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의록(10.-12)
| 욥 기(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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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통과 절망 속에서의 절규 ‘욥이 겪고 있는 고통은 스스로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벌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욥에게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여 그분과 화해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면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옛날처럼 행복을 내리실 것이다.’ 욥은 친구들의 이러한 질책과 권고가 고통과 절망의 심연에 빠진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항변한다. 그뿐만 아니라, 친구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전통적인 인과 응보 사상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거부한다. |
| 욥 기(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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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절망을 넘어 하느님께로 욥은 지금까지 누려왔던 행복을 박탈당한 것만이 아니라, 친구들에 의해서 ‘초인적 교만’에 사로잡혀 자신을 하느님보다 더 정당하게 여긴다고 지탄받고(15,7-16참조), 이들이 대변하는 응보의 교리에 의해서 단죄받는다. 이제 욥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밖에 없다. 그러나 그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찾을 수조차 없다. 욥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여건은 절망의 심도와 강도를 더해갈 뿐이다. 가. 절망보다 강한 희망 이성적으로 판당할 때 욥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신앙인으로서의 욥은 모순과 역설의 인간이다. 이는 욥이 특별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가 모순과 역설적 요소로 점철되어 있으며, 신앙은 더욱 그러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비이성성은 결국 초이성성을 말한다. 욥이 추구하는 하느님 자신이 초이성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욥은 절망의 심연과 죽음의 문턱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도약을 이루어낸다. 물론 한번의 도약으로 욥이 희망과 생명의 광명 속으로 돌입하는 것은 아니다. 욥은 마지막 결말이 날 때까지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 하느님에게서 멀어짐과 그분에게로 가까워짐, 하느님의 부재와 현존 사이의 내림가 오름을 계속해 나아간다. 그러면서 때로는 자신도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분께선 나 같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나 그분께 답변할 수 없고, 우리는 함께 법정으로 갈 수가 없다네. 우리 사이에는 우리 둘 위에 손을 얹을 심판자가 없구려 몇몇 히브리 수사본들 ` 칠십인역 ` 페쉬타는 “우리 사이에 제 손을 / 우리 둘 위에 얹을 심판자가 있다면!”으로 읽는다. (9,32-33). 욥은 자신이 겪는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하느님 자신이라고, 그래서 결국 그분과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욥에게 일차적으로 제시되는 담판의 방식은, 인간 사이에서처럼, 하나의재판이다. 물론 욥은 하느님과 자신이 소송 상대자가 될 수 없음을, 그래서 그분과 자기 사이에는 어떠한 법정도 설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욥은 이러한 담판 방식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 실제로 욥은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 놓인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한 희망을 계속 법적인 용어로써 기술해 나간다. 나. 희망의 보루: 제삼의 존재: 9,33; 16,18-21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삼의 존재가 희망의 보루로 등장하다. 이 존재는 먼저, 우리가 직전에 본 바와 같이, 욥과 하느님사이의 잘잘못을 가려줄수 있는 “심판자”의 모습으로 부각된다(9,33). 그러나 욥은 곧바로 이러한 판관이 있을수 없음을 인식하고 다시 절망의 상태로 떨어진다: 그분께서 당신의 매를 나에게서 치우시고, 그분의 공포가 나를 더 이상 덮치지 않는다면! 나 두려움없이 말할 수 있으련만! 그러나 나로서는 어쩔 수 없구려(9,34-35). 비록 한날 불가능한 희망으로 즉시 끝이 나기는 하지만, 이로써 무고하게 고통을 당하는 자신과 자기를 원수처럼 대하시는 하느님사이에 제삼의 존재가 있어야 함을 욥이 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이러한 의미에서, 몇몇 히브리 수사본들과 중요한 고대 번영본 둘이 위 9,33의 “... 심판자가 없구려”라는 한탄을 “... 심판자가 있다면!”이하는 원망형으로 수정한 의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욥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기 신앙의 명예(16,17참조: 내 손에는 폭력이란 없고, / 내 기도는 순수하건만)를 회복시켜 줄 수 있다고 여기는 제삼의 존재는 다시 “증인”의 형태로 나타난다. “심판자”와는 달리, 욥은 이 제삼의 존재에 대하여 뚜렷한 확신을 내보인다: 땅이여, 내 피를 덮지 말아다오, 내 부르짖음에 안식처는 나타나지 말아다오. 