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의록(10.-12)

2015. 9. 17. 오전 8:26:10

글자

욥기강의록(10.-12)


욥 기(10)


4. 고통과 절망 속에서의 절규

‘욥이 겪고 있는 고통은 스스로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벌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욥에게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여 그분과 화해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면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옛날처럼 행복을 내리실 것이다.’ 욥은 친구들의 이러한 질책과 권고가 고통과 절망의 심연에 빠진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항변한다. 그뿐만 아니라, 친구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전통적인 인과 응보 사상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거부한다.

가. 친구들의 ‘신학’과 욥의 ‘삶’
물론 욥으로서도 친구들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자기 역시 계속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면, 그들과 다르지 않으리라고 시인한다:
    자네들이 내 처지에 있다면,
    나 역시 자네들처럼 말해주겠지.
    자네들에게 (좋은) 말을 늘여 놓으며
    자네들이 (불쌍하다고)머리를 젓겠지.
    내 입으로 자네들의 기운을 북돋우고,
    내 입술의 연민은 (슬픔을) 줄여주었겠지  2행의 뜻이 분명하지 않다. ‘줄여주다’에 해당하는 히브리 낱말은 본디 ‘억제하다/삼가다’등을 뜻한다. 칠십인역과 페쉬타는 “나는 내 입술의 연민을 [또는: 내 입술의 동정(의 말을)] 억제하지 않았겠지”로 옮긴다. “연민”에 해당하는 낱말을 “움직임”으로 이해하여 “내 입술의 움직임을 억제하지 않았겠지”, 또는 “내 입술의 움직임은 (슬픔을) 줄여주었겠지”로 옮기기도 한다.
(16,4-5).
그러나 이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직접 고통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것이 야기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면할 때, 자기 역시 동의해 왔던 친구들의 이론과 신학, 그리고 구체적인 삶 사이에는 크고 깊은 괴리가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로써 고통을 직접 겪는 욥과 그 고통을 바라보는 친구들 사이에도 또한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친구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신앙의 현인들이 믿고 가르치고 또 실생활로 증거해 온 진리(5,27; 8,8-10; 15,17-19), 밭을 갈아 불의를 심은 자와 재앙을 뿌린 자는 그것을 거두기 마련(4,8; 그리고 잠언 14,22; 22,8; 집회 7,3; 호세 10,13; 갈라 6,7도 참조)이라는 평범한 사실과,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욥의 경우에 내린 자기들의 신학적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는 욥을 용납할 수가 없다. 욥으로서는 ‘좋은 씨만을 뿌렸는데 가라지가 생길 수도 있는 현실’(마태 13.27참조)을, 그리고 이론과 실재, 신학과 삶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그 괴리를 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고통의 밖에 서서 예부터 내려오는 신조만을 되풀이하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것들은 내가 이미 많이 들어 왔네,
   자네들은 모두 쓸모없는 위로자들이구려.
   그 공허한 말엔 끝도 없는가?(16,2-3)
욥은 친구들의 위로와 이론을 정면으로 배격하기에 이른다. 현실에 답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까지 끌어들여 뒷받침해야 하는(22,5-11에 나오는 욥에 대한 엘리바즈의 단죄 참조) 그들의 이론은 결국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욥의 문제를 치유하고자 하는 친구들은 돌팔이 의사일 수밖에 없다(13,4). 그래서 친구들의 말은 모욕을 당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모욕이요,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또 다른 아픔이 되는 것이다(19,3참조).

나. 욥의 무고 선언: 31장
친구들이 주장하는 인과응보 사상, 그리고 이와 관계되는 신학을 욥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되어야 하는 악행을 결코 범한 일이 없다는 그의 확신이다. 물론 욥은, 친구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15,14; 25,4) 자신이 완전무결하지는 못함을,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인간도 의롭다고 할 수없음을 인정한다:
    물론 나도 그런 줄은 알고 있네,
    하느님 앞에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하느님께 소송을 건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하리.
    지혜가 충만하시고 직역: “마음이 현명하시고.”
능력이 넘치시는 분,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 하느님을 서술할 수도 있고, 다음 행에 나오는 “누가”(=사람)를 서술할 수도 있다(이 경우 이 문장은 “지혜가 충만하고 능력이 넘치더라도”가 된다). 일반적으로 (위의 번역에서와 같이) 전자의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여겨진다.

