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읽었던 '우리말의 상상력'이란 책에선가 본 듯한 내용입니다. 지금은 책꽂이 어느 구석에 박혀있는지도 가물거려서 해당 부분이 정말 있는지 조차 확실하지 못하군요.
희미한 기억을 안고 십 년도 훨씬 지난 지금의 생각을 보태 굿자게 복귀 기념으로 한 줄 적을까 합니다.
'거짓'이란 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우선 사전에 나오는 '거짓'에 대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 또는 사실처럼 꾸민 것...
'거짓'은 '가죽', '거죽'이랑 통한답니다. 또 '겉'이랑도 통한다는군요.
한자(漢字)도 그렇지만, 단어라는 게 대체로 원래 일반적인 사물에 대한 표현에서 차츰 추상적으로 옮겨가게 되지요. '거짓'이라는 추상명사도 이런 식으로 '가죽', '거죽' 또는 '겉'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합니다.
속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채, 또는 속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가죽만 들어 보이고, 겉 껍데기만 들고 나오는 것이 바로 '거짓'의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녀를 바라보고 있더라도 그 미녀의 가죽 껍데기 뒤에 자리한 시뻘건 핏줄과 신경이 그대로 보이는 안면 골격을 마주하게 되면 소름이 끼치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미모가 그리 빼어나진 못해도 그 마음 씀씀이가 너그럽고 아름답다면 그 껍데기 보다는 그 속을 알아보고 구애를 하게 되는 이치가 그런 것 아닐까요...
그래서 '거짓'은 '참'이랑 거리가 있습니다.
그럼 '참'이란 단어는 어디서 유래했을까.
나는(아니 그 책에서 본 것이겠지요) 그 단어가 '(들어)차다'의 명사형인 '참'에서 나온 것이라고 상상을 합니다. 한자로 표현하면 '진(眞)'이라고 적게 되지만 저는 차라리 '충(忠)'이 더 어울리는 글자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 한가운데에 들어 있는 것'이 바로 '참'의 가장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문제는,
거짓이 참의 얼굴을 하는 것입니다. 가죽이 속을 가장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 거짓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자신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경우와, 자신이 거짓말을 정확히 알고서도 그 거짓말을 지속하는 경우입니다. 어느 게 더 나쁜 것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르고 하는 거짓말은 언제든 참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본인이 그것을 깨닫는 그 순간, 그리고 그 깨달음에 따라 거짓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순간, 그 거짓은 참으로 바뀔 여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가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고 가르치는 단어 '회심'입니다.
알고도 버텨내는 거짓은 따로 약이 없습니다. 아무리 옆구리를 찔러 줘도 막무가내입니다. 그것이 거짓임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막무가내로 버티는 그 거짓의 주인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냥 안타까울 뿐입니다. 어떤 때에는 화도 나고, 또 어떤 때에는 내 거울을 보는 듯도 하지만 그냥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방법을 갖고 계실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냥 두고 볼 밖에...
어쨌든,
하느님의 도우심이건,
관리자의 도움이건,
이곳 회원들의 도움이건 간에,
이곳 게시판에서 종종 튀어나왔던, 지금도 일각에서 여전히 칼을 휘두르고 있는 '가죽 말', '거죽 말', '겉 말' 들이 하나 하나 그 껍데기를 벗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 이곳 게시판에서 꾸준히, 욕을 들으면서도 한가닥 희망을 잃지 않고 잔잔히 참아내는 '꽉 들어찬 말'들이 좀더 밝게 비춰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게 내가 한달 만에 다시 들르면서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그리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자고 적어 보는 '내 마음 한가운데에 들어 있는' 말입니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