지금도 나의 증인은 하늘에 계시네, 나의 보증인은 저 높은 곳에 계시네. 내 친구들이 나의 빈정꾼, 그러나 나는 하느님을 향해 눈물짓는다네. 아, 그분께서 앞의 “증인/보증인”을 가리킨다. 한 인생을 위하여 하느님과 논쟁해 주신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본문에서는 “사람의 아들과 그 이웃”으로 되어 있지만, 몇몇 히브리 수사본들을 따라 “아들”을 히브리말에서 이와 꼴이 비슷한 “사이”로 읽는다. (시비를 가리시듯). (내게 정해진) 그 몇 해가 지나면, 나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기 때문이라네(16,18-22). 욥은 이제 완전히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그는 성서에 깊이 뿌리를 내린, 살해된 이들의 피갚음을 하시는 하느님 자신을 기억한다. 아우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예훼님은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라고 말씀하신다(창세 4,10; 또한 창세 37,26; 이사 26,21; 에제 24,7; 마태 23,35; 묵시 18,24도 참조). 욥은 자신이 죽으면, 그것은 결국 타살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자기가 흘린 피가 흙으로 덮이지 말고 계속 복수를 부르짖음으로써, ‘복수’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증인으로 나타나서 자기가 죽은 뒤에라도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를 그는 바란다. 그것은 소망 이상의 것이다. 욥은 자기 피에 대한 증인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자신한다(지금도 나의 증인은 하늘에 계시네, / 나의 보증인은 저 높은 곳에 계시네). 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그렇고, 자기가 죽은 훗날에도 이 증인은 늘 계실것이며, 언젠가는 당신의 역할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존재가 누구인지는 아직 선명하지 않다. 그분께서는 하늘 곧 하느님의 영역에 계신다. 또한 욥은, 친구들은 자기를 빈정거리지만 자기는 하느님을 향해 탄원의 눈물을 짓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 증인이 자기와 같은 인생을 위해서 바로 이 하느님과 논쟁을 벌여주시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증인이 하느님 자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존재라고 단정짓기도 어렵다. 욥은 다시 절망의 암흑을 걸으며 심판자, 증인에 이어 제삼의 빛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다. 구원자이신 하느님: 19,25-27 그 빛은 구원자에 대한 확신으로 주어진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나의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후에라도, 이 내 몸으로 또는 “이 내 몸으로부터”, “이 내 몸이 없이도”로 옮길 수도 있다. 나는 하느님을 뵈오리라. 내가 기어이 뵈옵고자 하는 분, 나의 두 눈은 다른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직여: “나의 두 눈은 보리라, 그리고 다른 이가 아니다.” 위와 같이, 또는 “다른 이(의 눈이)아니라 나의 두 눈이 보리라”로 옮길 수도 있다. 내 간장 본디는 “신장”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장을 감정과 사고의 자리로 여겼다. 여기에서는 신장을 동경의 주체로 여기고 있다. 이 속에서 녹아내리는구나(19,25-27). 헨델의 「메시아」에 나오는 아리아(“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여기서는 19,25-26만이 불려지는데, 번역은 우리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로도 잘 알려진 이 구절로써 대화 부분의 욥기는 그 정점에 다다른다. 욥에게 결정적 계시가 부여된 것이다. 구원자(히브리말로 고엘)는 원래 한 가정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이 가정의 가족들을 보호하고(경제적 이유로 가족중 누가 종으로 팔렸으면 그를 속량한다), 이 가정의 재산이 남 또는 다른 가문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며(토지등이 다른 가문에 팔렸으면 이를 도로 사들인다), 그 가족 가운데 누가 살해되었을 경우에는 복수를 대신하며, 대가 끊길 경우에는 망자의 부인과 함께 자손을 낳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에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해야(신명 25,6)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닌 사람이다(레위 25,25-26, 47-49; 민수 35,19; 신명 25,5-10; 2사무 14,11; 룻기 2,20). 제 2이사야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고엘로 나타나신다.(이사 43,14; 44,24; 52,9). 그분께서는 가장 가까운 혈족으로서 당신 백성을 책임지시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을 속량하시고 그들의 원수를 갚아주는 분이 되시는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와준다. 두려워 말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야훼의 말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를 구원하는 이(=고엘)다(이사 41,14). 욥은 이러한 자기 구원자의 현존을 확신하면서 이를 장엄하게 선포한다. 