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대충 믿기 - 25. 신앙을 위해 모든 것 버리고?

2012. 10. 3. 오전 9:5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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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대충 믿기 - 25. 신앙을 위해 모든 것 버리고?

이 시리즈 제 22편에서 나는 일개 평신자가 직제자를 꿈꾸며 하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비꼬았다.

정작 따라야 할 것은 나 몰라라 하고 따르면 안 될 것들은 청개구리처럼 그대로 따라 하는 웃기는 행동을 보이면서 마치 자기가 예수님의 직제자라도 된 양 의기양양 행세하는 웃기는 '일부 평신자'를 비꼰 것이다.

이번엔 정말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신자들 얘길 해 보자.


이 시리즈의 1편부터 24편에 이르기까지 전부는 아니지만 그나마 중심을 이루는 성경구절은 바로 부자청년의 일화다. 교회 - 또는 당시의 유다교 -가 가르치는 율법을 모두 준수하고 이제야말로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를 수 있겠다고 자부한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고' 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고개를 떨구고 제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대충'인 것이다. 그건 '대강'과는 다르다. '띠엄띠엄? 웃기는 얘기다.


이곳 게시판에는 이 부자청년의 따귀를 갈길 만큼의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다. 자신의 신앙 반 만큼이라도 있으면 마치 천국에서 최소한 현감 자리 하나쯤은 그냥 '떼어 놓은 당상'으로 여겨도 될 정도로 굳은 신앙심을 자랑한다.

그 일부는 자기 신앙의 부족함을 진심으로 고민하고 아쉬워하는 듯하면서, 마치 진흙 속에서 피어난 고귀한 연꽃인 양 수줍은 체 자신의 신앙을 뽐내는 이들도 보인다. 명백히 드러난 악에도 눈을 질끈 감고, 온갖 상스러움을 자랑하는 욕설에도 주님의 사랑으로 고마움과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이 무한한 관용에 사실 엄청난 부담을 느끼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정말이지 예수님의 명령 -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을 100% 실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다 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집어서 확인해 볼까?

1. 죄책감 : 이 '잘난(?) 신자들'이 제일 먼저 버린 것은 바로 죄책감이다. 이건 이미 이 시리즈 4편에서 상술했다. 이 죄책감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바람에 이 '잘난(?) 신자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악행을 저지른다. 그리곤 곧바로 기도손을 한다. 그들의 기도에는 분명 '내 탓이오'가 들어있다. 그러나 그들은 발음을 살짝 비튼다. '네 탓이오'로...

2. 이성 :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성을 내버렸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인가 다른 성인인가가 기도 중에  깨달았다는 명제인 "믿기 위해서 알고,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값진 고백을 이들은 어느 개가 짖나 정도로 여긴다. 이성을 짓밟고 엄숙히 떠들어댄다. 까불지 마, 이 이단 녀석아!라고.

3. 양심 : 이성과  죄책감을 버리면서 그 근본이랄 수 있는 양심을 걷어내 버렸다. 양심이란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밭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가꾸라고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님께서도 줄고 이 '양심'을 바탕으로 하늘나라, 즉 하느님의 왕국을 설명하셨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지 못하실 일이 있겠냐마는 최소한 우리 양심은 우리가 가꿔야 그나마 하느님의 최종  선물을 기다릴 자격이 있지 않겠냐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양심을 짓밟고도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겠다는 것은 남이 일군 포도밭에 숨어들어가 자기 바구니에 따 담으려는 도둑님에 다름아니다.


이런 것들을 죄다 버리고 예수님을 잘 따르고 있다고 자랑하고 다니니 그 모양새가 역겹기 짝이 없는 거다.

그럼 이 '잘난(?) 신자들'이 아직 버리지 못한 게 뭔지 좀 알아볼까?


1. 폭력성 : 이건 이들이 죽어도 못 버리는 소중한 보배다. 아마 이곳 게시판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 중 하나가 바로 폭력이다. 이들에게 가장 값지고 소중한 자산인 이 폭력성 때문에 이곳은 바람 잘 날이 없다. 이번 명절 단 삼 일 동안에도 이 폭력성은 춤을 추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이 잘난(?) 신자들은 이걸 버릴 생각이 추호도 없다. 자기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아담이 쫓겨난 동산을 지키는 케루빔처럼 이 폭력성을 껴안고 있다.