    누가 그분과 겨루어서 직역: “(목을) 뻣뻣하게 하여서.”
무사하리요?(9,2-4).
그러나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에 해당해야 하는 죄악, 곧 응보의 등식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신념만은 욥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에게 이유없이 고통을 가하는 하느님 앞에서도 굽힐수 없는 이 자긍심이 육체적`정신적`영신적으로 극한 상황에 내몰린 욥을 지탱해 주는 하나의 기둥이기도 하다.
    난 온전하네! 난 내 목숨에 관심없고
    내 생명을 멸시한다네(9,21)
    나의 권리를 박탈하신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내 영을 쓰라리게 하신 전능하신 분께서 (살아계시는 한),
    나에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하느님의 숨 또는 “영”으로도 옮긴다.
이 내 코에 있는 한,
    맹세코 내 입술은 허위를 말하지 않고,
    내 혀는 거짓을 이야기 하지 않으리.
    결단코 나는 자네들(=친구들)의 정당함을 인정할 수 없으며
    내가 죽기까지 나의 무죄함을 포기하지 않으리.
    나의 정당함을 우켜쥐고 놓지 않으며,
    내 양심은 내 생애 어떤 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리(27,2-6)
욥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자기의 정당함과 무고함을 주장해 왔다: 6,28-30; 9,21; 10,7; 12,4; 13,18.23; 16,17; 23,10.12. 이러한 믿음이 욥으로 하여금 친구들과 전통적인 교리를 거슬러, 자신을 에우고 있는 절망과 눈 앞에 닥친 죽음을 거슬러, 그리고 하느님을 거슬러 초인적으로 저항해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는 결국, 친구들과의 대담을 마무리하는 독백(29-31장)에서 철저한 자기 반성과 총고백(물론 무엇무엇을 저질렀다가 아니라, 저지르지 않았다는 부정적형식의 고백)을 하게된다(31, 1-34.38-40). 이는 현재 자기가 처한 고통의 현실과(29-30장),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최종적 도전 곧 그분을 만나뵙고자 하는 열망의 토로(31,35-37)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정당화의 마지막 노력이다. 이러한 자기 반성에서 욥은 단순히 율법이나 계명의 차원에 머루르지 않는다. 그는 하느님께대한 깊은 경외심,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고(31,4) 이에 따라 판결을 내리시는 심판자 하느님 앞에 서게 되리라는 자각, 그리고 사회저변층의 사람들, 심지어 자기의 남녀 종들까지도 자기와 같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31,15) 다른 인간들에 대한 깊은 동질성과 유대성을 바탕으로 한 높은 윤리의식속에서 자기 반성을 한 끝에 자신의 온전함(31,6)을 고백하는 것이다.
욥은 자기의 잘못은 간과한 채 단순히 하느님께 탓을 돌리는 무책임한 인간이 아니다. 이 점을 31장의 이 「무고선언」이 분명하게 한다. 1절에서 8절까지 욥은 음란(1-4절)과 허위(5-6절)와 탐욕(7-8절)이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에 빠지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자기의 모든 것을 보고 아시며(4절; 시편 139도 참조)이에 따라 자신을 심판하실(6절) 하느님과의 관계에 부적절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악을 욥은 자신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욥은 이에 대한 자신의 무고함을 ‘자기 저주’로써 확인하고 강조한다. 곧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탐욕을 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면 이에 상응하여 ‘자기가 뿌린 것을 남이 먹고, 자기의 농작물들은 뿌리채 뽑혀도 좋다’는 것이다(31,8).
9절에서부터 욥은 구체적인 사항들에대한 반성을 제시한다. 첫째는 간음이다(9-12절). 간음으로 남의 부부관계에 해를 끼치는 자는 자신의 부부관계를 파괴하는 자이다. 욥은 이러한 행위가 심판받아 마땅한 추행으로서, 만일 자기가 이를 저질렀다면, 그 심판이 지금, 자기의 부인과 자기의 소유를 통해서 내려져도 좋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욥은 남녀 종들의 권리와 관련하여 자기 반성을 한다(31,13-15). 종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적 장치가 없지는 않았지만(출애 21,1-11), 실제에 있어서느 이들이 아무런 권리 보장도 받지 못한채 주인의 도구로 전락된 삶을 살아야 했음을 쉬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욥은 이들의 존엄성이 신학적인 바탕 위에 세워진 것임을 통찰한다. 이들 역시 주인인 욥과 같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곧 그분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이다(31,15). 그렇기 때문에 종들에 대한 자세와 행동 역시 하느님 자신께 대한 책임성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16-23절에서 욥은 사회저변층의 사람들, 곧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 물질적 곤궁에 빠진 이들에 대한 자신의 연대성을 드러낸다. 이 연대성 곧 이웃 사랑을 욥은 고아들에게는 아버지, 과부에게는 형제됨으로써 구체화하였다(18절). 아울러서, 욥은 설사 자기가 법적으로 정당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약자들에 대하여 자비스럽지 못한 행동은 하느님께 용납될 수 없다는 높은 도덕적 자각심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어, 24-25절에서 욥은 황금과 재산, 그리고 권력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 놓지 않았음을, 배금주의`황금만능주의`권력지상주의에 빠지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세만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내세에관한 사고가 아직 정립되지 않은 구약성서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富)가 지니는 의미와 이에 따른 위험과 유혹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들에게 부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인정과 강복의 가시적 모습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는 한, 부가 자기 옆에 있는 한, 하느님 역시 절대적으로 자기의 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보다 부를 더 중시하고, 하느님이 아니라 부를 최상의 존재와 가치로 모시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맘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가 16,13)라는 예수님의 경고가 옛날 사람들에게도 매우 현실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욥은 더 나아가서 피조물을 신격화함으로써 하느님을 배신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도 명백히 한다.
원수를 미워하고 그의 불행을 즐기는 것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욥이 29-30절에서 말하는 바는 아직 원수 사랑의 차원은 아니지만, 이미 신약성서의 이상(理想)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있다. 31-32절에서 욥은 친척들과  이웃들, 그리고 길손들에 대한 후한 인심을 말한다. 특히 (낯선 나그네들에 대한) 손님 접대는 고대 중동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 31장에서와 같은 총고백에서 이러한 사항은 당연히 빠질 수가 없는 것이다. 33-34절은 죄를 범하고서도 다른 사람들의 질타와 단죄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감추는 위선에 대해서 반성한다. 욥은 그러한 인간의 나약함에 빠져 진실함과 진솔함을 저버린 적이 없다고 한다.
만일 내 밭이 나를 거슬러 울부짖고, / 그 이랑들도 함께 울어댔다면으로 시작하는 38-40절은 원래 34절 다음에 있었는데 전승 과정에서 잘못되어 31장의 마지막에 자리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농경 사회에서 땅이 지니는 의미는 막대하다. 땅은 곧 인간의 생명이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표현도 나오게 된 것이다. 땅과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하나의생명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거기에 사는 인간들이 죄를 짓게 될 경우 당도 또한 그 죄의 결과를 겪게되고, 또 죄스런 인간들을 거슬러 땅이 울부짖게 되고, 인간이 잘못되면 땅도 잘못되어, 밀 대신 가시가 나오고 / 보리 대신 잡초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욥의 「무고선언」은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율법이나 계명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행동의 원천인 ‘마음’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 종교적`윤리적 동기까지 포함하는 철저한 자기 반성을 드러낸다.

