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의록(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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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기
Ⅰ. 욥기 일반
그렇다고 욥기가 단순히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 고통을 이리저리 꿰어 맞춘다거나, 목적 달성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고통을 윤색 내지는 각색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욥기의 저자는 지극한 고통을 스스로 겪어야만 했다. 욥기에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이 들어 있다. 어떠한 신학이나 신심의 여과 장치 없이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하느님께 쏟아 부을 수 있는 탄식과 탄원, 원망과 항변이 들어 있다. 욥기를 접할 때 우선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그리고 그 내용을 잘 살펴볼 때, 산문으로 된 앞뒤 부분만으로도 욥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꾸며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산문 부분은 욥이라는 경건한 사람이 어떻게 행복한 삶을 구가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 내기가 벌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로 불의에 닥친 엄청난 고통을 욥이 어떻게 감수하면서 자기의 신앙을 고수하였는지, 결국 이러한 욥이 어떻게 행복을 되받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반면에 운문 부분에서는 어떠한 사건 전개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욥과 그 친구들, 그리고 욥과 하느님 사이에 벌어지는 대화들만이 들어 있으며, 또 이 대화들은 긴 시적 문장으로 되어 있다. 이 말은 이 대화가 실제로 이런 식으로는 진행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 대화가 산문의 종결 부분에 다다르기 위해서 꼭 있어야 하는 요소는 아니다. 곧 대화가 없이도 산문의 욥 이야기는 훌륭히 끝을 맺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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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 기(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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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에 들어 있는 산문 부분의 바탕을 이루는 이야기는 이미 기원전 2천년대 말기부터 중동 지방의 현인들 사이에 일종의 민간 설화로 두루 퍼져 있었으며, 이것이 기원전 천년 이후에 이스라엘에도 전해졌다고 여겨진다. 이에 대한 증거 하나를 우리는 에제키엘 예언서 14장에서 볼 수 있다. 14절과 20절에 전설적인 의인 셋이 거명된다. 곧 노아와 다넬(또는 다니엘), 그리고 욥이다. 노아는 창세기 6,9와 7,1이 말하는 바와 같이 모범적인 의인이다. 그는 흠없는 인간으로서 대홍수로 인한 완전한 파괴로부터 이 세상을 구하는 도구가 된다. 그는 제 2의 아담, 새 땅 위에 새 인류의 아버지가 된다.
에제키엘 14장 이외에 (히브리말로 쓰인) 집회서 49,9에도 욥이 언급된다(칠십인역에는 욥이 아니라 적군들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리스말 번역자가 히브리말에서 비슷하게 생긴 ‘욥<בויא>’과 ‘원수/적<ביוא>’을 혼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집회서의 이 구절은 욥기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늦어도 집회서가 쓰인 기원전 200년 이전에는 욥기가 완성되었다.)
물론 우리로서는 에제키엘서가 알고 있던, 그리고 욥기의 저자가 알고 있던 욥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욥기의 저자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욥 설화를 기계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목적에 따라 변경하고 윤색했다는 사실이다. 욥과 대화를 나누게 될 세친구들의 방문을 이야기히는 산문 2,11-13은 뒤에 나오는 대화 부분과 함께 가야한다.
또 한 가지 언급할 바는 1-2장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사탄에 관한 문제이다. 사탄은 유배 초기 이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에 등장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원래의 욥 이야기에는 사탄이 등장하지 않고, 또 욥의 고통이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 벌어진 내기의 결과가 아니라, 다른 것에서 기인했으리라 여겨진다.
이 점에서 특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지방을 무대로하고,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산문 부분에서는 하느님의 명칭으로 이스라엘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인 야훼를 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운문 부분에서는 12,9<그리고 38,1>을 빼고서는 항상 하느님의 일반적인 명칭들 곧 엘, 샫다이<전능하신 분>, 엘로아만이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될 것이다).