이 구원자께서 종국에는 당신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심으로써(일어서리리라) 욥이 그토록 갈망하던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원자와 하느님은 동일한 존재이시다. 욥과 하느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심판자나 증인처럼 제삼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 자신이시다. 원수라고 여겨왔던 하느님께서 욥의 구원자 곧 그에게 ‘가장 가까운 친족’이시다. 부재(不在)의 하느님과 원수이신 하느님 앞에서 욥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일하신 하느님께서 이제 구원자로 ‘가장 가까이’ 현존하고 계심을 욥은 깨닫게 된 것이다. 이와 아울러서 욥의 신앙과 희망은 이제 정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심판자와 관련해서 욥은 하느님과 시시비비를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불가능한 희망을 품었고(9,32-33), 증인과 관련해서는 이 존재가 자기를 위해서 하느님과 논쟁을 벌여 시비곡직을 가려주기를 바랐다(16,21). 그러나 여기서는 하느님을 뵈옵는 것, 그분의 현존만으로 만족한다. 그분의 현존이라는 은혜야말로 다른 모든 것, 그의 불행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상대화하는 것임을 욥은 깨닫는다. 아무런 조건 없이, 반대급부적인 기대없이(=까닭없이: 1,9)하느님만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희망일 따름이다. 이제 하느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만남은 아직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욥이 속이 타도록 열망하는, 자기의 두 눈으로 구원자 하느님을 뵙게 되는 이 대전환의 ‘언제’와 ‘어떻게’는 분명하지 않다. 위 구절에서 먼지가 욥의 무덤을 지칭하는지,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후가 죽은 다음을 뜻하는지 불투명하며, 그리고 구원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욥에게 작용할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욥의 저자는 지적 호기심에 이끌리지 않고 이를 자제할 줄 안다(사도 1,6-8참조). 중요한 것은 장차 ‘얼굴에 얼굴을 맞대고’ 뵙게될 구원자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죽음의 장벽까지도 깨뜨려버리는 신앙과 희망이다. 그리고 이 신앙과 희망은 그 어떠한 지식이나 인식보다도, 그리고 고통과 죽음보다도 더 강하고 확실한 것이다. 라. 마지막 도전: 31,35-37 그러나 이로써 모든 것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삶은 그것이 안고 있는 고통과 함께 계속된다. 희망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실현시켜 주실 때까지 신앙인의 가슴 속에서 타오른다(19,27 3행 참조). 신앙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삶이 가져오는 새로운 도전에 항상 새롭게 맞서 나가는 과정이다. 욥 역시 오르내림을 계속하여 다시 밑바닥가지 떨어지기도 한다. 거기에서 욥은 결코 굴복할 수 없다는 자만심과 함께, 자비를 구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당당하게 나아가 대결을 벌이겠다고 하느님께 마지막 도전자을 내놓는다: 아,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여기 나의 서명이 있도다. 전능하신 분께선 내게 대답하실지어다. 나의 고소인이 쓴 고소장은 (어디 있느뇨!) 나 그것을 반드시 내 등에 지고 다니며 면류관처럼 내 (머리에) 두르련만, 그분께 내 발걸음을 낱낱이 밝히고, 나 제후처럼 그분께 다가가련만. 마. 하느님의 현현: 38,2-40,2; 40,7-41,26 결국 하느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비로소 하느님은 야훼(주님)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구약성서에서 이름은 그것이 지칭하는 존재의 본질을 나타낸다. 욥과 친구들이 펼치는 이론적`신학적 논쟁에서가 아니라, 현현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욥에게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욥이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조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느님께 다가갈 수 없으며,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무엇을 말씀하시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이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타나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말씀하신다. 인간은 하느님 현현의 그 절대적 은혜를 감사로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폭풍 속에서 말씀하신다(38,1). 폭풍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상징이다. 그분은 인간이 전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감추어 계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신다. 그리고 당신을 드러내 보이실 때에도 그분은 계속 인간에게 감추어 계신 분으로 남아 계신다(이사 45,15 참조: 정녕 당신께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이시니이다 ; 또는 ... 감추어 계신 하느님 ... 으로 옮기기도 한다. Deus absconditus, Deus revelatus). 이러한 이중적 사실을 폭풍이라는 상징이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다가오시어 말씀하신다. 그러나 욥의 질문들에는 대답하지 않으신다. 