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일 제1독서 (이사2,1-5)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4)
이사야는 2장 2절에서 종말에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성전으로 모여들 것을 예언하였고, 2장 3절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이제 2장 4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날에 주님의 판결로 인해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즉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당신의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면 온 세상에 평화가 깃들 것이라는 희망에 찬 예언이 제시된다.
여기서 평화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말미암아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원죄와 완고한 불신앙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하느님의 옥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 옥좌에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과거 원수되었던 하느님과 화해하여 그분에게서 내려오는 평화를 나누어 갖게 된 것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이루어질 평화로 볼 수 있다. 전쟁의 무기를 모두 농기구로 바꾸어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는다는 예언이 바로 메시야 시대에 이루어질 완전한 평화를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이것은 장차 메시야에 의하여 이루어질 평화시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으로 이 땅에 시작된 메시야의 통치를 나타내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성취될 메시야의 통치로 인한 완전한 평화의 시대를 내다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와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는 같은 뜻의 대구 구조를 이루는 문장이다. 앞의 것은 민족(나라)들 사이의 분쟁 해결의 측면을 강조하고, 뒤의 것은 잘못을 어긴 자들, 각 개인을 바로 잡는 교정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재판관이 되시고'에 해당하는 '웨샤파트'(weshapat)나 '심판관이 되시리라'에 해당하는 '웨호키아흐'(wehokiah)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 행위를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이 구절에서 주님의 통치로 이루어지는 평화의 나라는 전쟁이 전혀 없는 완벽한 평화를 구가하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칼과 창은 전쟁때에 필요한 무기이지만, 보습과 낫은 전쟁이 없는 평화 시기에 필요한 농기구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참전한 자들이 평화로운 때에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하고, 또 농사일을 하다가도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전쟁터로 나가곤 하였다. 따라서 농기구를 잡은 손이 무기를 잡게 되고, 또 무기를 잡은 손이 농기구를 잡게 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미래의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시대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미래의 평화 시대를 예언했을 것이다.
'보습'(plowshare)은 쟁기의 술바닥에 맞춰 끼우는 삽처럼 생긴 쇠조각을 말하며, 씨를 뿌리기 위하여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농기구이다. 그리고 '낫'(pruninghook)는 곡식을 추수할 때 이삭을 자르는 도구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전쟁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칼과 창을 파종과 추수때 사용하는 농기구로 만들 것임을 지적하여, 더 이상 살상무기가 필요없는 그야말로 완전한 평화 시대가 장차 도래할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 문장 바로 앞에 나오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와 마찬가지로 본문은 절대적 부정의 의미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부정어 '로'(lo)가 이끄는 문장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같은 뜻의 대구를 이루는 강한 부정문을 반복 사용하여 두 번 다시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민족들 사이의 전쟁이 그칠 것이며 완전한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 예언은 그리스도 재림의 때가 가까워질수록,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에 전쟁이 자주 발발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예언(마태24,7)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모든 분쟁과 싸움, 다툼이 종식되는 완전한 평화, 곧 그리스도 재림 후에 이루어질 평화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토요일 제1독서(이사6,1~8)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1~2)
앞선 이사야서 1장 2절~5장 30절은 주님을 배반한 남부 유다를 향하여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란 사실과 더불어 주님의 날에 있을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가 주님의 오심과 성전 숯불의 환시를 통하여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구약의 거의 모든 예언서에는 그 예언서를 쓴 예언자가 하느님의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술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예언서의 초두에 이런 사실이 소개되는데 (예레1,1~19; 에제1,1~3.15), 이에 반해 이사야 예언서에는 남부 유다에 대한 심판 선언이 너무나 중차대한 문제이며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시급한 사안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로 미뤄졌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이사야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느님의 종이며, 그의 메시지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임을 독자들에게 명확하게 인식시키기 위한 의도로도 볼 수 있다.
먼저 이사야서 6장 1~3절은 이사야에게 예언자로서 소명을 주신 주님의 장엄한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이사야가 성전 위에 높이 들리고 사람들이 에워싼 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본 시점을 밝히는 본문의 내용으로 시작된다. 이 일은 남부 유다의 제10대 임금이었던 우찌야가 죽던 해에 발생하였다. 그 해는 B.C.739년으로 추정된다.
우찌야 즉 '우찌야후'(uzziyahu)는 '능력'(1역대16,11),'힘'(탈출15,2)이란 의미의 명사 '오즈'(oz)와 '야훼'의 축약형 '야흐'(yah)가 결합된 형태로 '주님의 능력'이란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그는 '아자르야'(2열왕15,1)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돕다'(여호1,14)란 뜻의 동사 '아자르'(azar)와 '야훼'의 축약형 '야흐'(yah)가 결합된 형태로서 '주님께서 도우셨다'라는 의미이다.
그는 부친 아마츠야에 이어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남부 유다의 왕위에 올라 죽는 날까지 무려 52년 동안 남부 유다 왕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통치 후기에 문둥병이 들어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삶을 살다가 병으로 죽게 된다.
그의 통치 전반과 중반은 주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예언자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필리스티아와 암몬 등을 정복하고, 필리스티아 땅에 성(城)을 건축하고 암몬 왕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나아가 이집트의 변방에까지 그 명성을 떨치는 등 그 왕국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그가 강성해지면서 교만에 빠지게 되어 사제 외에는 들어가지 못할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려 하였다. 그것이 죄라고 말리는 아자르야 사제의 손을 뿌리치면서까지 분향하기를 고집하는 순간, 주님께서 그를 치셔서 그 이마에 문둥병(나병)이 생기게 하셨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는 왕궁이 아닌 별궁으로 내려 앉고, 나아가 성전 출입을 제한당하였다. 그런 비참한 말년을 쓸쓸히 보내다가 그의 나이 67세에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2열왕15,1~7; 2역대26,1~23).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받은 소명은 그가 예언자 직분을 시작하면서 받은 소명이 아니라 예언자 직분을 수행하던 중간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소명임이 분명하다. 즉 본장에 나오는 소명과 별개로 이사야는 과거에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 소명을 받은 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굳이 이를 따로 소개하지 않는 것은 본장의 내용만으로도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은 예언자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1인칭 단수를 사용하여 자신이 직접 주님의 환시를 보았다는 증거를 많이 한다. 아합과 여호사팟 임금 당시의 예언자 미카야가 그랬고(1열왕22,17.19-23), 즈카르야 예언자(즈카1,8), 에제키엘 예언자, 예레미야 예언자 등이 그러했다. 이와 같은 1인칭 단수의 사용은 그들 각자가 보았다고 하는 그 환시의 신빙성의 무게를 더해준다. 제3자의 경험이 아닌, 자기 자신의 경험을 직접 기술한 것이기 떄문이다.
한편, 본문에서 '나는 보았는데'에 해당하는 '와에르에'(waereh)는 계속적 용법으로 사용된 '와우'(wau)에 동사 '라아'(rah)의 미완료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이것은 우찌야 임금이 죽은 직후에 이사야가 환시를 보았다는 사실 및 그 때에 일회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사야서 1장 1절에는 이사야가 환시를 보았다는 것이 '하자'(haza)동사를 통해 표현된 반면에, 후자는 실제적으로 실체를 매우 확실하고 분명하게 바라봄으로써 실제적으로 이를 체험하여 아는 것과 관련된 표현인 것이다. 즉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본장에서 경험한 주 하느님의 천상의 모습과 그에 바탕을 둔 그 자신의 죄의 용서에 관한 환시가 그에게 있어 현실적인 일처럼 분명히 나타났음을 강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이사야 예언자가 본 환시는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 하느님이었다. 이같은 장면은 아합 임금 당시 예언자로 활약한 미카야의 증언에도 나오며 (1열왕22,17.19~23), 욥기에서도 유사한 묘사가 나온다(욥기1,6~12).
하느님께서는 실제로 물리적인 육체가 없으신 순수한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때때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에게 계시를 주시며, 이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시각적 형상으로 나타나시기도 한다.
한편, 본문에서 주어로 제시되는 '주님'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는 주 하느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인간 세상 뿐 아니라 온 우주를 권능으로 주관하시는 주님의 면모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 호칭이 바로 '아도나이'인 것이다.
그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으신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그 어떠한 세력도 감히 필적할 수 없는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가 이 세상을 통치하심을 나타낸다. 특히 '앉아 계시는'에 해당하는 '요셰브'(yosheb)는 오래 동안 머물러 있거나 거주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야샤브'(yashab)의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주님의 왕적 통치가 항구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의 통치는 인생사의 영고성쇠와 관계없이 계속되어 왔고 계속 될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영원한 임금되심과 항구적인 통치의 면모는 과거에 위대한 임금으로 통치하다가 범죄로 징계를 당해 비참한 신세에 떨어지고, 결국 죽어 무덤에 돌아간 인간 임금 우찌야의 면모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의 옷자락'에 해당하는 '슐라이우'(shulayu)의 원형 '슐'(shul)은 길게 늘어뜨린 옷자락을 의미하는데,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은 좌우 손목 부분의 옷자락을 비롯하여 발을 덮어 가리는 옷자락까지 모든 부문의 옷자락이 길게 늘어뜨러져 성전을 가득 덮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의 위엄과 권능이 온 세상을 덮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님의 권능 앞에 모든 피조물은 굴복하고 꿇어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성전'에 해당하는 '하헤칼'(hahekal)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지금 이사야가 보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시이며 천상의 상황이기 떄문에 이 문맥에서는 천상에 있는 주님의 궁전을 가리킨다.
혹자는 이것을 성전과 관련지어 이사야가 성전에 있었으며, 성전에 가득한 주님의 옷자락은 분향 제단으로부터 올라간 연기가 성소 안을 가득 채운 것을 나타낸 것으로 해설한다. 그러나 그가 현재 성전에 있든 그렇지 않든, 그가 환시 중에 목도한 것은 성전 그 자체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영광중에 거하시는 천상의 거소로 보는 것이 문맥상 보다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2) 이사야서 6장 2절과 3절은 하늘의 사자들이 주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사랍들'에 해당하는 '세라핌'(seraphim)은 '불타다'(예레51,3)란 뜻의 동사 '사라프'(saraph)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 '불탐'이란 의미를 지닌 '사라프'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세라핌'은 문자적으로 '불타는 것들'이란 뜻을 지닌다.
천사들에 대하여 이러한 명칭이 주어진 것은 부정한 것을 불로 태워 없애는 것처럼 그들이 거룩하고 순결한 존재이며, 또한 불꽃처럼 화려하고 접근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사랑을 상징한다.
화요일 제1독서(이사7,1~9)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커스요, 다마스커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순 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7~8)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본문은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의 구원을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은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 야심에 차 있지만, 주 하느님은 그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사야는 남부 유다 임금 아하즈가 그 두 임금의 말이 아닌, 주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서언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 the Lord)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이루시는 주(主)이심을 강조적으로 나타내주는 칭호이다. 아람 임금 '르친'과 북부 이스라엘 임금 '페카'는 결코 '아도나이'가 아니다. 그들은 두 왕국의 임금으로서 교만하게 자신들의 야욕에 찬 계획을 선언하였지만, 만군의 주님, 모든 주권을 틀어쥐고 계신 주 하느님은 자신의 계획을 선언하신다.
아무리 종들이 이런 저런 계획을 도모한다 해도, 주인이 결정을 내리면 그것을 따라야만 한다. 인간 왕국의 어좌보다 더 높은 하늘의 어좌가 없다면, 인간들은 인간 세상에서 권력을 잡은 오만한 자들, 악한 자들의 횡포에 휘둘릴 수 밖에 없지만(이사40,27), 그 위에 진정한 주권자이신 '아도나이'가 계신다. 잠시 잠깐 인간 권력자들이 자기 세력을 과시하고 자기 계획들을 도모하려고 광분하고, 그것이 실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은 바로 '아도나이' 이시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본문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부정어 '로'(lo)가 두 번이나 사용된 문장으로서 두 임금의 도모가 결코 또한 영원히 성취되지 못할 것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 정황으로 판단할 때, 아하즈에게는 그들의 계획과 시도가 당장이라도 성취될 것처럼 느껴졌겠지만, 역시 동일한 정황의 한 복판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을 주관하고 계시는 주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이사야 예언자에게는 그 시도가 사산(死産)된 아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시각에 그 두 왕국의 침공을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8ㄱ) 앞선 이사야서 7장 3절~7절은 주님께서 이사야로 하여금 남부 유다 임금 아하즈에게 나아가 북부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의 침공이 실패할것을 예언하라고 명한 내용이었다. 이제 이사야서 7장 8절과 9절은 북부 이스라엘의 영원한 멸망을 예언하며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먼저, 주님은 남부 유다를 침범한 주역인 아람 임금 '르친'의 위치를 밝힌다.
