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장-20장(독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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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창세1,1~19)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1~2)
'한 처음에'로 번역된 '뻬레쉬트'(bereshith)는 천지 창조의 시점, 곧 하느님께서 우주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無)에서 유(有)로 동시에 섬광처럼 생겨나게 하신 원천적 창조 사건이 일어난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뻬레쉬트'(bereshith)는 '뻬'(be)와 '레쉬트'(reshith)의 합성어이다. 먼저 '뻬'(be)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reshith)는 '근원'(창세2,10), '머리'(창세3,15), '꼭대기'(1열왕18,42)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rosh)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창세10,10), '근본'(시편111,10), '으뜸', '우두머리'(욥기40,19) 등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뻬'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뻬레쉬트'는 직역하면 매우 단순하게 '시초에', '한 처음에'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뻬레쉬트'가 말하는 '시초'(처음)는 시간이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원점, 곧 시간(時間; the time)의 출발점을 의미한다. 결국 '뻬레쉬트'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바로 그때에'(In the beginning)라는 뜻이다. 즉 인간 역사(歷史)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이처럼 천지 창조는 다름아닌 모든 우주 만물의 존재와 그들 사이에 발생할 모든 사건의 기원을 이루는 원초적 사건이다.
이런 천지 창조의 시점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뻬레쉬트'는 천지 창조 사건이 일어났던 '때'가 시간 자체도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기원', 곧 '시간의 원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실로 천지 창조는 시간 자체도 이제 막 시작한 때에 바로 그와 동시에 섬광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만유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계시는 그리고 만유를 뛰어넘어 계시는 유일한 절대 자존자(自存者)요, 초월자(超越者)이시다. 이러한 하느님께서는 공간 뿐 아니라 시간도 초월하여 계신다(시편90,4).
반면에, 우리 인생을 포함한 우주 만물은 오직 공간(空間; the space)안에서 시간(時間; the time)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즉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은 시공에 얽매인 차원(dimension)에 존재하지만, 이 우주 만물 각각은 물론 이 모든 것들의 존재 양식인 시간과 공간까지 지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이곳으로부터 완전 초월하여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에 얽매여 있는 인생을 포함한 피조물과의 관계만 아니라면 하느님께 시간은 의미가 없다. 심지어 하느님 자신의 실존에만 국한해서 볼 때에는 천지 창조 이전과 이후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는 시간으로부터 완전 초월하여 시간과는 무관하게 영원히 계시는 분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천지 만물은 오직 시간의 시작과 함께, 곧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다. 또한 역으로 말해도, 시간도 오직 그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만 그 존재 양상이 전개되어 가는 만물들의 존재와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무(無)로부터 유(有)로의 천지 창조(creatio ex nihilo)는 시간의 시작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시간 또한 천지 만물이 창조되는 순간 필연적으로 함께 창조되었고, 또한 그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우리는 '한 처음에'로 번역된 창세기 1장 1절의 '뻬레쉬트'를 새 성경에서 그 역시 '한 처음에'로 번역된 요한 복음 1장 1절의 '엔 아르케'(en arche)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뻬레쉬트'는 하느님의 천지 창조로 이제 막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던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키고, 반면에 '엔 아르케'는 시간이 아예 흐르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뻬레쉬트'가 무로부터 유가 시작되어 시간이 출발했던 영원과 시간의 접촉점만을 가리킨다면, '엔 아르케'는 근본적으로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차원 전반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 이 구절은 앞서 '한 처음에'란 창조 시점에 제시된 것에 이어서 이제 천지 창조의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앞서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데 이어서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힌다. 여기 '하느님'에 해당하는 원어 '엘로힘'(ellohim)은 제1위 성부 하느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을 경우에는 모두 다 '하느님'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권세있다', '힘세다'라는 뜻을 가진 '울'(ul)에서 유래한 것 (2열왕24,13; 시편73,4)으로서 '권세있고 힘있는 뛰어난 분'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elloah)의 복수형이다(탈출12,12; 신명32,15).
하느님의 이름이 복수형으로 되어있는 것은 그 가리키는 대상이 분명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복수형으로 표기함으로써, 그 대상의 권위와 중요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고대 근동 전반의 수사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태초의 천지 창조는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만물의 존재 자체, 그리고 그들이 서로 얽혀서 빚어내는 모든 역사의 유일한 원초적 기원이다. 따라서 결국 천지 창조의 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만물과 역사의 궁극적 기원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의 기원이시다. 만물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욥기1,21; 시편90,3; 코헬렛12,7; 로마11,36).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우리 인생의 궁극적 관심일 수밖에 없다.
또한 천지 창조 기사 전체가 오직 하느님만이 온 천지를 모두 다 직접 창조하셨음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전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 우주의, 특히 전 우주의 대리 통치자인 우리 인간들(창세1,26)의 하느님께 대한 복종과 경배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한 주체가 어떤 사물을 만들거나 사거나 이를 소유함에 있어서 그 주체 자신이 요구되는 의무를 다하는 것은 그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갖게되는 완전하고도 정당한 법적 근거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천지 창조 기사는 거듭해서 전 우주가 스스로 생겨났거나 다른 그 무엇에 의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엘로힘 하느님'에 의해서 지어진 것임을 그토록 강조한다.
즉 이것은 전 우주와 인생에 대한 하느님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소유권(탈출18,5; 신명10,14; 에제18,4)과 통치권 (탈출15,18; 시편72,8; 다니엘5,21) 사상은 성경 전체에서 나타난다.
'하늘과 땅을' 본문은 창조의 시점, 곧 언제 천지 창조가 있었는지를 밝힌 '한 처음에'와 창조의 주체, 곧 누가 천지를 창조하였는지를 밝힌 '하느님께서'에 이어서 이제 창조의 대상(對象), 곧 무엇이 창조되었는지를 밝히는 구절이다. 원문은 '에트 핫샤마임 웨에트 하아레츠'(eth hashamaim weeth haarets; the heaven and the earth)이다.
우리말의 '~을'(를)에 해당하는 것으로 직접 목적어임을 표시하는 대격 전치사 '에트'(eth)와 '그 하늘을'이란 뜻의 '핫샤마임'(hashamaim), 또 '그리고'(과)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we)와 '에트'(eth)가 결합된 '웨에트'(weeth), 끝으로 '그 땅'이란 의미의 '하아레츠'(haarets)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현대 천문학이 말하는 지구의 대기권 및 그 너머에 무한히 팽창하는 공간으로서의 우주에 대해 과학적 개념이 없었다.
그 대신에 하늘에 새들이 날아다니는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거대한 금속판인 소위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리고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느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머물고 있는 셋째 하늘 등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 420여회 나오는 하늘은 모두 다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또한 여기서 '땅'을 말하는 '아레츠'(arets)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를 가리킬 뿐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성경에는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시편113,3),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2사무17,11) 등과 같이 양극단을 함께 말함으로써, 그 안에 있는 것이 모두 다 포함됨을 강조하는 용례가 많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그 하늘들과 그리고 그 땅을'이라는 원어의 표현은 비단 하늘과 땅 뿐만 아니라 가없는 양자 사이의 공간 자체는 물론 그 안의 모든 물질들, 곧 하늘에서부터 땅 끝까지의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창조의 대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하셨다' '창조하셨다'의 원어는 '빠라'(bara)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이 단어는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끝으로 '먹다'(eat), '양육하다' (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빠라'(bara)가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느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느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신명4,32; 시편89,12; 이사43,1; 예레31,22). 한마디로 '빠라'(bara)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롭게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이같은 절대적 창조 행위는 오직 만물을 초월(超越)하여 자존(自存)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오직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하여, 즉 과거와의 연속 안에서만 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빠라'(bara)는 실제로 '만들다', '지어내다'의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때에는 오직 '하느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등장하며,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만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셨다', 곧 '빠라'(bara)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섬광처럼 존재하게 하신 하느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제5주간화요일 제1독서(창세1,20~2,4ㄱ)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창세1,26)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우리와 비슷하게'로 번역된 '뻬찰르메누'(betsalmenu; in our image)에서 '비슷하게'에 해당하는 '첼렘'(tselem; 모상, 형상)은 '그늘지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 '그림자'(시편39,7)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뜻이 확장되어 그림자가 그 실체의 모양을 반영하듯이 실체의 모양을 반영하는 '모상'(형상)이란 말로 주로 번역되었다.
