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의록(7.-9)
| 욥 기(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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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Ⅲ. 운문으로 되어 있는 대화 부분 1. 대화 부분의 일반적인 사항 가. 대화 부분의 구조 욥기의 중심 부분은 문체상 운문으로, 그리고 형식상 대화로 되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에 의해서 유명하게 된 대화 형식은,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들 중 두곳인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에서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생성되어 문학의 한 형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욥기의 저자는 이렇게 당시 중동 지역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문학 형식을 빌려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한 것이다. 형식을 빌려오기는 했지만, 고대 중동의 문학에서 욥기에 비길 만한 작품은 없다. 문학적`정신사적`신학적인 견지에서 욥기의 대화 부분은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욥기의 대화 부분을 직접 일별할 때 우선 각 인물들이 내놓는 담론의 길이가 상당할 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데에도 일정한 순서가 있는 듯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사실 이 부분(3-42,6)은 아래 도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일정한 순서와 구조를 지니고 있다(이러한 점들은 ,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대화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문학 작품임을 가리키는 징표이기도 하다). 욥의 독백: 3장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대화: 4-27장 첫째 차례(4-14장) 둘째 차례(15-21장) 셋째 차례(22-27장) 엘리바즈 (4-5장) 엘리바즈 (15장) 엘리바즈 (22장) 욥 (6-7장) 욥 (16-17장) 욥 (22-24장) 빌닷 (8장) 빌닷 (18장) 빌닷 (25장) 욥 (9-10장) 욥 (19장) 욥 (26-27장) 소바르 (11장) 소바르 (20장) 욥 (12-14장) 욥 (21장) 지혜 찬가(28장) 욥의 독백(29-31장) 엘리후의 발언(32-37장) 주님과 욥 사이의 대화(38, 1-42, 6) 주님의 첫째 발언(38, 1-40, 2) 주님의 둘째 발언(40, 6-41, 26) 욥의 첫째 대답 (40, 3-5) 욥의 둘째 대답 (42, 1-6) 이러한 구조에서 우선 두 종류의 대답의 있음을 알 수있다. 욥과 그의 세친구들 사이, 그리고 욥과 주님 사이의 대담이다. 아울러서 이 두 번째 대담에서는 주님께서 길게 말씀하시고 욥은 짧게 대답함으로써, 첫째 대담과는 성격이 다르리라 예측할 수있다. 욥과 친구들 사이에 벌어지는 대화의 앞과 뒤는 욥의 독백으로 틀이 짜여져 있다. 그런데 대화를 마무리짓는 욥의 독백 바로 앞 28장에 대화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보이는 「지혜 찬가」가 나온다. 많은 이들은 이 찬가가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찬가의 문체가 38장 이하에 나오는 주님 말씀의 문체와 매우 가까워서, 이 시가가 대화로 구성된 토론 부분과 욥기의 결론부분을 분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여기기도 한다. 두 개의 대담 사이에 엘리후라는 사람의 긴 담론이 나온다. 원래의 욥기를 전승해 가던 후대의 사람들 중 하나가 욥의 주장과는 다른 전통적 입장을 옹호하고자 하는 목적 아래 이 부분을 덧붙였다고 여겨진다. 곧 욥의 세 친구가 충분하게 전개 시키지 못했다고 유감스럽게 보아 왔던 논증을 보탠 것이다. 욥의 친구들 중에서 둘은 각각 세 번, 한 친구는 두 번 발언하는 데 반해서, 이 엘리후는 네 번에 걸쳐 자기의 담론을 펼치는 데에서도 이러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나.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대화와 그 성격 이 부분에서 네 사람의 대담자들은 일정한 순서에 따라 등장한다. 욥의 독백에 이어 친구들 중에서 엘리바즈가 첫 번째로 말문을 연다. 이에 이어서 자기의 주장을 펼치는 욥에게 다음 친구가 응수하면, 다시 욥이 나서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러한 대화가 세 차례에 걸쳐 전개되는데, 셋째 차례가 불완전하게 보인다. 곧 소바르의 세 번째 담론과 이에 대한 욥의 응답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결함은 구두 전승 또는 필사 과정에서 욥기의 본문이 훼손을 입은 결과라 추측된다. 또한 욥의 마지막 담론(26-27장)에 들어 있는 어떤 구절들은 오히려 친구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24,18-25; 26,5-14). 