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독서묵상)

2015. 10. 20. 오후 12: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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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 (독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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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다니1,1-6.8-20)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십시오.  저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시고 또 물만 마시게 해 주십시오. (12)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13) 

다니엘은 자신을 감독하는 자에게 진지하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것은 특정한 기간을 정해서 임금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는 자신과 이를 먹는 다른 친구들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열흘 동안'에 해당하는 '야밈 아사라'(yamim asarah)문자 그대로 10일을 의미한다. 다니엘서 1장 14절과 15절에 열흘 동안 시험했다는 사실이 부가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열흘은 동료들과 다른 음식을 먹고 얼굴빛을 통해 그 결과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그러나 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먹는 자들보다 채소와 물만을 먹으면서 얼굴빛이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주권자이신 주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다니엘의 신앙이 얼마나 확고했는지가 드러난다. 시험해'에 해당하는 '나쓰'(nas)'시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나싸'(nasa ;test,prove)의 강조 능동 명령형이다.  

여기서는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는 뉘앙스가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불변사 '나'(na; please)와 더불어 문장을 구성하여 '시험해 보십시오', '시험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정중한 청원의 의미가 된다. 말하자면, 특정 기간동안 특정한 대상에게만 시범적으로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하여 그 조치에 따른 결과를 조사해 본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채식을 주어 먹게 하시오' '채식'에 해당하는 '핫제로임'(hazeroim)의 원형 '제로아으'(zeroah)는 씨를 뿌리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 '자라으'(zarah)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씨를 뿌려 싹을 내는 것, 또한 씨를 맺는 곡물 종류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것은 야채(vegetable)만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육식과 생선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곡식류 및 그 곡식으로 만들어진 빵과 과일류까지 다 포함한다. 이 단어가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것이 입증된다. 

이어서 다니엘은 포도주 대신에 물을 줄 것을 청원한다. 다니엘서 1장 8절에서도 지적한 것처럼이교도의 제사와 관련되었을 수도 있으며, 방탕한 생활을 지양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게 위해 율법이 금하지 않은 술까지도 거부하며 오로지 물만을 마시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13) 다니엘은 자신이 시험을 요청한 사안에 대해 자신감있는 태도로 말한다. 다니엘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하심을 통해 놀라운 일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진수성찬과 포도주를 먹지 않고 채식과 곡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자신과 자기 친구들의 얼굴빛과 건강 상태가 다른 동료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을 것임을 확신한다. 

여기서 '비교해 보시고'에 해당하는 '웨예라우'(weyerau)'마르예'(marye; '얼굴')의 어원이기도 한 동사 '라아'(raah; '보다')의 수동태 3인칭 복수'(젊은이들의 용모와 저희들의 용모가) 보일 것입니다'라는 의미이다. 즉 얼굴빛과 건강 상태는 감독관이 면밀히 살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로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이러한 자신감은 주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다니엘은 자신의 신앙적 신념대로 행한 후에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바빌론 감독관의 결정에 맡겼다. 여기서 '하십시오'에 해당하는 '아세'(aseh; deal,treat)번역 그대로 행하라는 의미인데, 문맥에서는 '처분하십시오'라는 뜻이 들어있다. 

이러한 처분은 음식에 관한 결정권뿐 아니라 다니엘과 그 동료들에 대한 징계도 포함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다니엘의 자신들에 대한 처분에 대한 의탁 역시 하느님께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않아 죽임을 당한다고 하여도, 자신들의 신앙의 정절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도 있다.


제34주간 화요일 제1독서 (다니2,31-45)

"이것이 그 꿈입니다. 이제 그 뜻을 저희가 임금님께 아뢰겠습니다."  (36)  

다니엘서 2장 31-35절은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밝히지 않았던 꿈의 내용을 정확하게 진술하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니엘서 2장 36-45절은 임금의 기이한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설을 보여준다. 다니엘은 꿈의 내용에 대해 다 말한 다음에 그 해석을 진술하는 단락의 서두에서 '이것이 그 꿈입니다' 라는 표현을 통해, 앞의 진술한 내용의 확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은 네부카드네자르는 다니엘의 말이 진실임을 인정했을 것이다.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다니엘이 결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꿈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그 해석 역시 정확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저희가 ~아뢰겠습니다'에 해당하는 '네마르'(nemar)'말하다', '진술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마르'(amar)의 1인칭 복수 미완료 시제이다. 