또한 '우리 모습으로'으로 번역된 '키드무테누'(kidmuthenu; in our likeness)에서 '모습'에 해당하는 '떼무트'(demuth; 유사성,모양)은 '닮다'에 해당하는 '따마'(dama)에서 유래하며 어떤 실체와 유사한 상태를 가리킨다(1역대4,3; 이사40,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모상'(형상; imago; image)과 '모습'(유사성; 모양; similitudo; likeness)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어떻게 양자가 구별되는지 알기는 매우 어렵다.
과거 초대 교회의 일부 교부들은 '모상'(형상)을 외형적인 신체의 모습을 보고, '모습'은 하느님께서 지니신 영원성이나 절대성, 성성(聖性)등과 같은 내면적인 성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두 단어는 그 통례에 있어서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으로 구분되어 사용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순수한 영이신 하느님께서는 육체적인 형상이 없다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두 단어를 구별하여 이해할 것이 아니라 모두 하느님의 성품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이를 중복하여 사용한 것은 유사한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보다 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때문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본문 단어는 각각 분리될 수 없는 전치사 '뻬'(be)와 '케'(ke)가 그 서두에 붙어 있다.
이 두 전치사는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으나 가장 일차적인 의미가 '뻬'(be)는 '~안에'(in)이고, '케'(ke)는 '~처럼'(as)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이 매우 엄정하게 하느님의 모상(형상)과 모습(유사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본문은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의 성품을 이어 받아 창조되었으므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어야 하는 존귀한 존재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생물학적 진화론이 옳다면, 근본적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별반 다를 바 없으며, 단지 빠른 진화 과정을 겪었다는 상대적인 가치만을 지닐 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이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imago Dei; similitudo Dei)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조론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는 절대 구별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는 인간을 연구할 때 그 안에 하느님의신적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지성, 자유의지, 감성(정서), 기억, 양심 등과 같은 영혼의 정신성과 영혼의 불멸성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성적인 동물로서, 지성과 자유의지가 있는 실존으로서,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인격적 존재(persona; personality)라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다른 유인원, 동물들에는 없는 고유하고 독보적인 것이 아닌가? 여기에 생물학적 진화론이 들어올 자리가 어디 있는가?
'만들자'로 번역된 '나아세'(naase)는 '만들다'는 뜻을 지닌 '아사'(asa)의 일인칭 복수형이다. 히브리어 '아사'는 이미 있는 기존 재료를 사용하여 어떤 것을 만들지만, 그 결과는 전혀 새롭고 창조적인 것임을 가리킨다.
창세기 2장 7절에도 나오지만 사람은 흙이라는 재료로 하느님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나, 그 결과로 만들어진 인간은 그 이전의 어떠한 창조물과도 구별되는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임을 암시한다. 한편 본문에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처럼 인간 창조에 있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우리'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최고 걸작품인 인간을 창조함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느님의 밀접한 협의와 상호 협조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천지 창조 때에도 성부 하느님과 더불어 성령 하느님께서도 활동 하셨음이 밝혀져 있으며(창세1,2), 후에 요한 복음 저자도 성자 하느님께서도 창조 사업에 동참하셨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요한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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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주간 수요일제1독서(창세2,4ㄴ~9.15~17)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16~17)
'명령하셨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와'(tsawah)는 원래 '지정하다' (appoint)라는 엄격한 뜻이 있다. 이 단어는 어떤 것을 정확하게 지정하여 다른 것을 선택할 여지를 완전히 없앤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엄하게 명령하다'는 뜻인데, 이 명령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최초의 금지 명령으로 절대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먹어도 된다'에 해당하는 '아콜 토켈'(akol tokel; you are free to eat)에서 '먹다'라는 기본 뜻을 지닌 '아칼'(akal)이 두 번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다.
앞에 나오는 '아칼'(akal)은 부정사 절대형이고, 뒤에 나오는 '토칼'(tokal)은 2인칭 단수 미완료형이다. 여기서 부정사 절대형이 사용된 것은 이어 나오는 동사를 강조하는 것이고, 미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앞으로 계속 먹어도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창세기 2장 16절은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자유롭게 계속 먹을 수 있다'는 뜻이 강조되어 있다.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창세기 2장 17절의 단 하나의 금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있어 넉넉한 자유가 부여되었음을 뜻한다. 이처럼 인간은 원래부터 창조주 하느님께로부터 많은 자유와 특권을 부여받은 존귀한 존재였다.
한편, 창세기 2장 17절의 '먹으면 안된다'에 해당하는 '로 토칼'(lo tokal; you must not eat)에서 '로'(lo)는 '아니다'라는 뜻을 지니는 부정 불변사이고, '토칼'(tokal)은 '먹다'는 뜻을 가진 '아칼'(akal)의 미완료형이다. 그런데 부정어 '로'(lo)가 미완료형과 함께 쓰일 때에는 강한 금지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창세24,37; 탈출20,13; 레위19,4). 따라서 '절대로 먹지 말라'는 강한 금지 명령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이러한 강한 금지 명령은 실제로 먹는 행위를 금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먹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조차 금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창세기 2장 17절은 인간의 절대 순종을 요구하는 하느님의 엄중한 금지 명령인 것이다.
또한, '먹는 날'에 해당하는 '뻬욤 아칼레카'(beyom akaleka; when you eat)에서 '뻬'(be)란 '안'(in)이란 뜻의 전치사인데,직역하면 '먹는 날 안에'(in the day)이다. 이것은 '먹는 즉시'라는 뜻으로서 하느님의 명령을 불순종했을 때는 그 즉시 형벌이 내린다는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 선언이다.
그리고 '반드시 죽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모트 타무트'(moth tamuth; you will surely die)에서 '죽다', '망하다', '멸하다' 등의 뜻을 가진 '무트'(muth)가 두 번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 앞부분 '모트'(moth)는 부정사 절대형으로서 '죽는 것'을 의미하고, 뒷부분 '타무트'(tamuth)는 2인칭 단수 미완료형으로서 '너는 죽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부정사 절대형이 동일한 동사 앞에 오면 그 동사를 강조하는 뜻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먹는다면 전혀 예외없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창세2,18~25)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2~24)
'갈빗대'에 해당하는 '첼라'(tsela; rib) 앞에 정관사 '하'(ha; the)를 연결한 것은 여자를 만든 '갈빗대'가 창세기 2장 21절에서 밝힌 아담에게서 취한 바로 그 갈빗대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여자와 남자가 본래 분리할 수 없는 한몸이었으나, 하느님께서 그 일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셔서, 비로소 이제 남,녀 양성(兩性)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창조 방법은 다른 동물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다른 동물은 암,수 함께 여러 쌍을 동시에 창조하셔서 그 짝이 되게 하셨다(1티모2,13). 따라서 동물은 그 특성에 따라 수컷 한 마리가 여러 암컷을 거느릴 수도 있고, 때로 짝짓기 대상을 바꾸고 교미가 끝나면 암,수 각자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한 남자가 꼭 한 여자만을 배필로 삼아야 하며, 또한 본래 한몸이므로 죽음이 갈라 놓기 전까지는 결코 헤어져서는 안된다(마태10,9; '혼일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 이와 같인 혼인 제도는 인간의 창조와 동시에 주어진 신성한 것이다.
한편, '그를 사람에게 데려 오시자'에 해당하는 '와예비에하'(wayebieha; and he brought her)를 직역하면, '그러자 그분이 그녀를 인도하셨다'이다. 여기서 '그러자' 혹은 '그후에'라고 번역할 수 있는 계속적 '와우'(wau; and)가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 아담에게 데려가기 위함이며, 여자가 창조된 후에 즉시 그녀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셨음을 나타낸다.
여기 본문은 '인도하다', '출가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는 '뽀'(bo)의 사역형이 사용되어 여자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녀를 몸소 아담에게 인도하셨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어지는 것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시고 몸소 결합시키셨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창세기 2장 23절의 원문에는 '이야말로(이것을)'에 해당하는 지시 대명사 '조트'(zoth; this)가 3번 반복된다. 즉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을 가리키는 '이야말로'와 '남자에게서 나왔으니'에 결합된 '이야말로', 그리고 '여자라 불리리라'와 결합된 '이야말로'가 있다.