그래서 본디 소바르가 발설한 말은 운문 부분의 후대 편집자들이 욥의 대담성을 완화시키려는 의도 아래 욥의 말로 옮겼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욥기의 대화는 이런 구조와 각 담론의 길이가 말해 주듯 느린 행보로 장엄하게 전개된다. 이렇게 이루어진 욥기에서 우리는 예컨대 고통 또는 신앙의 문제를 다루는 현대적 의미의 학술 토론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참가자들이 문제를 조리있게 분석해 나가고 서로 상대방의 주장에 이어서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펼쳐나감으로써 결론을 향해 직선적으로만 나아가지는 않는다. 물론 욥기의 운문 부분도 하느님과의 대화와 욥의 고백(42,2-6)이라는 대단원을 향해서 직선적으로 진행되기는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욥기의 더 큰 특징으로서, 순환적으로 원을 그리면서 나아간다. 많은 경우, 앞 사람이 주장한 의견과는 별 상관없이, 때로는 그것을 듣지 않은 사람처럼, 자기의 입장을 밝혀나간다. 서로 (물론 동일한)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다. 아울러서 특히 욥이 토로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욥의 심리적인 면도 고려해야한다. 욥은 지극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신앙의 위기에 처해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느님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철저한 신앙인이다. 또한 욥기의 저자는 욥의 말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그래서 욥의 말만을 고찰할 때, 욥이 직선적 또는 상향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부침 곧 오르내림을 계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하느님께 탄원하다가 그 다음에는 그분을 원망하고, 때로는 하느님을 뵙고자 갈망하다가 그 다음에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를 바라고, 때로는 죽음을 넘어서는 죽음보다 강한 신앙과 희망을 선포하다가 그 다음에는 절망의 심연속으로 떨어진다. 결국 욥은 여느 신앙인처럼, 또는 여느 신앙인보다도 더 처절하고 극적이며 더 폭이 넓은 오르내림을 계속하면서, 자신은 이를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다. (대화 부분의 이러한 특성으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강의 역시 많은 시간을 가지고 시작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욥기를 고찰하지 않고 중요 부분만을 다루어야 할 경우에는, 욥기의순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욥기의 전후를 왔다갔다 하면서 진행될 수도 있다.) 욥기 대화 부분의 이러한 성격이 욥기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욥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읽는 법도 함께 배워가야 하는 것이다. 다. 두 욥과 욥기의 저자 이제 욥기를 본격적으로 읽어갈 때, 대화 부분의 첫머리에서부터, 산문이 그리는 욥과 운문에 나오는 욥의 인물상이 상당히 다름을 느낄 것이다.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실지어다(1, 21)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산문의 욥은 신앙심이 깊고 인내심이 많으며 경건하고 순종적이다. 반면에 운문의 욥은 고통을 참지못해 하고 거의 초인적 긍지와 함께 대담하게, 그리고 반항적으로 자기의 억울함을 느끼는 그대로 털어 놓는다. 그러나 결국은 흔들림 없는 신앙이 이 두 욥을 하나로 묶는다. 운문의 욥 역시 하느님을 도저히 버릴수가 없기 때문에, 그분과 끝까지 투쟁을 벌여나가는 것이다. 욥기의 저자는 산문으로 된 욥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운문의 욥의 입을 통해서 자신이 경험한 바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저자는 두 욥의 다름을 상쇄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이성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결국 운문의 욥이 도달하는 종점 역시 산문이 그리는 욥의 인물상이라 할 수 있다. 이 또한 욥기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한 요인이다. 그런데 이 종점에 다다르는 것은 고통이라는 험난한 길과 고난이라는 어둠을 통해서이다. 사실 저자가 대화 부분의 욥을 통해서 토로하는 말은 그런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직접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친구들에 대한 독설, 하느님께 대한 거의 독성에 가까운 말,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언사도 거리낌없이 털어 놓는다. 이러한 욥과 욥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욥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한 전제 조건이 된다. 