다. 약자들과 하나되어: 21; 24장
욥은 자기의 특수한 경우만을 내세워 전통적인 응보사상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방금 우리가 고찰한 「무고선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옴을 우리는 보았다:
    위의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몫이 무엇이고,
    높은 곳의 전능하신 분께로부터 오는 유산이 무엇이리요?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
    나쁜 짓 하는 자들에게는 재난이 아닌가?(31,2-3)
이렇게 욥은 일면 근본적으로 응보사상을 수긍한다. 그러면서도 이 사상이 적응되지 않는 고통 속에서 자기의 전망을 확대해 나아간다. 그는, 엘리바즈가 처음부터 인정하는 바와 같이(4,3-4), 예전에도 어려움과 고난에 처한 사람들과 연대하여 그들에게 힘과 도움이 되어 주었다(30,25). 그러나 이제 ‘고통의 바다’한가운데서 욥은 구조적인 불의를 자기 몸으로 직접 겪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기처럼, 아니 자기보다 앞서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이들과 하나되어, 그들이 겪는 억울함을 자기의 짖이겨진 육체와 더불어 대변하게 된다.
이미 대화 부분을 개시 하는 독백에서 욥은 고생하는 이, 영혼이 쓰라린 이, 차라리 죽음을 바라는 이들(3,20-22)에 관하여 하느님께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이제 ‘악인들의 성공’(21,7-16)과 ‘벌받지 않는 악인들’(21,17-34)의 문제, 그리고 ‘사회적 불의’(24,1-12)를 거론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중간에 위치한 욥의 발언들은 물론 욥의 개인적인 말이면서 동시에 욥과 같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대표성도 지니는 것이다.
욥의 눈에 우선적으로 비치는 것은 인과응보라는 대원칙이 현실에서는 작용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반대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곧 선인이 행복을 누리지도, 악인이 불행을 당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반대로 악인은 행복을 구가하고 약한 선인은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악인들은 (오래) 살며
    늙어서조차 힘이 더하는가?
    자식들은 저들 앞에 본문에는 “저들과 함께”라는 말이 또 들어 있으나, 앞의 “저들 앞의”와 중복되기 때문에 많은 경우 생략한다.
든든히 자리잡고,
    후손들은 저들 눈앞에 (항상) 있지.
    저들의 집은 평안하여 무서워할 일이 없고,
    하느님의 회초리는 그들 위에 내리지도 않지.
    저들의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저들의 암소는 유산함이 없이 새끼를 낳지.
    저들의 아이들을 양떼처럼 풀어놓으니,
    그 어린것들이 뛰어논다네.
    손북과 비파에 맞추어 목청 돋우고
    피리소리에 흥겨워하지.
    행복 속에 나날을 보내고선
    순식간에 고통속에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그러나 칠십인역과 타르굼처럼 “편안히”로 이해하기도 한다.
저승으로 내려가네(27,7-13).
악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의식적으로 부인하고 배척한다. 그리하여 무신(無神)적이고 반신(反神)적인 세계관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도 하느님께 한다는 소리가 “우리 앞에서 비키소서,
    당신의 길은 안다는 것이 우리 마음에는 내키지 않나이다.
    전능하신 분이 뭐길래 우리가 그를 섬기며,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에게 매달리리요?“(21,14-15).
그런데도 이들은 행복 속에 자손과 가문과 재산이 번창함을 누리다가, 사는 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죽을 때에도 아무건 아픔을 겪지 않고 건강히 수를 다하여 죽는다. 삶이 동반하는 여러 가지 재난도 그들은 용케 피하고, 죽어서도 호화로운 무덤속에 몸을 눕힌다(21,30-33; 시편 73도 참조).
욥은 불의의 사회적 차원을 직시한다. 강자가 약자의 재산을 탈취하고, 의지 할 데 없는 소외계층 사람들을 수탈하며, 가난한 이들을 밖으로 내모는 현실에 그는 눈을 돌린다:
    사람들은 경계선을 밀어내고
    가축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들의 나귀를 끌어가고
    과부의 소를 담보로 잡는데,
    가난한 이들을 길에서 내쫓으니,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은 죄다 숨을 수 밖에 (24,2-4)
이렇게 불의가 자행되는데도 과연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분을 아는이들 곧 그분께 믿음을 고백하고 이에 따라 살아가는 성실한 사람들은 언제면 그분의 날을 보게 될 것인가?(24,1). 이제 욥은 불의하게 내몰려 숨을 수밖에(24,4)없는 이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대변자로 나서는 것이다.

라. 문제는 하느님 자신
욥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는 친구들의 위로도, 그들과의 논쟁에서 이기는 것도, 자기의 세계관이나 신학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욥이 원하는 바는 오직하나, 하느님 자신이다. 욥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며, 신학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친구들과 대화/논쟁을 벌여가는 가운데서도 욥이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친구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대화 중에 욥은 계속 하느님에 대해서,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직접 하느님께 항변과 원망, 탄식과 탄원의 기도를 드린다: 7,7-21; 9,25-31; 10,2-22; 13,20-14,22; 17,1-5; 30,20-23.
욥이 하느님께 그토록 애절하게 바라는 것은 옛 건강과 행복과 영화의 복구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진흙 바닥에 내동댕이 치신 자기의 명예를 그분이 손수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욥은 하느님을 직접 만나뵈옵기를 갈구한다. 하느님께 직접 말씀드리고 자신에 대한 변론을 펼칠 수 있게 욥은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기를 바란다:
    나는 전능하신 분께 여쭙고
    하느님께 항변하고플 따름이네(13,3);
    그분께서 나를 죽이려 하신다면 나는 가망이 없네,
    다만 그분 면전에서 나의 길을 변호하고플 뿐(13,15).
또한 얼굴을 마주하면, 하느님께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욥을 원수인 양 고통과 공포로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욥이 저지른 죄악과 악행을 떳떳이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나이까, 저의 죄와 허물들이?
    저의 악행과 죄를 저에게 알려주소서.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감추시나이까?(13,23-24)
욥이 원하는 바는 재판정과 같은 곳이다. 그런 자리가 마련된다면, 하느님과 자기 가운데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가려낼 수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욥은 하느님과 자기 사이에 놓여 있는 무한한 차이를 잘 알고 있다. 그분께서는 창조주(9, 8-10), 만물의 통치자(12,14-25), 그리고 절대적 유일자(23,13)이시다. 반면에 욥은 ‘수명은 짧고 혼란만 가득하며, 꽃처럼 솟아났다 시들고 그림자처럼 사라져버리는’(14,1-2)인간일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욥은 최소한 하느님을 찾아 뵈올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찾을 수조차 없다. 욥의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내적 고통의 밑바닥에는 바로 이 하느님의 부재(不在)가 놓여 있는 것이다:
    오늘도 나의 탄식은 쓰디쓰고,
    신음을 (막는) 내 손 칠십인역과 페쉬타는 “그분의 손”으로 읽는다. 이 경우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하느님의 손이 내리누르고 있음을 의미하므로 뜻이 잘 통한다. 히브리 본문의 뜻이 분명하지는 않지만(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하도 심하여 제 손으로 틀어막아야 한다는 뜻?) 이를 수정할 당위성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은 무겁기만 하구려.
    아, 그분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알기만 하면
    그분의 거처까지 찾아가련만?
    그분 앞에 소송물을 펼쳐놓고,
    내 입을 변론으로 가득 채우련만,
    그분께서 내게 어떤 답변을 하시는지 알아듣고
    그분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련만.
    아니, 내게 관심이라도 두기만 하신다면!
    그러면 올바른 이는 그분과 소송할 수 있고,
    나는 내 재판관으로부터 영원히 풀려나련만.
    그런데 내가 동녘으로 가도 그분께선 계시지 않고,
    서녘 1행의 “동녘”을 “앞”, 2행의 “서녘”을 “뒤”로 옮길 수도 있다.
으로 (가도) 그분을 알아낼 수가 없구려.
    북녘에서 일하시나 하건만 눈에 뜨이지 않으시고,
    남녘 1행의 “북녘”을 “왼쪽”, 2행의 “남녘”을 “오른쪽”으로 옮길수도 있다.