이 세 개의 단어가 모두 여성형 단수 지시 대명사인데, 동일한 단어가 이렇게 3번이나 반복된 것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한 여자를 바라보는 아담의 기쁨이 너무나 컸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뼈'에 해당하는 '에쳄'(etsem; bone)과 '살'에 해당하는 '빠사르'(basar; flesh)는 몸 전체를 대표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뼈'도 '몸'으로 번역된 적이 있고, '살'도 '몸'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와같이 '몸'을 가리키는 두 단어를 동시에 사용하며, 각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향해 나아오고 있는 여자를 본 아담의 기쁘고 감동적인 마음을 잘 보여 준다. 또한 '뼈에서 나온 뼈','살에서 나온 살'이라는 표현은 '뼈 중에 가장 소중한 뼈', '살 중에 가장 소중한 살'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혈육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창세기 2장 23절전 까지는 사람을 가리킬 때 '아담'(adam)이라는 단어가 쓰였다(창세1,26 2,5.15). 그러나 창세기 2장 22절에서 '여자'에 해당하는 '잇샤'(ishah; woman)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고, 2장 23절에서 '남자'에 해당하는 '이쉬'(ish; man)라는 단어도 처음 나온다.
'남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ish)는 성경에서 2183회 정도 사용되며, 여기처럼 주로 '여성'과 대비되는 '남성'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 단어의 정확한 어원은 모르지만, '강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또한 '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잇샤'(ishah)는 여기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남자'를 의미하는 '이쉬'(ish)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781회 정도 나오는데, 대부분 '남성'과 대비되는 '여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여기서 '떠나'에 해당하는 '아자브'(azab; will leave)는 '남겨 두다', '끊다', '짐을 부리다'는 뜻으로서 원래 속했던 집단과 관계를 청산하고 떠나 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결합하여'에 해당하는 '따바크'(dabaq; be united)는 '붙좇다', '속하다'는 뜻도 있는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상호 완전한 소속감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끝으로 '된다'에 해당하는 '하야'(hayah; will become)는 '~이다', '~이 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본문에서 '떠나'는 미완료형으로, '결합하여'와 '된다'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었다. '떠나'가 미완료형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혼인이 지금까지 부모에게 속해 있던 상태에서 떠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아니고 육체적, 인격적으로 책임있는 존재로서 부모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계속해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결합하여'와 '된다'가 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혼인이란 남녀가 단지 육체적, 형식적인 결합이 아니라 상호간에 노력해서 서로가 상대에게 속해서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마태19,6).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창세3,1~8)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4)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5)
창세기 3장 3절에서 여자는 선악과를 먹거나 만질 경우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낸 데 대해서, 창세기 3장 4절에서는 3장 3절의 여자의 말을 받아 뱀이 완강히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4절이 계속적 '와우'(wau; and)로 문장이 시작되지만, 앞선 3장 3절과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 주기에 계속적 '와우'를 '그러나'(but) 혹은 새 성경처럼 '그러자'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창세기 3장 4절의 '말하였다'에 해당하는 '아마르'(amar)는 기본적으로는 '이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때로는 '지시하다'(창세22,3), '명령하다'(민수15,38), '맹세하다'(예레16,14)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런 뉘앙스를 살려 보다 강조하는 의미로 이 단어를 해석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말 중에 '결코'는 상당히 힘이 실린 권위적인 어투의 말이기 때문이다.
당시 뱀은 '결코'에 해당하는 부정사 절대형 '모트'(moth; surely)와 미완료형 '테무툰'(themuthun; you shall die)을 사용해서 동사의 개념을 강조하신 하느님을 흉내내어 마치 자신이 신적 권위를 지닌 것처럼 위장하고, 여자에게 강하게 지시하였음을 보여준다(창세2,16). 이처럼 사탄은 하느님의 위치에 서서 자신도 마치 신적 권위를 지닌 것처럼 위장하고 사람들을 유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한다.
창세기 3장 4절에 나오는 뱀의 말은 선악과를 먹을 경우 '반드시 죽을 것이다' ('모트 타무트'; moth thamuth)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창세2,17)에 단지 '로'(lo; not)라는 부정어만 붙인 형태이다. 그런데 히브리어 '로'(lo)는 '아인'(ain)이나 '알'(al)이 다소 부드러운 부정을 나타내는 것과 달리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것은 사탄이 하느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사탄은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부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멸망에 이르게 하는 속이는 영이며 거짓의 아비이다(요한8,44). 이 시대에도 사탄은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로마6,23)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슬러 마치 죄악이 큰 기쁨을 순간적으로 가져오는 것처럼 속여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다.
'훔친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빵이 더 맛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그곳에 죽은 자들만 있음을, 그 여자('우둔함'을 지칭)의 손님들이 저승 깊은 곳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 (잠언9,17~18).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5) 원문의 '키 뻬욤 아콜르켐'(ki beyom akollkem; when you eat of it; the instant you eat it)은 직역하면 '너희가 먹는 바로 그때에'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욤'(yom)은 일반적으로 '날'(day)로 번역되지만, 특별한 시점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으며, 더군다나 바로 앞에 나오는 '키'(ki)가 시간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쓰여 '바로 그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뱀은 간교하고 사악한 동기를 가지고 선악과의 신통한 효험이 먹자마자 바로 나타난다고 말함으로써 여자의 욕망과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속이는 거짓의 영 사탄은 각각의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극적인 미끼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멸망에 빠트린다.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2코린11,3)
한편 히브리어에서 '눈'('아인'; 'ain')은 단순히 보는 기능만을 지닌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눈을 인간의 '외모'(1사무16,7)는 물론, 인간의 마음 속 여러가지 감정을 표출하는 창구로 이해할 뿐 아니라(신명15,7; 잠언6,17; 시편18,28; 아가4,9), 때로는 지력을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창세29,17).
따라서 여기서 '눈이 열리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잘 볼 수 있게 된다는 기본적인 의미와 더불어 외모가 출중해지며 지력이 하느님처럼 향상된다는 다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열려'에 해당하는 '웨니프케후'(wenipqehu)는 단순히 '밝다'(이사42,20)는 의미 뿐만 아니라 '열다'(2열왕6,17.20), '뜨다'(욥기27,19)는 뜻도 가지고 있는 '파카흐'(paqah)의 단순 재귀 완료형이다. 이것은 어둡던 눈이 밝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장님처럼 못보던 눈이 열려 보게 되는 새로운 차원을 말한다(시편146,8; 이사42,7).
특히 여기서 수동의 뜻이 강한 재귀형이 사용된 것은 이러한 일이 전적으로 선악과의 효험에 의해 나타내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먹는 순간 바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것임을 단정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뱀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때와 먹고 난 후의 상태를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여자를 집요하게 유혹하고 있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5) '하느님처럼'에 해당하는 '켈로힘'(Kellohim; like God)에서 하느님의 이름 '엘로힘'(ellohim) 앞에 붙어 있는 '케'(ke)는 '~처럼'(as; like)이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이다(욥기32,19).
당시 뱀이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을 강조하는 '주 하느님'이 아닌, 단지 하느님의 권능을 강조하는 '하느님'(엘로힘)이란 명칭만을 사용한 것은, 여자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약을 망각하게 하고 하느님의 권능을 자신도 가질 수 있다는 허영심을 부추기고자 하는 의도로 볼 수 있다.이와 같이 사탄은 단어 하나까지 선택적으로 사용해서 오직 인간을 파멸에 빠트리는데 전념한다.
이러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 승리할 수 없으며,오직 전능하신 하느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한다(에페6,13). 한편 여기서 '선'(善)에 해당하는 '토브'(tob; good)는 단순히 착함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온갖 종류의 긍정적인 것을 가리킨다. 반대로 '악'(惡)에 해당하는 '라'(ra; evil) 역시 온갖 종류의 부정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알다'에 해당하는 '야다'(yada)는 단순히 머리로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체험을 통하여 속속들이 아는 것까지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는 이 단어가 남녀가 동침하는 것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며(창세4,1; 1열왕1,4) '익숙하다'(창세25,27; 1열왕9,27)라는 뜻으로도 번역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선과 악을 구별하는 정도의 지력만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선(善)의 속성과 악(惡)의 속성을 깊이 알며, 또한 선(善)과 악(惡)에 익숙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이처럼 선(善)과 악(惡)을 철저히 알게 될 것이라는 뱀의 장담은 완전한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후 남자와 여자는 물론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류가 선(善)에는 오히려 무지하고 선(善)을 행할 능력마저 퇴보된 반면에, 오히려 악(惡)을 알고 악(惡)을 행하는 능력만 더 커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게 되었고(창세3,7), 인류의 모든 비극은 이처럼 '알게 될 것'('yada')이라는 사탄의 달콤한 거짓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발생하게 된 것이다. 끝으로 '하느님께서 아시고'에서도 '아시다'는 것은 앞의 '야다'(yada) 동사와 같아서 철저히 아는 것을 말한다. 사탄은 여기서 계속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분사형을 사용해서 하느님께서 이전부터 알고 계셨으며, 현재로 알고 있다고 여자를 부추기고 있다.
