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의 키루스2세(고레스)가 기절초풍한 까닭은?

2015. 10. 2. 오후 12: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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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키루스2세(고레스)가 기절초풍한 까닭은?

  


성경을 읽다보면 매우 흥미진진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벨로니아 제국(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제국의 키루스2세에 대한 내용입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2세는 성경에서 바사왕 고레스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키루스2세(고레스왕)가 바벨론을 점령할 당시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제국에서 70년간 포로생활 하던 때입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는 그의 원년에 한 조서를 내리게 됩니다.

 

그 조서의 내용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믿는 신 여호와 하나님이시야말로 참 신이시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태양신을 섬기는 나라로써, 그 당시 패권을 장악했던 제국의 왕이 일개 포로들이 섬기는 신을 찬양한다는 일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내용을 잠깐 성경 속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바빌론 유배가 끝나다 (에즈라기 1장1-11)

1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3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 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4 이 백성의 남은 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모든 지방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의 집을 위한 자원 예물과 함께, 은과 금과 물품과 짐승으로 그들 모두를 후원하여라.” 

5 그리하여 유다와 벤야민의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과 사제들과 레위인들,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 계신 주님의 집을 짓도록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신 이들이 모두 떠날 채비를 하였다. 

6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저마다 온갖 자원 예물 외에도, 은 기물과 금과 물품과 짐승, 그리고 값진 선물로 그들을 도와주었다. 

7 키루스 임금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서 가져다가 자기 신전에 두었던 주님의 집 기물들을 꺼내 오게 하였다. 

8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재무상 미트르닷을 시켜 그것들을 꺼내 오게 한 다음, 낱낱이 세어 유다 제후 세스바차르에게 넘겨주도록 하였다. 

9 그 품목은 이러하다. 금 접시가 서른 개, 은 접시가 천 개, 칼이 스물아홉 자루, 

10 금 대접이 서른 개, 이급 은 대접이 사백열 개, 그 밖에 다른 기물이 천 개였다. 

11 그리하여 금 기물과 은 기물은 모두 오천사백 개였다. 세스바차르는 유배자들을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오면서, 이 기물들을 모두 가지고 왔다. 







 

이 사건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패전국의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삼아도 될터인데, 노예는 커녕 그들이 믿는 신을 찬양하며, 아무런 댓가없이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

 

그렇다면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은 도대체 왜 그와같은 조서를 내렸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성경의 예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키루스 왕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이름과 그가 할 일을 성경 속에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키루스를 세우시다 (이사야45,1-6)

1 주님께서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당신께서 오른손을 붙잡아 주신 키루스에게 말씀하시니 민족들을 그 앞에 굴복시키고 임금들의 허리띠를 풀어 버리며 문들을 열어젖히고 성문들이 닫히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2 내가 네 앞을 걸어가면서 산들을 평지로 만들고 청동 문들을 부수며 쇠 빗장들을 부러뜨리리라. 

3 내가 어둠 속에 있는 보화와 숨겨진 보물을 너에게 주리니 내가 바로 너를 지명하여 부르는 주님임을, 이스라엘의 하느님임을 네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4 나의 종 야곱 때문에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 때문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르고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 너에게 칭호를 내린다. 

5 나는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 너를 무장시키니 

6 해 뜨는 곳에서도 해 지는 곳에서도 나밖에 없음을,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 이사야서의 예언은 키루스2세가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기 약 170년 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170년 전이면 아직 키루스 왕은 이 땅에 존재하지도 않을 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고레스(키루스)라는 이름도 기록되었을뿐만 아니라 그가 할일까지도 상세하게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고레스 앞서 가서 모든 쇠빗장을 꺾으신 이유는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12 바로 내가 땅을 만들었고 그 위에 있는 인간을 창조하였다. 바로 이내 손으로 하늘을 펼쳤고 그 모든 군대에게 명령을 내린다. 

13 바로 내가 의로움으로써 그를 일으켰으니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라. 그가 내 도성을 재건하고 유배 간 나의 백성을 대가도 선물도 아니 받고 풀어 주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사45,12-13)




 

즉 하느님께서 키루스왕을 택하신 이유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케 하시려던 것이었습니다.

키루스 왕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바벨론을 정복한 줄 알았다가 성경의 예언을 보고서는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 역사가들도 모르는 내용이 성경에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과 그 성취를 살펴보면 세계 역사도 하느님의 계획하에 움직여 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등학교 세계사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헤브라이 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등 수난 끝에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옛땅으로 돌아갔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나 성경은 그 이유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등학교 세계사22p (주) 보진재>

 

그 후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기원전 722), 유대 왕국은 신 바빌로니아에 각각 정복되었다(기워전 586). 당시 헤브라이 인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등 수난 끝에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옛땅으로 돌아갔다(바빌론 유수).

 

 

 

홧팅2

 

키루스 왕에 대한 내용은 성경속 예언의 극히 일부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가 모두 예언과 예언성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 역사는 인류에 의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하에 움직여 간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예언과 예언성취들을 보여주신 이유는 제발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성경이 사실임을 깨달아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축복의 길, 구원의 길로 따라오게 하심입니다.