으로 방향을 바꾸셨나 하건만 뵈올 수가 없구려(23,2-9).
여기서 문제가 되는 하느님의 부재는 이론적`철학적 부재가 아니라, 실천적인 부재이다. 인간에게 선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부재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부재는, 인간에게 행복을 내리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손수 고통을 가하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동질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부재와 현존이 흡사 한 동전의 두 면과 같은 것이다. 이로써, 이미 말한 바와같이, 하느님 상(像)에 균열이 생기고 서로 융화할 수 없는 이중의 모습으로 분리되어 욥을 내리 누른다. 인간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으로 믿어지는 하느님과 인간을 내리치시는 하느님, 곧 인간을 원수처럼 다루시는 하느님이시다. 욥이 하느님을 찾지 못할수록, 하느님께서 가하신다고 여겨지는 고통의 강도가 더할수록, 그만큼 욥은 하느님을 원수로 느끼게 된다(16,9). 결국 계시지 않는 하느님과 원수이신 하느님은 동일한 하느님이신 것이다: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감추시나이까?
    저를 당신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13,24).
인간을 원수로 여기시는 하느님(이밖에도 10,16-17; 19,11; 33,10참조)은 결국 당신께서 손수 만드신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직접 파멸시켜버리시려는 모순된 하느님이시다.
    당신의 손이 저를 빚어만드시고선,
    이제 생각을 바꾸시어 저를 파멸시키려 하시나이다(10,8)
더 이상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상태이다. 나무보다도 못한 인간의 상황이다. 나무는 잘린다 해도, 그 그루터기가 흙 속에서 죽는다 해도, 움이 트고 싹이 그치지 않아 가지를 뻗으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은 죽으면 영영 일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14, 7-12).
    나의 날들은 흘러가 버렸고 나의 계획들은 찢겨졌다네,
    내 마음의 소망들도.
    저들은 밤을 낮이라 하고
    어둠 앞에서 빛이 가까웠다 하건만,
    나 무엇을 더 바라리요? 저승이 나의 집이요,
    내가 암흑 속에 잠자리를 펴는데,
    구덩이에게 “당신은 나의 아버지”,
    구더기에게 “나의 어머니, 나의 누이”라 부르는데,
    도대체 어디에 내 희망이 있으리요?
    나의 희망? - 누가 그것을 볼 수 있으리요?
    그것이 (나와 더불어) 칠십인역에는 괄호 속의 말이 본문 안에 들어있다.
저승의 빗장을 향해 내려가리요?
    아니면 (나와) 함께 먼지 속에 안식을 (얻으리요)?(17,11-16)
그러나 욥은 어떠한 고통과 절망 앞에서도 결코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설사 하느님께서 자기를 이 땅에서 제거하신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자신의 정당함이 드러나리라는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 히브리 낱말은 본디 ‘책/두루마리/(석)판’을 의미하나, 넓은 의미에서 글이 쓰여지는 온갖 재료를 뜻할 수있다. 여기에서는 다음의 24절을 고려할 때 ‘비석’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본디는 수동태 문장이다: “아, 제발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 의하여) 쓰여졌으면! / 제발 비석에다 기록되었으면!”

    철필과 납으로 철필로 (또는 정으로) 새겨진 글자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오래 지탱할 수 있도록 납을 붓는 것으로 생각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주었으면! 첫 두행과 같이 수동태 문장이다.

죽음보다 강한, 죽음을 넘어서는 초인적인 희망이다. 그러나 이 희망을 욥 스스로는 성취시킬 수가 없다. 이를 위해서 욥은 어떤 초인적인 존재를 필요로 한다.

[출처]욥 기(10) |작성자아녜스



욥 기(11)


5. 절망을 넘어 하느님께로  욥은 지금까지 누려왔던 행복을 박탈당한 것만이 아니라, 친구들에 의해서 ‘초인적 교만’에 사로잡혀 자신을 하느님보다 더 정당하게 여긴다고 지탄받고(15,7-16참조), 이들이 대변하는 응보의 교리에 의해서 단죄받는다. 이제 욥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밖에 없다. 그러나 그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찾을 수조차 없다. 욥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여건은 절망의 심도와 강도를 더해갈 뿐이다.

가. 절망보다 강한 희망
이성적으로 판당할 때 욥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신앙인으로서의 욥은 모순과 역설의 인간이다. 이는 욥이 특별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가 모순과 역설적 요소로 점철되어 있으며, 신앙은 더욱 그러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비이성성은 결국 초이성성을 말한다. 욥이 추구하는 하느님 자신이 초이성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욥은 절망의 심연과 죽음의 문턱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도약을 이루어낸다. 물론 한번의 도약으로 욥이 희망과 생명의 광명 속으로 돌입하는 것은 아니다. 욥은 마지막 결말이 날 때까지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 하느님에게서 멀어짐과 그분에게로 가까워짐, 하느님의 부재와 현존 사이의 내림가 오름을 계속해 나아간다. 그러면서 때로는 자신도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분께선 나 같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나 그분께 답변할 수 없고,
    우리는 함께 법정으로 갈 수가 없다네.
    우리 사이에는 우리 둘 위에
    손을 얹을 심판자가 없구려 몇몇 히브리 수사본들 ` 칠십인역 ` 페쉬타는 “우리 사이에 제 손을 / 우리 둘 위에 얹을 심판자가 있다면!”으로 읽는다.
(9,32-33).
욥은 자신이 겪는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하느님 자신이라고, 그래서 결국 그분과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욥에게 일차적으로 제시되는 담판의 방식은, 인간 사이에서처럼, 하나의재판이다. 물론 욥은 하느님과 자신이 소송 상대자가 될 수 없음을, 그래서 그분과 자기 사이에는 어떠한 법정도 설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욥은 이러한 담판 방식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 실제로 욥은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 놓인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한 희망을 계속 법적인 용어로써 기술해 나간다.

