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서(독서묵상)
<회개를 외치는 말라키 예언자>
연중 제 31주일 제1독서(말라1,14ㄴ-2,2ㄴ.8-10)
'말라키'라는 이름은 '나의 사자(使者)'라는 뜻으로 3장 1절에서 끌어들인 일종의 가명이다. 구약의 어느 곳에서도 이 예언자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를 찾아볼 수 없다.말라키서의 역사적 배경을 기원전 480-46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체로 하까이/즈카르야 시대와 에즈라/느헤미야 시대 사이다.
기원전 539년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은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독려에 힘입어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고(기원전520-515년) 성전 전례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러나 두 예언자가 예루살렘 성전의 복구와 연결하였던 이스라엘의 완전 회복에 대한 높은 기대와 희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백성을 올바로 인도하고 가르쳐야 할 사제들이 스스로 제사와 전례 규정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았고, 백성들은 십일조 규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이방 민족과 통혼하면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기 주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말라기의 두 번째 신탁(1,6-2,9)은 사제들의 타락을 고발한다. 말라키는 아모스를 비롯하여 사제들에게 비판적이었던 예언자들의 전통위에 서 있다.
말라키가 비판하는 사제들의 가장 큰 잘못은, 하느님께 값싼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 더러운 빵과 훔친 짐승, 절름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성의 없이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을 업신여겼다. 아무도 이런 짐승을 총독에게 바치는 일은 없다(1,8).
만군의 주님께 어울리는 제물은 향기로운 제물, 깨끗한 곡식 예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내 이름은 민족들 가운데에서 드높다. 내 이름이 민족들 가운데에서 드높기에, 곳곳에서 내 이름에 향과 정결한 제물이 바쳐진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1,11)
어떤 교부들은 이 11절의 말씀이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와 맺게 될, 새 계약의 경신례를 예고하는 것으로 본다.
말라키는 사제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대의 상황을 주도하던 차독 가문 사제들의 타락과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차독 가문의 사제들은 즈루바뻴의 치세 아래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을 때, 성전의 모든 권한과 임무를 장악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말라키 예언자는 이들에 맞서 레위 가문 사제들의 사제직을 옹호한다. 다윗 임금 시절에 레위의 후손인 무시 가문의 에브아타르는 차독과 더불어 만남의 천막에서 함께 봉직하였다. 그러나 솔로몬 임금의 형이자 경쟁자인 아도니아를 지지했다는 죄목으로,에브아타르는 고향 아나톳으로 쫓겨나고, 차독 가문 사제들이 예루살렘 성전 전례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부터 레위의 후손인 무시 가문의 사제들은 예루살렘 성전 대신, 지방에서 떠돌며 백성을 가르치는 소임만을 맡았다.
민수기 16-17장을 보면, 레위 족속들이 턱 밑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다가 벌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장 은혜를 받고 있고, 주님의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도와 주어야 할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데서 질투와 반역을 한다는 사실이다.
가톨릭 교회안에도 생각해야 될 여러 문제들이 많다. 다만, 나는 사제로서 하느님 대전에 어떤 제물을 바치며, 영신적으로 참으로 잘 준비하여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최상의 제사를 봉헌하고 있는가? 를 내 자신에게 묻고 싶다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제1독서 (말라3,13-20ㄴ)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20)
말라기 3장 19절에서는 주님의 심판이 최종적으로 실현될 그 날에 악인이 처할 궁극적 운명이 무엇인지를 다루었다. 그것은 완전한 파멸이었다. 이제 말라기 3장 20절에서는 심판이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그 날에 의인이 완전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제시된다.
이처럼 악인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날은 반대로 의인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을 도래케 할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제시되는 주요한 예언의 패턴인데,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 악인의 패망과 의인의 궁극적 승리를 병렬시켜 쌍으로 제시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여기서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 대조되는 존재를 '의인' 또는 '겸손한 자'로 표현하지 않고,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로 표현하신다. 이것은 말라기 3장 16절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이러한 표현은 말라기서 전반에 제시된 당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악인들이 죄를 고집하고 악을 자행하는 이유가, 주님을 경외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심판의 대상인 악인들과 대조되어 하느님의 축복의 대상으로 나오는 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로 표현되는 것은 적절하다.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종말론적 심판의 날에 악인은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지만,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와 반대로 복을 받게 된다. 여기서 '의로움의 태양이 ~떠오르리라'에 해당하는 '웨자레하 ~셰메쉬 체다카'(wezareha ~shemesh tsedakqah; but the sun of righteousness will rise)는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두 가지 대표적인 견해가 공존하는데, 하나는 의로움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공의로운 날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어떤 번역본은 여기의 '태양'(해)을 의미하는 '셰메쉬'(shemesh)를 대문자 'S'를 사용해 'Sun'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이 태양을 그리스도로 본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그런데 문제는 신약에서 그리스도가 '의로움의 태양'으로 표현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그와 동의어로 볼 수 있는 '빛'으로 묘사하는 실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요한1,4.8.9; 8,12; 12,46).