사실 욥기가 제기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으리라 기대하고 이 하느님 말씀을 읽는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주제별로 나눈다면 다음과 같이 38-41장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첫째 말씀」 38, 2-3 : 네가 누구냐? 38, 4-7 : 땅의 주재자 38, 8-18 : 바다의 주재자 38, 19-21 : 빛과 어둠의 주재자 38, 22-30 : 기후의 주재자 38, 31-38 : 하늘의 주재자 38, 39-39,30 : 동물 세계의 주재자 40, 1-2 : 주님의 꾸짖으심 「욥의 첫째 답변」 「하느님의 둘째 말씀」 40, 7-14 : 주님의 꾸짖으심 40, 15-24 : 베헤못 40, 25-41,26 : 레비아단 「욥의 둘째 답변」 하느님께서는 욥의 도전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도전을 하신다: 지각없는 말로 나의 뜻을 어둡게 하는 이 자는 누구냐?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38, 2-3). 그리고 너에게 물을 터이니 나에게 대답하여라(38, 3) 하시면서 오히려 욥에게 질문을 퍼부으신다. 질문을 하는 것은 욥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욥이 당혹할 수 밖에 없는 물음까지도 서슴치 않으신다: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는가?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는 이에 응답할지어다(40, 2). 이에 대해 욥은 놀라울 정도로 자세와 어조를 누그러뜨린다. 4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리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이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인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침묵의 상징으로 욥은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이다. 5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으로리다. 또는 “대답할 수가 없나이다”, “재론하지 않으오리다”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두 번 (말씀드린 바) 덧붙이지 않으오리다(40, 4-5).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어 직접 말씀드리고, 또 그분께서 물으시면 대답하리라고 그렇게 열망하던 욥과 비교했을 때 커다란 차이가 드러난다. 그러나 욥은, 논쟁 또는 소송의 상대자로서 하느님과 대립했을 때 자신은 그분께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리라고 어렴풋이나마 예견했었다(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하리: 9,3). 그 예감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위의 5절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욥이 하느님께 완전히 굴복한 것은 아니다. 다만, 만물의 창조주와 주재자이신 하느님(38, 4-39,30)과 비교했을 때 자신은 그분과 맞설 수 없는 하찮은 존재임을 수긍하고 고백한다(창세 32,11; 출애 3,11; 이사 6,5; 예레 1,6참조). 결국 하느님 앞에 세워진 인간은 자신을 되돌아 볼 수밖에 없다. 되돌아 본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무력하며 무상한 존재인지 절감하게 된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면 그 자체로서 이미 하느님의 심판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별다른 결정이 없이도 인간 스스로가 자신에 해당되는 판결을 깨닫는다. 이로써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자기 비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작기 비하’는 단순히 하느님쪽에서 인간을 무시하거나, 인간 쪽에서 근거없이 자신을 낯추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아래에서만 존립하고 존속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조차 교만으로 물들기 마련이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인간에게 원초적인 교만,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자신을 신적 위치에 세워놓으려는 인간의 거의 본질적인 교만(창세 3,5참조)을 제거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서 자기 본연의 모습을 보고 이를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위치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 이에 따른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자신에 대한 겸손,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긍정적으로 발전될 수 있는 밑바탕이다. 위에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주제별로 나누어 보았는데, 그 구조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느님께서는 “네가 누구냐?”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인간 욥으로 하여금 당신과의 관계 아래 자신을 되돌아 볼 것을 요구하심으로써 당신의 「첫째 말씀」(38, 2-40, 2)을 시작하신다: 지각없는 말로 / (나의) 뜻을 어둡게 하는 이 자는 누구냐?(38, 2). 이어서 질문 형식으로, 인간의 위치에서 세상의 창조주이며 주재자이신 당신을 생각하도록 하신다. 