라. 욥기의 보편성 이제 본격적으로 욥이 한탄하는 소리를 듣기 전에 먼저 한가지 명심하고 들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욥기의 보편성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고대 중동에 널리 알려져있던 욥기의 산문으로 된 이야기에서는,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에 고유한 야훼라는 이름이 주로 사용되고, 반면에 이스라엘 시인의 창작인 대화부분에서는 (12,9를 제외하고는) 항상 일반 명사인 하느님 또는 전능하신 분이 사용된다. 산문 부분은 이스라엘화하고, 운문부분은 보편화-일반화하려는 의도라 해석할 수 있다. 저자는 국제적-일반적인 욥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이스라엘의 신앙이라는 특수한 토양에서 출발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욥기에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선택, 시나이산에서 맺어진 야훼님과의 계약, 메시아에 대한 기대 등 이스라엘에만 특유한 사항, 이스라엘에게만 본질적인 사항들이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아울러서, 욥기는 기원전 587-538년의 유배기간 이후에 저술되었음이 확실한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구약성서에서 전무후무한 전환점을 이루는 ‘예루살렘 함락-성전의 파괴-유배’라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이는 저자가 인간의 고통이라는 일반적인 바탕에서 신앙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말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있다. 실제로 욥기는 그 핵심에서부터 보편성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 욥 자신이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외국인이며, 욥이라는 이름도 당시 여러 나라에서 쓰이던 이름이라 생각된다(1,1). 욥의 세친구들 역시 모두 외국 이름을 가진 이방 사람들이다(2,11). (다만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여겨지는 부분의 주인공인 엘리후<‘그분께서는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식 이름을 지녔다: 32,2). 그리고, 곧 이어서 보게 되겠지만, 욥은 대화를 개시하는 독백에서부터 이미 자기 자신의 고통을 일반화한다(3,20-22). 어찌하여 그분께선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고통에 처한 자신을 고생하는 이, 영혼이 쓰라린 이들과 동일시하면서 이들을 대변 하여 하느님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욥은 (전적으로 악인들의 행복을 말하는 21장과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는 24장에 이르기까지)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지만, 이 이야기들도 다른 이들과의 연대성 안에서 이루어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욥기의 저자는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보편성을 염두에 두면서 자기의 생각을 보편적으로 전개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
| 욥 기(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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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욥의 한탄: 3장 산문 부분에서는 욥의 고통이 밖에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냉정하게 서술된다. 그러나 이제 대화 부분에서는 고통이 안에서부터 묘사된다. 욥 스스로가 자기의 전 존재로 겪어야만하는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이 고통이 야기하는 온갖 것들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밖으로 쏟아낸다. 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욥: 3,1-10 고통은 자신과 이 세상에서의 자기 실존을 돌아보게 한다. 욥은 자기 존재의 근원까지 파고 든다. 극에 달한 아픔 속에서 자기 존재의 뿌리까지 거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로써 욥은 이전에 예언자 예레미야가 그러했던 것처럼(예레 20,14-18),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저주하게 된다(3, 3-10). 먼저 예레미아의 탄식을 들어보기로 하자: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복과는 거리가 먼 날,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한 그자도 천벌을 받아라 <원래는: 저주받을지어다>. ...