나. 희망의 보루: 제삼의 존재: 9,33; 16,18-21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삼의 존재가 희망의 보루로 등장하다. 이 존재는 먼저, 우리가 직전에 본 바와 같이, 욥과 하느님사이의 잘잘못을 가려줄수 있는 “심판자”의 모습으로 부각된다(9,33). 그러나 욥은 곧바로 이러한 판관이 있을수 없음을 인식하고 다시 절망의 상태로 떨어진다:
    그분께서 당신의 매를 나에게서 치우시고,
    그분의 공포가 나를 더 이상 덮치지 않는다면!
    나 두려움없이 말할 수 있으련만!
    그러나 나로서는 어쩔 수 없구려(9,34-35).
비록 한날 불가능한 희망으로 즉시 끝이 나기는 하지만, 이로써 무고하게 고통을 당하는 자신과 자기를 원수처럼 대하시는 하느님사이에 제삼의 존재가 있어야 함을 욥이 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이러한 의미에서, 몇몇 히브리 수사본들과 중요한 고대 번영본 둘이 위 9,33의 “... 심판자가 없구려”라는 한탄을 “... 심판자가 있다면!”이하는 원망형으로 수정한 의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욥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기 신앙의 명예(16,17참조: 내 손에는 폭력이란 없고, / 내 기도는 순수하건만)를 회복시켜 줄 수 있다고 여기는 제삼의 존재는 다시 “증인”의 형태로 나타난다. “심판자”와는 달리, 욥은 이 제삼의 존재에 대하여 뚜렷한 확신을 내보인다:
    땅이여, 내 피를 덮지 말아다오,
    내 부르짖음에 안식처는 나타나지 말아다오.
    지금도 나의 증인은 하늘에 계시네,
    나의 보증인은 저 높은 곳에 계시네.
    내 친구들이 나의 빈정꾼,
    그러나 나는 하느님을 향해 눈물짓는다네.
    아, 그분께서 앞의 “증인/보증인”을 가리킨다.
한 인생을 위하여 하느님과 논쟁해 주신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본문에서는 “사람의 아들과 그 이웃”으로 되어 있지만, 몇몇 히브리 수사본들을 따라 “아들”을 히브리말에서 이와 꼴이 비슷한 “사이”로 읽는다.
(시비를 가리시듯).
    (내게 정해진) 그 몇 해가 지나면,
    나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기 때문이라네(16,18-22).
욥은 이제 완전히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그는 성서에 깊이 뿌리를 내린, 살해된 이들의 피갚음을 하시는 하느님 자신을 기억한다. 아우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예훼님은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라고 말씀하신다(창세 4,10; 또한 창세 37,26; 이사 26,21; 에제 24,7; 마태 23,35; 묵시 18,24도 참조). 욥은 자신이 죽으면, 그것은 결국 타살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자기가 흘린 피가 흙으로 덮이지 말고 계속 복수를 부르짖음으로써, ‘복수’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증인으로 나타나서 자기가 죽은 뒤에라도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를 그는 바란다. 그것은 소망 이상의 것이다. 욥은 자기 피에 대한 증인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자신한다(지금도 나의 증인은 하늘에 계시네, / 나의 보증인은 저 높은 곳에 계시네). 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그렇고, 자기가 죽은 훗날에도 이 증인은 늘 계실것이며, 언젠가는 당신의 역할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존재가 누구인지는 아직 선명하지 않다. 그분께서는 하늘 곧 하느님의 영역에 계신다. 또한 욥은, 친구들은 자기를 빈정거리지만 자기는 하느님을 향해 탄원의 눈물을 짓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 증인이 자기와 같은 인생을 위해서 바로 이 하느님과 논쟁을 벌여주시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증인이 하느님 자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존재라고 단정짓기도 어렵다. 욥은 다시 절망의 암흑을 걸으며 심판자, 증인에 이어 제삼의 빛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다. 구원자이신 하느님: 19,25-27
그 빛은 구원자에 대한 확신으로 주어진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나의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후에라도,
    이 내 몸으로 또는 “이 내 몸으로부터”, “이 내 몸이 없이도”로 옮길 수도 있다.
나는 하느님을 뵈오리라.
    내가 기어이 뵈옵고자 하는 분,
    나의 두 눈은 다른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직여: “나의 두 눈은 보리라, 그리고 다른 이가 아니다.” 위와 같이, 또는 “다른 이(의 눈이)아니라 나의 두 눈이 보리라”로 옮길 수도 있다.