여기서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로쉬'(rosh)는 지배적 도시, 즉 '도성'이란 의미와 더불어 '지배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아람의 도성은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에서 아람 국을 통치하는 자는 르친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밝히는 것은 단순히 북부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은 주체가 누구인지 밝히기 위함이다. 즉 여기서 하느님께서 관심을 갖는 대상은 르친이 아닌, 르친과 군사 동맹을 맺은 북부 이스라엘이요, 그 왕국을 다스리는 르말야의 아들이다.
이것은 본문에 뒤이어 곧바로 북부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사야서 7장 8절과 9절에서 하느님께서 '우두머리'란 표현을 거듭 사용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아람이나 북부 이스라엘이 남부 유다와 구별된다는 점이다.
사실 신정(神政)왕국 남부 유다의 우두머리는 하느님 임재와 현존의 상징적 처소인 예루살렘이고, 이곳의 우두머리는 하느님이시다. 이처럼 남부 유다는 신정 왕국인 반면에, 남부 유다를 침략한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은 허무한 인간, 임금이 그 우두머리이며,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임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이제 예순 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8ㄴ) 본문은 이사야서 7장에 등장하는 난해한 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당시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에게 예언을 주고 있던 때는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남부 유다를 공격한 B.C.734년경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65년후는 B.C.669년 경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는 북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패망한 B.C.722년과 53년의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B.C.669년은 앗시리아의 통치자 예잘하똔을 승계한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이 제국의 통치자의 반열에 올라서 북부 이스라엘에서 마지막으로 인구 이동 정책을 시행한 첫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서의 저자 이사야 예언자는 그떄까지 살아 있지도 않을 것이며, 그 미래에 있을 역사적 사실을 알 수도 없다.
이사야 예언자는 65년 이후에 있을 아슈르바니팔의 북부 이스라엘 인구 이동 정책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예언으로서 직접 화법이 사용되고 있다. 본문은 65년 이후에 있을 인구 이동 정책으로 인해 북부 이스라엘은 이제 정치적 주권의 측면에서 뿐 아니라 혈통적 측면에서까지, 예전의 이스라엘 민족이 구성하던 나라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은 B.C.722년에 있었던 무력에 의한 패망 뿐만 아니라 B.C.667년까지 계속되었던 민족의 강제 이주 정책까지 포함하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예언은 이사야 예언자 뿐 아니라 그 예언을 듣고 있던 아하즈 임금에게도 그 생전에 일어날 예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영적 진리를 전달해 준다. 즉 비록 생애 동안이 아닌 먼 훗날 일어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언의 말씀을 믿으며 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자신의 예언서에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즉 이사야가 '예순 다섯 해만 있으면'이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것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먼 훗날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을 때에 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굳게 설 수 있다.
제15주간 수요일 제1독서(이사10,5~7.13~16)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5~6.7ㄱ)
앞선 이사야서 9장 8절에서 10장 4절은 주님을 거부한 북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엄정한 심판으로 장차 멸망하게 될 것을 네번이나 예언한 내용이다. 이제 이사야서 10장 5절이하 19절은 북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하느님의 도구로 쓰임받은 아시리아가 스스로의 신분을 망각함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하느님을 배제하고 인간 역사를 고찰하면, 북부 이스라엘을 패망시키고 아람을 패망시키며, 남부 유다를 함락 직전의 위기까지 몰고간 아시리아가 근동에서 오랜 세월동안 절대 주권을 휘두를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막강한 힘을 지닌 아시리아를 향한 하느님의 예언은 역사는 주권자 하느님의 손 안에서 움직이며, 아시리아는 단지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주님께서 사용하신 심판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아시리아는 자신의 위치와 분수, 즉 하느님의 심판 도구임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을 자랑함으로써, 주님께로부터 북부 이스라엘처럼 심판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를 통해 북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또 바빌론을 통해 그 아시리아를 심판하심으로써, 역사를 운행하는 자는 강력한 전제 군주나 제국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신다.
다른 각도에서 아시리아는 당시 히브리 민족의 관점에서 볼 때 불경건하고 사악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심판하는 도구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은 그들이 사악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북부 이스라엘은 그들보다 더 불경건하고 더 사악한 자들이었다는 데 해답이 있다. 또한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의 깊이까지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러한 내용은 아시리아 사람을 향하여 저주를 선언하는 내용으로 시작딘다. 여기서 '불행하여라' 에 해당하는 '호이'(hoy)는 이사야서 10장 1절의 맨앞에서도 쓰여 북부 이스라엘의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심판이 임박했음을 나타냈었다. 이제 바로 북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주님께서 선택하신 아시리아에 대해 동일한 단어가 사용됨으로써, 그들이 비록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되기는 하였지만 그들도 임박한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 예언되고 있다.
그들에게 화가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자만심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강해져 근동의 패자가 되었다고 자만하여 정복 과정에서 온갖 비인륜적인 만행을 저지르며 파괴와 약탈을 일삼았다(7). 심지어 아시리아는 이 과정에서 주변 열강의 신들, 북부 이스라엘의 우상들과 북부 이스라엘의 전능자이신 하느님을 동격으로 취급하고,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신성 모독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주님은 그러한 아시리아의 교만을 단죄하시고 그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다.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이사야서 10장 5절이하 6절에서는 아시리아를 심판의 도구로 택하신 주님의 주권과 의도를 밝힌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가 하느님의 진노의 막대기에 불과함을 선언하신다. 여기서 '내 진노'에 해당하는 '압피'(apphi)의 원형 '아프'(aph)는 '코'(창세2,7)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 단어는 코에서 뜨거운 김이 품어져 나올 정도로 감정이 격앙된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극도의 분노를 나타낸다. 여기서도 이 단어는 주님의 활활 타오르는 진노를 의미한다.
그 진노의 방향은 북부 이스라엘에게로 맞추어져 있으며, 그 진노를 대행하도록 선택된 자가 바로 아시리아 사람들이었다. '막대'에 해당하는 '셰베트'(shebet)는 왕권을 상징하는 '홀'이나 '규'를 의미하기도 한다(창세49,10 ; 민수24,17 ; 판관5,14). 그러나 뒷 문장과의 대등관계를 고려할 때 징계하는 데 사용되는 매, 혹은 막대기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고려하여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몽둥이는 나의 격노의 표현이다'가 된다. 여기에서 '그의 손에'에 해당하는 '베야담'(beyadam)은 '손'을 의미하는 명사 '야르'(yar)에 3인칭 복수 소유격 접미어와 '~안에'란 뜻의 전치사 '뻬'(be)가 붙어 '그들의 손 안에'라는 의미이다. 또한 '나의 분노이다'에 해당하는 '자으미'(zahmi)의 원형 '자암'(zaam)은 본래 입에 거품이 뿜어져 나올 정도의 격노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죄에 대한 주님의 분노가 얼마나 격렬한 것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이사30,27; 38,4;시편102,11). 이러한 하느님의 분노는 인간의 분노와 달리 죄의 속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의노(義怒; 의분; 義忿)이며, 잘못된 것을 심판하여 의(義)를 이루시는 것이다.
제15주간 목요일 제1독서(이사26,7~0.12.16~19)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8~9)
앞선 이사야서 26장 1절ㄴ에서 7절은 장차 구원의 도성에 입성하는 자들의 환희와 믿음의 선포를 소개하였다. 이제 이사야서 26장 8절 이하 15절까지는 구원의 도성에 입성하는 자들이 노래하는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멸망에 대한 신앙 고백이 소개된다. 이러한 내용은 네가지 신앙 고백 형태로 제시되는데, 각각의 신앙 고백은 두 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첫번째 단락인 8절과 9절에서는 심판을 통하여 공의를 실현하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심정이 고백된다. 먼저 본문은 주님의 진실한 백성들이 주님의 의로우신 심판과 구원을 바라보면서 그날을 기다리며 자신의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장차 아루어질 구원에 대한 확신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아는 믿음은 그의 구원을 확신하게 하며, 나아가 악한 자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은 현재의 삶에 비록 고난이 많다 할지라도 그의 나타나심을 인내로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에 해당하는 '오하르 미쉬파테카'(ohar mishiphateka)는 문자적으로 '당신의 심판의 길'이라는 의미이다. 심판의 길에서 하느님을 기다렸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심판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공의로운 판결을 내리실 하느님을 대망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신의 판결에 따라'에 해당하는 '미쉬파테카'(mishiphateka)의 원형 '미쉬파트'(mishiphat)는 법정에서 행해지는 판결이나 심판을 의미한다.
신명기 4장 8절에서는 '법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무엘 하권 22장 23절에서는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열왕기 상권 6장 12절에서는 '규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역대기 상권 16장 12절에서는 '판결'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종합해 볼 때, 본문의 '미쉬파테카'(mishiphateka)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면서 그 통치의 규례로 사용하시는 법칙, 또는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사용하시는 판결(판단)의 기준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에 해당하는'키우위누카'(qiwuynuka)의 원형 '카와'(qawa)는 참을성 있게 마땅히 바랄만한 것을 기다리고 대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그 의미가 한층 더 강조되어 있다.
사실상 하느님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주님은 그들의 삶 속에서 눈으로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손으로 확실히 느껴지지 않는 영적 존재이시다. 나아가 그 하느님은 비록 악인들이 세상에서 불의를 행하여도 그것을 모른체 하는 것으로 보일 때도 있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중도에 신앙을 버리고 악한 자들의 편과 자리에 서서 하느님을 적대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 제시된 참 하느님의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마치 보는 것처럼 참고 기다리는 자들이다(히브11,27). 하느님은 당신이 정하신 종말의 날에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며, 그 인내와 진실에 대해 성실하게 보상하심으로써 당신의 신실하심을 만천하게 드러내실 것이다(히브11,6).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당신 이름'(주의 이름)에 해당하는 '쉬므카'(shimka)는 주 하느님의 고유한 위격과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주 하느님은 거룩한 이름을 소유하고 계시며 그 이름에 부합한 일을 행하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신실한 의인들에게 인자를 베푸시고 교만한 악인들을 진노로 벌하시며, 자신을 의탁하고 신뢰하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필요한 때에 도움과 구원을 베푸신다.
그리고 '당신을 기억하는 것'에서 이 '기억'이란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과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실 때 보이셨듯이, 하느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당신의 은혜로우심과 전능하심 등과 관련된 기억을 의미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이 영혼'에 해당하는 '나페쉬'(naphesh)는 단순히 '영혼'이라는 의미이며, '소원입니다'에 해당하는 '타아와트'(thaawath)는 '열망','소원','갈망'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따라서 본문은 문자적으로 '영혼의 갈망'(the desire of the soul)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의 전존재를 다하여 그야말로 뼈에 사무치도록 소망하고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순수하고 단순한 것이며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9) 이사야서 26장 9절의 상반절은 주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토로하는 이사야서 26장 8절의 내용이 연장되는 예언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원문상으로 26장 8절의 마지막 단어가 26장 9절의 맨 처음에 또 다시 온다는 사실이다. 즉 26장 8절과 9절 두 구절은 '네페쉬'(nephesh)라는 단어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 단어는 본래 '호흡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생명'(1사무19,11), '마음'(1사무18,1), '숨'(창세2,7), '마음'(에제36,5), '목숨'(창세12,13)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용례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 '네페쉬'라는 단어가 인간의 마음 가운데서도 생명의 핵심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밤에'에 해당하는 '빨라울라'(ballaulla)는 매우 큰 어려움을 당하는 때를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즉 그 밤은 주님의 광명이 비추지 않는 때이며, 주님의 의로운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이다. 또한 그 밤은 악인이 횡행하고 궁핍한 자가 억울하게 착취를 당하는 때이다. 그 밤은 악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이며, 의(義)가 실패한 것처럼 느껴지는 때이다. 그러한 때에도 하느님의 백성들은 생명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였다.
