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정임(rmskfk) 2015. 06. 01.
나는 당연히(2열왕 5,11) 이것이 나아만의 나병은 아닐까?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엘리사는 심부름 꾼을 시켜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 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2열왕 5, 9-11)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서 사람에게 쓸 수 없고 사람에게 해당이 안 되는 말이 있을까?
있다면 뭘까?
내가 생각하는 건 절대로와 당연히가 아닐까 싶다.
절대로와 당연히라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하고 살까?
절대로와 당연히를 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 아니실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나아만은 자신의 나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엘리사 예언자를 만나러 간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전쟁을 치루기 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그는 엘리사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한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어찌 인간의 생각이 당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당연하다는 것은 절대적이라는 말이 아닌가? 인간에게는 절대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왜냐? 한계를 지녔기 때문이고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치유받기 위한 사람의 기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낮아진 자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낮아진 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가는 모습이 아니고 우리 예수님처럼 나귀를 타고 가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치유해 줄 수 있는 분의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이 낮아진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분보다 자신의 생각이 당연하다고 화를 내는 나아만의 모습이 바로 나병의 모습은 아닐까 싶다.
우리도 신앙 생활 안에서 나아만처럼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당연히 내 생각대로 예수님께서 해 주셔야 되지 않겠냐고 화를 내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묵상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당연히라는 말 안에는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주님, 이제 제 입에서 당연히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 말씀에 "예!" 하고 순명하는 마음을 주소서. 아멘.
결국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 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2열왕 5,14)
나아만은 자신의 당연히를 고집했다면 결코 나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아만의 훌륭한 점은 당연히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사람들의 조언을 수용하는 점이 그의 훌륭한 점이라고 보았다. 그의 부하들이 해 주는 말을 기꺼이 그는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여정에서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도 나아만의 모습을 살 수 있고 또 너도 나아만의 모습을 살 수 있다.
당연히라는 말을 하면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만의 부하들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수용했던 용기있는 면도 본받아야 한다.
화가 나서 당장 떠나고 싶을 때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러나 그럴 때만다 지인들이 이러저러한 조언들을 해 준다. 나는 기꺼이 나아만처럼 그들의 조언을 듣고 수용하며 사는 사람인가? 반성해 본다.
나아만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내가 당연히라는 말을 품고, 또 하고 살지만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수용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의 말씀도 잘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해주는 어떤 조언이나 충고 등 ~
이런 것을 무시하고 살아간다면 결국 하느님의 사람의 말씀을 따르는 데도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조언이나 충고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모습이 바로 나아만이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하느님의 사람의 말을 먼저 들은 것이 아니고 자기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은 듣고,
하느님의 사람의 말씀을 실천하는 나아만의 모습 안에서 자기보다 낮은 사람의 말을 수용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요르단 강으로 내려감을 의미하지 않나 싶다.
내려감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위풍당당했던 그가 자신의 부하들이 해 준 말을 수용하는 모습이 바로 내려감이 아닐까 싶다.
결국 나아만은 스스로 내려감으로 나병에서 치유가 되었다. 요르단 강물이 어떤 기적을 베푼 것이 아니라 나아만의 내려감이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다고 묵상해 본다.
당연히를 내려 놓고 내려감을 통해 그는 어린 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났다.
*****'나아만의 내려감으로" ... 은혜롭습니다! 더하여 이러한 묵상은 어떻습니까?
처음의 나아만의 권세와 교만의 표현도, 과정을 거쳐 이어지는 부하들의 말을 경청하게 됨도, 나아만의 나추임도 결국 하느님의 이끄심이 아닐까요. 이런 그의 외면적인 변화보다 먼저, 죽음보다 더한 문둥병자인 그의 내면은 이미 그 오랜 고난을 통하여 겉사람(자아)이 파쇄되었고, 오직 치유자 이신 한분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는 것은 아닐까요? (여호수아서2,11참조)
십자가와 고통의 신비가 생각나는 군요! 묵상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렐루야! 아멘.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줄탁동시의 어떤 관계로 묵상해 보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응답 없이 강제로, 당신 마음대로 우리의 인생을 이끄시지 않으시는 분임을 저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에게 주신 그 귀하고 귀한 자유의지이죠. 그 자유의지를 지켜주시기 위해 애쓰신 사랑의 표현이 십자가상 죽으심이고요.
나아만의 문둥병 ...그는 자신의 병으로부터 치유받고자 열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치유자이신 분께 온 마음이 쏠렸을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나아만은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아람인 장수를 아람인들이 믿는 신들이 치유시켜 주지 못했다는 증거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람인 나아만의 고백은 참으로 중요한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 신약에서도 이방인 백인대장이 이와 비슷한 고백을 하고 있지요. 이미 구약에서도 이방인이 온 세상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그 야훼 하느님 밖에 안 계시다는 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자신들이 믿는 아람인들의 신은 치유의 능력이 없는 신이라고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이 신이 아니라고 증거하는 신앙은 당시 그 시대에는 감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대단히 목숨을 건 고백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고요.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그 하느님이야말로 참하느님이시고 유일하신 신이심을 나아만이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점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관심과 사랑에 감사합니다
******열왕기하권에서 말하는 그 당시 배경과 주제, 그리고 자매님의 강조를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부담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은 어떤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곧 위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영의 인도를 받는 엘리사의 태도와 그의 순종이, 태초부터 이미 예정되고 선택된 라아만으로 하여금 고통의 변화를 거치게 함으로써, 마침내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한폭의 그림 이야기입니다! 저에게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림 이야기에서의 조연은 엘리사와 라아만이며, 주연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그분의 크신 손길입니다.
그분은 이제 내 영 안에 계시면서,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라아만이며, 또한 엘리사입니다. 묵상은 말씀의 지식이 아니라, 그분을 만남과 앎입니다! 알렐루야! 아멘.
++++예정되어 있었다는 말씀은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개신교 중에서 장로교가 예정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어떤 사람의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는 표현은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유다의 운명도 태초에 그렇게 정해져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역사 속에 들어오시어, 또는 한 개인의 인생 안에 오시어 비뚤어지고 엉클어지고 그런 삶을 정돈해 가시는 분이시지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에 대해서 2티모 3,15절 이하를 묵상해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연학 신부님이 쓰신 책이 있습니다.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
누구든지 자신의 성장 과정과 함께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그만큼 알아듣고, 깨닫고 하는 것이겠지요.
저도 그렇고 형제님도 그렇고 자신의 영적 나이만큼 알아듣고 그렇게 알아들은 말씀을 자신의 삶을 통해 드러내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자매님의 말씀에 동의를 하면서도, 자매님은 예정설에 대한 오해가 있으시군요.
장로교의 예정설은 나는 잘 모릅니다만, 그러나 그들의 편협한 해석 때문에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요. 저도 그렇게 해석하는 예정론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언급한 예정과 자유의지는 별개의 주제입니다. 로마서, 에페소서 및 그외 바오로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6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7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9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사55,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