    내 간장 본디는 “신장”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장을 감정과 사고의 자리로 여겼다. 여기에서는 신장을 동경의 주체로 여기고 있다.
이 속에서 녹아내리는구나(19,25-27).
헨델의 「메시아」에 나오는 아리아(“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여기서는 19,25-26만이 불려지는데, 번역은 우리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로도 잘 알려진 이 구절로써 대화 부분의 욥기는 그 정점에 다다른다. 욥에게 결정적 계시가 부여된 것이다. 구원자(히브리말로 고엘)는 원래 한 가정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이 가정의 가족들을 보호하고(경제적 이유로 가족중 누가 종으로 팔렸으면 그를 속량한다), 이 가정의 재산이 남 또는 다른 가문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며(토지등이 다른 가문에 팔렸으면 이를 도로 사들인다), 그 가족 가운데 누가 살해되었을 경우에는 복수를 대신하며, 대가 끊길 경우에는 망자의 부인과 함께 자손을 낳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에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해야(신명 25,6)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닌 사람이다(레위 25,25-26, 47-49; 민수 35,19; 신명 25,5-10; 2사무 14,11; 룻기 2,20). 제 2이사야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고엘로 나타나신다.(이사 43,14; 44,24; 52,9). 그분께서는 가장 가까운 혈족으로서 당신 백성을 책임지시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을 속량하시고 그들의 원수를 갚아주는 분이 되시는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와준다.
    두려워 말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야훼의 말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를 구원하는 이(=고엘)다(이사 41,14).
욥은 이러한 자기 구원자의 현존을 확신하면서 이를 장엄하게 선포한다. 이 구원자께서 종국에는 당신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심으로써(일어서리리라) 욥이 그토록 갈망하던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원자와 하느님은 동일한 존재이시다. 욥과 하느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심판자나 증인처럼 제삼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 자신이시다. 원수라고 여겨왔던 하느님께서 욥의 구원자 곧 그에게 ‘가장 가까운 친족’이시다. 부재(不在)의 하느님과 원수이신 하느님 앞에서 욥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일하신 하느님께서 이제 구원자로  ‘가장 가까이’ 현존하고 계심을 욥은 깨닫게 된 것이다. 이와 아울러서 욥의 신앙과 희망은 이제 정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심판자와 관련해서 욥은 하느님과 시시비비를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불가능한 희망을 품었고(9,32-33), 증인과 관련해서는 이 존재가 자기를 위해서 하느님과 논쟁을 벌여 시비곡직을 가려주기를 바랐다(16,21). 그러나 여기서는 하느님을 뵈옵는 것, 그분의 현존만으로 만족한다. 그분의 현존이라는 은혜야말로 다른 모든 것, 그의 불행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상대화하는 것임을 욥은 깨닫는다. 아무런 조건 없이, 반대급부적인 기대없이(=까닭없이: 1,9)하느님만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희망일 따름이다. 이제 하느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만남은 아직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욥이 속이 타도록 열망하는, 자기의 두 눈으로 구원자 하느님을 뵙게 되는 이 대전환의 ‘언제’와 ‘어떻게’는 분명하지 않다. 위 구절에서 먼지가 욥의 무덤을 지칭하는지,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후가 죽은 다음을 뜻하는지 불투명하며, 그리고 구원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욥에게 작용할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욥의 저자는 지적 호기심에 이끌리지 않고 이를 자제할 줄 안다(사도 1,6-8참조). 중요한 것은 장차 ‘얼굴에 얼굴을 맞대고’ 뵙게될 구원자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죽음의 장벽까지도 깨뜨려버리는 신앙과 희망이다. 그리고 이 신앙과 희망은 그 어떠한 지식이나 인식보다도, 그리고 고통과 죽음보다도 더 강하고 확실한 것이다.

라. 마지막 도전: 31,35-37
그러나 이로써 모든 것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삶은 그것이 안고 있는 고통과 함께 계속된다. 희망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실현시켜 주실 때까지 신앙인의 가슴 속에서 타오른다(19,27 3행 참조). 신앙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삶이 가져오는 새로운 도전에 항상 새롭게 맞서 나가는  과정이다. 욥 역시 오르내림을 계속하여 다시 밑바닥가지 떨어지기도 한다. 거기에서 욥은 결코 굴복할 수 없다는 자만심과 함께, 자비를 구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당당하게 나아가 대결을 벌이겠다고 하느님께 마지막 도전자을 내놓는다:
    아,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여기 나의 서명이 있도다. 전능하신 분께선 내게 대답하실지어다.
    나의 고소인이 쓴 고소장은 (어디 있느뇨!)
    나 그것을 반드시 내 등에 지고 다니며
    면류관처럼 내 (머리에) 두르련만,
    그분께 내 발걸음을 낱낱이 밝히고,
    나 제후처럼 그분께 다가가련만.

마. 하느님의 현현: 38,2-40,2; 40,7-41,26
결국 하느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비로소 하느님은 야훼(주님)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구약성서에서 이름은 그것이 지칭하는 존재의 본질을 나타낸다. 욥과 친구들이 펼치는 이론적`신학적 논쟁에서가 아니라, 현현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욥에게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욥이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조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느님께 다가갈 수 없으며,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무엇을 말씀하시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이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타나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말씀하신다. 인간은 하느님 현현의 그 절대적 은혜를 감사로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폭풍 속에서 말씀하신다(38,1). 폭풍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상징이다. 그분은 인간이 전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감추어 계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신다. 그리고 당신을 드러내 보이실 때에도 그분은 계속 인간에게 감추어 계신 분으로 남아 계신다(이사 45,15 참조: 정녕 당신께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이시니이다 ; 또는 ... 감추어 계신 하느님 ... 으로 옮기기도 한다. Deus absconditus, Deus revelatus). 이러한 이중적 사실을 폭풍이라는 상징이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다가오시어 말씀하신다. 그러나 욥의 질문들에는 대답하지 않으신다. 사실 욥기가 제기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으리라 기대하고 이 하느님 말씀을 읽는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주제별로 나눈다면 다음과 같이 38-41장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첫째 말씀」
             38, 2-3        : 네가 누구냐?
             38, 4-7        : 땅의 주재자
             38, 8-18       : 바다의 주재자
             38, 19-21      : 빛과 어둠의 주재자
             38, 22-30      : 기후의 주재자
             38, 31-38      : 하늘의 주재자
             38, 39-39,30   : 동물 세계의 주재자
             40, 1-2        : 주님의 꾸짖으심
     「욥의 첫째 답변」
     「하느님의 둘째 말씀」
             40, 7-14       : 주님의 꾸짖으심
             40, 15-24      : 베헤못
             40, 25-41,26   : 레비아단
     「욥의 둘째 답변」
하느님께서는 욥의 도전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도전을 하신다:
      지각없는 말로
      나의 뜻을 어둡게 하는 이 자는 누구냐?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38, 2-3).
그리고 너에게 물을 터이니 나에게 대답하여라(38, 3) 하시면서 오히려 욥에게 질문을 퍼부으신다. 질문을 하는 것은 욥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욥이 당혹할 수 밖에 없는 물음까지도 서슴치 않으신다: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는가?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는 이에 응답할지어다(40, 2).
이에 대해 욥은 놀라울 정도로 자세와 어조를 누그러뜨린다.
      4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리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이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인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침묵의 상징으로 욥은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이다.