이처럼 사탄은 마치 인간에게 큰 유익이나 줄 것처럼 웃으면서 다가오고,어떤 일의 배후에 마치 큰 흑막이 있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긴다. 그러나 사탄의 마음에는 온갖 부정이 가득하고 그 혀에는 간교함과 사악함이 가득하여 온갖 거짓과 위선으로 인간을 멸망에 이르게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창세4,1~5.25)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3~5ㄱ)
여기서 '세월이 흐른 뒤에'에 해당하는 '와예이 믹케츠 야임'(wayei miqets yaim; in the course of time)을 직역하면, '그리고 날들의 끝으로부터 이 일이 있었다'이다. '세월'은 '한 날'에 해당하는 '욤'(yom)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야임'(yaim)이며,이러한 '날들'은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끝'에 해당하는 '케츠'(qets)가 있음을 보여 준다.
'흐른'으로 번역된 '믹케츠'(niqets)는 '끝'이란 뜻의 '케츠'(qets)에 '~으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민'(min)이 결합한 형태로 '~의 끝으로부터'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주로 심판을 다루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창세6,13; 에제7,2.3; 이사9,6).
그러므로 창세기 4장 3절은 단순히 세월이 흐른 어느 시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카인과 아벨을 평가하고 심사할 시간이 되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카인과 아벨이 각각 자신의 수고에 따라 힘써 일하고 보냈던 날들이 마감되고, 하느님 대전에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지에 지켜볼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전개될 사건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정해진 때, 즉 카인과 아벨이 자신들의 수고에 따라 일한 것들을 통해 그들의 신앙이 검증받아야 할 때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물'에 해당하는 '미느하'(minha; offering)는 반드시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선물을 나타낼 때에도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혹은 감사를 나타내기 위해 바치는 선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 이 단어는 카인이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존경과 감사를 돌려 드리기 위해 바치는 것이어야 함을 보여 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래서 창세기 4장 5절에 나오는 것처럼 카인의 제물을 하느님께서 굽어 보시지 않은 이유가 바로 제물을 바치는 대상인 하느님 당신께 대한 진정한 존경과 감사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히브11,4참조).
사람은 보통 겉모습을 보지만, 전지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의 정성을 보시고 이러한 제물을 굽어보시고 기꺼이 받아주시는 것이다(1사무16,7참조).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직역하면, '그의 양 첫 새끼들 그리고 그것들의 기름을'이다. 여기서 '맏배들'에 해당하는 '뻬코라'(bekora; some of the firstborn)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서 아벨은 새끼양 한 마리만을 제물로 바친 것이 아니라 여러 마리를 바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뻬코라'(bekora)가 '맏배'(첫 새끼; firstlings) 외에도 모든 '처음 난 것'을 가리키거나 그 말 속에는 '가장 뛰어난 것'이나 '우두머리'라는 뜻도 들어 있다. 그리고 '기름'에 해당하는 '헬레브'(heleb; fat portions)는 일차적으로 '지방'을 뜻하지만, '살찌고' '기름지며' '아름다운' 것이란 뜻도 들어 있다.
그래서 본문은 '그의 양 떼의 첫 새끼 몇 마리로부터 얻은 기름진 부분들'이나 '그의 가장 좋은 어린 양들로부터 얻은 고기의 기름진 조각들'과 같이 의역되기도 한다.
어쨌든 아벨은 형식적인 제사를 바친 카인과는 달리 정성을 다해 가장 좋은 것을 하느님께 바쳤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아벨의 태도는 하느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태도이며, 하느님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는 겸손의 표현이다(히브11,4).
'기꺼이 굽어 보셨으나' '기꺼이 굽어 보셨으나'에 해당하는 '와이샤'(waisha; and looked with favor on; and had respect)는 '기쁘게 받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아'(shaah)의 뜻은 '응시하다','둘러보다'이다. 특히 이 단어는 상대방을 돕기 위해 둘러본다는 뜻이 있으며, '돌이키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응시하신 대상이 단지 제물만이 아니라 아벨 그 자신까지도 포함된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아벨을 제물보다 앞에 단어를 위치시켜서 아벨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응시하심을 보여 주고 있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정성껏 제물을 바치는 아벨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 보시는 것을 의인법적으로 더 친근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창세6,5~8; 7,1~5.10)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5~6)
창세기 6장 5절의 '보시고'에 해당하는 '와야르'(wayar)에서 '보다'에 해당하는 '라아'(rah)는 '조사하다', '주목하다', '진단하다'는 뜻이 있다. 이것은 주 하느님께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세상 사람들을 면밀히 살펴보셨음을 뜻한다.
창세기 6장 5절은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는 창조 때에 사용된 문장과 대조를 이룬다. 창조 때의 하느님의 시선에는 기쁨과 만족, 충만감이 있었는데, 지금 여기서 비추어지는 주 하느님의 시선에는 의노와 아픔이 서려 있다. 인간은 자신의 죄악을 사람들 앞에서는 감출 수 있으나, 눈동자처럼 이 세상을 살피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다(예레17,10).
여기서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에 해당하는 '랍바 라아트'(rabah raath)에서 '라아트'(raath)는 '라아'(raah)의 연계형으로서 '깨트리다', '악하게 되다'는 뜻을 지닌 '라아'(raah)에서 유래하여 외형적 범죄라는 범위를 넘어 '해로움', '불행', '슬픔'을 가져다 주는 모든 '잘못된 것', '나쁜 것', '사악한 것'등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그리고 '세상에 많아지고'로 번역된 '랍바'(rabah)는 '라브'(rab)의 여성 형용사이다. 이것은 창세기 6장 1절에서 '늘어나다', '번성하다'로 번역된 '라바브'(rabab)에서 유래한 말로 '풍성한', '큰', '넓은', '강대한', '범람한' 등의 다양한 뜻을 지닌다.
이것을 볼 때 노아 홍수 이전의 세상에는 하느님의 심판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외부적인 범죄와 부조리만이 아니라 각 개인의 심성 안에 온갖 악함이 흘러 넘치는 등 사회가 온통 부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히브리어로 '마음'(heart)을 가리키는 용어는 여기 나오는 '레브'(leb)와 '레바브'(lebab)가 있는데, 성경에서는 여기에 처음 등장한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마음은 지, 정, 의(知情意)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말하자면, 마음은 지식과 지혜의 자리이며, 감정의 자리이기도 하고(탈출4,14; 판관16,25), 양심과 도덕의 자리로 간주되기도 한다(욥기27,6; 2사무24,10). 따라서 마음은 인간 자신을 대표하기도 하며(잠언4,4), 모든 사고, 욕망, 말과 행동의 원천으로 간주된다(창세20,5; 잠언17,9).
그런데 노아 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이 오염되어 죄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 역시 오염되었고, 말이나 행동도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생각'에 해당하는 '마하샤바'(mahashabah)는 '숙고', '책략', '계교' 등의 뜻이 있으며, '뜻'에 해당하는 '예체르'(yatser)는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들거나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조각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모양으로 만들다', '꼴을 이루다'에 해당하는 '야차르' (atsar)에서 나온 단어로서 심사숙고하여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노아 시대 사람들은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뿐만 아니라, 세밀하게 뜻을 세워서 악한 일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모든'에 해당하는 '콜'(kol)은 뒤이어 나오는 '언제나'와 동일한 단어로서 모든 개체 전부와 모든 시간 전부를 가리킨다.
이것을 볼 때,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래 원죄(原罪)아래 있는 모든 인간 전체가 예외없이 타락 가운데 있으며, 아담의 타락한 인간성과 원죄성이 계속됨을 지적한다.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원래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대표하는 단어가 '창조하다'에 해당하는 '빠라'(bara)이다. 이 단어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 내는 형상과 산물에는 결코 쓰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표현할 때만 쓰인다. 이 단어는 '만들다'에 해당하는 '아사'(asah)와 '짓다'에 해당하는 '야차르'(yatsar) 동사를 동반하기도 한다(창세1,26; 2,7).
비록 인간 창조의 장엄성과 하느님의 개입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단어가 '빠라'(bara)였지만(창세1,27), 본래 인간 창조의 의도를 얘기하실 때에는 '아사'(asah)가 쓰였다(창세1,26). 창세기 6장 6절에서 '빠라'(bara)가 쓰이지 않고, '아사'(asah)가 쓰인 것은 인간 창조의 과정이나 결과보다는 인간을 창조하시기로 의도하셨던 하느님의 마음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을 따라 만들 것을 의도하고 창조했던 인간이 하느님께서 만드셨던 그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제 마음대로의 길로 달려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심정을 드러내기 위해 '아사'(asah)가 쓰인 것이다(에페2,10참조).