| 욥 기(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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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욥에 대한 하느님과 사탄의 내기: 1,1-12 욥은 많은 자녀들과 함께 매우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욥이라는 인물을 욥기의본문은 이렇게 특색짓는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올바르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머리하는 이였다(1,1). 똑같은 표현이 하느님의 말로서 1,8과 2,3에서 되풀이된다. 욥기 전체의 이해에 앞으로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욥의 성격 규정을 잠깐 살펴보도록 한다. 욥은 무엇보다도 ‘온전한’ 사람이다. 온전함이라는 개념은 갖출 것을 다 갖춘 것을 뜻한다. 있어서는 안될 요소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예컨대 종교의식의 언어에서, 하느님께 봉헌할 짐승이 온전해야 한다함은 있어서는 안될 흠이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흠이 없음은 우리말에서와 같이 히브리말에서도 도덕적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온전하다는 말을 흠없다, 죄없다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인간이 흠없다 함은 단순히 어떤 객관적 죄가 없음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윤리적 개념을 우리는 하나의 관계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흠 곧 있어서는 안될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느님과의 관계에 전적으로 충실하여서, 하느님과 자기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되는 다른 요소, 곧 불충의 요소가 없다는 말이다. 온전함에 대한 이러한 관계적인 이해는, 하느님이 욥을 부르는 칭호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하느님은 욥을 나의 종이라 부른다: 1,8: 2,3;42,7, 8(3번). 종은 주인과의 관계를 지칭하는 칭호이다. 그래서 욥이 온전하다 함은 하느님께 대해서 종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들을 지니고 이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들은 지니고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과 사탄 사이의 내기의 결과로 겪어야만 했던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1,22), 하느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는 아직도 제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다(2,3). 하느님을 거역할 수 있는 소직 다분히 있는 고통 속에서도 욥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부정적인 언행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올바르다’는 말 역시 관계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옆으로 비껴 가거나 옆을 보지 않고 곧바로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의 두 개념을 이어 받으면서 종합g나다고 할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경외’ 역시, 다음에 자세히 말하게 되겠지만, 결국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말한다. 그리고 믿음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칭한다. 욥의 성격 규정의 네 번째 요소인 ‘악을 피함’은 어떤 객관적`추상적 악을 저지르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에 저해되는 것을 행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이렇게 이해된 욥의 성격 규정은 비단 산문만이 아니라, 결국에 가서는, 운문 부분에 나오는 욥에게도 해당된다. 물론 욥은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느님께 대항하기도 하며, 하느님을 자기의 원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욥은 하느님을 버리지 않는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만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부정했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적어도 내적인 고통은 덜 겪었을 것이다(욥에게는 육체적 아픔보다는 내적인 고통이 더 컸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느님만을 향한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종국에 가서는 욥이 친구들보다도, 하느님께 그리고 그분과의 관계에 더 충실했다고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42,7-9). 행복하게 살던 욥은 어느 날 갑자기 까닭을 알 수 없고, 또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불행에 휩싸이게 된다.(1, 13-20). 이 불운은 천상 어전에서 벌어진 하느님과 사탄 사이의 내기가 그 원인이 된다(1, 6-12). 여기서 사탄은 우리가 현재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악마’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사탄은 본디 ‘고발자, 대적자, 원수’의 뜻을 지녔다. 여기서는 바로 이러한 원 의미의 보통 명사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는 ‘천상 어전’이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천상 천하의 임금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도 지상의 정치 및 국가 체제에 따라서 생각하였다. 사탄 역시 임금이신 하느님의 신하들 중의 하나이었다. 