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요나서(독서묵상)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제1독서 (요나1,1-2. 1.11)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서 요나가 뽑혔다."(7)
선장은 배 밑창에 있던 요나 예언자를 갑판으로 데리고 올라왔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동안 요나가 주 하느님께 기도했을 것이라는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요나는 어쩌면 당시 상황에서 기도하는 것까지 포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타르시스로 도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 갑판 위에 요나를 비롯하여 모든 승객들과 뱃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들은 위기 타개를 위한 방편으로 제비뽑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자, 제비를 뽑아서'라고 번역된 '레쿠 웨납필라 고랄로트' (leku wenapilla goralloth; Come, let us cast lots)는 문자적으로 "오라, 그래서 우리가 제비들을 던지자" 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말할 것도 없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제비를 뽑아 그 재앙이 누구때문인지를 살피자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자'로 번역된 '레쿠'(leku)는 '걷다', '가다'(또는 '오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 '알라크'(allak)의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너희들은 오라'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제비뽑기를 위해 사람들을 각각 갑판 한 가운데로 모이게 하는 말이다.
고대 세계에서 제비 뽑는 일은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미래를 점치거나 숨겨져 있는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하던 일반적 관행이었다. 당시 제비뽑기는 막대기나 돌 같은 것 위에 글자를 새겨 던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파선 위기에 놓인 당시 사람들은 막대기에 각각 자신의 이름을 써놓고 그것들을 갑판에 던짐으로써 어떤 이름의 제비가 다른 모양으로 넘어지는지를 관찰함으로써 풍랑의 원인 제공자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런 사심도 없이 던진 그 제비가 깊은 강에 빠져 있다가 선장의 꾸짖음에 깨어 아직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 있는 요나 예언자에게 당첨된 것이다. 이것은 제비뽑기의 전 과정을 하느님께서 주관하고 계셨음을 알게 한다. 비록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그 일을 결정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요나를 일깨워 당신의 명령에 궁극적으로 순종하도록 하신 것이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 (잠언16,33)
'누구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이 본문은 그들이 제비를 뽑기 원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던 그 위기를 '재앙'으로 표현한다. 이에 해당하는 '하라아'(harah; evil)의 원형 '라으'(lah)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나쁜 것을 포괄하는 '악'(evil)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뱃사람들은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악의 원인이 인간의 악에 있음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상당히종교적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관념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서도 있었다(욥기4,7). 그러한 이해와 적용이 욥에게는 해당되지 아니했지만, 요나에게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일이었다.
한편 이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위기의 상황에서 그 위기의 원인을 찾아보고자 제비를 뽑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나 문서화된 율법의 말씀이 없는 이방인들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예레44,1-10참조).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본문은 '와이얍필루 꼬랄로트 와이입폴 학고랄 알 요나'(weiyappiliu goralloth weiyippol hagoral al yonah; They cast lost and the lot fell on Jonah)인데, 문자적으로 '그래서 그들은 제비들을 던졌고,그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앞의 '제비'는 복수형으로 되어있는 반면 뒤의 '제비'는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뽑으니'와 '뽑혔다'에 해당하는 단어를 '와이얍필루'와 '와이압폴'의 원형 '나팔'(napal)은 어원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모습(fall down)을 나타내는 동사인데(탈출21,33; 여호6,20),
앞의 것은 3인칭 복수 사역 능동형으로 사용되고, 뒤의 것은 3인칭 단수 기본형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막대기로 된 제비들을 던졌다는 사실과 그 제비들 가운데 당첨되었음을 알리는 특정한 제비가 사람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느님의 주권에 의하여 요나에게 떨어졌음을 암시한다.
이로 인해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요나가 풍랑의 원인 제공자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섭리를 통해 당시 배에 탄 사람들이 던진 제비가 정확하게 요나에게 당첨되도록 역사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조금도 관여되지 않은 제비뽑기로 인해 요나는 당시 재앙이 일어나게 한 원인자임이 밝혀졌고, 이것을 통해 요나는 자신의 범죄 사실을 시인하게 되었다.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제1독서 (요나3,1-10)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5~6)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 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으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8)
요나서 3장의 내용은 요나가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니네베에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이 임금을 비롯하여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모두 회개하고 그것을 보신 주님께서 마음을 돌리시어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니네베의 회개는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임금부터 용상에서 일어나 용포를 벗고 자루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단식'(촘; tsom; fast; fasting)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는데,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곧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도 좋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하느님 앞에서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악을 크게 회개한다는 표시이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자 행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니네베 사람들 역시 죄악을 크게 회개하였고, 장차 철저한 멸망에 이를 수 있는 현실적 정황 앞에서 하느님의 용서와 보호의 은총을 구하여 위기를 타개하고자 단식을 단행한 것이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5) 여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니네베의 왕을 지칭하며, 가장 낮은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비천한 자들 아마도 노예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일 것이다.