'당신을 열망하며'에 해당하는 '이우위티카'(yuithika)의 원형 '아와'(awa)는 '바라다','희망하다','열망하다'란 의미를 지닌다.(신명14,26; 시편106,15; 잠언13,4; 23,3). 본문에서는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사랑의 열정이 한층 더 강조되어 있다.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본문에서 '저의 넋'에 해당하는 '루히'(ruhi)는 본절 상반절에 있는 '저의 영혼'에 해당하는 '나프쉬'(naphsh)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이 단어의 원형 '루아흐'(ruah)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심령(영; spirit)을 지칭하며, 이것은 하느님과 사람이 영적 교제를 나누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저의 영혼'이라는 표현과 병행하여 사용되었으므로,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그리고 생명을 다하여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모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풀이된다. 그리고 '당신을 갈망합니다'에 해당하는 '아샤하레카'(ashahareka)의 원형 '샤하르'(shahar)는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하며(판관19,25),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모두 12회 사용되었는데, 대부분 하느님을 간절히 구하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욥기8,5; 시편63,2; 78,34 ; 잠언1,28; 8,17; 호세5,15).
어원적인 의미와 연결시켜 보면, 이 단어는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깊이 사무쳐서 잠을 설치면서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하느님을 찾는 당신 백성의 열렬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는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그 의미가 한층 더 강조되어 있다. 동시에 미완료 시제로 쓰여 그토록 하느님을 찾는 것을 물론,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 하느님과 만나 더 친밀한 교제를 누는 것이 의인들의 진정한 희망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시편78,23).
특히 현실적으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악과 불의와 억울함이 자행되기에 인간의 한계를 너무가 잘 알고 있는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찬란한 태양처럼 임하시면, 죄악과 불의의 깊은 밤이 사리지고 세력이 약화될 것이기에 주 하느님을 간절히 희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제23주일 제1독서(이사35,4~7ㄴ)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4)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5)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떠뜨리리라."(6ㄱ)
이사야서 35장 4절은 핍박받는 선민을 향하여 선포해야 할 말을 직접 화법을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사야서 35장 4절의 서두에 해당하는 본문은 그 선포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바로 '마음이 불안한 이들'이 그들이다.
이것은 이사야서 35장 3절의 '맥풀린 손', '꺾인 무릎'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이사야서 35장 3절의 표현이 위로할 대상의 신체적인 묘사에 집중한 것이라면, 본문의 '마음이 불안한 이들'이란 표현은 내면, 곧 심적인 측면에 집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전치사 '레'(le)에 '서두르다', '두려워하다', '액체가 되다' 등의 의미를 지닌 '마하르'(mahar)의 수동형 분사가 결합된 '레니므하레'(lenimhare)에 '마음'을 의미하는 '레브'(leb)가 결합된 것이다. 즉 여러가지 핍박과 고통으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 마음이 물처럼 녹은 상태를 나타낸 것이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그리고 여러 불안한 사회적 정황으로 인해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 마음조차 가누기 어려울 만큼 극심한 고통과 공포 속에 머물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 처한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생각하여 마음이 압도되고, 그로 인해 철저히 절망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일의 희망을 가진 하느님의 백성은 그런 자들에게 다가가 절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해주며, 그 심령을 강하게 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한편, '굳세어져라'에 해당하는 '히제쿠'(hizequ)는 앞에서 언급한 '마하르'(mahar)와 정반대의 마음의 상태로 만들라는 명령이다. 이 단어의 원형 '하자크'(hazaq)는 마음이 완고한 것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이처럼 마음을 굳세게 하는 것은 사람의 스스로의 결단이 아니라 하느님을 의지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하느님을 의지하라는 전제, 하느님을 더 견고히 붙들라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이어지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표현 역시 마음과 관련된 표현이다. 이것은 마음을 굳세게 한 결과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함으로 그 심지를 견고히 세우는 자를 평화로 지켜주신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사26,3)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에 맞닥뜨려 두려움없이 대담하게 행하고자 한다면, 하느님을 믿는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리에 굳게 서야 한다.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본문은 마음에 겁이 잘린 자, 고통스런 상황에 압도되어 무력해진 자들이 왜 다시 일어나야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그들이 믿는 하느님께서 오실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멀리 계셔서 그들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으시기 때문이며, 혹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사정을 아신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을 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과 하느님 사이에 있는 간격이 너무나 크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들은 무력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자, 내일의 희망을 확신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오셔서 그들의 원수들에게 보복을 가하시고, 그들에게 보상을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용기를 갖게 해야 한다.
한편, 본문에서 '복수가 들이닥친다'에서 '나캄'(naqam)은 '복수'를 의미하며 '하느님의 보복이'에서 '께물'(qemul)은 '보상'을 의미한다. '복수'는 두려움을 제공한 적대자에 대한 것이며, '보상'은 하느님을 섬긴 신앙에 대한 것이다. 하느님의 이러한 공의로운 보복과 보상을 확신하는 이들, 악인의 소멸을 확신하며 의로운 상급을 바라며 희망하는 자들은 현재 닥치는 어떤 어려움도 능히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원문은 '엘로힘 후 야보 웨요샤아켐'(elohim hu yabo eyoshakem)인데, 문자적으로 '하느님, 바로 그분이 오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구원하실 것이다'이다. 원문상으로는 '하느님'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주어가 포함되어 있는 히브리어의 특징상 '그가 오실 것이다' 라는 서술어 '야보'(yabo; will come)가 있으므로, '엘로힘'(God)과 '후'(hu)라는 단어가 없어져도 의미가 통한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이 두 단어를 문장 앞에 내세워 '하느님'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누가 오시는가? 하느님 바로 그분이 오실 것이다. 누가 구원하시는가? 하느님 바로 그분이 구원하실 것이다. 어느 힘있는 인간도 아니요, 이집트와 같은 이방의 강대국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조상때부터 믿어오던 바로 그 하느님, 홍해를 마르게 하시고 이집트의 군대를 수장시키시고, 예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바로 그 하느님께서 오시어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그러니 왜 두려워해야 하겠는가!'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5) 이사야서 35장 5절부터 7절까지는 종말에 선민 이스라엘의 땅에 넘칠 환희과 기쁨을 예고하는 이사야서 35장 1~2절에 이어 다시 하느님께서 가져오실 당신 백성들과 그들의 땅의 역동적 회복을 예언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역동적 구원은 부분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 성취되었다.
특히 이사야서 35장 5절과 6절은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되심을 입증하면서 답하신 말씀과 동일한 것이다(마르7,37; 루카7,22; 마태11,2~6). 즉 이것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의해 성취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문 서두에 제시된 '그때에'에 해당하는 '아즈'(az; then)은 일차적으로는 메시아 시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것은 주님께서 도래케 하시는, 온전한 회복의 나라, 영원한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을통해 이루어질 그 나라로 귀결된다.
한편, 하느님께서 회복케 하시는 역사(役事)가 이루어질 날에 일어나게될 사건으로 먼저 제시되는 것은 맹인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열리고'에 해당하는 '티파카흐나'(thiphaqahna)는 '열다'의 의미를 지닌 '파카흐'(phaqah)의 수동형으로서 '열릴 것이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이 단어가 수동형으로 사용된 것은 그것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것이다. 즉 맹인의 눈이 열리는 역사가 전적으로 주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이것은 문자 그대로 맹인이 눈을 뜨고 보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며, 영적 어두움 속에서 멸망의 길을 걷던 자들이 진리의 빛을 보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던 백성에게 내려졌던 책벌이 풀리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이사6,10; 29,18). 그들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게 될 것이며,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더 이상 무익한 이방의 강대국이나 헛된 이방의 우상이 아닌, 완전한 구원이신 주 하느님만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어지는 본절 후반부는 '눈먼 이의 눈'에서 '귀먹은 이의 귀'로 바뀌었을 뿐, 앞 부분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평행 대구 문장으로 풀이된다. 여기서는 청각기관인 '귀'란 표현이 사용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했던 자들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귀가 열리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역사가 이루어 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떠뜨리리라.' (6ㄱ) 예수님은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 여덟 해나 누워있던 병자를 치유하셔서 그로 하여금 걷게 하셨으며(요한 5,2~9),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해 그로 하여금 사슴처럼 뛰게 하였다(사도 3,1~9).
이처럼 메시아 시대가 되면, 절름발이도 건강한 다리를 갖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영적으로 해석하면, 불완전한 신앙을 가졌던 자들이 신앙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고, 죄의 굴레에 얽매여 바르게 사는 데 있어 제한을 받던 자들이 그 굴레를 떨쳐버림으로 인해 진리의 길을 마음껏 활보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중 갈릴리 지방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셔서 그로 하여금 말을 분명하게 하신 사건(오늘 마르코 복음 7,31~37)을 연상케 한다. 이것 역시도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과거에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못했던 자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며, 하느님의 진리를 침묵하던 자들이 입을 벌려 담대히 그 진리를 증거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으로 알아 들을 수 있다.
한편, 앞의 이사야서 35장 5절의 경우는 메시아의 활동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표현이 모두 수동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의 주도적인 역사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사야서 35장 6절(ㄱ)의 경우, 발로 걷고 입으로 말하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는 강조 능동형과 능동형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메시아 시대의 회복의 양상이 하느님의 주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자들의 적극적인 순종과 증거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제1독서(이사38,1-6.21-22.7-8)
그 무렵 히즈키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가 그에게 와서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집안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러자 히즈키야가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말씀드렸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히즈키야는 슬피 통곡하였다. 주님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내렸다. "가서 히즈키야에게 말하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1~5)
'너의 집안 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네 집을 정리하라' 혹은 '너는 너의 집을 위하여 명령하라'로 번역한 '차우 레베테카'(tsau lebetheka)에서 '차우'(tzau)의 원형 '차와'(tsawa)는 명령을 내리거나 정돈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네 집'에 해당하는 '레베테카'(lebetheka)의 원형 '빠아트'(baath)는 '가정', '가문', '왕조','국가' 라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표현은 히즈키야가 자신의 집에 관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정해 주는 것은 물론, 자신의 왕궁 안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한 지시 사항을 자기 신하들을 통해 정리하는 등, 왕으로서 마지막 해야 할 일을 다 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그의 사후 왕위 계승 쟁탈전이 벌어지지 않도록 후계자를 정해 놓으라는 의미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의 문제와 제반 문제들을 아직 정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히즈키야가 지금까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본문의 명령은 그에게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원문은 본문이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작하고 있으며, 이것은 왜 히즈키야가 자신의 집을 정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임을 나타낸다. 본문은 히즈키야의 죽음을 긍정문과 부정문을 사용하여 강조해서 표현할 뿐만 아니라 강한 부정의 의미를 가진 부정어 '로'(lo)와 미완료 형태의 동사를 사용하여 반드시 죽을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강조적, 확정적 의미를 지닌 예언은 히즈키야에게 절망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간절한 기도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생명을 연장받게 된다(9절). 이같은 사실은 본서 전체의 예언을 닫혀진 미래의 일로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하느님 대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자 히즈키야가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말씀드렸다'(2) 앞선 1절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이사야 예언자가 히즈키야에게 가서 죽음을 예고하고 유언을 권면한 내용이었다. 이제 2절과 3절은 이러한 말씀을 전해들은 히즈키야가 하느님을 향해서 진심으로 기도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내용의 본절에서 사용된 두 동사는 계속적 '와우'(wau)가 사용되어 예언자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기도에 전념하였음을 보여준다.