그런데 사탄은 그중 가장 냉소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땅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왔다(1,7)는 사탄에게 하느님께서는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올바르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피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느니라(1,8)하시면서 욥을 높이 평가하신다. 그러자 사탄 곧 냉소자는 욥이 하느님을 믿는 데에는 다 까닭이 있다고 응수한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복을 넘치게 내리시고 그를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만일 그의 소유를 모조리 앗아버린다면, 그 역시 틀림없이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되리라고 빈정거린다. 이렇게 해서 욥을 믿는 하느님과 욥을 믿지 않는 사탄사이에 내기가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사탄과 내기를 하고 또 이로써 인간을 불행에 빠뜨리는 우둔한 존재가 아니시다. 욥을 두고 벌어진 하느님과 사탄 사이의 내기를 우리는 두가지 면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첫째는 고대인들의 사고 방식이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것이 신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신교적인 환경에서는 인간의 행복은 선한 신과, 인간의 불행은 악한 신과 연결된다. 또는, 우리가 그리스 신화에서 잘 볼수 있듯이, 인간적인 감정을 지닌 신들 사이의 애증과 갈등. 그들의 변덕스런 기분에 따라 인간의 행`불행이 좌우되는 것으로 여겼다. 반면에 유일신적인 환경에서는 모든 것이 한 분의 신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느님과 사탄사이에 벌어진 내기에 대한 이야기의 배경에는 이렇게 심지어 고통과 불행까지도 전부 하느님에게서 기인한다는 이른바 ‘범원인론’적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내기가 일종의 문학적 도구라는 점이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리고 원인을 알 길이 없기데 그 강도가 더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모범적인 인내와 신앙을 드러내는 한 인간을 그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 것이다. |
| 욥 기(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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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인내와 신앙의 모범인 욥: 1,13-22 재산과 자식들을 모두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빼앗기는 아픔 속에서도 욥은, 하느님께서 믿었던 대로, 굳은 신앙과 커다란 인내심으로 고난을 극복해 나아간다. 이렇게 인내와 신앙의 모범인 욥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 산문 부분 중에서 유일하게 운문으로 되어 있는, 그럼으로써 그 중요성이 부각되는 1,21이다: 알몸으로 어미 배에서 나온 이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여기에서 그리가 1행에 나오는 어미 배가 아님은 확실하다. 집회 40,1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는 만물의 어머니 곧 땅을 가리킨다. 인간이면 누구나 고생스럽게 마련이고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날부터 만물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날까지 아담의 자손들이 지는 멍에는 무겁다. 구약의 사람들은, 개개의 인간이 어머니 뱃속에서 형성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원 모습, 곧 흙에서 왔다는 사실을 잘 자각하고 있다(창세 3,19; 집회 17,1). 그래서 인간의 (물론 고대인들에게) 신비스러운 형성을 노래하는 시편 139는 이렇게 노래한다: 정녕, 당신께서는... 제 어미 뱃속에서 저를 엮으셨나이다(13절): 제 골격은 당신께 감추어지지 않았나이다,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땅 깊은 곳에서 제가 짜여질 때 (15절) 그뿐만 아니라 이들 역시 인생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어미 배에서 나온 것처럼 알몸으로 되돌아간다.... 자기 노고의 대가로 손에 들고 갈 수 있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전도5,14): 실상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또 아무것도 가지고 갈수 없습니다 (1디모 6,7). 그러나 욥의 이 구절은 단순히 공수래 공수거만을 말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인간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는다. ‘이것을 달라’, 또는 ‘저것을 주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인간은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다. 주어진 것은 한시적으로 맡겨 졌다. 맡겨진 것은 찾아감을 전제로 한다. 하느님의 이러한 권리 행사를 거부할 여지가 인간에게는 전혀 없다. 주셨다가 가져 가시는 것은 창조주이시며 지배자이신 하느님의 주권 행사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찬미이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빌려 주셨다가(1역대 29,14참조) 거두어 가시니, 신앙인으로서는 이러한 주님께 찬미를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의 인간에게 공수래 공수거는 인생 무상 또는 허무의 토로가 아니다. 공수거라는 허무까지도 찬미라는 하느님과 의 인격적인 관계로 채우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찬미는, 인간의 소유나 행복의 유무를 떠나,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감사의 관계가 지속됨을 말한다. 욥은 1,21의 말로써 이러한 깊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