여기서 '후회하시며'에 해당하는 '와인나헴'(wainnahem; was grieved; it repented)은 '나함'(naham)의 단순 재귀형으로서 '뉘우치다', '후회하다', '슬퍼하다', '애도하다' 등의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느님께서 스스로 후회하셨다거나 슬퍼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미리 다 아실 뿐 아니라, 당신의 뜻에 따라 행하신 것에 대해 전혀 후회하실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소중한 피조물인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벌받아 멸망할 수 밖에 없게 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인간이 이해하기 쉽도록 인간적인 측면에서 묘사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사순 제1주일 제1독서(창세9,8~15)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13~15)
본문에 언급된 계약은 홍수 이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너와는 내 계약을 세우겠다. 너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가거라.'(창세6,18) 이제 그 약속이 현실이 되어 체결되고 있는 것이다(창세9,9).
이처럼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대홍수 심판 가운데서 노아와 그와 함께 한 가족들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황폐해진 세상의 모습에서부터 다시 살아가야 할 앞날을 우려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재차 찾아 오셔서 장래를 보장해주는 계약을 맺으신 것이다.
창세기 9장12절에 보면,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라는 말이 나온다. '표징'으로 번역된 '오트'(oth)는 '징조', '기호', '증거'로도 번역되는 단어로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뚜렷이 드러나는 어떤 물증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맺으시되, 의심많고 변덕스러운 인간이라도 이 계약을 굳게 신뢰할 수 있도록 너무나 뚜렷한 증거물로서 무지개를 세우셨다. 그러나 '계약'(berit) 그 자체는 계약을 보증하는 '표징'(오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따라서 계약은 그 증거물에 의해 보증된다기 보다는 그 자체로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다.
'무지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쉐트'(qesheth)는 일차적으로 '활'(1사무2,4)이란 뜻도 있다. 활의 모양이 무지개와 비슷하기 때문에 동일한 단어가 활에도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활의 모양을 본따서 동일한 이름을 무지개에 적용했는지 그 순서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도구의 이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무지개가 활로 비유된 사례는 고대 근동 지방의 신화에도 나온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 신화에는 무지개가 쿠자(kuzah)神이 사용한 무기였으며, 싸움이 끝난 뒤에 이를 구름 사이에 걸어 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바빌론 신화에서도 무지개는 므로닥(Marduk; 예레50,2)신(神)이 악한 신(神) 티아맛(Tiamat)을 물리치는 활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이 신화들은 무지개, 즉 활을 하늘에 걸어 둔 것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 세상을 다시는 홍수로 심판치 않겠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평화의 선언을 확증하는 증거로서 무지개를 하늘에 두셨다는 성경 말씀이 다소 와전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구름'에 해당하는 '아난'(anan)과 '모아 들이다'(덮다)에 해당하는 '아난'(anan)은 동일한 어근이며, 다만 '구름'의 모음이 장모음이란 점만 다르다. 본문에서 '모아들이다'(덮다)로 변역된 '아난'(anan)의 어원적인 의미는 '드러내다', '나타나다'이며, 특별히 '장애물로서 개입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동사의 주어가 '하느님'이란 사실로서 자연현상의 배후를 주관하시고 지배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을 '하느님께서 하늘을 가리우기 위해 구름을 나타나게 하실 때'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구름을 고난과 위험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에도 여러번 사용되었다(에제30,3.18; 32,7; 34,12).
하지만, 먹구름 속에서도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평화의 무지개를 준비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신앙인은,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짙게 하늘을 덮은 구름 속에도 찬란한 무지개가 감추어져 있음을 믿으며, 난관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15) 본문의 '기억하다'에 해당하는 '자카르'(zakar)는 원래 '새기다','표시하다'는 말에서 유래하며 마음에 깊이 새겨 절대 잊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무지개란 표징을 주신 이유가 계약에 대한 하느님 자신의 기억을 위한 것이란 사실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기억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 불변하시는 하느님의 기억에 그 계약의 바탕을 둠으로써, 결단코 계약의 파기나 망각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천하가 다 알수 있도록 확실하게 해 준 것이다.
따라서 무지개를 볼 떄마다 인간이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도 잊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계약을 신실히 지켜 가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그 약속에 따라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우리를 인도해 가실 그분의 강력한 의지인 것이다(2베드 3,13).
마지막으로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국지적인 홍수는 발생할 수 있지만, 바로 노아 홍수와 같은 이 세상 전체를 멸하는 그러한 홍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대한 심판 자체가 없을 것이란 의미는 절대 아니다.
성경은 이 세상 마지막 날 사람들이 노아의 시대와 같이 먹고 마시며 향락에 젖어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불현듯 재림하셔서 홍수 심판보다도 훨씬 두려운 불의 심판으로써 모든 죄악된 것을 징벌하실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마태24,38.39; 2베드3,6.7).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마지막 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항상 깨어서 그 날을 준비해야 한다.'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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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제1독서(창세12,1~9)
그 무렵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1)
'주님께서~말씀하셨다'에 해당하는 '와요메르 예흐와'(wayomer yehwa)로 시작하는 본문은 아브람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부르심을 받고 역사(歷史)의 전면에 등장하는 장면을 보도한다. 이것은 역사의 전면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인간 아브람이지만, 그 배후에는 주님의 역사(役事)하심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본문이 '그 무렵(그러자;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로 번역되는 '와요메르'(wayomer)로 시작되는 것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주로 말씀으로 이루어짐을 보여 준다.
'(너는)~가거라'에 해당하는 '레크 레카'(lek leka)에서 '레크'(lek; go)는 '걷다'라는 뜻이 있는 '할라크'(hallak)의 2인칭 단수 명령형이다. 그리고 '레카'(leka)는 전치사 '레'(le)와 2인칭 단수 어미가 붙은 형태로서 '너에 대해서는'(as for you) 또는 '너에 관한 한'(as far as you are concerned) 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레크'(lek)라는 2인칭 단수 명령형 그 자체가 '너는 가거라'라는 의미가 있는데, 다시 '너에 대해서는(관해서는)'이라는 뜻이 있는 '레카'(leka)를 덧붙인 것은 '가거라'는 하느님의 명령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아브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아브람을 대신하여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아브람이 버리고 떠나야 할 것으로 명시된 세 개의 단어인 '메아르체카'(meartseka), '밈몰라드테카'(mimmolladtheka), '밉베트아비카' (mibbethabika) 앞에는 모두 철저한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민'(min)이 붙어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당신 자신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반면에, 인간의 거룩함은 하느님을 향한 지향으로 세속과 이기와의 철저한 구분에서 시작됨을 알려준다.
이것은 또한 거룩한 당신의 백성을 구별하여 세우시려는 하느님의 의지가 이미 아브람이라는 칼데아 사람을 세상에서 철저히 분리시키는 일에 예표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람이 떠날 대상이 고향, 친족, 아버지의 집 등 삼중으로 표기된 것은 결국 과거의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아브람이 이러한 것들을 과감히 버리도록 하느님께서 강력하게 요구하셨음을 의미한다. 루카 복음 14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도 '이와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한편, '네 고향'으로 번역된 '메아르체카'(meartseka)는 '너의 땅으로부터'라는 뜻이다. 이 말이 다른 두 가지, 즉 친족과 아버지의 집보다 앞에 나온 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궁극적으로 인도해 가실 곳이 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최초의 요구로 '땅'을 떠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이것은 옛 삶과 새로운 삶의 구별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새 출발과 더불어 가나안의 약속이 지배하는 삶의 영역으로 향하는 실질적인 삶을 강하게 명령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이 있을 거처를 미리 마련해 놓으시고, 기존의 것에 안주하지 말고 떠날 것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6절에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친족'으로 번역된 '몰레데트'(molledeth)는 '낳다'(창세4,18), '태어나다' (고헬렛7,1)로 번역되는 '얄라드'(yalld)에서 유래하여 '한 조상으로부터 태어난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 이러한 '친족'이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신 것은 당시 하란에는 아브람의 형제 나호르의 가족들이 살았기 때문이다(창세24,10; 28,10). 아마도 나호르 가족은 테라 일행이 칼데아 우르를 떠난 후(창세11,31) 바로 뒤이어 하란으로 이주하여 계속 그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치안 유지가 잘 되지 않았던 고대 사회는 오늘날보다 친족의 중요성이 더 컸다. 따라서 친족이 많은 자는 유력한 자로 여겨졌으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친족은 모여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친척 뿐만 아니라 보다 가까운 혈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집조차 떠나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큰 희생의 요구이다.