'자루옷'(굵은 베옷)에 해당하는 '삭킴'(saqim)의 원형 '사크'(saq)는 조직이 매우 거친 삼베를 말한다. 이것은 장례식에 입거나(창세37,34; 2사무3,31) 국가적 재난을 당할 때(에스테르4,1) 극심한 심적 고통을 표현하고자 할 때(2열왕21,27) 입었다. 이처럼 평상시 입는 옷을 벗고 거친 베를 몸에 걸친다는 것은 일체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거부하고,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진심으로 회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6) 당시 니네베 왕은 아시리아 제국 전체를 통치하던 샬만에셀 4세(Shalmaneser IV; B.C.782~773), 혹은 앗슈르단 3세(Asshurdan III; B.C.772~755)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니네베 왕이 주 하느님 앞에 철저히 낮아져 진실로 겸비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는 하느님 대전에 더 이상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왕좌에서 일어나 왕의 권위를 겉으로 드러내는 자신의 왕복까지 벗고 대신 자루옷을 입었다.
그는 왕좌에 앉는 대신에 잿더미위에 앉았다. '재'에 해당하는 '하에페르'(haeper)의 원형 '에페르'(eper)는 흩어 뿌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물질이 완전히 연소되고 남은 매우 가벼운 분말 상태의 찌꺼기인 재(ash)를 의미한다(민수19,10). 고대 근동에서 사람이 재 위에 앉거나 재를 뒤집어 쓰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극심한 육체적, 심적 고통을 나타내거나(2사무13,19; 욥2,8),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의 은총을 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 행동이다(다니9,3).
당시 세계 최강의 권세를 자랑하던 아시리아 제국의 최고 통치자가 자루옷을 걸치고 잿더미 위에 앉았다는 것은, 아시리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 누구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서쪽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서 온 이름없는 한 예언자의 선포를 듣고 그렇게 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다. 하지만 아시리아 왕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비천함과 하느님의 심판 대전에 무기력함을 절감하고, 그 모든 권세와 권위를 하느님 대전에 내려놓고 오직 주 하느님만을 최고의 신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그에게 은총을 구했다.
이러한 아시리아 왕의 태도는 실로 하느님 대전에 은총을 구하는 자, 회복을 간구하는 자가 취해야 할 합당한 태도라고 할 수 있으며, 좀 더 근본적으로 하느님 대전에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 누구나 마땅히 창조주 하느님 대전에 취해야 할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온 국민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 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으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7~8)
고대 근동에서는 나라에 매우 큰 위기가 닥쳤거나 최고 통치자가 서거했을 경우 사람들 뿐 아니라 이성이 없는 우매한 가축들 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하는 관행이 있었다. 니네베 성읍 전체의 모든 생명체가 멸망의 위기를 벗어나 모두 다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단식을 통해 철저한 회개의 모습을 가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나서 3장 7~8절은 니네베 읍성 백성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한 방법 네 가지가 제시된다. 그것은 ⑴음식 뿐만 아니라 물까지 입에 대지 않는 완전한 단식, ⑵자루옷(굵은 베옷)을
입는 것, ⑶하느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⑷ 각기 악에서 떠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네번째 사항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즉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8) 바로 이것 때문에 심판이 닥쳤으므로, 백성들에게 악과 폭행을 버리고 선한 길로 돌이키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돌아서야 한다'에 해당하는 '웨야슈브'(weyashubu)의 원형 '슈브'(shub)는 어원적으로 가던 방향을 돌이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창세8,12). 본문에서는 악한 행위와 폭행을 버리고 과거의 그러한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회개란 단순히 악을 버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善)을 행하는데까지 나아가야 완전한 회개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폭행'에 해당하는 '훼하마스'(whehamas)의 원형 '하마스'(hamas)는 어원상 강한 힘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약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죄악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수로 멸망당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죄악이었다(창세6,11.13). 어떤 예언서에도 니네베 사람들처럼 이토록 진지하게 회개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학계 지도자들이 권력과 돈과 지위와 명성을 가지고, 또한 악한 법과 구조와 제도를 가지고 얼마나 하느님의 신법(神法)과 자연법(自然法)을 거스리며 나쁜 짓을 하고 하고 있는지 모른다. 스스로 하느님의 의노(義怒)를 초래하고 있는 나라들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높은 데서 권력과 돈을 이용해 불볍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낮과 밤의 다른 생활, 아니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완전히 다른 철저한 이중생활, 야누스적 생활을 하면서 감히 서민들이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맛있는 것들을 먹고 마시고, 최고의 사치와 향응과 쾌락과 스포츠를 즐기며 하느님과 백성들 무서운 줄 모르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통탄할 일이다. 참으로 이 시대는 임금부터 저기 보이지도 않는 잡초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속속들이 썩어 버린 것을 도려내야 하는, 온갖 부패와 불법과 불의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그래도 하느님의 벌을 받지 않고 망하지 않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께서 남겨두신 이들 때문이다.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희생하며 보속하는 몇몇 의인들과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회개해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회개가 정말로 필요한 때이다.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요나4,1-11)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9-11)
앞의 4장 5-8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그늘을 드리우도록 예비하신 아주까리가 하룻밤 사이에 시들었음과 이로 인해 요나가 하느님을 향해 격한 불평을 토로했음을 밝혔다. 이제 4장 9-11절에서는 시든 아주까리로 인해 격한 불평을 쏟아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불평의 정당성을 고집하는 요나를 향해, 하느님께서 그의 주장을 역이용해서 니네베 구원의 정당성을 밝히는 내용을 다룬다.