히즈키야는 죽음이 선고된 순간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 주 하느님께 간구하였다. 사실 이 당시 히즈키야는 39세의 젊은 나이였으며, 그의 왕위를 이을 므나쎄가 42세에 태어났으므로(2열왕21,1), 그에게는 후계자가 될 직계 자식도 없는 형편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국가는 아시리아의 침공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 역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게 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자신을 죽음을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께 매달렸다.
한편, 히즈키야의 기도의 자세는 매우 독특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하였다. '쪽으로 돌리고'에 해당하는 '와이얏세브'(waiyasseb)는 계속적 '와우'(wau)와 '돌이키다'(turn)라는 의미를 가진 '싸바브'(sabab)의 사역형이 결합한 형태이다.
히즈키야의 즉각적이고도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이 표현은 '벽'이란 단어와 함께 사용되어 이전의 불신앙적 태도에서 완전히 돌이켜 온전히 주 하느님만을 의지하였음을 형상화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벽쪽으로 돌리고'란 표현은 히즈키야가 모든 세상적 방법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끊고 오직 하느님께 전적으로 매달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도 보았다' 같은 뜻의 대구로 되어 있는 본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전지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다 보고 계시며, 모든 사람의 말을 다 듣고 계신다.
본문의 '들었고'와 '보았다'는 이러한 의미에서 듣고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네 기도들'과 '네 눈물을'에 해당하는 표현 각각에 사용된 2인칭 접미어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중에서 구별하여, 히즈키야 개인에 대해 가지신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과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 해 주겠다' '자, 내가'로 번역된 '히느니'(hinni)는 문자적으로 '보라, 내가'(behold I)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어 전개되는 말씀들이 놀라운 것이며 매우 중요한 것으로 주의깊에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죽음을 목전에 둔 히즈키야의 즉각적인 회복은 기적적인 일이며 국가의 운명과도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너의 수명에다 열 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너의 날들 위에 15년을 추가할 것이다'이다. 이런 표현은 히즈키야의 정해진 날이 끝났으나 하느님의 은혜로 15년을 더 살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즉 아무런 소망이 없던 히즈키야가 제2의 인생을 살게 하셨음을 보여준다.
한편, 열왕기 하권 20장 5절에는 '이제 내가 너를 치유해 주겠다. 사흘 안에 너는 주님의 집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본문의 내용 바로 앞에 있다. 이것은 이사야가 히즈키야에게 치유의 말씀을 전한 날로부터 3일안에 그 병이 기적적으로 완전히 치유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40,25-31)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28)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29)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30)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31)
이사야서 40장 27절에서는 수난과 징계 가운데서 주님께 대한 절대 신앙이 흔들리는 선민을 향한 책망이 소개되었다. 이제 이사야서 40장 28절과 29절에서는 창조자이신 주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은혜가 선포된다.
이사야서 40장 28절은 두 번 거듭되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이사야서 40장 21절 상반절과 동일한 질문이지만, 미완료가 아닌 완료 시제가 사용되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며 들었다는 사실을 보다 더 강조한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은 이미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고, 그들은 그들 조상에게 역사하신 하느님의 권능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으르 증거된 율법의 말씀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시며 크신 권능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신지를 이미 들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심햇던 것을 향하여 이사야 예언자는 그만큼 그들을 휘감고 잇는 어두움의 잔재가 짙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그들을 향해 하느님의 영원하심, 그분의 전능하심, 신실하심과 한결같으심의 면모를 선포하며 다시금 하느님을 신뢰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 처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호칭으로 소개되고 있다. 서두에 나오는 '엘로헤'(ellohe)의 기본형 '엘로힘'(ellohim)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이나 창조주되심을 강조할 때, 그분의 능력의 크고 위대하심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호칭이다.
이어 제시되는 '예호와'(yehowa ;주님)은 구약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신명(神名)으로 기본적으로는 '스스로 계신 분'이란 의미를 지니며,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계약 관계를 성실히 지키시는 하느님의 면모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지금 그들에게 권고의 말씀을 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그분은 이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아니한 창조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동시에 지금도 그들과 맺은 계약을 잊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이러한 하느님의 신명(神名)을 연이어 제시한 것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과 맺은 계약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어디 있든 지키시며 보호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을 제시되는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명칭은 주 하느님의 창조주 되심을 더욱 구체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땅끝까지'에 해당하는 '케초트 하아레츠'(qetsoth haarets ;the ends of the earth)의 '땅끝'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원래 당하는 시련과 그로 말미암아 위축된 상태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가장 끝에 있는 것, 극단에 있는 것조차도 창조하신 하느님의 전능을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명칭은 시련 가운데 위축당한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알려주면서, 동시에 그들을 극단의 위기 가운데서도 구원하시고 새롭게 조성하실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고' 이사야서 40장 28절은 주 하느님께서 무한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드러낸다. 여기서 '피곤한'에 해당하는 '이아프'(iap ;tired), '지칠'에 해당하는 '이가으'(igah ;weary)인데, 여기서 '이가으'의 원형 '야가으'(yagah)는 힘에 부치도록 심한 노동을 한 결과 기진맥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혼자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결코 기진맥진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완전한 섭리로 움직이고 계시지만, 결코 피곤을 느끼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과는 딜리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피곤함을 느끼지 않으시며, 그 능력에 있어서 무한한 분이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피곤하고 지치고 위축되고 쇠약해지면, 하느님의 능력과 역사하심까지도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범주에서 판단하기 일쑤이다(창세18,11-14 ;민수11,14 ;15,21-23).
따라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이러한 면모를 강조하며, 그들이 피곤하고 지쳐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피곤하시조 지치지도 않으시기에, 그들을 향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고 온전히 성취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이 구절은 인간으로서는 하느님의 슬기가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결코 파악할 수도 없으며, 헤아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서 '헤아릴 길이 없다'에 해당하는 '엔 헤케르'(en heqer)에서 '엔'(en)의 원형'아인'(ain)은 '존재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무'(無), '공허'를 의미한다.
그리고 '헤케르'(heqer)는 '측량하다'(1열왕7,47), '숫자를 헤아리다'(예레46,23)는 뜻의 동사 '하카르'(haqar)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속량함', '계산(계수)함' 등의 의미를 지닌다. 즉 이것은 '측량이 절대 불가능함'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슬기는 인간의 조사 범위를 뛰어넘는 명철함이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아무리 연구하고 깊이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 명철함의 한계를 발견해 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잠시 당신 백성을 외면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스러운 일을 계획 가운데서 진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본절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참으로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며, 또한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축복이 무엇인지를 약속해 준다.
자신의 유한선을 깨닫고 하느님의 무한하심과 전능하심을 깨닫는 자들은 비록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즉 그들은 자신의 무력함과 한계를 인정하며 하느님만이 진정으로 의지할 분이시며, 참되고 온전한 도움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도움을 구하게 된다.그렇게 살아가는 자는 하느님의 권능을 힘입으며 이 땅에서 더욱 더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에 해당하는 '웨코예'(weqoye)의 원형 '카와'(qawa)는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것, 혹은 위를 쳐다보면서 대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어두운 밤이 빛(광명)을 바란다는 문맥(욥기3,7), 하루 종일 노동한 품군이 품삯을 바란다는 구절(욥기7,2), 고난 가운데서 주 하느님의 도우심을 대망한다는 구절 (시편25,5 ;39,8) 등에서 사용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인생의 고난의 시기일지라도 광명의 아침을 가져다주실 주 하느님을 참을성있게 대망하는 자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새 힘을 얻고'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 해당하는 '야할리프 코아흐'(yahalipu koah)는 문자적으로 '그들은 힘을 움트게 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땅 속에서 새싹이 나오듯이 새 힘이 지속적으로 솟구쳐 오르며 강성해지게 되는 것을 생동감있게 묘사한 것이다.
본문의 동사 '야할리프'(yahalip)의 원형 '할라프'(hallap)는 나무에서 싹이 나는 것(욥기14,7), 땅에서 풀이 돋아나는 것(시편90,5)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사역 능동형 3인칭 복수로 사용되어 주님을 바라는(앙망하는) 자들에게 힘이 솟아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의미한다고 해서 금방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환경 자체를 뒤바꾸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를 의지하는 백성들에게 샘솟듯이 솟구치는 능력, 왕성하고 지속적인 생명력을 부여하신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 힘을 의지하며 현실의 어두움에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그 어두움 가운데서도 빛의 삶을 살며,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찬란한 새벽이 여명을 열어 젖히는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사41,13-20)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은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5)
이사야서 41장 15절과 16절에서 주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을 주님의 타작기로 삼으시고 영광을 누리도록 하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농사가 끝난 이후에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타작은 심판의 양상을 나타내는 예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고대 근동에는 두 가지 타작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소가 돌리는 육중한 맷돌을 이용해 타작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끝이 날카로운 타작기계를 손에 쥐고 타작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면서 타작하는 방식이다. 본문은 후자의 방식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하느님께서 이방 땅에 있는 이스라엘을 자기 손에 들린 타작기로 삼는다는 것은 이방 사람들을 파괴한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로 갈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해 내는 심판의 기준이 될 것을 암시한다.
본문은 종말론적 상황과 관련하여 장차 영적 이스라엘로 세워질 교회와 그 성도들이 만왕의 왕, 만민의 주님으로 영광 중에 재림하실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며,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을 나타내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마태19,28).
한편 앞선 이사야서 14장 14절 상반절에서 이스라엘은 '벌레', 즉 지렁이처럼 사람이 밟고 지나가면 터져서 죽는 초라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날카로운 타작기','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묘사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급작스런 변화, 너무나도 상이한 대상을 묘사한 것이 아닐수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일으키는 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주 하느님이시며, 그분이 이스라엘을 도우실 것임을 약속하셨기에 이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신실하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대로 시행된 지극히 당연한 일일뿐이다. 아울러 이러한 일로 이제 이스라엘이 회복될 시점이 가까웠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시고 보증하신 그 때가 가까워오고 있으며, 실제로 하느님께서 행하신다면, 사람의 시각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지라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부수고, 언덕들은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본문은 앞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이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처럼 된 결과, 이루어질 일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과거 '벌레'같은 존재로서 이스라엘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산들과 언덕들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이방인들, 이방 국가, 이방 권세자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권능으로 강해진 그들,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처럼 견고하게 된 그들은, 산같은 힘을 가진 압제자들을 부스러기나 겨와 같이 흩어버리고, 그 압제를 통해 해치고 말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먼저 제시된 '산들'에 해당하는 '하림'(harim)은 이스라엘을 적대하는 자들 가운데 큰 세력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이를 쳐서 부스러기로 만든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불신자들 가운데서 산들처럼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한 자들을 심판할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어 제시되는 '언덕들'은 앞서 나온 '산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적대하는 불신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의 영향력이 미미하더라도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산들'과 대비되는 '언덕들'에 해당하는'우게바오트'(ugebaoth)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언덕들은 '지푸라기'(겨)같이 될 것인데, 본문에서 '지푸라기'(겨)에 해당하는 '모츠'(mots)는 탈곡한 곡물 가운데서 알곡이 빠져 나와 버린 쭉정이, 껍질, 왕겨를 의미한다.
이러한 본문이 전달하는 표면적 의미는 이스라엘이 강성하여 주변 여러 나라들을 허무하고 무가치한 부스러기나 '지푸라기'(겨)처럼 만들어 버리며 짓밟을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이 그만큼 강하게 성장하고 영예로운 지파에 설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의 삶과 관련된 것으로 풀이된다.
세례자 요한이 그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활동이 그러하였듯이 하느님 말씀을 증거하는 성도들은 높은 산을 낮추며, 거만한 자들을 하느님의 권세와 그 말씀 아래 굴복시키는 일을 행할 것이고, 하느님의 권능 앞에서 악인들과 불신앙적인 삶을 사는 교만한 자들이 얼마나 무력하고 초라한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성주간 월요일 제1독서(이사42,1~7)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1)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2)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3)~~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4)~~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7)첫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이사42,1~9)중에서 이사야서 42장 1절이하 4절까지는 주님께서 소개하시는 주님의 종의 선한 성품과 하시는 일들이 제시된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1) '여기에'에 해당하는 '헨'(hen)은 '보라'라는 뜻으로서 동사가 아니라 감탄사이다. 당신이 소개하는 종에게 관심과 주의를 가질 것을 촉구하는 표현이다.