이제 하느님꼐서는 '고향'이라는 넓은 영역에서 '친족'이라는 중간 영역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고 너의 아버지의 집으로부터'에 해당하는 '우밉베트 아비카'(umibbeth abika) 즉 가장 작은 영역으로, 아브람이 떠나야 할 곳을 점점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아브람은 그의 '고향', 즉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을 떠나는 '지역적 이동'을 해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친족'을 떠나는 '공동체로부터의 이동'을 해야만 하고,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마저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브람에게 주어진 부르심의 내용은 당시 친지와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었던 고대 유목민에게 있어서는 결코 따르기에 쉬운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실에 대해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히브11,8)라고 계시하고 있다.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여기서 '너에게 보여줄'로 번역된 '아르에카'(areka)는 '라아'(raah; '보다') 동사의 사역형 미완료형에 2인칭 어미가 붙은 형태로서 '내가 너로 하여금 보게 할' 혹은 '내가 너에게 보여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직 아브람에게는 구체적인 목적지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본문에서 아브람이 가야할 곳의 지명이 막연하게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그 땅'에 해당하는 '하아레츠'(haarets)으로만 표기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셨지만, 실상 그가 가야할 곳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지가 이미 선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하아레츠'(haarets)라는 '그 땅'에 붙은 정관사 '하'(ha; '그')에 의해서 확인된다.
즉 '어떤 땅'이 아니라 바로 '그 땅' 가나안을 하느님께서는 생각하시고 아브람에게 명령하시고 계신 것이다. 아브람이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하느님의 확신에 찬 명령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제12주간 화요일 제1독서(창세13,2.5~18)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8~9)
'한 혈육'으로 번역된 '아나쉼 아힘'(anashim ahim)을 직역하면, '형제들의 사람들'이다. 즉 '한 형제'라는 말이다.
'아힘'(ahim)의 원형 '아흐'(ah)는 기본적으로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한 형제를 말하며 (창세4,2; 신명13,6; 시편50,20), 두번째는 이복 형제를 가리키고(창세39,14), 세번째는 한 조상에게서 태어난, 먼 혈연 관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창세29,15; 민수16,10; 25,6). 그리고 넓게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레위25,46; 신명3,18).
창세기 13장 8절에서는 세번째의 의미, 즉 한 조상으로부터 나온 삼촌과 조카라는 친척 관계를 의미하는 용어로 쓰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롯은 주님의 약속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 공동체에 속했던 자였으므로, 아브라함은 그를 혈연 관계로서의 가까운 사이라는 표면적인 사실을 넘어서 영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동반자 의식을 가지고 그를 친밀하게 대하고 있다고 본다.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8)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제발', '원컨대'(창세12,13; 탈출33,18)로 번역될 수 있는 '나'(na)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나'(na)는 '하야'(haya; to be)동사의 미완료형 '테히'(thehi)와 함께 쓰여 정중하게 허락을 요청하는 의미가 있다(탈출4,18; 이사5,1; 1열왕1,12; 민수20,7). 동시에 이 말이 일회적인 부정(不定)의 의미가 있는 '알'(al)과 함께 쓰여 애원의 뜻과 더불어 결정을 촉구하는 단호함까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창세13,8).
당시 아브라함은 연장자로서 거주지 선택에 있어서 우선권이 있었고, 롯을 보호할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혈육간의 분쟁을 막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롯에게 간청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을 보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평화를 사랑하는 온유의 사람, 또한 겸손의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9) '갈라져 나가라'로 번역된 '힙파레드'(hippared)는 '나누다', '구별하다'라는 뜻을 가진 '파라드'(parad)의 재귀 명령형이므로, '스스로 분리해라'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 '제발', '원컨대'로 번역되며 앞절에서도 나온 '나'(na)가 또 등장한다.
따라서 창세기 13장 9절은 명령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애원에 가까운 간곡한 권유로 보아야 한다(창세12,13; 24,2; 민수20,12). 또한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지대가 높은 베델에서 넓은 팔레스티나 지역을 내려다 보며, 놀라운 겸손과 양보 정신을 발휘해서 조카 롯에게 거주지 선택의 우선권을 주며 분가(分家)를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보다 손아래 사람인 조카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는 아브라함의 성숙한 모습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먼저 '하느님과 나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대신(代神)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첫번째 가치로 둘 뿐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평화로운 관계를 이루기 위한 온유와 겸손의 태도를 지향해야 한다.'그러니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로마14,19)
제12주간 목요일 제1독서(창세16,1~12.13~16)
"하가르는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아브람은 하가르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 하가르가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 줄 때,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 살이었다." (15~16)
성경에는 하가르가 아브람에게 다시 돌아갔다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하가르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아브람이 지어주었다는 창세기 16장 15절의 기록을 보면, 하가르는 주님의 천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브람에게 즉각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가르는 주님의 천사를 만난 사실을 아브람에게 소상히 이야기했고, 아브람도 이를 받아들여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로 지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스마엘을 이름 지을 때 창세기 16장 15절은 '뻬노'(beno), 즉 '그의 아들'(his son)이란 표현을 써서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그의 아들로 여겼음을 확인해 준다. 이것을 볼 때 여종 하가르의 몸을 빌려 자녀를 얻자는 사라이의 인간적인 생각에 의해 시작된 아브람 가문의 분쟁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해결되었다.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 살이었다' (16) 창세기 12장 4절에서 아브람의 나이가 일흔다섯 살로 소개되어 나온 이후 두번 째로 그의 나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물론 창세기 16장 3절의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자리 잡은 지 십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의 내용을 보아서 이스마엘을 낳을 때 아브람의 나이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로서는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람의 나이를 분명히 명시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86이라는 숫자가 히브리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즉 히브리인의 개념에서 완전함을 나타내는 3, 7, 10 이라는 숫자와는 별개의 숫자들이 조합된 86이란 숫자는 이스마엘을 출산할 때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백 살 되던 해에 이루어진 이사악의 출생(창세21,5)은 약속의 씨가 완전함을 상징하는 '10'이란 숫자가 연결되어 이것이 큰 의미를 지닌 사건임을 암시한다. 굳이 '86'이란 숫자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쉐쉬'(sheshi; 6)란 숫자이다. 이것은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 '7'에 미치지 못하는 숫자로서 완전함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만일에 아브라함의 나이가 가지는 의미와 약속의 씨의 출생이 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독자는 분명 '86'이라는 숫자 다음에 올 수 있는 의미있는 숫자로 이루어질 아브라함의 나이를 기대할 것이고, 그것이 곧 '100'이라는 숫자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악의 출생이 예고된 창세기 17장 1절이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었음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러한 추정은 신빙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제12주간 금요일 제1독서(창세17,1.9~10.15~22)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없는 이가 되어라." (1)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지 24년이 되었고(창세12,4). 그의 첩 하가르가 이스마엘을 낳은지 13년이 되는 해였다(창세16,16). 그런데 창세기 16장의 마지막 내용인 이스마엘이 출생한 기록이 나온 후, 곧 바로 13년이나 건너뛴 것은 그 동안 하느님의 계시가 아브람에게 없었던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장시간 동안 하느님의 계시가 없었으므로, 아브람에게는 이스마엘에 대한 애착이 강해졌을 것이고, 그를 통한 약속의 성취를 계속 기대했을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7장 18절의 '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라는 아브라함의 고백에서 엿볼 수 있는 사실이다.