      5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으로리다. 또는 “대답할 수가 없나이다”, “재론하지 않으오리다”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두 번 (말씀드린 바) 덧붙이지 않으오리다(40, 4-5).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어 직접 말씀드리고, 또 그분께서 물으시면 대답하리라고 그렇게 열망하던 욥과 비교했을 때 커다란 차이가 드러난다. 그러나 욥은, 논쟁 또는 소송의 상대자로서 하느님과 대립했을 때 자신은 그분께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리라고 어렴풋이나마 예견했었다(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하리: 9,3). 그 예감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위의 5절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욥이 하느님께 완전히 굴복한 것은 아니다. 다만, 만물의 창조주와 주재자이신 하느님(38, 4-39,30)과 비교했을 때 자신은 그분과 맞설 수 없는 하찮은 존재임을 수긍하고 고백한다(창세 32,11; 출애 3,11; 이사 6,5; 예레 1,6참조). 결국 하느님 앞에 세워진 인간은 자신을 되돌아 볼 수밖에 없다. 되돌아 본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무력하며 무상한 존재인지 절감하게 된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면 그 자체로서 이미 하느님의 심판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별다른 결정이 없이도 인간 스스로가 자신에 해당되는 판결을 깨닫는다. 이로써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자기 비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작기 비하’는 단순히 하느님쪽에서 인간을 무시하거나, 인간 쪽에서 근거없이 자신을 낯추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아래에서만 존립하고 존속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조차 교만으로 물들기 마련이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인간에게 원초적인 교만,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자신을 신적 위치에 세워놓으려는 인간의 거의 본질적인 교만(창세 3,5참조)을 제거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서 자기 본연의 모습을 보고 이를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위치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 이에 따른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자신에 대한 겸손,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긍정적으로 발전될 수 있는 밑바탕이다.
위에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주제별로 나누어 보았는데, 그 구조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느님께서는 “네가 누구냐?”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인간 욥으로 하여금 당신과의 관계 아래 자신을 되돌아 볼 것을 요구하심으로써 당신의 「첫째 말씀」(38, 2-40, 2)을 시작하신다: 지각없는 말로 / (나의) 뜻을 어둡게 하는 이 자는 누구냐?(38, 2). 이어서 질문 형식으로, 인간의 위치에서 세상의 창조주이며 주재자이신 당신을 생각하도록 하신다. 이러한 「첫째 말씀」을 끝맺는 꾸짖으심(40, 2)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교만으로 자신을 잔뜩 부풀린 인간(38, 2-3에서처럼 여기서도 하느님께서는 욥을 직접 거명하지 않으신다)으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하신다). 「둘째 말씀」역시, 하느님과 자기 사이에서 양자택일적으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인간(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 하느냐? / 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나를 단죄하려 하느냐?: 40,8), 자기를 신격화하려는 인간(네가 하느님의 팔을 지녔으며 / 그와 같은 목소리로 천둥칠 수 있느냐?: 40,9)을 꾸짖으시면서 반성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시작하신다. 이어서, 신화적 색조를 띤 말씀으로, 욥이 보여준 너무나 인간적이고, 인간 역사 중심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전망을 확대시켜 주신다. 그러나 「첫째 말씀」처럼 욥에 대한 질책으로 「둘째 말씀」을 끝맺지 않으신다. 38, 2-3, 40,2 그리고 40, 6-14 세 번으로 충분한 것이다. 인간은 그 모든 나약성과 무상성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느님과의 대화 상대자로 창조된 존재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말을 욥의 몫으로 허락하신다.
어쨌든 하느님의 「첫째 말씀」으로 욥은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겸손을 깨치고 자신을 낮춘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과의 만남, 이를 통한 심판의 한 면일 따름이다. 하느님의 심판은 또 다른 한 면을 지향한다. 심판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은 하느님의 「둘째 말씀」과 이에 이은 욥의 대답으로 실현된다.
하느님의 두 번째 말씀뒤에야 비로소 욥은 완전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욥이 친구들과 벌인 논쟁의 결론이나, 또는 욥 스스로가 이론적`신학적고찰을 통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보이시는 사건, 이로써 이루어지는 욥의 신앙 체험이 가져다 주는, 결국 하느님 자신이 주신 통찰인 것이다.
    저는 알았나이다, 당신께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알았나이다.
    “지각없이 (나의) 뜻을 가리는 이 자는 누구냐?” 욥은 38,2에서 자기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여기에서 거의 말 그대로 반복한다.

    그렇습니다, 제겐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나이다.
    “이제 듣거라, 내가 말하려느니,
    너에게 물을 터이니 나에게 대답하여라.“ 욥은 여기에서도 38,3과 40,7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한다.