'내가 붙들어 주는 이'에 해당하는 '에트마크'(ethmak)는 '붙잡다', '지지하다', '떠받히다','지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타마크'(tamak)의 미완료형이다. 미완료형은 미래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항상 그렇게 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이 동사는 하느님께서 그 권능의 손길로 이 종을 굳게 붙들어 흔들리지 않게 하시며,보호하시고 높이 세워주실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내가 선택한 이'에 해당하는 '뻬히리'(behiri)의 원형 '뻬히르'(behir)는 동사 '빠하르'(bahar)에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임의적으로가 아니라 어떠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를 신중하게 선택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주님의 종이 구원사업을 능히 수행할 수 있기에 선택하였다는 뉘앙스와 이를 선택하신 하느님께서 주님의 종의 능력을 보증하신다는 함축적인 의미가 함께 있다.
'내 마음에 드는'에 해당하는 '라체타'(ratsetha)의 원형 '라차'(ratsa)는 '기뻐하다', '받아들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특별히 제사규정을 다루고 있는 레위기에서 하느님께서 제물과 예물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레위1,4; 7,18; 19,7; 22,23).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드려진 희생 제사라 할지라도 제물에 흠이 있거나 제사 드리는 자가 율법에 합당한 자가 아니면, 그 제사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레위10,1~11; 19,7; 22,23). 그런 점에서 본문의 마음에 든다(기뻐하신다)는 표현은 그가 인류 대속을 위해 드려질 제물로서 조금도 흠이 없다는 사실과 나아가 제사를 드릴 대사제로 완벽한 분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1)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I have put My Spirit upon him)에서 완료 시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완료시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로 역사적 완료로 본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종 메시야에게 인간으로 육화(강생)하기 전에 천상에서 말씀으로 존재하였을 때 (요한1,1; 필리2,6) 이미 영을 충만하게 부어 주셨음을 나타낸다.
둘째로 예언적 완료로 본다면, 이 본문은 메시아께서 강생하신 후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한 사건을 내다보는 예언이 된다. 따라서 본문의 완료 시제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하여 주님의 종이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임의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 즉 하느님의 뜻과 능력으로 구원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것임을 보여 준다.
'공정'에 해당하는 '미쉬파트'(mishipath)는 '재판하다'라는 의미의 '샤파트'(shapath)에서 유래하며, '심판', '재판'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정의'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하느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되고 인간이 하느님께 대해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인간들 상호간에 평화롭고 올바른 관계가 서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일 것이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2) 거의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세 개의 부정 단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주님의 종이 이방의 열왕들처럼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인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크게 드러내고자 하지 않으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심을 나타낸다.
또한 거짓 예언자가 자신을 과시하며 떠들어대는 것과 전혀 다르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의 가슴에 조용히 그러나 호소력있게 진리를 전달하며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전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모습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마태26,62.63; 27,14; 마르15,5; 루카23,9; 요한8,6; 14,30).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3) 습지나 물가에서 자라나는 갈대는 유프라테스 강 하류와 나일강 주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주요 무대인 팔레스티나의 요르단 강 유역에서도 많이 자라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식물이었으므로, 고대 근동 문학과 성경에서도 상징적, 비유적 표현으로 자주 등장한다. 갈대는 연약하여 바람에 잘 흔들리므로 연약한 인간의 면모와 관련하여 종종 사용된다(1열왕14,15; 마태11,7).
여기에서 '부러진 갈대'(상한 갈대)에 해당하는 '카네 라추츠' (qaneh ratsuts)는 문자 그대로 반쯤 부러진 상태의 갈대를 나타낸다. 비유적으로 사용되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입은 상태와 특별히 죄악으로 인해 영혼이 더러워진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
여기에서 '꺾다'는 의미에 해당하는 '이쉬뽀르'(yishibor)의 원형 '샤바르'(shabar)는 완전히 박살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레위6,21; 1열왕19,11). 사실 상한 갈대는 아무런 이용 가치가 없기 때문에 박살내 버려도 전혀 아깝지 않다. 이러한 상한 갈대조차 꺾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종이 육체적, 정신적, 영적 상태 모든 면에서 절망적인 상황, 비관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들을 세상의 왕들처럼 무자비하게 심판하는것이 아니라 그들을 치유하며 새 생명을 주실 것을 나타낸다.
한편 일상생활의 필수품인 등불 역시 갈대와 마찬가지로 고대 근동의 문학에서 비유와 상징으로 자주 사용된다. '꺼져가는 심지'에 해당하는 '피쉬타 케하'(pishitah kehah)는 '희미한 심지'(꺼져가는 등불), '연기나는 심지'라는 의미이다. 즉 본문의 등불은 기름이 없어서 깜빡이면서 이제 막 꺼져버리려는 순간이나 혹은 꺼져서 연기가 나는 상태의 등불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경우 그 등불은 연기가 날 뿐, 등불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러한 상태의 등불은 꺼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주님의 종은 이런 등불을 결코 끄지 않으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필요없다고 꺼서 내버릴지라도 주님의 종은 이러한 상태의 등불도 소중히 여기신다. 이것은 주님의 종이 그 어떤 사람도 거부하지 않고, 자비와 사랑으로 용납하여 주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님의 종의 봉사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4) '섬들'에 해당하는 '이임'(iyim)은 이사야서 40장 15절과 41장 1절, 5절에 사용된 표현으로 '가장 먼 곳'이라는 의미로서 세상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을 다 포함하는 모든 백성들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교훈)에 해당하는 '울레토라토'(uletorato)의 기본형 '토라'(torah)는 율법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이다.
'고대하리라'에 해당하는 '예야헬루'(yeyahelu)의 원형 '야할'(yahal)은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기대하다', '기다리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러를 앙(仰)'과 '바랄 망(望)'이 합쳐져서 '앙망하다', '우러러 바라보다'는 뜻이다. 이처럼 세상 모든 백성들이 하느님의 율법의 말씀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주님의 종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하느님의 공의가 완전하게 이루어져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의미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7) 주님의 종의 일은 아시리아나 바빌론 제국의 왕들처럼 수많은 민족들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일이 아니고, 이 땅에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세속적인 기업을 세우는 것도 아니다. 주님의 종의 일은 고통과 괴로움에 처해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자들'(눈먼 자들)에 해당하는 '이우로트'(yiuroth)는 '이우웨르'(yiuwer)의 복수형으로서 '시각 장애인'이란 기본적 의미에 국한하지 않고, 정상적 생활을 할 수 없는, 지치고 피곤한 자들과 하느님 앞에 올바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무기력하고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사람들을 말한다(이사56,10).
이것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어떤 생명력도 찾아볼 수 없는 자들, 아무런 소망없이 살아가는 자들을 나타낸다. '뜨게하고'(밝히고)에 해당하는 '리프코아흐'(liphqoah)의 원형 '파카흐'(paqah)는 닫혀 있는 것을 활짝 열어 젖히는 것을 의미한다(1열왕6,20). 이것은 메시야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놀랍고 획기적인 일을 통해서 절망과 고통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 생명과 희망의 빛을 가져다 줄 것을 나타낸다.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갇힌 이들'에 해당하는 '앗씨르'(assir)는 '노예', '죄수', '포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고독한 자', '가난하고 궁핍한 자', 죽이기로 정해진 자'라는 표현과 병행하여 사용되는 표현으로서 실제적인 노예와 죄수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 매우 극심한 고난과 고통을 받고 있는 자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진리와 생명에서 격리되어 죄와 죽음의 법칙에서 얽매어 어둠의 권세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들의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감옥에서'에 해당하는 '밈마쓰케르'(mimmasger)의 원형 '마스케르'(masger)는 '지하감옥'이라는 의미로서 빛이 들어오지도 않고 눅눅하고 침침한 토굴을 지칭하며, 이곳에서는 누구도 탈출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사람이 그야말로 완전한 절망적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 준다. 사실 하느님을 떠한 인간은 바로 이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어둠'에 해당하는 '호셰크'(hoshek)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을 의미하며(창세1,4; 탈출10,21), 비유적으로는 큰 슬픔이나 불행을 당하거나 파멸에 이르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2사무22,29; 욥17,23). 즉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란, '눈먼 이들'이나 '감옥에 갇힌 자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적, 정신적, 영적 영역에서 볼 때, 아무런 소망없이 고통과 절망 가운데 처한 인간의 실존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특별히 여기서 사용된 '앉아 있는 이들'에 해당하는 '요셰베'(yoshebe)의 원형 '야샤브'(yashab)는 '거주하다', '머무르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잠깐이 아닌 계속 이러한 상태에 있는 자들임을 나타낸다. 칠흑같이 어두운 감옥에 갇힌 죄인이 혼자 힘으로 그 곳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이 인간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메시야의 활동으로 여기에서 능히 벗어나게 될 것임을 본문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29주일 1독서(이사45,1.4-6)
주님께서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당신께서 오른손을 붙잡아 주신 키루스에게 말씀하시니 민족들을 그 앞에 굴복시키고 임금들의 허리띠를 풀어 버리며 문들을 열어젖히고 성문들이 닫히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1)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은 이는 왕이나 사제, 예언자와 같이 하느님의 특별한 소명이 있어, 성령으로 도유된 자를 말한다. 오늘 독서는 바빌론을 패망시킨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를 통해 이스라엘에 내리신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신 분이시다. 남부 유다가 잘 못 살아 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신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가는 벌을 받았다. 이제 바빌론을 멸망시킨 이방 민족 페르시아의 왕을 통해서도 말씀이 내린다.
"나의 종 야곱 때문에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 때문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르고,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 너에게 칭호를 내린다."(45,4) 하느님께서는 한 번 선택한 이스라엘, 첫 사랑을 버리지 않으신다.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당신을 버렸을때, 주변 이방 민족들을 통해 전쟁을 일으키고, 유배를 보내서 다시 정신 차릴 기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리고 이 모든 구원의 길, 회복의 길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신다.
"나는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45,5) 우리는 주님의 이러한 사랑에 대해, 2독서 테살로니카 전서 1장 2절처럼,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로" 사랑으로 보답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복음 마태오 22장 23절처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주어야" 한다. 로마 화폐 데나리온 동전에 무엇이 새겨져 있는가? 황제의 이름과 그 이름 앞에 "신적인" 이라는 각명, 황제와 그의 어머니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 그 동전은 황제의 것이다. 황제에게는 바로 그 동전 한 닢만 돌려 주면 된다.
하지만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너희 인간들, 더더군다나 나중에 예수님께서 피로서 구속하실 너희 인간들은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 온전한 사랑, 갈림없는 사랑과 믿음과 충성을 드려야 한다. 내 마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이사48,17-19)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8)
이사야서 48장 18절과 19절은 주님을 떠나 징계를 받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토로된다. 하느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당신 백성이 번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명령과 규정을 주심으로서 옳은 길을 걷도록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느님의 명령 듣기를 싫어하였다.
본문의 서두에 나오는 '루'(lu)는 가정법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했더라면' 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심경을 반영한다(민수20,3; 22,29; 여호7,7; 판관8,29). 새 성경은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아~'로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그들의 삶을 복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명령(신명10,13)을 경청했더라면, 그들의 삶은 이러한 고통이 없었을 것이고, 평화롭고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축복이 아닌 스스로가 자초한 고통스러운 징계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풍성한 평화를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 심령과 삶에 놓인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서(시편68,20)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이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너의 평화'에 해당하는 '셸로메카'(shellomeka)의 원형 '샬롬'(shallom)은 단순히 전쟁이나 불화, 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상태(well-being)를 나타낸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인생 최대의 축복으로 여긴 것이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평화를 강물에 비유한다. 이것은 생명을 공급하는 풍성한 소출을 맺게하는 물이 풍성한 강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넘치는 삶, 풍족하고 풍성한 삶을 살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축복은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의로움'은 앞에 제시된 '평화'와 더불어 주님의 통치의 성격과 관련된다(이사32,17). 사실 의로움은 평화를 초래하는 원천이다.