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나를 죽이셨던들 어머니 몸이 나의 무덤이 되어 언제까지나 뱃속에 있었을 것을! 어찌하여 모태에서 나와 고생길에 들어서 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 이렇게 수모를 받으며 생애를 끝마쳐야 하는가! 특히 소위「고백록」을 통해서 예레미아가 고통과 고난의 예언자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욥 역시 예레미아의 그것에 못지 않는 격렬한 감정과 더불어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것이다. 3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애가 잉태되었네” 하고 사람들이 말하던 밤. 4 그날은 차라리 암흑이 되어버려, 위에서 하느님 ‘엘로힘’의 단수형인 “엘로아”이다. 욥기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40)여번 하느님의 명칭이다. 께서 찾지 않으시고, 빛이 밝혀주지도 말지어다. 5 어둠과 암흑이 그(날)을 차지하여, 구름이 그 위로 내려앉고, 일식 유다인 성서 전승가들은 “날의 쓰라림들처럼”으로 읽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두 낱말로된 “쓰라림들처럼”을 하나로 생각하여 ‘일식(日蝕)’ 또는 ‘날이(갑자기)어두워짐’ 등으로 이해한다. 이 그(날)을 소스라치게 할지어다. 6 그 밤은 흑암이 잡아채어, 연중 어느 날에도 끼이지 말고, 직역: “한 해의 날들 중에서 기뻐하지 말고.” 달 수에도 들지 말지어다. 7 정녕 그 밤은 붙임(의 밤)이 되어, 환호소리 찾아들지 말지어다. 8 날에다 술법을 부리는 자들, 어떤 날을 길일(吉日)과 흉일(凶日)로 만들 수 있다는 마법사를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레비아단 때문에 “날(히브리말: 욥)”이 본디 히브리말에서 꼴이 비슷한 “바다(히브리말: 얌)”였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 경우 8절 1행이 말하는 사람들은 동일 인물들로서 바다에다 술법을 부려서 레비아단을 깨우는 마법사들을 뜻한다. 레비아단 고대 중동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괴물이다. 이사 27,1; 시편 74,14; 104,26참조. 을 깨우는 데 능숙한 자들, 그들은 그(밤)을 저주할지어다. 9 그 (밤은) 새벽별들도 어둠으로 남아 있고, 빛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말며, 여명의 햇살 본디 “속눈썹”이다. 새벽의 빛살을 “여명의 속눈썹”으로 표현했다고 여겨진다. 을 보지도 말지어다. 10 그 (밤)이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않고 내 눈에서 고통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통의 밑바닥에서 욥은 두 가지의 차원에서 인간 실존의 밑바탕까지 내려 간다. 첫째는 인간적인 관점에서본 실존의 기원, 곧 자기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생일(과 해마다 되풀이 되는 생일날), 그리고 그너머, 잉태된 날, 곧 자기 실존의 씨앗이 이 세상에 뿌려진 밤이다. 아기의 탄생은 고대인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경사였다. 그러나 욥은 그 밤과 그 날을 마치 하나의 인격체처럼 자기 눈앞에 세워 그들을 저주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제거하고자 한다. 욥이 파고든 인간 실존의 두 번째 밑바탕은 하느님 관점에서 본 실존의 기원 곧 창조이다. 욥은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하느님의 창조에 대립적이고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나선다. 첫째로, 빋에 어둠을 대립시킨다. 우선 위의 구절에 나오는 암흑, 어둠, 구름, 흑암 등은 창세 1,2가 말하는 창조 이전 혼돈의 어둠을 말한다(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춤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께서 첫째로 창조하신 것은 빛이다: 빛이 생겨라(창세 1,3;히브리말: 여히 오르). 이에 대항하여 욥은 암흑을 불러온다: 암흑이 되어버려(3,4; 히브리말: 여히 호쉐크). 우리말 번역에서는 어쩔수 없이 다르게 되었지만, 이 두 말마디는 원래 히브리말에서 암흑과 빛만 다를 뿐 동일한 형식의 말이다. 욥은 첫째 창조물인 광명을 무효화시켜 다시 혼돈의 어둠으로 되돌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숫자의 대립을 통한 총체적 무효화이다. 하느님께서는 일곱 날에 걸쳐 세상 창조를 완성하신다(창세 1,1-2,4). 반면에 욥은 일곱 번에 걸쳐(3절에서 9절에 이르는 저주의 절수가 일곱이다)자신의 창조를 저주한다. 일곱에 일곱을 대립시킴으로써, 마치 7 빼기 7처럼,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고자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다산의 강복」과 「불임의 저주」사이의 대립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라...” 하고 다산의 강복을 내리신다(창세 1,27-28). 반면에 욥은 정녕 그 밤은 불임(의 밤)이 되어, / 환호소리 찾아들지 말지어다(3,7)하면서 「불임의 저주」를 내뱉는다. 