하느님께서 먼저, 분노하여 죽기를 자청하는 요나에게 수사적 질문을 던지신다. 이방 성읍이며 선민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적대국의 수도라 하여도,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 하느님께서 온 천하보다 소중하게 여기시는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성읍이 멸망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극도의 불쾌감을 느끼고 분노했던 요나가, 후에는 자신이 배양하지 않은 아주까리가 시들어 죽는 것을 보고 극도로 분노하는 것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인 것이다.
'아주까리 때문에'로 번역된 '알 학키카욘'(al haqqiqayon; for the gourd)은 '이 아주까리로 말미암아' 혹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로 번역할 수 있다. 그가 하찮은 아주까리가 시들어 죽어버린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합당하다면, 마땅히 하느님 대전에 소중하게 여김받는 니네베 성읍이 멸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지 말았어야 했다.
동시에 요나는 아주까리가 시들어 죽어버린 것에 대해 분노할 자격도 없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위해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며, 햇빛을 주는 등 수고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고가 아니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혜로 자라나 그에게 그늘을 제공한 아주까리로 인해 그는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 하며, 또한 설사 갑자기 그것이 시들어 죽어 버렸어도, 그 사실로 인해 그는 분노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9) 한마디로, 요나의 답변의 요지는 자신이 하루 아침에 시들어버린 아주까리로 인해 분노하는 것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죽을지라도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옳습니다' 라는 의미이다. 도대체 어느 누가 사람의 목숨보다 아주까리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그러한 주장을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는 아주까리가 벌레 먹어 시든 것이 분노의 이유가 된다면, 아주까리와는 비교 자체도 되지 않는 사람의 목숨, 더군다나 수십만의 사람들이 사는 니네베, 단순히 죄인들만 사는 곳이 아닌 선악에 대해 분간조차 못하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십이만 명이나 되는 그곳이 파멸을 당하는 것에 대해 더더욱 분개하고, 마치 심판을 앞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아브라함이 힘을 다해 중개한 것처럼,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일을 막고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1절의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으로 번역된 '아셰르 로 야다으 뻰 예미노 리세몰로'(asher lo yadah ben yemino lisemollo;who cannot discern between their right hand and their left hand)는 문자적으로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로서, 이것은 아직 인간으로서의 판단력이 부족한 어린 아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학자들은 이 숫자를 바탕으로 니네베 성읍 당시 인구를 추정하기도 한다. 여기서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은 6~7세 미만의 유아로부터 아동들을 지칭하며 고대 세계에서 이들의 수는 전체 인구의 5분의 1정도 였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니네베 성읍에는 약 60 여만 명의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어떤 학자는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을 어린 아이가 아니라 니네베 도성 주민의 영육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이 도시에 하느님께서 아끼고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당시 니네베는 동쪽으로부터 서쪽까지 직경이 약 30km, 도시 둘레 전체 길이가 약 97km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읍의 사람들에 대해 하느님과는 달리 요나는 자기 편견만을 고집할 뿐만 아니라 자가당착에 빠져 무엇이 자신에게 잘못된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러기에 이토록 당당하게 '내가 화가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나의 면모는 요나서 1장에 요나로 말미암아 풍랑을 만난 뱃사람들의 면모와 극한적 대조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1장에서 뱃사람들은 어떻게든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고자 배에 실린 모든 물건들, 그들의 전 재산과 다름없는 그 물건들을 아낌없이 바다에 내던졌다. 아울러 비록 요나로 말미암아 배가 풍랑을 만났고, 요나가 명백한 죄인임이 밝혀졌으며,요나 자신이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청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다에 던지는 것조차 주저하고, 도리어 어떻게든 자기들의 힘으로 위기를 타개하여 요나의 생명을 지키려 하였다.
또한 아울러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당할 수 없는 풍랑이 몰려오자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만, 그 이후 겸손하게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뱃사람들의 태도와, 죄인들이라고 해서 무자비하게 파멸을 기대하고 자기 머리를 시원하게 하는 아주까리는 아끼면서 니네베 사람들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태도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또한 온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느님 대전에 겸손할 줄 모르고, 자기 주장이 관철되지 않았다고 해서 원망과 불평의 말을 내뱉으며, 목을 곧게 하고 끝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요나의 면모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실로 이것은 충격적인 대조이다. 우리는 이러한 요나의 면모가 단지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세대의 하느님의 자녀들, 믿음의 자녀들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빠질 수 있는 오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나 요나처럼,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만도 못한 그릇된 일을 저지르며, 왜곡되고 편협한 시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일깨우시는 하느님 앞에서까지 그릇된 길을 고집할 수 있음을 잊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