하느님의 그같은 사랑에 감사드리며 하느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현명한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키루스의 업적

 

 키루스 2세는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후에 칙령을 내려 바빌로니아에 의해 끌려온 유대인들을 풀어준다. 이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를 해준 것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이 재건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키루스 2세는 인간의 기본권에 대해서도 최초의 선언을 하였으며 이것들을 그릇과 석비에 새겨 남겼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고, 자신의 군인들에게 점령지 주민들을 약탈하거나 위협하는 행동을 금지시켰다. 또한 자신의 개혁정신을 전하고 점령지를 개발하려는 공공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The Cyrus cylinder, a contemporary cuneiform document proclaiming Cyrus as legitimate king of Babylon
 
 
 * 참고 :

 이 실린더의 길이는 약 9인치이고, 거기에는 BC 536에 기록된 키루스 왕의 필적이 있다. 이 필적은 에스라 1:1-3의 내용을 확증해 준다. 바사왕 키루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놓아주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였다.

 

 많은 비평가들은 기원전 6세기의 페르시아 황제는 정치적으로 약아 빠진 자들이라, 포로된 백성을 놓아주고 종교적 자유를 선언했다는 것은 우스운 소리다 라고 하면서 에스라의 기록이 잘못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키루스 왕의 실린더가 발견된 후 그들은 더 이상 에스라의 기록을 비웃을 수 없었다.

 그 실린더에는 키루스 왕이 어떻게 BC 539년에 바빌론의 도시를 저항 받지 않고 취했는지를 보이며, 그 실린더 위의 기록의 끝 부분에는 외국 포로에 대한 자유와 사회적 신분을 바로 잡아 주고 그들을 고국의 땅으로 돌아가 전통에 따라서 예배하도록 한 키루스 왕의 정책이 있다.

바빌론 거주민에 대하여는 나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안 주는 것과, 사회적 신분을 안 주는 제도를 폐지한다..나는 그들의 무질서한 주거 생활에 안녕을 주었고 티그리스 다른 편에 있는 헌납됐던 도시들을 돌려주었다. 그 땅은 오랫동안 폐허 되어온 거룩한 땅으로 나는 역시 이전의 원주민들을 모아서 그리로 돌려 보냈다.

  


[성경 속의 인물] 키루스 (1)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서 가져다가 자기 신전에 두었던 주님의 집 기물들을 꺼내오게 하였다. 그런 뒤 재무상 ‘미트르닷’을 시켜 유다 제후 ‘세르바차르’에게 넘기게 하였다. 품목은 이러하다. 금 접시 30개, 은 접시 1,000개, 칼 29자루, 금 대접 30개, 은 대접 410개, 그밖에 다른 기물이 1,000여 점이었다(에즈 1,7-10).

어지간히도 많이 가져갔음을 알 수 있다. 그 많은 전리품을 키루스는 이스라엘 측에 돌려주려 했던 것이다. 이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보통 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키루스는 이스라엘을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준 은인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키루스를 메시아라고 선언했다. 주 야훼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기름 부어 선택한 자’라고 한 것이다(이사 45,1-3). 이방인으로서 이렇게까지 칭송된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키루스는 유다인의 종교를 인정했으며, 어디서든 예배하는 것도 허용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기초공사 경비는 왕실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에즈 6,4).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키루스는 유다인에게만 이런 정책을 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빌론의 신전도 복구해 주었고 바빌로니아의 종교도 인정했다. 키루스는 속구의 종교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자신감과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키루스의 ‘페르시아’는 이렇게 해서 다양한 문화를 지닌 국가로 변신하게 된다.

키루스는 티그리스 강 동쪽의 ‘메디아’ 출신이다. 그는 왕의 외손자였다. 왕은 자신의 ‘심복장군’에게 딸을 시집보냈고 키루스가 태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키루스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왕은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자신의 딸이 도시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엄청나게 많은 오줌을 누는 것이었다. 꿈에 시달리던 왕은 재사들에게 해몽을 요구했는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외손자가 태어날 것인데 그가 왕위를 이어받아 세계를 정복한다는 것이었다. 왕조가 바뀔 수 있다는 암시였다. 왕은 키루스가 태어나자 죽이게 했다. 하지만 키루스는 살아남고 결국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기원전 550년에 일어난 ‘메디아의 쿠데타’다.

이렇듯 키루스는 시련을 견디어낸 인물이다. 궁중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며 어린 시절부터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기에 이민족을 배려할 수 있었다. 고대 역사에서 피지배 계급의 종교를 인정한 사람은 키루스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역시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다른 문화권의 종교를 인정할 수 있었다.
[2009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일 가톨릭마산 14면]


키루스 (2)


키루스의 원 이름은 ‘키루스 2세’며 키루스 대왕이라고도 한다. 1세는 전설적인 인물로 보고 있다. 키루스는 ‘메디아’의 왕으로 출발했다. 메디아는 지금의 이란 북서쪽에 있었던 고대국가로 세력이 크지 못했다. 그런데도 키루스는 남쪽의 ‘바빌로니아’를 공격하기 위해 무모한 공격을 시도한다.