또한 13년간의 침묵은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새로운 하느님의 계시와 약속을 아브라함이 매우 놀라운 사건으로 여길 수 있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동안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자신의 기업을 확장해 가려던 그 모든 생각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한순간에 깨닫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좌절은 심각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약속이 새롭게 주어지는 것을 통해 아브라함은 그 좌절의 혼란속에서 다시금 믿음을 일깨우는 계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나타나'로 번역된 '와예라'(wayera; appeared)는 단순 재귀형이 사용되어 '그리고 그는 자신을 보여주다'이다. 여기서 '보여주다'에 해당하는 '라아'(raah)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숙고하여 깨달아 아는 것을 의미한다(창세11,5; 에제21,26; 호세9,10). 말하자면 주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시는데, 아브람이 직접 경험하여 구체적으로 깨달아 알도록 보여 주신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신 이유는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사라이를 통한 이사악의 출생 약속이 임박했음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창세16,16; 17,19).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히브리어 문장에서 주어가 어떤 단어의 접두어나 접미어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처럼 '나는'에 해당하는 인칭 대명사 '아니'(ani)가 독립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바로 지금 하느님께서 자신을 공적으로 소개하시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전능한 하느님'은 '엘'(el; '하느님')과 '샷다이'(shaddai)의 복합어이다. 여기서 '엘'(el; '하느님')의 어원인 '울'(ul)은 '능력 있다', '강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샷다이'(shaddai)는 '~하는 자'(she; 셰)와 '충분한'(dai; 따이)의 복합어로서 '충족적인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전능한 하느님'은 권능이 있으면서 또한 '(자기)충족적인 하느님'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이 명칭은 특별히 사람과 계약을 세우실 때 사용되는 하느님의 명칭이다(창세28,3; 43,14; 48,3). 이 명칭이 주로 계약과 관계되어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한번 맺으신 계약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반드시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신 자기 충족적이신 분이심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로 번역된 '히트할레크 레파나이'(hithhallek lepanai)는 직역하면 '너는 내 얼굴 앞으로 스스로 걸으라'이다.
여기서 '히트할레크'(hithhallek)는 '걷다'(walk)는 뜻이 있는 '할라크' (hallak)의 재귀형이므로 '자기 스스로 걷다'란 의미가 있다. 그리고 '레파나이'(lepanai)는 '얼굴'을 의미하는 '파님'(panim)에 '~을 향하다'는 뜻이 있는 전치사 '레'(le)가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결정하여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대전에 하는 것처럼, 즉 하느님을 의식하고 의롭게 행동해야 함을 명령한 것이다.
'흠없는 이가 되어라' '흠없는 이가 되어라'로 번역한 '웨흐예 타밈'(yehye tamim)은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완전하라'는 명령형이다. 그런데 '타밈'(tamim; perfect)이란 용어는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되는 흠이 없는 동물을 표현할 때도 쓰였다. 하느님께서는 흠없는 제물만 받으신다(레위22,14~25)
그러나 이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도덕적으로 성실하고 깨끗한 자로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자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시편15장; 101,6).
이것은 노아를 묘사할 때도 쓰인 말로서(창세6,9), 아브람은 믿음이 없는 세대 가운데서 도덕적으로 성실하고 깨끗하여 하느님과 친교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춤으로써,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이 되라고 하느님께로부터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흠없는 이가 되어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아브람이 하가르를 첩으로 취한 것이 하느님께는 완전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람의 지난 13년간의 삶을 한순간에 뒤돌아보게 하는 명령이었다.
둘째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 대전에서 절대적인 의미로 완전할 수 없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도덕적으로 순결할 것과 성숙할 것에 대한 요구이며, 아브람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이다.
제12주간 토요일 제1독서(창세18,1~15)
그 무렵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거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1~5)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마므레'는 아브람과 동맹을 맺었던 아모리족의 한 사람인 '마므레'를 가리키는 이름 (창세14,13.14)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개인 소유지로서 아브람이 롯과 헤어져 정착한 장소(창세13,18)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창세23,17.19; 35,27).
한편 '참나무들 곁에서'에 해당하는 '뻬엘로네'(beellone)는 '참나무'(상수리나무)를 뜻하는 '알론'(allon)의 복수형과 '속에', '~사이에', '곁에'를 뜻하는 전치사 '뻬'(be)가 결합하여 당시 아브라함이 '참나무들 사이에', '참나무들 바로 가까이에 (곁에)' 살았음을 보여준다.
'나타나셨다'에 해당하는 '와예라'(wayera; and appeared)에서 '보다'(창세7,1)라는 뜻이 있는 '라아'(rah)의 단순 재귀형이 사용되어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찾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셨음을 보여준다.
'한창 더운 대낮에'에 해당하는 '케흠 하이욤'(kehm haiyom; in the heat of the day)에서 '날'(창세1,8; 탈출6,28)을 뜻하는 '욤'(yom)과 정관사 '하'(ha)가 결합하여 '그날'(the day)이란 뜻의 '하이욤'(haiyom)이 쓰였다.
그리고 '한창 더운'에 해당하는 '케흠'(kehm)은 '입다'라는 뜻을 지닌 '하맘'(hamam)에서 유래하여 '더위'(창세8,22), '따뜻함', '따끈함'(1사무21,7)이라는 뜻을 가진 '흠'(hm)과 '~같이', '~처럼', '~할때'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케'(ke)가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그날의 그 더운 때에'(in the heat of the day; while the day was growing hot)가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오전 일을 모두 마치고 가장 더운 때를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때였음을 알려 준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제 사람이 서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에 해당하는 '와잇사 에나이우 와야르 웨힌네'(waissa enaiu wayer wehine; and he lift up his eyes and looked and saw)에서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발견한 것을 자연스럽게 묘사하지 않고, 감탄사인 '힌네(hinne)를 통해 묘사한 이유가 '잇사 예나이우'(issa enaiu; he lift up)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문자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눈을 들어 보게 된 경우를 묘사한다.
즉 아브라함은 정오의 햇볕을 피하기 위해 천막 앞에 앉아 졸고 있던 중에 언뜻 눈을 들어 보는 중에 세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에 놀라움을 가지게 된 것이고, '힌네'(보라)라는 감탄사는 이러한 당황스러움을 묘사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왜 달려나가 그들을 맞이했는지 그 이유를 말해준다. 이것은 그가 졸고 있었다는 사실을 만회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보게 된 대상은 '세사람'으로 소개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혀 사람 이상의 다른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달려 나가'에 해당하는 동사 '루츠'(ruts)는 '달려들다', '돌진하다'(욥기15,26), '급히가다'(1사무20,6) 라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계속적 '와우'(wau)와 함께 쓰여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보자마자 곧바로 달려 나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맞으면서'에 해당하는 동사 '카라'(qara)는 '만나다'(창세46,29; 탈출4,27) 라는 뜻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그러자 그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급히 나갔다'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낯선 손님을 환영하기 위해 서둘렀음을 말한다. 이것은 손님을 맞이하는 고대 근동의 관습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졸고 있었기에 눈앞에 까지 그들이 왔어도 알아채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을 만회하기 위해 평상적인 모습보다 더 과장된 행동으로 나그네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에 해당하는 '샤하'(shaha)는 재귀형으로 쓰여 외부의 간섭없이 자의적으로 '엎드리다'(창세23,7; 이사51,23), '절하다', '경배하다'(탈출11,8; 신명8,19)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몸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이런 인사는 귀한 방문자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근동의 인사 양식이었다.
성경에서는 야곱이 에사우를 맞이할 때(창세33,3),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환영하며 맞아들일 때(창세48,12), 그리고 예언자 무리(생도들)가 엘리사를 맞이할 때 (2열왕2,15) 등 여러 시대에 걸쳐 이런 인사 풍습을 보여 주고 있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나리'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는 원래 '주'(창세19,18; 여호3,11), '주인' (창세18,12; 판관19,11), '소유주'(창세42,30; 이사24,2)를 뜻하는 '아돈'(adon)의 강조형이며 남성 복수형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에 대하여 '나의 주여'(my Lord)라고 하면서 1인칭 단수를 사용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 중 한 사람이 하느님이심을 즉각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의 기본 어근이 '아돈'이며, 이 단어는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창세18,12), 종이 주인(상전)을 부를 때 (창세24,12) 상대방을 지극히 높여 부를 때 사용되었고,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하였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점(히브13,2) 등을 들어 아브라함이 그들 중 한 명이 하느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지극히 높여 부른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들을 발견했을 때 '세 사람'이라고 말한 것에서 확인되며, 아브라함은 계속적인 대화를 통해 이들 중에 한 명이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된 것은 확실하다(창세18,17.22절).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에 해당하는 '임 나 마차리 헨 뻬에네카'(im na matsathi hen beeneka)는 직역하면 '만일 제가 당신의 눈속에서 은혜를 찾아냈다면(발견했다면)'이다.
여기서 '입다'(창세6,8; 탈출33,12)에 해당하는 '마차'(matsa)는 '얻다'(창세19,19; 신명22,3), '발견하다'(창세36,24; 민수24,1), '만나다'(민수35,27; 여호2,22)라는 뜻을 지닌 '임'(im)과 함께 쓰여 '발견했다면'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은혜', '은총'에 해당하는 '헨'(hen)은 '불쌍히 여기다'(2사무12,22)라는 뜻의 '하난'(hanan)에서 유래하며 '은총'(탈출33,12; 잠언3,4), '호의'(신명24,1; 탈출39,21)로도 번역되었다.