이러한 「첫째 말씀」을 끝맺는 꾸짖으심(40, 2)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교만으로 자신을 잔뜩 부풀린 인간(38, 2-3에서처럼 여기서도 하느님께서는 욥을 직접 거명하지 않으신다)으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하신다). 「둘째 말씀」역시, 하느님과 자기 사이에서 양자택일적으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인간(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 하느냐? / 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나를 단죄하려 하느냐?: 40,8), 자기를 신격화하려는 인간(네가 하느님의 팔을 지녔으며 / 그와 같은 목소리로 천둥칠 수 있느냐?: 40,9)을 꾸짖으시면서 반성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시작하신다. 이어서, 신화적 색조를 띤 말씀으로, 욥이 보여준 너무나 인간적이고, 인간 역사 중심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전망을 확대시켜 주신다. 그러나 「첫째 말씀」처럼 욥에 대한 질책으로 「둘째 말씀」을 끝맺지 않으신다. 38, 2-3, 40,2 그리고 40, 6-14 세 번으로 충분한 것이다. 인간은 그 모든 나약성과 무상성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느님과의 대화 상대자로 창조된 존재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말을 욥의 몫으로 허락하신다. 어쨌든 하느님의 「첫째 말씀」으로 욥은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겸손을 깨치고 자신을 낮춘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과의 만남, 이를 통한 심판의 한 면일 따름이다. 하느님의 심판은 또 다른 한 면을 지향한다. 심판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은 하느님의 「둘째 말씀」과 이에 이은 욥의 대답으로 실현된다. 하느님의 두 번째 말씀뒤에야 비로소 욥은 완전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욥이 친구들과 벌인 논쟁의 결론이나, 또는 욥 스스로가 이론적`신학적고찰을 통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보이시는 사건, 이로써 이루어지는 욥의 신앙 체험이 가져다 주는, 결국 하느님 자신이 주신 통찰인 것이다. 저는 알았나이다, 당신께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알았나이다. “지각없이 (나의) 뜻을 가리는 이 자는 누구냐?” 욥은 38,2에서 자기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여기에서 거의 말 그대로 반복한다. 그렇습니다, 제겐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나이다. “이제 듣거라, 내가 말하려느니, 너에게 물을 터이니 나에게 대답하여라.“ 욥은 여기에서도 38,3과 40,7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한다. 당신께 대하여 귀로만 직역: “귀의 들음으로만.” “풍문(또는 소문)으로만”이라고 옮길 수도 있다. 들어왔던 이몸, 그러나 이제는 저의 눈이 당신을 뵈었나이다. 그래서 (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자신을)부끄럽게 여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 동사가 여기에서는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아 ‘자신을 낮추다, 자신을 싫어하다, 취소하다’등 여러 가지로 옮겨진다.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하나이다(42,2-6). 이제 욥은 하느님께서 인간과는 다른 존재이실 뿐만 아니라, 인간과는 다르게 사고하심을 깨치게 된다. 이는 이사야서가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 55, 8-9). 하느님의 뜻(38,2)은 자기 중심적으로, 자신의 실용성과 유용성, 이해(利害)와 실리의 척도만으로 사고하는 인간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사람이 없는 땅, 인간이 (살지) 않는 광야에 비가 내리게 하고, 황폐하고 황량한 광야를 흠뻑 적시며, 풀밭에 싹이 트게 하기 위하여 (누가 길을 놓았느냐)?(38,26-27). 또한 하느님께서는 주고 받는 인간적인 교환 법칙에 따라 계산하고 행동하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응보사상 역시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하느님께 강요할 수 없는 교리이다. 선행 또는 악행이라는 물건을 하느님께 주었으니, 하느님께서는 이에 따라 행복 또는 불행을 내놓으시라고 인간이 요구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실행 또는 불이행으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조종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응보하지 않으신다. 응보의 법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대응하시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판단을 내리신다. 응보의 원칙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가 절대적인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욥 역시 친구들처럼 인간적인 한계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인간적인 판단 기준으로 하느님을 판단하였다(당신께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몸:42,5).욥은 친구들이 대변하는 전통적인 응보 교리를 부정하면서도, 결국은 그 역시 ‘주고 받음’이라는 상업적 교환 개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산적 사고방식의 차원에 머무른 것이다. 