여기서 '의로움'(정의)에 해당하는 '체다카'(tsedakah)는 하느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올바른 삶의 태도, 의롭고 정직한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법적으로 의로움을 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의로움을 누릴 수 없는 약한 자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자비와 연민을 베푸는 삶으로까지 확대된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다 물결 같다는 표현은 그러한 삶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이다. 바다 물결은 그 흐름이 끊이지 않고, 한 파장이 다른 파장으로 연결되면서 계속된다.
하느님의 백성이 그의 명령을 겸손한 마음으로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산다면, 그들의 삶에서는 마치 바다 물결같이 의로운 행위, 자비로운 행위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그와 그가 속한 공동체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힘입게 하며, 그야말로 '샬롬'(shallom), 즉 완전한 평화를 누리는 형통한 삶, 부족함이 없는 삶의 자리로 이끌어 세울 것이다.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19)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이란 표현은 주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삶은 창세기 15장 5절과 22장 19절에 있는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축복을 성취하는 첩경이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는 이와 정반대의 결과 즉 저주스러운 일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즉 북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흩어졌으며, 남부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하면서도 동일한 결과가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언약을 받은 다윗 왕가는 무너졌으며, 왕의 자손들 역시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 민족 자체가 멸절된 것은 아니었지만, 민족의 수효는 급감하고 말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큰 축복으로 여겨졌었다. 이스라엘은 범죄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언약된 번성의 약속을 누리지 못하고 불순종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쇠퇴와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본문은 완료 시제가 아닌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사야서 48장 18절과 19절 상반절이 완료 시제로 되어 있는 것과 다르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이 이미 끊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님의 계명과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하느님의 명칭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이름을 지닌 대상의 존재와 성품, 사명과 활동 등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이름이 하느님 대전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그들에 대해 하느님께서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시며,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사제들의 나라(탈출19,5.6)로 삼으시고 축복의 통로로 삼으신 거룩한 직책을 박탈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하느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이같은 영예로운 이름, 그 안에 함축된 복된 직책과 임무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업신여김으로써 그 모든 축복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바빌론에 의해 패망을 당하여 결국 그들이 지닌 거룩한 이름과 정체성까지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성주간 화요일 제1독서(이사49,1~6)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3)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5)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3) 여기서 '종'에 해당하는 '아브띠'(abdi)는 '섬기다','일하다'는 의미의 '아바드'(abad)에서 유래하며 주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소유물인 노예나 왕국의 가신(1사무19,1)을 언급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겸손을 나타낼 때에 사용한다(창세33,5). 그러나 본문에서 이 종은 주님을 지칭하는 1인칭 접미어와 결합하여 '주님의 종'으로 표현되고 있다.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에 해당하는 동사 '에트파아르'(ethpaar)의 원형 '파아르'(paar)는 어떤 물체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재귀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는데, 그의 종을 통해서 그렇게 하실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너에게서'로 번역된 '뻬카'(beka)는 '메시야의 삶과 일(사명)을 통해서'라는 의미이다. 오직 주 하느님의 말씀대로만 사는 메시야의 삶과 무죄한 자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은 메시야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요한17,4).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5) 이사야서 49장 5절부터 7절까지는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사명을 성취하게 하실 것과 영광의 승리를 보장하시는 약속이 제시된다. 이러한 내용은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주 하느님께서 한번 주신 약속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취시킨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앞세움으로써 앞으로 제시되는 이사야서 49장 6절의 주님의 말씀이 확실하게 성취될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여기 이사야서 49장 5절은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주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매우 긴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주님의 종과 이스라엘이 어떤 관계이며, 이들에게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사야서 49장 5절의 이러한 내용은 이사야서 49장 6절에서 인용되는 주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이사야서 49장 5절에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예흐와 요체리 밉베텐 레에베드 로'(yehwa yotseri mibbeten leebed lo; who formed me as his servant from the womb)이다. 여기서 '모태에서부터'에 해당하는 '밉베텐'(mibbeten; from the womb) 에서 드러나지만, 주님의 종이 후천적으로 사명을 받은 자가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사명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모태에서부터 주님의 종을 예비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그 종이 성공적으로 사명을 완수하게 하실 것임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5) '모여들게 하시려고'의 표현은 앞의 '돌아오게 하시고'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가장 가깝게는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로부터의 귀환과 신앙적 회복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이사야서 49장 2절에 암시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질 것인데, 주님의 종이 본래부터 이스라엘의 영육의 회복을 위해 지음을 받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사명을 입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계획된 주님의 종을 통한 하느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며, 이 계획은 궁극적으로 종말에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백성들이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옴으로써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로마11,25~27).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5) '소중하게 여겨졌고'에 해당하는 '웨엑카베드'(weekkabed; for I am honored)의 원형 '카바드'(kabad)는 본래 '무겁다'는 의미로서 '소중히 여기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주님의 눈에'라는 '뻬에네 예흐와'(beene yehwa;in the eyes of the LORD)라는 표현은 주 하느님과 주님의 종과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주님의 종을 특별히 소중하게 보신다는 것은 결국 이 종을 통한 사명이 반드시 성취되게 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라는 표현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이것은 메시아가 이 땅에서 인류 구속 사업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원천이 바로 주님께서 주신 능력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요한 복음 14장 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사명이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1독서 (이사49,14-15)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14-15)
이사야서 49장 8-13절에서는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에 주님의 종 메시야를 통해 선민이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될 것이 예언되었다. 이제 이사야서 49장 14-26절까지는 바빌론 포로지에 있던 남부 유다 백성이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번성할 것을 예언한다. 바빌론에 포로로 있는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이사야서 49장 14절에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결코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확답을 줌과 동시에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후에 그곳이 비좁아서 못 살 정도로 인구가 많아지는 축복까지 누릴 것이라고(이사49,20) 구체적으로 약속하고 있다.
한편 이사야서 49장 14절의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라는 의심과 불평은 이사야서 40장 27절에 나타나는 다음의 내용과 같다.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이렇게 불평을 하는 대상으로 언급되는 '시온'은 바빌론 포로지에 있는 남부 유다 백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현실만을 볼 뿐 하느님의 약속을 망각했으며, 하느님께서 주실 구원을 내다보는 믿음의 눈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사야서 49장 14절에서 '나를 버리셨다'에 해당하는 '아자바니'(azabani)의 원형 '아자브'(azab)는 '무시하고 저버리다', '남겨두고 떠나다'라는 의미다(창세28,15; 39,12; 50,8). 그리고 이것과 병행하는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라는 표현에서 '나를 잊으셨다'에 해당하는 '세케하니'(shekehani)의 원형 '샤카'(shaka)는 인지적으로 기억을 못함과 더불어 무시하고 배신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신명8,11.19).
이것은 바빌론 포로민들의 하느님께 대한 불신앙을 보여준다. 그들은 장차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단지 계속된 포로 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향해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잊고 유기하신다고 불평을 했던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주님과 주님과의 계약과 율법을 배신하며 무시하고 저버린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결코 버리시거나 잊으시지 않으셨다. 백성들의 불신앙 가운데서도 당신 구원의 계획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이사49,1-3).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반어적 수사 의문문으로 시작하는 이사야서 49장 15절은 주 하느님의 유다 백성들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강조하여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자신들을 버리고 잊으셨다는 유다 백성들의 의심과 불평에 대해 주 하느님은 자신의 몸에서 난 젖먹이를 키우는 여인의 비유를 통하여 당신 자신이 당신의 백성을 결코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보여주시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 중에 가장 숭고하며 강한 것이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모성애인데,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사랑을 소재로 해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고 계신다.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본문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강조하기 위한 문장이다. 실제로 젖먹이를 잊고 자신의 태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는 어머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부정될 수 있다고 해도 하느님의 사랑만큼은 결코 부정될 수 없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사야서 49장 15절 후반부에 이어지는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라는 표현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원문에서 '나는'에 해당하는 '아노키'(anoki)는 문장 구성상 없어도 되는 단어이지만, 주어를 강조하기 위해 인칭대명사로서 사용되었다. 이처럼 원문은 주 하느님 자신이 매우 강조되었다. 그리고 미완료형 동사와 부정어 '로'(lo)가 결합한 형태로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이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 하느님 자신 만큼은 절대로 유다 백성들을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일찌기 다윗도 그의 시편에서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 주리리라."(시편27,10)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을 간파하고, 확신에 찬 고백을 드러내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이사50, 4~7)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6)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7)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6) 본절은 주님의 종이 당할 극심한 고난과 더불어 그 고난 가운데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다 이겨낸다는 사실을 예언한다.
그가 이런 극심한 고통을 인내로 견뎌낸 것은 그 고통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통이요, 그 고통을 통해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를 이루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주님의 의(義)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의 고난에 대한 예언은 주님의 종의 노래 가운데 마지막 노래인 52장 13절~ 53장 12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예언되며 그 고난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 고난은 단순히 육체적 아픔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굴욕과 치욕감을 깊이 느끼게 하는 고난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옷을 벗긴 상태에서 채찍으로 과격을 당하고 수염을 뽑히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는 것은 인격을 철저히 무시하는 너무나도 크나큰 굴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신명25,9; 2사무10,4; 느헤 13,25; 예례7,29; 마태26,67; 요한18,22). 그러나 주님의 종은 그 고난을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성취하는 통로로 여기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이를 묵묵히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본문에서 '나를 매질하는 자들에게'에 해당하는 '레막킴'(lemakim)의 원형 '나카'(nakah)는 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서 53장 4절에서는 그가 맞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느님께 맞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예언된다. 그러나 그는 무죄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채찍질을 감내해야 했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등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게서는 로마 병정들의 모진 채찍질을 묵묵히 참음으로써 이 예언을 성취하였다(마태26,27; 27,26; 요한19,1).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에 암몬 임금 하눈은 그의 죽은 아버지께 경표하고자 온 다윗의 신하들을 욕보이며 턱수염을 절반씩 깎아 버린 일이 있었다(2사무10,4). 이것은 극심한 모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 신하들은 다윗의 지시에 따라 턱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예리코에 머물러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고대 사회에서 수염은 멋으로 기르는 것 즉 장식용이 아니라 남성의 인격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그것을 깎는다든지 뽑아 버리는 것은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완전히 깔아 뭉개버린다는 뜻이었다. 울러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형벌(느헤13,25)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은 이런 치욕적인 일, 이처럼 무고한 모독과 형벌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즉 자기 턱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뺨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의 이러한 태도는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는 가르침(마태5,39)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모욕'으로 번역된 '켈림무트'(kelimmuth)는 주먹과 손바닥으로 얼굴을 맞는 것을 통해 주님의 종이 느끼는 인격적 상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마태26,67). 또한 '수모'로 번역된 '로크'(loq)는 구약에서 본문과 욥기 30장 10절 두 곳에서만 사용된 매우 희소한 단어인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 침뱉음을 뜻하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한다는 것은 턱수염이 뽑히는 것보다 드문 일이고 더 굴욕적인 일임을 암시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은 그 굴욕을 피하기 위해 저항하거나 얼굴을 가리우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무기력해서가 아니라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을 안다."(7) 의 이사야서 50장 4~6절에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한 주님의 종의 고난과 고난을 받는 중에도 전적으로 참고 순종한다는 사실을 노래하였다. 이제 이사야서 50장 5~9절 까지는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종이 승리할 것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노래한다.먼저 본절은 그토록 견디기 힘든 치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것은 자기를 종으로 세우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을 돕는다는 확신과 그 하느님께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 것 때문이다. 주님의 종은 극심한 수치와 모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취급을 당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의 종은 자기가 당하는 그 고난이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감당해야 할 사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절은 원문상 접속사 '와우'(wau; because, for 혹은 but)로 시작하고 있다.이것은 본절의 내용이 앞절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사실을 말해 준다.