2. 증오 :  신앙을 갖게 되면서부터 키워온 것은 아닐 게다. 이건 후천적인 마음밭이다. 자신의 손톱에 낀 때를 긁어 줘도 자기 것을 훔쳤다고 여기는 못된 마음밭에서 비롯된 가라지다. 이렇게 한 번 가지게 된 증오심은 스스로 번식을 한다. 괴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 증오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한다. 눈에 걸리적거리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볼 수가 없게 된다. 상대방이 신자이든 이단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 눈에 거슬리는 놈은 아작을 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렇게 아작을 내고 나서 - 실제로는 아작이 난 거지만 - 승리감에 취해 다시 기도손을 한다. 그리곤 기도를 올린다. 오늘 이 불쌍한 영혼을 구제했나이다. 저를 위해 천국에 자리 하나 마련해 주소서 하고 말이다. 그리곤 또 잡아먹을 놈을 찾아 구천을 헤맨다.

그리스도교가, 아니 예수님 당신이 '증오를 멀리하라'고 그렇게 가르치셨건만 이들 '잘난(?) 신자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건 그리스도교에서가 필요한 거지 자신들의 '신앙(?)'에서는 쓰레기만도 못한 가르침이라 여긴다. 그리곤 그렇게 행동한다.

3. 자만심 : 이건 좀 웃긴다. 자랑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이 창피할 정도다. 오르는 게시물을 보면 정말 가톨릭 교회에서 둘도 없는 지식과 겸손함을 가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그걸 단 한 장만 껍질을 벗겨 보면 그 바닥이 여실히 드러나는 지식과 겸손함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이들은 자랑한다. 자랑하지 않는다고 우겨대면서 자랑한다. 그리곤 바로 다음 장에서 그 바닥을 드러낸다. 정말 이들 '잘난(?) 신자들'만이 지니고 있는 자만심이다. 그걸 절대 버리지 못한다. 그래야 신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대충' 시리즈이다.

'대충'은 '대강'이랑 그 뜻이 같은 게 아니다.


그렇게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은 죄다 쏟아버리고, 정말 버려야 할 것들은 죄다 품 속에 지닌 채,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다'고 착각하느니,

어차피 버리지 못할 것들은 아쉬워하고 죄송스러워하면서
어차피 내버린 것들을 단 하나라도 주워담으려고 안간힘도 써 보면서...

그래도 잘 안 되는 것은 내 부족함으로 여기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좀 채워주고 비워주시라 기대면서...


그렇게 대충 대충 믿는 것이

착각 보다는 훨씬 낫겠다는 것이 바로 이 '대충' 시리즈가 담고 있는 '실제 의미'이다.



들을 귀...

그건 말하는 입 보다 중요하다


박영미 ( (2012/10/02) : 제가 많이 찔리네요...반성하며 하루를 마감합니다. txpym73)  
 
이정임 ( (2012/10/02)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감사합니다. 그 의미는 잘 알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은 확실하고 누구나 인정하지만 목표라고 빵실하게 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며 하신 마지막 말씀이 언제나 제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저는 그랬습니다." 아니,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면서 이걸 나보고 살라고? "정말 많은 시간 화두로 남아 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그럴지라도 목표를 그렇게 세우고 살아보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들려 왔습니다. kr3217)  
 
이정임 ( (2012/10/02) : 저 혼자서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주님은 아시고 다음 장면에서 당신은 세상의 빛이라 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요한 8,12) 용기를 주셨습니다. 내가 그렇게 살려고 목표를 정하면 당신이 빛을 비추어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나 우리는 나의 약한 의지와 유혹자가 늘 유혹하는 가운데 살기에 늘 걸려 넘어지는 비참한 인간임을 고백합니다. 위의 글은 다 저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약속을 믿기에 애처로운 몸부림을 쳐 보는 불쌍한 제 모습을 고백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세요! kr3217)  
 
문경준 ( (2012/10/02) : 박영미님, 굳이 제 글 속에 '님의 모습 중 작은 한 부분'이 들어있음을 부정하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더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제가 포함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한번씩 더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시리즈를 적는 겁니다. 오해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jeunerhino)  
 
문경준 ( (2012/10/02) : 이정임님, 님의 댓글이 바로 제 '대충'이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댓글 대부분을 공감한다는 말씀으로 갈음하겠습니다. jeunerhino)  
 
김예숙 ( (2012/10/02) : 안녕하세요.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의문이 가는 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는데요. 제가 존경하는 신부님께서 말씀해 주셔서 이해를 할 수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이 말씀은 '열 두명'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 이 말씀은 부자청년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 성경을 잘 탐독하면 예수님께서 평신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문형제님의 '대충' 이란 표현이 잘못 이해하면 오해를 할 수 있는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양쪽 어느 선으로 너무 기울이지 않는.. '천칭저울'을 의미하지 않으셨나 생각해 보았어요. symondst)  
 