여기에 욥이 깊이 깨달아 스스로 참회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잘못이 있다:그래서 (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하나이다(42, 6). 물론 욥은 친구들이 비난하는 그런 죄악들을 저지르지는 않았다(22, 5-11). 그리고 31장의 「무고 선언」이 밝히는 바와 같이, 하느님과 다른 인간들에 대해서 한 점 부끄럼없는 양심을 지녔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욥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인간이 범하기 쉬운 죄 그 자체를 범한 것이다. 욥은 고통과 불행속에서 자기가 의롭고 정당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렇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판결을 내린다. 결국 인간의 판단 기준 아래로 하느님을 끌어내려 그분을 판단한다. 이는 인간 사고의 규범에 따라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느님을 규정짓는 인본주의적 주관주의이다. 결국 욥은 자기 자신을 제2의 '심판자-하느님‘으로 만드는 인간의 교만이라는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의 현현이라는 은총을 통해서 욥은, 하느님께 대한 희망으로 죽음의 벽을 넘었듯이, 하느님을 향하여 자기 한계를 넘어선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셔서 당신과 욥사이에 있는 심연에 다리를 놓아주셨기 때문이다. 결국 욥은 하느님을 뵙게 된다. 하느님을 뵙는 신체험 그 자체가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사실이다(19,26-27과 42,5). 이 신체험이라는 신비 안에서 욥의 그 모든 문제들은 신비로이 해결된다. 하느님을 뵙는 은총과 욥의 참회를 통해서, 앞서 말한 바 있는 심판의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면이 실현된다. 곧 어떠한 대립이나 모순이 없이 하느님과 욥이 서로를 완전히 받아 들이는 것이다. 욥은 자기의 위치에서 하느님을 그 본연의 모습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는 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이것이야말로 욥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그 외의 모든 것, 논리와 이론, 옳고 그름, 정당함과 부당함, 행과 불행,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도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친구들은 하느님을 변론하기 위하여(13,8)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고통을 겪으며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는 욥과 연대하기보다는 이론과 신학 쪽에서서 욥을 탄핵하게 된다. 그들의 말 속에는 진실의 일면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고통속에 있는 욥에대한 ‘따스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었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모든 인간적 논리와 이론, 인간적 지혜와 판단, 인간적 기준과 척도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그분의 신비를 받아들이려는 ‘넓은 마음’과 경외심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욥처럼 그의 친구들 역시 당신의 사랑으로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 화해를 욥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신다(42, 7-9). 고통을 통해 더욱 깊은 차원에서 하느님과 화해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사명과 능력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이를 실행에 옮긴다.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다시 하느님의 은혜를 전하는 일꾼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욥기의 저자가 의도하는 「욥의 회복」(42,10-17)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원래의 욥 설화에서는 욥의 복구가 그의 정당함에 대한 보상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욥기 전체의 관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욥이 제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드리자 주님께서는 그의 운명을 되돌리셨다(42,10). 참회(42,6)에 이어 곧바로 욥이 행복을 되찾지 않고,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린 후에야 비로소 하느님께서 욥의 운명을 되돌리셨다는 데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곧 욥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적어도 외적으로는 예전과 다름없이 계속되는 불행속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한 뒤에야 비로소 행복을 되찾는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항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어떠한 강제적 행동으로 ‘어쩔수 없이’ 욥의 운명을 되돌리도록 강요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절대적 자유속에, 욥을 향한 사랑으로 그에게 지상(地上)의 행복을 부여하신 것이다. 되돌려진 욥의 운명 역시 하느님의 ‘무상적(無償的)’은총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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