주님의 종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고난을 자기 혼자 당하는 것도 아니며, 그 고난 때문에 자신이 절망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본절을 와우 접속사로 시작한다. 리고 그 진정한 배후에는 자신의 정당성을 지지해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도와 주시니'에 해당하는 '야아자르'(yaazar)의 원형'아자르'(azar)는 이사야서 50장 4절에서 주님의 종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과 동일하다. 주님의 종은 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올바른 지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며, 하느님을 통해 고난의 때에 도움을 받는다. 여기서 '아자르'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주님께서 종의 사명 전반을 지지하며 도와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한편 이에 이어지는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구절은 과(因果)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al ken; therefore)이란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신 결과, 그가 수치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의 의미를 앎으로써 고난과 모욕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문 역시 앞 문장과 같이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시는 결과, 주님의 종이 자기 얼굴을 차돌같이 굳게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만든다'에 해당하는 '사므티'(samthi)는 '두다','되게 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숨'(sum)의 능동 완료형 1인칭 단수로서 본문의 행동의 주체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기 얼굴을 차돌처럼 굳게 하였다는 것이다. '차돌'로 번역된 '할라미쉬'(hallamysh; flint)는 '아주 단단한 물건','단단한 돌','부싯돌','바위'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매우 단단한 돌을 말한다(신명8,15; 시편114,8). 따라서 본문은 낯이 매우 두꺼운 것을 의미한다.
우리 말에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낯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종이 주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치욕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처지를 전혀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을 이런 직유법을 사용해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본문은 이중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첫째는 주님의 종이 그런 치욕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결단코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그가 비록 죄인들이 당하는 수난을 당하고 있지만, 마지막 날에는 결코 심판에 처해지지 않고, 자신이 의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을 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수치를 당하다'는 의미로 번역된 '에보쉬'(ebosh; shall be ashamed)의 중의성(重意性)때문이다. 이 단어의 원형'뽀쉬'(bosh)는 수치를 느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창세2,25) 최후 심판에서 단죄되어 치욕스런 상태로 떨어진다는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창세45,16).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는 고소를 당해 수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마태26,65).그러나 그들이 단죄한 그 신성 모독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요한1,1-3; 필리2,6)을 깨달았다면, 그들은 그를 신성 모독죄로 고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단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위치로 끌어 올려 주셨다(필리2,10). 이 사실이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확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이사50,5~9ㄴ)
"3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었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53,3) '그는 멸시받고'에 해당하는 '니브제'(nibze)의 원형 '빠자'(baza)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 무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람들이 주님의 종이 그들에게 왔을 때, 메시야로 인정할 만한 조건이 하나도 없다고 판단하여 무시하고,그를 인격적으로 모독하고 멸시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배척당할'에 해당하는 '와하달'(wahadal)의 원형 '하델'(hadel)은 '거절된'이라는 의미로서 '멸시받고'라는 표현과 같은 뜻이다. '고통'에 해당하는 '마크오보트'(makobot)의 원형 '마크오브'(makob)는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고통을 의미하는 단어이다(탈출3,7; 이사53,4).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의 진리를 배척하는 사람들로 인해 메시야가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당할 것을 암시한다(마태23,37~39). 또한 '병고'에 해당하는 '홀리'(holi)는 흔히 육체적 질병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신명7,15; 2역대21,15; 이사38,9).
이 두 표현은 함께 사용되어 인간이 죄로 인해 경험하는 세상의 각종 고통과 고난을 나타낸다. 이러한 분문은 주님의 종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신 동시에 순수한 인성을 지니신 분임을 잘 보여주며 더 나아가 인간의 모든 고통을 경험하셨으므로, 인간의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은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척당하고 외면당하는 모습을 회화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보통 이것을 두가지 의미로 해석하는데, 사람들이 메시야에게 자신들의 얼굴을 숨긴다는 의미와 메시야가 자신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숨긴다는 의미이다.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라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메시야가 무시당하는 것보다 더 있을 수 없는 일, 즉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메시야가 환영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3,4) 여기 이사야서 53장 4절에서 53장 9절까지는 주님의 종의 고난을 예언하며, 그 고난이 대속을 이루기 위한 고난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먼저 전반부인 이사야서 53장 4~6절에서는 대속 고난을 위한 주님의 종의 고독하고도 처절한 희생을 부각시킨다. 인간은 죄악을 범하여 하느님의 친교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메시야는 그 인간을 대신하여 매를 맞고, 찔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시게 되는 것이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며(창세2,17; 로마6,23),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는 것이(레위17,11; 히브9,22) 영원불멸의 원칙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구약 시대에는 양과 송아지를 희생하는 제사 제도를 주셨지만, 동물의 피가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씻을 수는 없다(히브10,4.11). 동물의 피를 드리는 제사는 사람의 죄를 생각하게 하는 기능일 뿐이다(히브10,3).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참된 것의 그림자로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동물 제사 제도를 허락하셨으며(히브8,5; 9,11), 때가 되어(갈라4,4) 온전한 희생 제물의 자격을 갖추신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어 단 한번의 제사로써 완전한 속죄를 이루게 하셨다(히브9,12; 10,12.18).
그리스도가 단 한번 죽어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드릴수 있는 것은 그가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이다(히브4,15).
이사야 53장 4~6절은 이와같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 죽음의 본질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병고'(홀라예누; holayenu)와 '우리의 고통'(우마크오베누; umakobenu)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각각 이사야서 53장 3절의 '병고'와 '고통'에 해당하는 원어와 동일한 어근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메시야가 하느님의 백성이 겪는 그 병고와 고통을 '대신 메고 갔으며','대신 짊어졌다'는 것을 묘사하는 동사는 '나사'(nasa)와 '쎄발람'(sebalam)이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바빌론 우상의 무능과 하느님의 참 구원자되심을 밝히는 이사야 46장 1~7절에서 반복 사용되는 단어와 동일하다.
그곳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방 바빌론의 우상 숭배자들이 그 우상을 어깨에 매고 들어 나르는 것과 그에 반해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을 품에 안아 보호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본문의 이 두 단어를 번갈아 사용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그의 독생성자이며 대속의 사명을 감당할 주님의 종에게 인류의 병고와 고통을 대신 짊어지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짊어져야 할 그 병고와 고통을 완전히 덜어 주심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이방의 종교가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짊어 지우는 것과 대조되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 준다.
주님의 종 메시야는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병고와 고통을 당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그를 통해 직접적인 혜택을 얻는 우리 인간은, 그를 보면서 그 자신의 죄 때문에 징벌을 당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53,5)
이 구절만큼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생생하게 예언하는 구절도 없고, 이 구절만큼 인간이 하느님께 범한 죄악의 심각성을 현저하게 드러내주는 것도 없다. '찔린 것'을 묘사하는 '메흘랄'(mehlal)의 원형 '할랄'(halal)은 문자적으로는 구멍을 뚫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메시야가 당할 고난과 고통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인데, 주님께서 가시관으로 머리에 찔림을 당하고, 대못으로 손과 발에 못박힘을 당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는 것으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메시야의 이러한 고난과 고통이 모두 우리의 '악행'때문이다.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에 해당하는 '밉페샤에누'(mippeshaenu)의 원형 '페샤으'(peshah)는 변절하고 반역하는 것을 의미한다(2열왕1,1; 이사1,2; 43,27). 즉 사소한 실수나 연약함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가 으스러진 것은'에 해당하는 '메둑카'(medukka)의 원형 '따카'(daka)는 단순히 피부가 상하는 정도의 상태를 나타내지 않는다. 이 단어는 짓밟혀 뼈가 완전히 으스러지는 치명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욥4,19; 22,9; 이사3,15;19,10).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에 해당하는 '메아오노테누'(meaonotenu)의 원형 '아온'(aon)은 '페샤으'와 마찬가지로 주 하느님을 배반하고 다른 우상을 섬기는 등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는 근본적인 죄악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본문의 '징벌'에 해당하는 '무싸르'(musar)는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바로 잡기 위해 근실히 징계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잠언13,1.24; 15,5).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쉘로메누'(shelomenu)의 원형 '샬롬'(shalom)은 단순히 전쟁과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느 것 하나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행복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써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직접 하느님의 징벌을 받고 그 잘못된 것으로부터 돌이켜야 했다. 그러나 그 징벌의 댓가는 죽음일 수 밖에 없기에 하느님의 징벌을 직접 받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완전히 막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돌이킬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의 회복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상처로'(개신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에 해당하는 '우바하부라토'(ubahabrato)의 원형 '합부라'(habbura)는 매질과 큰 상처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육체적 고난을 상기케 한다(마태27,26-30; 마르15,15.19; 요한19,1~3참조). 그러나 이 단어는 이러한 육체적 측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고난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았다'에 해당하는 '니르파'(nirpha)는 '라파'(rapha)의 수동형으로서 인간이 어떠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구원의 수혜자가 됨을 말한다. 이것 역시 단순히 인간의 육체적 회복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회복을 다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의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53,6) 원문상으로 본절은 '우리는 모두'로 시작하여 '우리 모두'로 끝나 단 한사람의 예외도 없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을 양으로 비유하는 것은 바로 앞의 탐욕만을 생각하면서 한치 앞의 위험도 보지 못하는 인간의 영적 근시안과 줏대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 함께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인간의 영적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양은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어 먹을 때 바로 앞에 있는 풀에만 신경 쓸 뿐,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아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또한 양은 다른 양들이 놀라 허겁지겁 뛰어 달아날 때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면서 덩달아 달아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거룩한 삶으로 영원을 준비하기보다 바로 목전의 탐욕에만 급급하여 범죄하기를 쉬지 않는 인간의 죄성과 자신이 가는 길이 멸망인지도 모르고 다수의 사람들이 가니까 덩달아 따라가는 인간의 어리석음(마태7,13)이 양의 비유를 통하여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길을 잃고'에 해당하는 '타이누'(tayinu)의 원형 '타아'(taa)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본문에서는 영적 의미로 진리의 길을 벗어나 방황하는 인생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떨어지게 하셨다'에 해당하는 '히프끼아으'(hiphgiah)의 원형 '파가으'(pagah)는 두 당사자가 서로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탈출23,4; 민수35,21). 본문에서는 사역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자신의 단호한 의지로써 우리 모든 사람의 죄악을 주님의 종에게 떠넘기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예언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하느님의 경륜 가운데 작정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53,7) 주님의 종 메시야가 당한 수난이 그에게 합당하지 않는 수난이며 희생이란 사실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난을 자발적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저항하지 않는 인내와 순종의 정신은 그를 구세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삶의 모델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만물을 주도적으로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의 뜻을 겸손히 따르는 자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학대받고'에 해당하는 '닉가스'(niggas)의 원형 '나가스'(nagas)는 원래 강제권을 발동하여 억지로 무엇을 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탈출3,7; 5,6; 욥39,7). '천대받았지만'에 해당하는 '나아네'(naane)는 '억지로 시키다','괴롭히다', '천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아나'(ana)의 수동형이다. 이것은 주님의 종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큰 고통을 받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어린 양'에 해당하는 '세'(se)는 주로 번제 희생으로 드려지는 어린 양(창세22,7; 탈출34,20; 레위5,7) 혹은 파스카(유월절; 과월절)때 잡았던 어린 양(탈출12,4)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것은 메시야가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1,29)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메시야는 그가 당하는 고난이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인 것을 알면서도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양이 입을 열어 울지 않는 것처럼,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희생적 이미지의 양으로 묘사된 것이다.
양은 자기 몸에서 털이 깎여 나갈 때에도 울지 않는다. 여기서는 털을 깎기에 아주 적합한 암양(어미양)을 의미하는'라헬'(rahel)이라는 단어가 쓰여졌다. 그리고 '잠자코'에 해당하는 '네엘라마'(neelama)의 원형 '알람'(alam)은 원래 곡식단 같은 것을 동여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창세37,7). 주로 입을 단단히 묶어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용법으로 메시야의 단호한 침묵의 의지를 드러낸다.
