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 (루카15,11-32)

2017. 3. 5. 오후 6:5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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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탕자의 비유"(루카15,11-32)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우리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이 비유, 곧 '탕자의 비유'로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 내용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의 이해를 우리에게 주기 위한 것이었을까?

분명하게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나름으로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흔히 말하는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억지로 물려 받아 다 탕진하고 다시 거지꼴을 하고 돌아 왔는데 그럼에도 아버지가 환대를 하고 큰 아들은 불평을 하는 것'으로,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마라.'의 교훈으로 듣고 있지 않은가? 과연 그런 것일까? 그런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일까?

요즘 몇일 사이로 율법과 복음 그리고 진리, 그리고 더 나아가 진리됨에 대한 나름의 묵상과 정리를 글로 만들었었다. 그 연장선 상에서도 이 비유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고 그래서 그렇게 설교했던 과거에, 아니 얼마 전까지의 생각들이 얼마나 한심한 것이었나를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어, 이것이 율법적 이해와 복음적 이해 그리고 진리로 이해되는 것이 어떻게 다르고 같은가를 설명하는 아주 좋은 하나의 예가 될 것 같은 생각에 다시 이 글을 만들게 된다. 

이런 질문으로 다시 그 물음으로 시작해 본다. 과연 예수님께서 위에서 내가 전에 이해했던 그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겠는가? 만약 내가 전에 깨우친대로 '그렇다'로 답이 나오면 그것이 바로 율법적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당장 우리 눈에 보이는대로, 들리는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모습이다. 더구나 이 말씀을 하시는 분께서 하나님이신 분이신데 뭐 다른 생각을 할 것이 있겠나? 라는 아주 충성되고 헌신된 자세로 읽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면 그 교훈이 맞다. 아니 그렇게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율법적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그저 인간적인 열심에 목숨을 걸 수 밖에 없다. 진정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가 아니라 그 하나님을 위한 우리 나름의 열심과 충성으로 '아,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결국은 큰 아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율법이나 복음이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당신을 알려주시는데, 우리 인간의 한계성으로 인해 우리적으로 알려 주실 수 밖에 없으시고, 즉 쉽게 설명하자면 보이지 않으시는 분을 보이는 것으로만 알 수 있는 우리에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것으로 알려 주시는데, 바로 그 보이는 그 것, 자체를 율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은혜가 임한 사람은 그 율법, 그러니까 그 보이는 것을 통해서 그 안에 담으신 그 안보이시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될 것인데,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보이는 것만으로, 생각없이, 아니 나름의 우리적, 곧 인간적인 생각으로, 행하는데 열심을 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게 될 것인데,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신앙상태를 점검하고 알아 볼 수 있는 일종의 바로미터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문제는 율법과 복음도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행하라고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을 알라고 주시는 것이란 사실을 놓치면 않된다. 그것은 결국 모든 말씀이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란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직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은 이 비유를 당연하게 보이는대로 해석하게 된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그 실천적 적용이 나타날 것이다. 내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리고 아마도 좀 더 나가는 사람은 그러지 않기 위해서 나름의 실천적 방안들을 강구할 것이고, 문제는 실천에 있다고 판단하기에 그 실천을 위해 나름 최고의 열심과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열심있는 규칙적 기도생활, 매일 매일의 말씀 묵상, 좀 더 나가면 이웃을 위한 봉사 활동, 최선을 다하는 종교활동들 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우리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자신도 이런 열심을 신앙이라고 믿기에 자신의 구원을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진정한 문제는, 어떤 문제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풀려지지 않을 때, 꼭 큰 아들과 같은 반응이 나타나고야 만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율법주의자라고 한다. 모르긴 해도 오늘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바로 여기 속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은혜가 임해서 깨우침이 오면, 비로서 눈이 열려 율법이나 복음, 곧 말씀이 바로 하나님을 알려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러면 이 비유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데, 물론 여기에는 분명 은혜, 곧 말씀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간섭이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분께서 허락하시는 깨우침의 인도를 따라, 그 분의 뜻을 서서히 보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는 그 분의 진정한 뜻이 무엇일까?를 묻고, 동시에 기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니까,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를 물으며, 전체적인 분위기와 큰 아들의 태도와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모습, 곧 그 분의 마음을,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피게 된다. 그러면 전혀 다른 새로운 위로부터의 깨우침이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고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런 과정과 깨우침을 나는 복음적 이해라고 말하고 싶다. 뭐 경계선을 분명하게 그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집 안에서 어느모로 보나 열심이고 충성스럽게 보이는 큰 아들이 오히려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께 원망하고 불평하며 대드는 모습과 그런 큰 아들을 안타깝게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진정한 아버지의 의도와 뜻이 과연 무언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 비유는 그저 우리의 일상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인 일상의 삶의 모습을 넘어 천상의 삶과 연결되어 일반적인 인간적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천상의 아버지 곧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시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되고, 그럴 때, 그 아버지는 우리 인간처럼 그런 한계적 존재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이해될 때, 한걸음 더 나아간 이해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아!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그렇게 내 보내는 것은 힘이 없어 그 아들에게 밀려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분명하게 계산된 아버지의 뜻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아라' 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해라'의 비유가 될 수도 있겠구나!를 비로서 깨닫게 된다. 이것이 곧 진리를 알게 된, 다른 표현으로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가 되는 체험이다. 

아버지의 집안에 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아버지를 전혀 모르는,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그래서 그 집안 사람으로가 아니라 세상의 의식과 그것대로 판단하고, 나름의 열심과 충성을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결국은 아버지와 반대로 가게 되는 큰 아들의 모습과 비교해서, 처음에는 아버지를 거스르고 튀쳐나가 그야말로 탕자라고 불리우는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그 탕자가 되었기에 오히려 자기를 발견할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집의 풍성함, 오죽하면 종들마저도 그 풍성함을 누리고 있음에 대한 너무나 분명한 깨우침이, 결국 돌아서서 그 아버지를 찾아오는, 그리고 그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정과 그 분의 뜻, 그리고 그 나라를 어렴풋하게 알게 되는 영광을 맛보며, '아!' 그런 존재로 나를 만드시기 위해서 그렇게 나를 세상에 보내셨던 것이구나,'그러니 이 세상에서의 나의 잘못과 죄 마저도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만드시는 귀한 것들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 분의 섭리로구나!'를 알게 되어 감격할 때, 그 분은 그런 나를 형제로, 아들로 더 나아가 친구로, '네가 나구나'로 인쳐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나갔다가 다시 돌아 온, 진정한 아들의 비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이 전체를 가리켜 '회개'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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