이 사실을 감안하면, 본문은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그리고 강생(육화)과 재림의 양자의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둘 수 있지만, 후자에 보다 무게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제시하는 '치유'는 궁극적이고도 완전한 치유, 즉 영육간의 온전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메시야가 재림하심으로 모든 의인들은 그 동안의 아픔과 괴로움을 모두 치유받고,영육간에 온전히 회복을 체험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는 전통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견해는, '의로움의 태양'이라는 표현에서 '태양'이 아닌 '의로움'에 초점을 맞춘 표현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을 취한다면, '의로움의 태양이 ~ 떠오르리라'는 표현은 모든 어두움과 슬픔, 부조리와 불법을 물러가게 하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날이 밝을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과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에게는 그 날이 어두움의 날, 고통의 날, 슬피울면서 이를 가는 날, 화덕(용광로) 속의 지푸라기처럼 완전히 타버리는 날이 될 것이지만, 의로운 사람들과 주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정당성을 인정받는 날, 억울함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날, 모든 눈물이 씻겨지는 회복의 날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의로움'이라는 표현을 '승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지금 현재 보고 있는 패배와 굴욕의 날이 끝이 나고, 승리와 영광의 날이 온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 '날개에 치유를 싣고'에 해당하는 '우마르페 삐케나페하'(umarpe bikenapeha;with healing in its wings)는 '그 날개들 안에 있는 치유'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날개에'에 해당하는 '삐케나페하'(bikenapeha)는 직역하면, '그 날개들 안에'라는 뜻인데, 이것은 태양에 날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태양에서 퍼져 나오는 광선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태양을 묘사할 때, 광선을 상징하는 여러 날개달린 원반 물체로 묘사했다.
특히 구약에서 '날개'를 뜻하는 '카나프'(kanap)는 끝이나 가장자리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되는 데(시편104,2; 호세4,19), 여기서도 태양의 가장자리에 있는 광선이라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말라3,1-4.23-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24)
앞선 말라기 3장 23절에서 주님께서 최후의 심판에 예언자 엘리야를 파견할 것을 예언하였다. 이어지는 말라기 3장 24절에서는 그의 사명을 통하여 주님과 선민 이스라엘의 관계가 회복될 것을 예언함과 더불어 그의 사명을 거부하는 자에 대하여 경고를 주고 있다.
즉 말라기 3장 24절은 장차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으로 올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제시된다(루카1,17). 본문에서 '부모'에 해당하는 '아보트'(aboth), '아보탐'(abotham)은 모두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예언을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관련해서 그의 사명에 적용한 주님의 천사는 루카복음 1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여기서 '부모의 마음'과 '의인들의 생각'을 같은 뜻의 표현으로 보고, '자녀'와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같은 뜻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경건한 조상들의 신앙을 불경건한 후손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게 하여 그들의 신앙을 조상들의 신앙처럼 경건하게 만든다는 뜻이 된다.
말라기 예언자 당대나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당시의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과거에 신앙의 조상들이 주님 대전에 가졌던 경건하고 의로운 신앙의 결핍이었다.
이를 감안할 때, 세례자 요한은 부모들, 즉 이스라엘의 경건한 조상들이 가졌던 그 신앙심을 자녀들, 즉 그 후세대들이 회복하여 메시야를 맞을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 사명을 맡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그가 ~돌리리라'에 해당하는 '웨헤쉬브'(weheshib; and he will turn)는 '그가 회복시킬 것이다'(he will restore)라는 의미인데, 문맥과 구세사의 전개 과정을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좋다.
제27주간 목요일 제1독서 (말라3,13-20ㄴ)
히브리어 성경에서 말라키서는 열두 소예언서의 마지막 이면서 동시에 예언서 전체의 마지막 책으로 예언서를 마무리한다. 머리글(1장 1절)과 부록(3장 22-24절)을 빼놓고는 동일한 저자의 작품이다. '말라키'란 이름은 '나의 사자'라는 뜻인데, 3장 1절에서 끌어들인 일종의 가명이며,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기원전 539년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배인들은 하카이와 즈카르야의 독려에 힘입어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고(BC520-515년) 성전 전례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러나 두 예언자가 예루살렘 성전의 복구와 연결하였던 이스라엘의 완전 회복에 대한 높은 기대와 희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백성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가르쳐야 할 사제들이 스스로 제사와 전례규정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았고(말라1장 6-14절: 제물의 정성스런준비), 백성들은 십일조 규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말라3장 8-12절: 올바른 십일조 봉헌), 이방민족과 통혼하면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기 주체성을 모호하게 했다(말라 2장 10-16절: 혼혈과 이혼에 대한 경고).