연중 제 15주일 제 1독서(이사55,10-11)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 성모님의 살과 피를 취하고 인류의 구원자로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을 완성하시고, 영생을 주시기위해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듯~~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이 하늘로 다시 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에서 결실을 맺어 땅의 사람들에게 양식을 공급하듯~~ 그렇게 하느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씀은 반드시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바가 달성되고, 사명과 소명을 완성하고,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말씀은 권세가 있다. 말씀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이다. 말씀은 운동력과 생명력이 있다.말씀은 어둠과 악을 몰아내는 힘이시다. 말씀은 치유하는 광선(빛)이다.말씀은 재창조의 능력이시다. 말씀은 우리 삶의 의미요 가치이시다. 말씀은 기쁨이며 행복 자체이시다. 말씀은 살아계신 예수님시다. 말씀은 살아계신 생명의 빵(성체)이시다. 말씀은 구원자이시다. 말씀은 아버지께 가는 진리와 생명의 길이시다.
말씀을 매일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자. 생명을 주는 말씀을 한 구절 읽고 잠시 침묵하면서~<주님! 이 말씀을 통해서 저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세지가 없는지~~ 말씀하소서~>하고 기다리면, 어떤 깨우침을 주실 것이다. 무소부재하신 하느님께서 다 듣고 계시며 성령님을 통해 깨우침을 반드시 주실 것이다. 말씀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침묵중에 기다리는 자체가 신앙인의 모습이다. 성모님의 모습이다.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의 농사짓는 방법은 우리하고 다르다. 우리는 땅을 개간하고 좋은 땅에 씨를 뿌리나~그 당시 이스라엘은 씨를 뿌려놓고 땅을 정리를 했다. 그러니 길에도, 돌밭에도, 가시덤불에도, 좋은 땅에도 씨가 떨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 밭(심전心田)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 밭이 길과 같고, 돌과 같고, 가시덤불과 같으면, 회개하고 정리하고 고치고 비워서 좋은 밭을 만들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느님의 말씀의 씨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도록 하자.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이사55,10~11)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10~11)
오늘 독서 이사야서 55장 10~11절의 말씀은 55장 6~7절의 말씀이 천지가 개벽해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하느님께서 정하신 자연법칙을 예로 들면서 강조하고 있다.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 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6~7)
이사야서 55장 6~7절은 하느님을 만날 기회가 영원무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질 바로 그 때에 회개하여 주님을 찾으라고 촉구하는 내용이며, 이 말씀에 따라 죄인이 돌아올 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하시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는 땅에서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않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 이러한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한 번 주 하느님의 입에서 나간 말씀은 반드시 그 목적한 바를 성취하고야 만다. 하느님께서는 한 번 뱉은 말씀이 성취되기도 전에 그것을 다시 주워 담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민수기 23장 19절에서 발라암의 신탁을 통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어서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아니어서 생각을 바꾸지 않으신다. 그러니 말씀만 하시고 실천하지 않으실리 있으랴? 이야기만 하시고 실행하지 않으실리 있으랴?" 비가 내리면 그 중에서 수증기로 증발해 버리는 양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한 번 내린 비는 반드시 땅을 적시게 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땅은 생산력을 갖게 되어 있다.
본문의 진정한 의도는 하느님께서 목적하시는 바는 결코 헛되이 끝나지 않고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데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이 그와 같은 성취를 이루어낸다는 것을 자연 법칙을 통해 비유하는 데 있다. 적절한 시기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은 땅을 촉촉히 적셔서 싹이 돋게 하고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며 인간에게 양식을 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인간 영혼을 살리며 삶을 풍성하게하는 영적 양식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인간 영혼을 살리며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의 삶은 풍성해지게 마련이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완벽한 판단력과 완전한 지식과 총체적 계획과 영원한 경륜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입에서 나간 말씀이 헛되이 사라지거나 허망한 것으로 끝맺는 일은 결코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한 번 입에서 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계획한 목적을 달성하고야 마는것이다.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작하는 본문은 왜 하느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씀이 헛되이 그냥 돌아오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그 말씀이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내가 뜻하는 바'에 해당하는 '아셰르 하파츠티'(asher hapatsthi)는 문자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 혹은 '내가 기뻐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은 다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며 생명을 구원하는 일과 관련된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당신의 의롭고 선하시고 진실하신 속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전지 전능하심, 절대 주권에 근거해서 반드시 성취되며, 궁극적으로 그 모든 일들은 그분의 성품에 부합된 것으로서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축복이 되고 아름다운 결과로 귀결될 것이다.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간 말씀은 그의 마음 속에서 계획하신 뜻을 표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자 이시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고 운동력과 생명력이 있으며 재창조의 능력이요 치유하는 광선이고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다.
제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영육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절대적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매일 말씀을 읽고 곱씹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살아서 참으로 말씀이 주는 기쁨과 평화, 행복과 자유를 누리자.
그럴때 우리의 삶이 회복되고 의미가 있게 되고 가치롭게 된다.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4장 4절, 8절, 12절에 "성경에 기독되어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세번 다 구약 성경의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번역된 '게그라프타이'(gegraptai; It is written)는 원형 '그라포'(grapho)의 완료 수동태이다.
희랍어에서 완료형은 과거에 이루어진 동작이 현재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능을 가진다. 따라서 과거에 기록되어 이미 완성된 구약 성경의 그 말씀이 기록된 그 시대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계속하여 효력을 지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수동태가 된 것은 그 말씀이 사람이 쓴 문자로 남겨져 있음을 나타낸다.
성경은 비록 외형적으로 인간 저자나 필사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지만, 그 배후에 특별 계시의 주체가 되시는 하느님의 계시이므로 본적으로 하느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이 되는 것이다.
연중 제20주일(이사야 56,1.6-7)
이사야 예언서는 바빌론 유배 훨씬 이전에 활동했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과 신탁을 반영하는 제 1이사야서(1-39장), 유배 시대의 예언을 담은 제 2이사야서(40-55장), 유배후 시대의 예언을 포함하는 제3이사야서(56-66장)로 나눈다.
오늘 독서는 제3이사야서로 불리는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이다. 여기서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의 상황을 겨냥한다. 이 대목도 저자 한 사람이 쓴 것 보다는 다양한 역사적 삶이 배경에서 나온 여러 신탁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면서 몇 가지 공통된 주제가 있는데, 이사야 전체의 중심 주제인 <구원의 보편주의>를 재천명한다고 볼 수 있다.
1)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당신께 충실한 남은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하느님의 도성인 시온 또는 예루살렘은 참다운 예배의 중심이 될 것이다. 3) 하느님의 심판은 이스라엘과 그 주변의 경계를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 미칠 것이다. 4) 주님의 구원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 확장된다.
특히 이사 58장 6-7절과 61장 1-2절은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 공생활의 청사진을 그려내는 데 결정적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주님의 구원이 하느님의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다 미친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민 이스라엘이 거부하면 이방인에게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방인들도 하느님을 알아 모시며 안식일 규정을 지키리라는 오늘 제1독서의 말씀, 사도 바오로가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을 거절하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제2독서 로마서 말씀, 악령들린 딸의 치유를 예수님께로부터 끌어내는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겸손한 믿음을 다루는 마태오 복음은 오늘 주일 말씀의 공통된 주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묵상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은총과 선물, 특혜와 소명을 소중하고 감사로운 마음과 성실함으로 잘 관리하지 못하면,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고, 은혜를 은혜로 알며 그것을 잘 관리하고 성실하게 보존할, 겸손한 다른 사람에게로 떠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되고, 그리스도가 피로써 구속한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의식이나 열등감과 패배의식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폄하하거나 평가절하해서, 구원과 축복에서 제외된 존재라고 여기며 절망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선포하는 하느님의 구원의 보편주의와 보편성은 <저 사람은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예정되었다>는 그릇된 예정론과 자신만이 구원의 특혜를 받고 있다는 오만한 선민의식을 둘 다 배제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마태오 복음 3장 9절에서 말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마태오복음 11장 12절에서는 하느님 나라는 그것을 차지하고자 힘쓰고 애쓰는 사람의 것임을 선포한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주님 공현 대축일 제1독서 (이사60,1-6)
제3이사야서로도 불리는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56-66장)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의 상황을 겨냥한다. 특히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하느님의 도성인 시온 또는 예루살렘은 참다운 예배의 중심이 될 것이며(60,4-7), 주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 확장된다(60,3-14)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사야 40,1-2의 "위로"가 이 장에서 성취되고 있다. 이사야 49,6에서 약속된 "빛"이 이 장에서 비추어지기 시작한다. 에즈라기 7장과 느헤미야기 2장이 그 배경을 알려준다. 바빌론의 유대인 사회는 페르시아 행정부의 영향력있는 유대인 관료들을 통해 황제의 관심을 얻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과거에 키루스와 다리우스1세가 제의적 의식들과 신전 도시들에 대해 성공적으로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정책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그는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노력을 뒤에서 지원하기로 동의했다. 하느님께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후원하시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성을 인정한 결과로 예루살렘이 재건되고 또 복권되고 있었기 때문에, 기쁨과 빛과 아름다움이 이 장에 넘친다.
이 장의 핵심은 과거의 어두운 절망과 극도의 빈곤과 버려진 폐허의 혼돈을 활동의 중심지, 상인들과 기술자들, 노동자들의 바쁜 시장, 빛과 아름다움과 기쁨의 장소로 바꾸기 위한 정치, 경제, 종교적 결정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결정들은 바빌론으로부터의 유대인들의 귀환, 외국 자본의 유입, 그리고 예루살렘의 문예부흥에 기여하는 여러 국가들의 갑작스러운 관심이 포함된다.
에즈라기 7장 1-28절을 이 장과 나란히 둘 때, 여러 조각들이 제 자리를 찾게 된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특히 예루살렘의 성전이 다시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 에즈라에게 권력을 부여한다. 그는 예루살렘의 하느님께서 자신을 좋아하기를 바랬다. 이런 목적으로 그는 왕가의 자금을 넉넉히 지원했다. 그는 강 건너펀의 다른 백성들과 관리들에게도 돈과 목재와 노동력을 기증하라고 명령하고, 만일 그들이 거부하면 제국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는 자신의 명령들이 실행되는가 알기 위해 에즈라에게 군대의 호위를 제공했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아라.그들이 모두 모두 네게로 온다. 너의 아들들이 먼 곳에서 오고,너의 딸들이 팔에 안겨 온다.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다. 바다의 보화가 너에게로 흘러들고, 민족들의 재물이 너에게로 들어온다." (60,3-6절)
하느님은 못하실 일이 없으시다. 남부 유다가 멸망하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다 하더라도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통해 남부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 빛을 비추어주며 영광을 돌려주고, 민족들이 우러러 보게 만들어 준다.
죄악과 어둠과 혼돈이 만연한다 해도 이 세상과 교회 안에서 악이 승리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시간표대로 진행될 것이고, 하느님께서 하느님다운 방법으로 당신 뜻과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다. 예루살렘 위에 비추어지는 빛과 주님의 영광의 이사야 60,1-6의 말씀이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에 선포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온 세상과 이방인을 대표하는 동방 박사에게 이 세상의 구원자요 빛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의 모습이 공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공현;公顯; Epiphany). 여기에다가 예수님 세례 사건 때에 성삼위가 계시된 사실에 근거하여,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이 공적으로 선포됨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공생활이 시작된 사건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첫번째 기적을 베풀어 신성(천주성)을 드러낸 카나의 사건,이 세가지를 함께 기념하는 것이 공현의 의미이다.
그중에서 오늘은 특별히 동방의 점성술가들이 구세주의 탄생 장소로 인도하는 성령을 상징하는 별의 인도로,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과 신성을 상징하는<유향>과 인류를 구원할 죽음을 상징하는 <몰약>을 베틀레헴 마굿간 구유의 예수님께 드린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성령의 별빛을 받아 신앙을 갖게 된 우리 자신들도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무엇을 봉헌해야 주님이신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할 수 있는지를 묵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