이와 아울러 창세기의 이야기와 욥기의 이 구절이 자아내는 전반적인 분위기에서도 대립과 반대를 느낄수 있다. 창세기에서는 특히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라는 말이 되풀이됨으로써 밝고 끼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면에 욥의 저주에서는 이 밝음과 기쁨을 뒤덮어 없애버리려고 하는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욥은 자기 자신과 관련된 하느님의 창조 행위까지도 취소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로써 욥은 자기 실존에 대한 최종적 질문을 던진다. 이는 결국 회의와 절망에 빠진 한 인간이 하느님 자신께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 차라리 죽음이...: 3,11-19 이제 질문이 본격적으로 제기된다. 실존의 근원까지 갔을 때 그 시발점 자체가 문제가 된다면, 그 다음의 필연적 단계는 생명과 삶 자체에 대한 질문이며 이 질문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11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12 어째서 양 무릎은 나를 받아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13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14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 본디는 고문관(顧問官) 또는 평의원(評議員)이다. 들과 함께, 페허 옛날에는 호화롭고 웅장한 궁궐들이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된 건물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피라미드” 또는 “대영묘(大靈廟)” 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를 제 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15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과 함께, 제 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16 파묻힌 유산아처럼 나 존재하지 않을 터인데,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16절은 문맥에 맞지 않는다. 11절, 12절, 또는 13절 다음에 배치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17 그 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18 포로들이 함께 평온히 지내며 감독관의 호령도 들리지 않는 곳. 19 소인도 대인도 그 곳에선 똑같고, 종은 제 주인에게서 풀려나는 곳. 저주가 죽음에 대한 동경을 강렬하게 내뿜는 탄식으로 바뀌었다. 욥은 여기서 일반적으로 그리움-감사-사랑의 정과 함께 되새기는 태중, 모태, 무릎, 젖 등을 삶의 권태 속에서 원망스럽게 회상한다. 우리는 욥이 토해낸 이러한 구절을, 비관주의-염세주의 등이 인간의 삶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현대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고대인들의 마음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옛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최고선이고, 이승이 절대적인 것이다. 죽음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선의 끝장을 의미한다. 셔올 곧 저승은 안식을 누리는 곳이 아니라, 그림자와 같은 생존만이 간신히 부지되는 곳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승을 멸망의 나라(욥기 26,6; 28,22; 잠언 15,11; 시편 88,12; 묵시 9,11)라 부른다. 무덤에서 당신의 자애가, 멸망의 나라에서 당신의 성실이 일컬어지리까?(시편 88,12) 저승에서는 하느님을 찬미할 수 없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과의 생명 공동체가 끝나고 인간으로서의 인간적 생존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욥은 고통스론 삶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무의미한 이승보다는 차라리 멸망의 나라를 동경한다. 스스로 원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풀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이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기에, 차라리 유산아처럼 곧바로 삶에 끝이 나서 이승에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면 더 나았으리라는 것이다.(16절) 차라리 그랬다면, 지금은 자기가 그리워하는 안식을 누리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3,13). 안식에 대한 이러한 동경은 욥으로 하여금 구약성서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감미로운 표현으로 그 곳 곧 셔올을 그려내게 한다(17-19절). 