이런 혼돈의 시기에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하루 품팔이 노동자들과 과부, 고아와 외국인등의 사회의 소회계층들이었다 (말라 3장 5절:가난한 이들에 대한 정의 실천). 이들은 지도자들로부터 보호를 못받고 손쉽게 가진자들의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이같은 문제가 기원전 440년경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대개혁을 거쳐서 정리된다. 느헤미야는 이방인 통혼문제를 비롯해(느헤 10장 29-31절), 십일조 규정의 준수(느헤 10장 33절.38-39절), 규정에 맞는 전례거행(느헤 10장 33-37절), 가난한 이의 착취 금지(느헤 5장 1-13절)에 촛점을 맞추어 개혁을 진행했다.
말라기 예언자가 활동한 것은 바로 이 대개혁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이다. 페르시아 황제 연대로 따지면, 크세르크세스1세(BC 486-464년) 통치 시절이다. 말라기 예언자는 대개혁자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유다에 안정을 회복할 임무를 띠고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다가올 때, 그길을 미리 준비한 셈이다.
그리고, 최종 저작연대는 열두 소예언서가 완전히 확정될 때인 그리스 시대 초엽으로 보인다. 말라키서는 머리글과 마지막 세 절의 부록을 제외하고, 신탁 여섯 개로 구성된다.
첫 번째 신탁(말라1장 2-5절)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다른 민족 위에 아무런 조건 없이 자유롭게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신탁(말라 1장 6절- 2장 9절)은 사제들의 타락을 고발한다. 말라키는 아모스를 비롯해 사제들에게 비판적이었던 예언자들의 전통 위에 서 있다. 말라키가 비판하는 사제들의 가장 큰 잘못은 하느님께 값싼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세 번째 신탁(말라 2장 10절-16절)은 두가지 잘못, 이방인들과의 통혼과 이혼을 단죄한다. 단죄의 근거는 주님께서 조상들과 맺은 계약이다.
네 번째 신탁(말라 2장 17-3장 5절)은 주님의 공정 또는 정의를 선포한다. 공정은 자애와 더불어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다. 그분은 자애로우실 뿐만 아니라 공정하시기에, 이스라엘의 악을 적당히 넘기지 않으신다.
다섯 번째 신탁(말라3장 6-12절)은 주님의 한결같은 성실성과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배신을 비교한다.
여섯 번째 신탁(말라3장 13-21절)은 주님께 불경하고 거만한자들을 거슬러 의인과 악인을 분명히 판가름할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선언한다.
거만한 불경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또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한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을 시험한다 (말라3장 14-15절). 그러나 그날이 오면 주님을 공경하던 자들은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그분의 아낌을 받겠지만, 제멋대로 살던 악인들은 모두 검불처럼 타 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말라 3장 16-19절)
오늘 독서의 말씀이 바로 여섯 번째 마지막 신탁의 내용이다. 말라키 예언서의 중심 주제는 계약이다. 말라키 2장의 세 가지 계약, 레위의 계약(8절), 조상들의 계약(10절), 혼인 계약(14절)이 언급된다.
여기서 조상들의 계약은 성조들과의 계약과 시나이 계약을 다 같이 가리킨다. 특히 시나이 계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단체 계약이요, 구약계약의 핵심이다.
말라키 3장 1절에 나오는 "계약의 사자"는 시나이 계약의 준수를 촉구하는 예언자를 말한다.
하느님 편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으로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시나, 문제는 이스라엘의 불충이다.
말라키 예언자는 유다를 짓누르는 국제 정세, 지도자들, 특히 사제들의 도덕적 해이,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적 불의에 맞서서, 시나이 계약에 바탕을 둔, 유배 이전의 예언자 전통을논쟁의 무기로 삼았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 오히려 이제 우리는 거만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해야 한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 말라3장 14-15절)
이런 주장에 말라키 예언자는 옛 예언자 전통에 따라 강력하게 응수한다.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정의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계약에 성실하신 정의의 하느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의인들의 송사를 들어 주시고 악인들의 잘못을 처벌하신다.
현재의 열악한 상황만을 보고 오만하면 큰 잘못이다.
계약이 언제나 유효하다는 것을 믿고,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고, 십일조를 제대로 바치면서, 하느님께 마땅한 공경을 바치는 사람들은, 반드시 주님께서 간직하시는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다."( 말라 3장 20절)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 대로 살다가,하느님의 의로움을 살다가 억울한 고통과 수모와 불이익을 겪은 적이 있는가? 그런 분들과 단체들에게 오늘 말라키의 독서 말씀은 희망과 부활과 명예회복과 승리를 보장해 준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진리와 의 때문에 억울한 고통을 바치는 분들의 보이지 않는 눈물과 희생, 당신께 대한 충성을 제사로 받아들여 주시고, 그 제물을 이 세상의 성화를 위해 쓰시고, 언젠가 명예를 회복시켜 주신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 그러나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베드 2장 19절.20절ㄴ.21절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