    당신께 대하여 귀로만 직역: “귀의 들음으로만.” “풍문(또는 소문)으로만”이라고 옮길 수도 있다.
들어왔던 이몸,
    그러나 이제는 저의 눈이 당신을 뵈었나이다.
    그래서 (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자신을)부끄럽게 여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 동사가 여기에서는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아 ‘자신을 낮추다, 자신을 싫어하다, 취소하다’등 여러 가지로 옮겨진다.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하나이다(42,2-6).
이제 욥은 하느님께서 인간과는 다른 존재이실 뿐만 아니라, 인간과는 다르게 사고하심을 깨치게 된다. 이는 이사야서가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 55, 8-9).
하느님의 뜻(38,2)은 자기 중심적으로, 자신의 실용성과 유용성, 이해(利害)와 실리의 척도만으로 사고하는 인간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사람이 없는 땅,
    인간이 (살지) 않는 광야에 비가 내리게 하고,
    황폐하고 황량한 광야를 흠뻑 적시며,
    풀밭에 싹이 트게 하기 위하여 (누가 길을 놓았느냐)?(38,26-27).
또한 하느님께서는 주고 받는 인간적인 교환 법칙에 따라 계산하고 행동하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응보사상 역시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하느님께 강요할 수 없는 교리이다. 선행 또는 악행이라는 물건을 하느님께 주었으니, 하느님께서는 이에 따라 행복 또는 불행을 내놓으시라고 인간이 요구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실행 또는 불이행으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조종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응보하지 않으신다. 응보의 법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대응하시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판단을 내리신다. 응보의 원칙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가 절대적인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욥 역시 친구들처럼 인간적인 한계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인간적인 판단 기준으로 하느님을 판단하였다(당신께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몸:42,5).욥은 친구들이 대변하는 전통적인 응보 교리를 부정하면서도, 결국은 그 역시 ‘주고 받음’이라는 상업적 교환 개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산적 사고방식의 차원에 머무른 것이다. 여기에 욥이 깊이 깨달아 스스로 참회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잘못이 있다:그래서 (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하나이다(42, 6). 물론 욥은 친구들이 비난하는 그런 죄악들을 저지르지는 않았다(22, 5-11). 그리고 31장의 「무고 선언」이 밝히는 바와 같이, 하느님과 다른 인간들에 대해서 한 점 부끄럼없는 양심을 지녔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욥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인간이 범하기 쉬운 죄 그 자체를 범한 것이다. 욥은 고통과 불행속에서 자기가 의롭고 정당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렇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판결을 내린다. 결국 인간의 판단 기준 아래로 하느님을 끌어내려 그분을 판단한다. 이는 인간 사고의 규범에 따라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느님을 규정짓는 인본주의적 주관주의이다. 결국 욥은 자기 자신을 제2의 '심판자-하느님‘으로 만드는 인간의 교만이라는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의 현현이라는 은총을 통해서 욥은, 하느님께 대한 희망으로 죽음의 벽을 넘었듯이, 하느님을 향하여 자기 한계를 넘어선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셔서 당신과 욥사이에 있는 심연에 다리를 놓아주셨기 때문이다. 결국 욥은 하느님을 뵙게 된다. 하느님을 뵙는 신체험 그 자체가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사실이다(19,26-27과 42,5). 이 신체험이라는 신비 안에서 욥의 그 모든 문제들은 신비로이 해결된다.
하느님을 뵙는 은총과 욥의 참회를 통해서, 앞서 말한 바 있는 심판의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면이 실현된다. 곧 어떠한 대립이나 모순이 없이 하느님과 욥이 서로를 완전히 받아 들이는 것이다. 욥은 자기의 위치에서 하느님을 그 본연의 모습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는 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이것이야말로 욥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그 외의 모든 것, 논리와 이론, 옳고 그름, 정당함과 부당함, 행과 불행,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도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친구들은 하느님을 변론하기 위하여(13,8)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고통을 겪으며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는 욥과 연대하기보다는 이론과 신학 쪽에서서 욥을 탄핵하게 된다. 그들의 말 속에는 진실의 일면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고통속에 있는 욥에대한 ‘따스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었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모든 인간적 논리와 이론, 인간적 지혜와 판단, 인간적 기준과 척도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그분의 신비를 받아들이려는 ‘넓은 마음’과 경외심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욥처럼 그의 친구들 역시 당신의 사랑으로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 화해를 욥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신다(42, 7-9). 고통을 통해 더욱 깊은 차원에서 하느님과 화해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사명과 능력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이를 실행에 옮긴다.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다시 하느님의 은혜를 전하는 일꾼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욥기의 저자가 의도하는 「욥의 회복」(42,10-17)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원래의 욥 설화에서는 욥의 복구가 그의 정당함에 대한 보상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욥기 전체의 관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욥이 제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드리자 주님께서는 그의 운명을 되돌리셨다(42,10). 참회(42,6)에 이어 곧바로 욥이 행복을 되찾지 않고,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린 후에야 비로소 하느님께서 욥의 운명을 되돌리셨다는 데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곧 욥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적어도 외적으로는 예전과 다름없이 계속되는 불행속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한 뒤에야 비로소 행복을 되찾는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항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어떠한 강제적 행동으로 ‘어쩔수 없이’ 욥의 운명을 되돌리도록 강요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절대적 자유속에, 욥을 향한 사랑으로 그에게 지상(地上)의 행복을 부여하신 것이다. 되돌려진 욥의 운명 역시 하느님의 ‘무상적(無償的)’은총인 것이다.

[출처] 욥 기(11) |작성자 아녜스


욥 기(12)

Ⅳ. 맺는 말
욥의 이야기는 한 신앙인이 이 지상에 살면서 겪게 되는 거의 모든 것과 그러한 삶 안에서 마주치게 되는 거의 모든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건강과 행복, 병과 고통과 불행 그리고 죽음, 신앙과 희망, 불신과 실망과 절망, 죄와 벌 그리고 은총, 하느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사이에서의 갈등,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의 체험 등등 삶이 동반하는 모든 대립과 모순점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신앙, 곧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이는 인간을 믿지 않는 사탄이 인간을 믿는 하느님께 내던진 욥이 까닭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라는 질문속에 집약된다. 하느님께서 베푸실 수 있는 또는 베푸셔야 한다고 인간이 생각하는 선이나 행복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그 자신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믿음이 과연 가능한가? 인간과 하느님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한 채, 오직 하느님만을 향하는 순수한 믿음이 과연 가능한가? 인간은 오히려 하느님과 자기 사이에 있는 다른 그 무엇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인간은, 사탄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행복이라는 ‘물건’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기 위해서 ‘신앙’이라는 물건을 하느님께 내놓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러한 신앙은 자기 이익의 추구라는 내용물을 싼 포장지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신앙인은 각자 사는 동안 언젠가는 욥기가 제기하는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그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로서 순수하게 오직 주님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애덕송」을 노래할 수 있는가?


   주여, 당신을 나 사랑하옵는 것은
   나의 구원 때문도 벌이 두려워서도 아니요
   온갖 고통 모욕 당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사
   죽음으로 나를 온전히 받아주셨기 때문이니
   주여, 당신을 나 사랑하옵니이다,
   당신은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여, 당신을 나 사랑하옵는 것은
   천국의 영예도 상을 원함도 아니요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나를 온전히 받아주셨기 때문이니
   주여, 당신을 나 사랑하옵니이다,
   당신은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일회적인 것도 이론적인 것도 될 수 없다. 삶의 온갖 역경 속에서 오르내림을 계속하는 생활 그 자체를 통하여 하느님과 얼굴에 얼굴을 맞댈 때까지 지속적으로 생활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응답이다.
그 응답이 삶이라는 여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듯, 그 내용 역시 하나의 과정을ㄹ 통해서 형성된다. 욥의 경우에서처럼, 신앙의 응답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정화되어 가는 것이다. 때로는 행복 혹은 불행을 통해서, 때로는 기쁨 혹은 고통을 통해서, 때로는 절망 혹은 죽음보다 강한 희망을 통해서, 때로는 하느님의 부재, 혹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순화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정화에 필수적인 것이 자기 한계의 극복, 전망의 확대이다. 자기 중심, 인간 중심, 이해(利害)와 실리를 따지는 계산적 사고방식의 극복이다.

자기가 계산해 낼 수 있고, 자기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자기 눈으로 볼수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결국 신앙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음이며, 보이지 않는 분을 향해 나아감이다. 그래서 신앙은 하느님의 뜻을 어둡게(38,2)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가는 과정이다. 자기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와 생활에서 탈피하여 하느님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욥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욥기는 계속 열려 있는 책이다. 우리를 향해 그 문을 열어 놓고 있다. 욥기는 고통을 당하고 죽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도록 우리를 부른다. 욥의 고통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지향한다.
그래서 욥기를 읽는 신앙인 역시 각자가 자기의 고통, 그리고 이웃의 고통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향해 신앙의 길을 걸어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끝>


프로필 이미지

 

[출처] 욥 기(12) |작성자 아녜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구약 공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