수도 바빌론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유프란테스 강’을 건너야했다. 푸른 강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루스는 이 강의 물줄기를 바꾸는 공사를 시작한다. 아무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강물의 흐름을 바꾸었고 강바닥을 걸어 바빌론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후 메디아의 군대는 바빌로니아를 점령한다. 키루스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다.

차츰 키루스는 서남아시아 전체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메디아와 바빌로니아를 묶어 새로운 나라로 선언했다. ‘페르시아’의 출현이다. 키루스는 초대 황제가 되었고 포로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다. 이 정책으로 유다인들은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성전 재건도 허락받았다. 바빌론 주민들도 토속신인 ‘마르두크’를 숭배하는 것이 묵인되었고 종교적 축제도 인정받았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 전 지역은 키루스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키루스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가 죽자 맏아들(캄비세스 2세)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죽었고 둘째 아들은 살해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왕실 ‘경호 책임자’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그가 유명한 ‘다리우스 임금’이다. 다리우스는 정통성을 살리기 위해 키루스의 탈인 ‘아토사’와 혼인했고 강압정치를 통해 초기정국을 안정시켰다. 그런 뒤에는 키루스의 정책을 이어갔다.

그 역시 주민들의 종교적 관습을 존중했고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것도 추인하였다. 제도적으로 도와주라는 법령까지 내렸다. 기원전 519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성전 재건은 내부 문제로 지연된다. 사마리아인이 성전 공사에 참여하려 들자 유다인들이 막았던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이방인과 섞여 살았기에 정통 유다인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마리아 주민들은 분노했고 노골적으로 공사를 방해했던 것이다.

훗날 다리우스 황제의 손자였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이 사제 ‘에즈라’와 총독 ‘느헤미야’를 보낸 뒤에야 성전 재건은 완성된다(에즈 7,11). 키루스의 페르시아는 한때 이집트와 터키를 정복했고 그리스의 일부를 차지했다. 동쪽으로는 인도와 국경을 맞대었다. 페르시아의 뒤를 이은 ‘이란’은 1971년 키루스의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가진 바 있다.
[2009년 10월 4일 연중 제27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성경산책 구약] 역대기

천지창조에서 키루스의 칙령까지 이르는 역사

 

역대기는 아담에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는 족보를 시작으로 하여 페르시아의 임금인 키루스가 바빌론 유배민들의 본국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으로 끝나는 긴 역사를 서술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의 상당 부분은 사무엘기와 열왕기에 이미 보도된 역사입니다. 달리 말하면 역대기의 저자는 사무엘기와 열왕기에 보도된 다윗 왕국의 역사를 자신의 고유한 역사 신학에 바탕을 두고 불필요한 내용은 삭제하거나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는 등의 방법으로 재구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역대기의 역사적 사료들은 역대기 저자가 의도적으로 변형시킨 것이기 때문에 역사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절하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유배 후 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결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역대기의 자료들은 재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꿈란 동굴에서 발굴된 사무엘기 수사본 덕분에 사무엘기와 역대기 사이의 정보의 차이는 역대기 저자가 사용한 원본과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사무엘기와의 차이에서 일부 기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밖에도 역대기의 본문이 열왕기보다 더 자세한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거나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는 자료들을 전해주고 있다는 사실 또한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역대기 본문의 역사성이 재평가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역대기는 구약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 성전과 성전 제의에 큰 관심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역대기의 저자는 사제이거나 레위인 그룹에 속한 자로 여겨져 왔습니다. 다윗 임금과 여호사팟 임금, 히즈키야 임금, 그리고 요시야 임금에 대한 역대기의 보도와 열왕기의 보도를 비교하여 읽어보면, 역대기 저자가 성전 제의의 확립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외에도 역대기 저자는 족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며, 역사를 보다 응보의 원리에 부합되게 서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므나쎄 임금은 유다 왕국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왕이며, 열왕기에서는 유다의 임금들 가운데 가장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임금이기도 합니다.(2열왕 21장 참조) 그런데 역대기의 저자는 그토록 악명 높은 임금이 55년간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임 기간 중에 바빌론으로 끌려가 곤경에 처했을 때 회개하여 하느님을 알아 모시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2역대 33장 참조) 역대기의 저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다윗 왕국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는 북 왕국의 역사 대부분을 생략합니다. 따라서 역대기를 흥미롭게 읽는 방법은 사무엘기와 열왕기에 나오는 보도와 역대기의 보도를 비교하여 읽는 것입니다.

현재 학자들은 역대기가 에즈라-느헤미야기보다 늦게, 대략 기원전 4세기 후반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역대기 저자는 곳간에서 낡은 것과 새것을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는 율법학자처럼, 그의 시대에 유통되던 성경 자료들을 활용하여 역사와 율법의 조화를 도모한 훌륭한 성경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2014년 3월 9일 사순 제1주일 서울주보 4면, 김영선 루시아 수녀(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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