. 세상의 종말에 이루어질 일을 제시하는 본장은 정확한 해석이 불가능하므로 해석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하며, 어떠한 해석도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테살로니카 후서 2장에서 테살로니카 교인들에게 교시하고자 하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때 성도들이 그분앞에 모이게 되는 일에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재림'에 해당하는 '파루시아스'(parusias)의 원형 '파루시아'(parusia)는 원래 고대 사회에서 왕이나 황제 등 통치자가 지방 도시를 방문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황제의 방문을 받은 주민들은 그의 방문을 환호하면서 모여들어 축하 행렬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를 나타내는 '파루시아'(parusia)라는 용어가 신약에서는 거의 대부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 24회의 용례 중에 17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고 있으며, 17회 중에서 7회가 테살로니카 전,후서에 집중되어 있다. 한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 천사들이 선택받은 모든 성도들을 그분 앞에 모을 것이다(마태24,31).
테살로니카 후서 2장 1절에서 '그분께 모일 일'에 해당하는 '에피쉬나고게스 에프 아우톤'(episynagoges ep' auton)은 성도들이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가까이에 모여드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에피쉬나고게스'의 원형 '에피쉬나고게'(episynagoge)는 본절 외에 예배의 목적으로 모이는 것을 지칭하는 용례로 히브리서 10장 25절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다.
신약에서 이 명사의 동사형은 8회나 사용되었으며, 특히 마태오 복음 24장 31절에서는 재림의 날 천사들이 선택하신 자들을 순식간에 모으는 것을 나타내는 용례로 사용되었다. 테살로니카 후서 2장 1절의 의미도 마태오 복음 24장 31절과 같은데, 즉 재림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재림을 대망하던 성도들간의 만남을 말한다(1테살 4,17참조).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테살로니카 교인들로 하여금 마음이 흔들리게 하고 불안하게 한 핵심 내용이다. 여기서 '왔다고'로 번역된 '에네스테켄'(enesteken)은 현재 존재해 있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에니스테미'(enistemi)의 완료형이다. 그러니까 '이미 와 있다'(has already come)라는 뜻이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장 38절과 코린토 전서 3장 22절에서 '에니스테미'(enistemi)의 완료형이 현재에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즉 거기에서 '에니스테미'의 완료분사 '에네스토타'(enestota)는 장래 일이라는 의미를 지닌 '멜론타'(mellonta)와 대조적으로 '현재 일'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테살로니카 교인들이 잘못된 정보와 지식을 통해 주님 재림의 날, 심판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고 오해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받고 있는 박해와 환난이 너무 심해서 최후 종말의 산통(the eschatological birth pangs)이 이미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은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이미 이르렀지만 너희가 인식하지 못하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 중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의 날이 이미 도래하였다고 믿어 동요하거나 두려워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여기서 '마음'이라고 번역된 '노오스'(noos)의 원형 '누스'(nous)는 마음 중에서도 지각하고 이해하는 기능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즉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 정신을 의미한다. 또한 '흔들리거나'로 번역된 '살류테나이'(salleuthenai)의 원형 '살류오'(salleuo)는 심하게 흔들어 대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며, 여기서는 수동태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쉽사리'로 번역된 '타케오스'(tacheos)는 '속히','빨리','경솔하게'라는 의미를 지닌 부사이다. 따라서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라는 표현은 밖에서 일어나거나 유포되고 있는 어떠한 사실을 여과없이 쉽게 받아들여 이성(理性)이 갈피를 못잡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당시 테살로니카 교인들의 모습을 매우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