그곳은 악인들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희생물이 되어 쓰러진 사람들도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장소이다. 그리고 전쟁 포로로 끌려 와서, 아마도 광산에 투입되어, 감독관들의 욕지거리와 회초리 밑에서 혹사당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함께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셔올에서는 모든 사회적 께급이 없어져서 종도 못살게 굴던 주인에게서 해방되는 곳이다. 일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묘사이다. 그러나 다른 한 면으로는 강한 역설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역설은 욥이 죽음의 나라를 묘사하는 다른 구절과 비교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저의 (살) 날이 이제 조금밖에 없지 않나이까, 내버려 두소서. 저를 놔두소서, 제가 조금이나마 생기를 찾으오리다. 제가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어둠과 암흑의 땅으로 가기 전에, 칠흑같이 캄캄한 땅, 질서 없이 암흑만 있고, 빛마저 칠흑과 같은 (곳으로 가기 전에)(11,20-22). 욥이 이 3장에서 말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한 동경을 반어법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욥이 최후의 조치를 직접 취하지 않는 데서도 알수 있다. 사실 삶의 부정과 죽음의 동경에 이은 그 다음 순서는, 자기가 원하는 이 순간에 죽음이 오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여 삶에 끝을 내는 것 곧 자살일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욥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자살을 꾀하지는 않고, 점점 감정이 격해지면서, 손수 결단을 내려 주십사고 하느님께 간청하기도 한다: 아,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하느님께서 나의 소망을 채워주신다면! 하느님께서 결심하여 나를 으스러뜨리시고 당신 손을 내뻗어 나를 자르신다면! 베를 짜는 사람이 면직물 끝의 짜다 남은 실을 자르듯, 하느님께서 자기 수명의 선(線)을 잘라 죽게 해주시길 바라는 말이다. 이사 38,12참조. (6,8-9). 이는 일차적으로 생명을 창조하시고 각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생명의 하느님께 대한 일종의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으면서 하느님께 내맡겨버리는 것은, 반항이면서 동시에 져버릴 수 없는 신뢰를 의미한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욥은 결코 스스로 하느님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심연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욥을 생명과 이어주는 마지막 줄이다. 비록 지금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짐나, 이것이 욥을 다른 그 무엇보다도 더 강하게 하느님과 묶어 주며, 고통과 절망의 나락으로부터 생명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 들어올려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욥은 ‘무(無)의미’라는 또는 ‘반(反)의미’라는 어둠의 터널을 계속 걸어가야 한다. 다. 하느님께서는 왜?: 3,20-23 피조물의 실존에 대한 질문( 3,11-12 참조 )은 최종적으로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질문으로 귀착한다. 20 어찌하여 그분께선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단수 3인칭 “그분”은 하느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비인칭 용법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고대 번역본들은 수동태로 옮기고 있다: “어찌하여 고생하는 이에게 빛이 주어지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이들은 죽음을 기다리건만 오지 않는구나, 숨겨진 보물보다도 더 찾아헤메건만, 22 이들이 무덤을 얻으면 환호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련만 직역: “환호에 이르도록 기뻐하는 이들, / 그들은 즐거워하련만, 무덤을 얻으면.” 그러나 “환호”에 해당하는 히브리 낱말을 꼴이 비슷한 “무덤(을 덮는)돌”로 읽어서 “이들은 무덤돌에 이르는 (길)을 기뻐하고 / 무덤을 얻으면 즐거워하련만”으로 옮기기도 한다. 23 (어찌하여) 그 길이 막혀버리고 직역: “감추어져 있고.” ,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버린 사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빛을 위시해서(창세 1,3)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왜 고통받는 인간 개개인에게도 빛과 생명을 주시어, 무의미하고 빛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심연에서 허덕이게 만드시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오직 그분만이 주실 수 있다. 