김예숙 ( (2012/10/02) :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 이 말씀은 사제가 되려는 부자청년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 '사제' 중요한 단어를 빠뜨렸네요.^^ symondst)  
 
박영미 ( (2012/10/02) : 예수님이 아니면서 예수님 흉내를 내고 있다는 위선적인 모습에 항상 경계를 하게 되는데...또 신앙은 예수님을 닮으라 가르쳐주시니 제 위선을 허물수 있는 길은 또 결국에는 예수님을 닮은 그분의 사랑을 추구하는 길 밖에 없지 않을까 합니다. 낮아지기...결코 겸손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끊임없이 추구해야하는 신앙인의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저도 언제나 글을 올려 놓고 또 교만했구나...하는 후회를 하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니...이런 고뇌를 거듭하면서도 글을 올리는 이유는 뭘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세월이 지나면 이런 고뇌에 빠지지 않을 만큼의 하느님 찬미가를 올릴 수 있게 될런지...아님 지금은 떠들고 노래하는 txpym73)  
 
박영미 ( (2012/10/02) : 것이 제가 해야하는 일이라면 기쁘게 하려고 생각합니다...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죠. 물론 다른 이를 많이 불편하게 한다면 그만 둘 것입니다. 며칠 전 본회퍼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어리석음이 악보다 더 나쁘다는 말씀에 또 가슴이 아팠습니다. 악은 악으로 눈에 보이고 느껴져서 대응할 수 있으나, 어리석음은 그 실체를 알기도 힘들고 그 여파도 참으로 커지니 말입니다. 아마 나치시절 어리석게 히틀러의 정권하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가는 그런 상황에서 어리석음을 경계하며 통탄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발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늘 깨어 첫째, 나를 살피고 또 txpym73)  
 
박영미 ( (2012/10/02) : 주변을 살필 수 있는 그런 신앙인이 되고픈데...아직 저 자신도 잘 못 살피고 있으니...기도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주신 하루를 기쁘게 살아내야하니...그렇게 살고 싶으니...암튼 제가 또 말이 많았어요.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뭐 그러다보면 조금 더 나은 모습이 되어가리란 희망으로...편히 쉬시고 또 좋은 날 시작하세요...고맙습니다. txpym73)  
 
문경준 ( (2012/10/02) : 김예숙님, 반갑습니다. 사제라는 직책은 예수님 부활 후의 성사 진행의 대리자늘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전 거기까진 생각 못하고 그저 영원한 생명을 얻은 직제자 반열에 들고 싶어하는 한 젊은이를 그렸었습니다. 십자가라는 추가적 고통은 둘째치고 이미 갖고 있던 소유물을 벗어버릴 수 있는 용기와 그걸 가능케 하는 믿음인 거지요. 그 청년은 비난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걸 주님도 아셨을 테고요. 재산의 반을 내놓은 자캐오나 한푼도 내놓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 십자가형에 찬성했을 일반 유다인도 예수님은 용서하시고 죽음을 받아들이셨겠지요. 그래서 대충이라고 했습니다... jeunerhino)  
 
문경준 ( (2012/10/02) : 박영미님, 첫 댐글에 대한 제 답변이 좀 딱딱한 사실입니다. 굳이 변명을 삼는다면, 전 님의 글에서 위선을 본 게 아닙니다. 사랑과 겸손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애써 모른 척한다는 느낌이 부담스러웠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겠지만 자칫 그 겸손의 대척점에서 폭력이 의도하지 않은 응원군을 만났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게 부담스러웠다는 것입니다. 부디 이 차이가 좀 님에게 다가갔기를 소망합니다. jeunerhino)  
 
김예숙 ( (2012/10/03) : 아, 맞아요! 이냐시오님의 말씀이 맞았어요. 그 당시엔 예수님의 '부활 전'이었기에 '직제자'가 되려는 부자청년이라고 해야 정확해요. 감사합니다. '대충'에 대한 '추가설명'도 감사합니다. '대충'이란 단어가 '적당한 선에서' 또는 '아무렇게나'라는 표현이 강하다 보니 글의 내용은 이해하지 않고 '대충'이란 단어에 꽂히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이점이 아쉽고 이해의 폭이 넓지 못해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는 제가 안스러울 때가 있어요. 이제 충분히 이해를 했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symond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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