| 욥 기(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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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되풀이되는 내기와 재확인된 욥의 신앙: 2,1-10; 42,10-17 욥의 이러한 영웅적인 인내와 신앙을 보면서도 사탄은 단념하지 않는다. 그는 어쩌면 인간의 나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리라. 결국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 두번째 내기가 벌어진다(2,1-6). 사탄은 여기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사고방식의 하나인 「교환 개념」을 들고 나온다. 가죽은 가죽으로! (2,4). 가죽 한 장을 그것에 상응하는 값을 내고 사듯이, 인간은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이에 상당한 모든 것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자기의 목숨을 지탱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인간은 그런 하느님을 여지없이 내버릴 것임을 뜻한다. 첫 번째 내기에서 욥 자신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하느님을 버리지 않았지, 이제 직접적으로 욥 자신을 친다면, 틀림없이 욥의 인내심은 끝나고 하느님께 대한 그의 신앙 또한 그분께 대한 저주로 변할 것이라고 사탄은 장담한다. 가죽은 가죽으로! 는 이렇게 법적인 교환 개념을 배경으로 한 격언이라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곧 일반적으로 유효한 격언을 하느님 앞에서 직접 인용함으로써 사탄은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리하여, 욥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상실하고, 거기에다 이제는 머리 끝에서 발바닥까지 성한 데 없이 악성 종기로 뒤덮이게 된다. 욥은 토기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면 잿더미 속에 앉아 있었다(2,8). 더 이상 처참할 수 없는 욥의모습을 그려내는 말이다. 토기 조각은 고통을 없애기 위한, 또는 가려움을 덮기 위한 것이다. 욥의 고통은 단순히 질병만을 뜻하지 않는다. 심한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되어야 한다(레위 13,46). 이런 이는 일반적으로 성문 밖(2열왕 7,2) - 재도 함께 버려지는 - 쓰레기장에 머물렀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사회 및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삶을 이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잿더미위에 앉음은 거상(居喪)과 참회 때에(이사 58,5; 예레 6,26; 에제 27,30; 요나 3,6) 이루어지는 일종의 의식(儀式)이다. 욥의 경우에는 자신의 질병과, 그로 인한 내적인 고뇌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죽음에 못지 않은, 아니 죽음보다 더한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고통 속에서, 잿더미 위에 앉아 토기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면서도 욥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 몯느 고통을 함께해온 아내가 남편의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해 차라리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한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온전함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요(2,9). 욥기에서 여기에만 단 한 번 나오는 욥의 부인의 이 말은 2,3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과 1, 11 및 2,5 에 나오는 사탄의 말을 함께 담고 있다. 그는 아직도 제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다는 하느니믜 말씀은 부인의 입에서 경탄과 질문으로 바뀐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에게 유리할 때에만 신앙을 지킨다는 사탄의 예견은 욥 부인의 말에서 현실로 드러나며 그녀는 남편에게 이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저주와 인간의 죽음이 일정한 상호 관련 아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냐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죽음이 저주에 대한 하느님의 벌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저주는 하느님과의 절교 곧 하느님과의 관계의 부정이고, 죽음은 하느님과의 관계의 종말이라는 의미에서 둘은 깊은 관련이 있다. 저주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완전한 단념이고, 죽음은 이러한 단념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원외인 것이다. 그러나 욥은 사탄의 예상을 빗나간다.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2,10) 하면서 욥은 하느님을 단념하지 않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로써 사탄과의 내기는 하느님의 승리로 끝난다. 인간을 믿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믿지 않는 사탄에 대해서 승리하시는 것이다. 욥의 신앙에 대한 하느님의 믿음의 승리 곧 믿음에 대한 믿음의 승리이다. 결과적으로 욥은 회복된다(42,12-17). 건강만이 아니라, 일곱 아들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딸을 다시 얻고 재산도 예전의 것보다 갑절을 더 얻어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는다. 욥은 140년을 산 것으로 되어 있다(42.16). 이의 이해를 위해서 시편 90,10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중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가나이다. 140년은 ‘덧없는 인생 살이 70년’의 두배이다. 곧 가득 찬 수염, 충족되어 더 바랄것이 없는 삶을 가리킨다. |