또한 '뻬에네카'(beeneka)에서 '아인'(ain)은 '눈'(창세3,5; 1사무2,30)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서 '당신의 눈들 속에'라는 뜻이다.
'내가 당신의 눈들 속에서 은총을 발견했다면', '내가 당신의 눈들 속에서 나에 대한 사랑을 찾아냈다면, '내가 당신의 마음에 들었다면'하면서 아브라함은 지금 나그네들에게 쉬어 갈 것을 최고의 예의를 갖추어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명령형과 함께 사용되지만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을 할 때 혹은 더 나아가 간청할 때 쓰이는 '제발', '부디'라는 뜻이 있는 부사 '나'(na)가 창세기 18장 3절에는 두 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이 단어를 사용하여 세 명의 나그네에게 자신의 거처를 그냥 통과하여 지나가지 말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특히 아브라함은 자신을 '종'에 해당하는 '에베드'(ebed)이라고 까지 표현하며 손님들을 최대한 예우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손님 접대에 대한 열성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3장 2절에서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기도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씻으시고'에 해당하는 '라하츠'(rahats)가 '발'에 해당하는 '레겔'(regel)을 목적어로 하는 명령형으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서처럼 히브리어 부사 '나'(na; 부디, 제발, 청컨대)가 명령형과 함께 쓰일 때에는 명령보다는 애원의 의미에 더 가깝다. 따라서 '제발 당신들의 발들을 씻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쉬십시오'에 해당하는 '샤안'(shaan)은 '의지하다'(2사무1,6; 2열왕5,18)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지팡이(에제29,7), 창(2사무1,6) 혹은 팔이나 손(2열왕5,18; 7,2.17)과 같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게 의지하여 기대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동작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가는 재귀 명령형으로 쓰여져 나무 그늘에서휴식하며 식사하기에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옆으로 비스듬히 누어 왼팔로 몸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식사 관습을 반영하는 표현으로서 식사 대접을 편안히 받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요한13,23). 창세기 18장 4절에서 아브라함이 제공할 발 씻을 물과 나무 그늘에서의 휴식은 더위에 지쳐 있는 여행자가 가장 고마워할 것들이다.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로 번역된 '웨싸아두 립베켐 아하르'(wesaadu libbekem ahar)에서 동사 '싸아드'(saad)는 '지탱하다'(이사9,7), '강하게 하다', '만족시키다'를
뜻하는 말로서 명령형으로 쓰였는데, 보통 '레브'(leb; 마음)라는 단어와 함께 쓰여서 마음을 강하게 지탱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여행으로 인한 피곤한 육체를 쉬게 하고 음식을 먹음으로써 쇠잔한 기력을 힘있게 회복하고 재충전하라는 말이다.
한편 창세기 18장 3절과 5절에 '종'에 해당하는 '에베드'(ebed)는 '노동하다', '일하다'라는 뜻의 '아바드'(abad)에서 유래하여 '노예'(창세43,18), '종'(창세9,25) 이란 말로 사용되거나 낮은 신분에 처한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자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당시 아브라함은 이미 거대한 부자였으며, 한 가문을 대표하는 족장이었다. 그런 그가 신분조차 모르는 나그네들 앞에 자신을 낮추어 '종'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당시의 관습이 아무리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크나큰 겸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제13주간 화요일 제1독서(창세19,15~29)
"그들은 롯의 가족을 밖으로 데리고 말하였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 (17) 그때 주님께서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24) 그리하여 그 성읍들과 온 들판과 그 성읍의 모든 주민, 그리고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 (25)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26)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로 번역된 '힘말레트 알 나프세카'(himmallet al napsheka)에서 '힘말레드'(himmallet; escape, flee)는 '말라트'(mallat)의 수동형으로 '달아나다', '도망하다', '구원받다'라는 뜻이 있다.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라는 명령이다. 롯에게 달아날 것을 명령하신 것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이것은 뒤따르는 '알(for) 나프세카(the life)' 즉 '너의 생명을 위하여' (for your lives)라는 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말하자면, 롯은 형벌을 피하기 위해 도망하는 소극적 차원이 아니라 '생명을 위하여' 구원되어지는 적극적인 초청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원문은 생명을 위한 유일한 길이 달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달아난 후가 아니라 달아나는 그 순간이 바로 생명을 보존하는 시간이 된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17) 창세기 19장 17절에 나오는 네 번의 명령 중에서 두 번은 '달아나라'는 것이고, 두 번은 본문처럼 부정어 '알'(al)이 붙은 '~하지 마라'는 명령이다.
'알'(al)은 일회적인 금지를 나타내기 때문에 굉장히 단호한 명령임을 알 수 있으며, 단 한 번만이라도 그 명령을 어길 경우에는 하느님의 심판 아래 소돔의 멸망과 함께 생명을 잃을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이다.
두 번의 '하지 말라'는 명령 중 첫번째의 동사 '탑비트'(tabbit; look)는 '나바트'(nabat; 보다)의 사역형으로서 '관심을 보이다', '주의를 집중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첫번째 명령을 직역하면, '너의 뒤에 관심을 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돔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생명의 길을 달려가라는 것이다.
두번째 명령은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인데, 여기서 '들판'으로 번역된 '킥카르'(kikkar)는 보통 '들판'을 나타내는 '사데'(sade)와는 달리 '요르단 골짜기의 비옥한 둥근 지역'을 가리킬때 쓰는 말이다. 직역하면 '요르단 둥근 지역에 멈추어 서 있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혹시 롯이 중간에 머물러 물질을 기반으로 하는 육체의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하신 경고의 말씀이다. 생명은 결코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 그리고 물질에 대한 안주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주님께서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24) 특히 하느님께서 행동이나 사건의 원인이나 주도자를 나타낼 때, '하늘에서'처럼 '메에트'(meeth; ~로 부터, ~에서)라는 단어를 쓴다.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단어의 배열 순서인데,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의 순서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유황의 심판이 자연적인 재앙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리신 재앙이라는 사실을 먼저 표기한다. 이것은 과거의 심판 뿐 아니라 장차 있을 최후의 심판도 공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직접 주관하신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히브12,23; 묵시18,8).
'퍼부으셨다'로 번역된 '히므티르'(himtir)의 원형 '마타르'(matar)는 사역형 능동 완료형으로 쓰여 '비같이 내렸다'는 뜻이며, 비같이 내린 사실과 더불어 그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즉 유황과 불이 비같이 쏟아지고 퍼붓는 것은 우연한 자연 현상이 아니고,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임을 보여 준다.
'멸망시키셨다' (25) '멸망시키셨다'로 번역된 '와야하포크'(wayahapok)는 '뒤집히다', '망하게 하다' (신명29,22), '마음을 바꾸다', '변화시키다'(시편105,25) 라는 뜻을 갖고 있는 '하파크'(hapak)가 계속적 '와우'(wau)와 결합하여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서, 앞선 사건의 결과로 '본래 있던 상태가 완전히 뒤집혀서 새롭게 변해 버린 것'을 의미한다.
원래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지역은 역청 수렁이 많았는데(창세14,10), 하느님의 불심판으로 말미암아 지층의 침강, 함몰 등으로 지중해 수면보다 약 392m가 더 낮은 죽음의 바다로 변해 버렸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26) '돌아보다'에 해당하는 '나바트'(nabat)는 '조용히 바라보다', '주시하다'(이사18,4), '우러러보다', '생각하며 바라보다'(이사51,2), '관심을 보이다'라는 뜻이다. 또한 '메아하라이우'(meaharaiu)는 '그의 뒤에서부터', 즉 '롯의 뒤에서부터'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롯의 아내는 롯의 뒤를 마지못해 따라오다가 뒤에 두고 온 모든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목하여 바라보다가 심판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9장 17절에 나오는 천사들의 단호한 금지 명령을 가볍게 여긴 결과이다.
한편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여 달아나던 롯과 그의 가족 중에 그 근처에 있었던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유독 롯의 아내만 '소금 기둥'으로 번역된 '네트십 멜라흐'(netsib mellah; a pillar of salt)가 되어 버렸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불순종한 자만 구별하여 징계하셨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는 자연 법칙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초자연적인 분이시라는 사실과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은 개인별로 엄격히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사해 연안에 천사의 명령을 어긴 롯의 아내가 변해서 된 것으로 알려지는 소금 기둥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