그러나 그분께선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으신다. (위 각주 11의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추측이 맞는다면) 욥은 대화 부분에서 처음으로 하느님께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그냥 그분이라고만 부른다(히브리말에서는 인칭 대명사가 따로 사용되지 않고, 동사의 단수 3인칭 안에 내포 되어 있다). 23절에 하느님이 언급되지만, 그러나 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방으로 에워싸버린, 인간을 감옥속에 가두어버린 분이시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는 고통당하는 욥에게 이율배반적 모습으로 보이신다. 욥이 바라보는 하느님 상(像)에 균열이 생긴다. 하느님께서 서로 모순되는 이중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을 포로로잡아 가두시는 하느님, 그러나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대화가 진행된면서, 결국은 인간을 원수처럼 대하시는 하느님과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으로 나누인다. 원수이신 하느님, 구원자이신 하느님. 욥의 내적 고통, 욥의 신앙의 위기는 이 이율배반적인 하느님 ‘모습’에서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구원자이셔야 하는 하느님께서 보이지도 응답하지도 않으실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 공포의 대상의 되어버리신(3,25 참조) 것이다. 그러나 욥은 어둠에 싸인 고통과 무의미 너머에 본연의 하느님께서 계심을 확신한다. 지금으로서는 보이지 않으시는 이 하느님을 붙잡아 결코 놓지 않으면서 그분과 끝까지 대결해 나가는 것이다. 라. 욥의 고통 그렇다면 욥은 과연 어떤 고통을 겪는가? 우리는 산문 부분에서 욥이 모든 재산과 자식들을 빼앗겼고(1,13-20). 또 그 자신은 온 몸을 뒤덮은 악성 종기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대화 부분에서는 이 상실과 병고 곧 이를테면 외적인 고통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아픔에 대한 욥의 직접적인 첫 탄식이라 할 수 있는 3,20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 영혼이 쓰라린 이라는 말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욥은 처음부터 자신의 병고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듯 영혼과 육신이라는 인간의 이원론적 구분을 알지 못했지만, 이 ‘영혼의 쓰라림’은 이를테면 내적 아픔을 뜻한다(사회적 고통에 대해서는 19,13-19; 28-30장 참조). 사실 욥이 대화 부분에서 자신의 질병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탄식하는 곳은 다음과 같은 몇 군데밖에 되지 않는다: 내 살은 구더기와 흙먼지로 뒤덮이고 내 살갗은 갈라지고 곪아 흐르는구려(7,5); 내 뼈는 살가죽에 본디 “내 뼈는 나의 살갗과 나의 살에..”이다. 욥의 극도로 여윈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여겨지나, 본문이 분명하지 않아 여러 가지 수정이 제안된다. 달라붙고, 나의 잇몸으로 겨우 연명한다네 직역: “나는 나의 이의 가죽으로 살아나온다네(또는: 살아나간다네).” 여기서는 1행에 이어 2행에서도 자신의 지극한 육체적 고통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속담적 표현으로 보이는 이 2행의 구체적인 뜻은 분명하지 않다. (19,20); 이제 나의 넋은 빠져버리고, 직역: “...넋은 내 위에 (또는: 내 안에) 쏟아지고.” “넋”은 여기서 생명력을 뜻하고, 항아리에서 물이 쏟아져버리듯 몸에서 생명력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고통의 나날만이 나를 사로잡는구려. 밤은 내 뼈를 깍아내고, “밤에 그분께서는...”으로 옮기기도 하고, 또는 ‘깎아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 동사를 수동태로 바꾸기도 한다. 나를 갉아먹는 고통은 잠들지 않네(30,16-17). 물론 육체적 병고가 원인이고 시발점이다. 그러나 욥을 더 괴롭히는 것은 정신적`영신적 아픔이다. 그리고 욥의 최종적 아픔은, 앞으로 자세히 말해지겠지만, 모든 것의 귀결점이신 하느님 자신과의 관계에서 유래한다. 하느님 자신이 문제이면서 동시에 문제의 해결이기도 하다. |
| 욥 기(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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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친구들의 응답 엘리바즈는 이제 욥에게 하느님께 승복하라고 점잖게 권고한다. 현재의 불행에 대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
영원한 기록 (용기19,23-27)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 내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