| 욥 기(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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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욥 이야기의 핵심 문제 - 무상적(無償的)신앙: 1,9 산문으로 된 욥의 짧은 이야기는 이렇게 줄거리 역시 간단하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핵심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사탄이 하느님께 던진 질문이다: 욥이 까닭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 여기서 먼저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말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을 경회함 또는 두려워함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 대해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신체험(神體驗)에 기인한다. 예컨대 이사야서에 따르면 예언자는 성전에서 환영속에 하느님의 ‘모습’을 뵙게 된다. 이때 이사야의 반응은 이렇다: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비천하고 더러운 인간으로서 자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느님만의 세계에 접했을 때 자연히 느끼게 되는 공포이다. 이사야는 또한 천사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6,3). ‘거룩하다’는 하느님의 성성(聖性)만을 뜻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인간의 세계에서 떨어져 계신, 인간과는 철저하게 다르신 하느님,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그분의 속성을 말한다. 하느님을 경외한다 함은 이러한 하느님의 속성을 그대로 인정 및 수용하고 이에따라 행동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경외함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지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지혜, 인간답게 올바로 살게 해주는 지혜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임과 동시에 그 정점이라고 가르친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요, 거룩하신 분을 앎이 곧 깨달음이니라(잠언 9,10 : 이밖에도 잠언 1,7; 2,5; 15,33; 욥기 28,28; 시편 111,10; 집회 1,14 등 참조). 그러나 이 경외는 단순한 공포가 아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인간과 철저하게 다른 그 이질성 속에 안주하신다면, 인간은 끝까지 공포에 잠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선 인간 쪽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그 다름의 벽을 넘어 인간에게로 다가오신다. 이 다가오심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구원이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에게로 오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반응이 단순히 공포일 수만은 없다. 이사야도 처음에는 ‘죽었구나’ 했다가(출애 3,6; 판관 13,22도 참조). 하느님께서 먼저 누구를 예언자로 보낼까?라는 당신의 독백을 이사야가 듣도록 하시자, 그는 두려움 없이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며 나설 수 있었다(6,8). 결국 하느님을 경외함은 인간을 위하시는 존재(출애 3,14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자체가 이러한 뜻을 지닌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이신 그분께 대한 존경과 믿음과 신뢰와 사랑 등을 내포하고 있는 함축적인 개념이다. 경외는 올바른 신앙의 동의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가 구약성서에서 점점 하나의 명칭으로 되는 데, 이는 하느님을 참되게 믿는 이라는 뜻을 지녔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탄이 제기한 것으로 욥 이야기의 핵심 문제는 욥이 까딹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라는 질문속에 담긴 하느님께 대한 무상적 경외 곧 무상적 신앙이다. 욥이 과연 아무런 보상을 기대함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있느냐는 문제이다. 냉소적인 사탄은 욥이 하느님을 믿는 데에는 다 까닭이 있다고 한다. 욥은 자기의 신앙에 대한 반대 급부를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누리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누리리라고 계산하기 때문에 온전하고 올바르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피한다(1,8; 2,3)는 것이다. 그래서 욥이 만일 지금까지 누려 왔던 보상을 상실하고 또 고통에 빠짐으로써, 더 이상 신앙이 실익을 가져다 주지 않고 또 앞으로도 반대 급부를 받을 수 없으리라고 예상할 때, 주저없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버리리라고 사탄은 단언한다. 이는 신앙이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라 할 때, 신앙이 있는(또는 있다는) 곳에(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항상 제기되는 문제이다. 하느님이라는 인격체와의 관계만이 절대적이고, 그밖의 모든 것, 심지어 인간 자신의 몸과 목숨까지도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순수한 믿음이 인간에거 가능한 것인가? 욥기의 저자는 이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신앙은 바로 그러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이러한 신앙의 문제는 인간 사이의 사랑의 문제와 비슷한점을 지니고 있다. 과연 순수한 사랑은 가능한가? 상대방이 베풀 수 있는 것, 그리고 베풀 수 없는 것까지도 전부 무시하고 배제한 채, 그 사람 자신에 대한 사랑만으로 만족할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계산적이지 않고 실리를 따지지 않는 신앙, 주고 받는(give and take)인간적인 교환 법칙에 따르지 않는 순수한 믿음, 이것이 바로 산문으로 된 욥이야기만이 아니라, 운문으로 된 대화 부분까지 포함해서 욥기 전체의 핵심적인 관심사이다. 결국 욥기의 목적은 악이나 고통의 문제를 풀려는 것이 아니다. 고통에 처한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자리매김하려는 시도이다. 욥기는 고통이라는 문제를 통해서 이보다 더욱 근본적인 하느님과의 관계 곧 신앙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