새 성경은 '저희가'로 번역했는데, 본문의 주어는 1인칭 복수로서 '우리'(we)이다. 혹사는 이 1인칭 복수를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당시 그 세 친구들은 자신들의 집에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1인칭 복수 주어는 다니엘과 그에게 꿈을 알게 하신 주 하느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다니엘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그 꿈의 내용을  계시하신 분이 주 하느님이심을 이미 확실히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다니2,28), 꿈의 해석 역시 자기 혼자만의 통찰력으로 제시할 수 없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기위해 1인칭 복수 주어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니엘은 여전히 겸손한 태도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세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다니3,25.34~43)

불 속의 다니엘의 세친구(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와 주님의 천사 (다니3,49~50)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38~40) 

히브리어로 '다니엘''하느님께서 나의 심판관이시다' 뜻이다. 다니엘서의 작중 연대(글 안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기)는 네부카드네자르바빌론 왕좌에 오른 B.C.605년 이후부터 이고, 그의 통치 시절에 예루살렘 공략과 바빌론 유배가 크게 B.C.597년과 B.C.587년에 두 번 있었던, 여호야킨남부 유다를 다스리던 때였다(2열왕24,10~16; 에제1,2).

다니엘이란 한 인물을 통해 이민족의 지배 아래에서 유다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적이다. 다니엘서의 저작 연대(저자가 기록한 시점)는 마카베오 항쟁을 불러 일으킨 안티오코스 4세(BC175~164년)의 박해 때이다. 본문 자체가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가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한 사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다니엘8,9~13; 9,27; 11,31참조). 

그런데 기원전 164년에 있었던 성전 정화는 언급하면서도, 같은 해에 있었던 박해자 안티오코스 4세의 죽음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 책의 저작 연대 기원전 164년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다니엘서 1~6장에 나오는 여섯 가지 이야기는 박해 상황에 걸맞지 않게 유머스럽고 긴장감이 덜하다. 이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출중한 인물들이 고대 근동의 궁정안에서 벌인 활약상을 전하는 3인칭 궁정 설화의 전형적 예들이다. 

이 궁전 설화들은 마카베오 항쟁 훨씬 이전에 디아스포라(Diaspora; 본국이 아닌 곳에서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 해외 거류민 혹은 교포의 뜻) 유다인들이 이방인 왕궁에서 겪었던 갈등과 성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서 저자는 이 궁정 설화들을 입수해서 마카베오의 박해 상황에 맞게 편집했을 것이다. 

다니엘서 3장은 다니엘의 세 동료가 우상 숭배를 거절한 탓으로 불가마에 던져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이다. 다니엘서 2장과는 달리 다니엘서 3장에서 네부카드네자르는 현명한 군주가 아니라 어리석고 잔인한 폭군이다. 그는 금신상(아마도 자기 자신의 상)을 만들어 놓고, 문무대신들에게 거기다가 절을 하라고 명령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권능과 위엄을 만천하에 드러낼 뿐 아니라 이를 신격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과 함께 자신의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내 제국의 힘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실용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워 숭배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다니엘의 세 친구가 거절하자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활활 타는 불가마에 던지게 한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불길을 가마 밖으로 내몰아 세 젊은이를 보호한다. 세 젊은이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그리스어 역본에만 나오는 '아자르야의 노래'(다니3,24~45) '세 젊은이의 노래'(다니3,52~90)이다. 

이제 이러한 노래가 나오기까지의 전개 과정을 좀 살펴본다.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다니3,15) 

다니엘서 3장 15절 서두에 나오는 '이제라도'에 해당하는 '케안 헨'(kean hen)'만약 지금이라도'로 직역되며, 이미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자신이 직권으로 부여하겠다는 뉘앙스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 세 유다인들의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 (다니1,19.20), 과거 그들의 간절한 중재 기도로 인해 자신이 꿈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다니2,49). 이와 같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네부카드네자르로서는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금신상에 절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세 사람이 남는다는 것은 왕으로서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돌려  다시 주어진 기회에 금신상에 절한다면, 네부카드네자르는 한 번 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풂으로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돌이킬 수 있도록 상당히 이례적인 한 번의 기회를 더 부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악기소리가 날 때에'에서 '날 때에' 해당하는 '베잇다나 띠 티쉬메운'(beiddana di tishmeun)은 문자적으로 '너희가 듣는 바로 그 때에'(at the time you hear)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곧 바로 절해야 한다는 즉각성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즉시)에 해당하는 '빠흐 샤아타'(bah shaatha)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그들이 자기들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임금인 자기의 명령에 거역하면, 조금의 가차도 없이 즉각 불가마(풀무불)가운데 던질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당시 불가마가 금 신상 가까이에 있었고, 그 세 사람을 그곳에 던져 넣을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수 있겠느냐?'(다니3,15) 네부카드네자르의 이 말은 실상 유다인들이 믿던 하느님께 대한 도전이다. 그는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가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대적하고, 경멸하는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신'이라는 말은 분명 '하느님' 염두에 둔 말이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이라 하더라도 자기 손에서 이들 유다 사람들을 건져 낼 수 없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에 해당하는 '엘라흐'(elah)는 아람어에서 '하느님'지칭하는 단수형 명사이다.

네부카드네자르의 판단에 의하면, 그 하느님은 일전에 자신에게 꿈을 계시해 주시고 그 꿈의 모든 비밀을 명확하게 설명해주신 전지하신 신이셨지만, 자신의 권한 하에서 불가마에 떨어진 사람들을 안전하게 건져낼 능력이 없는 신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그의 판단은 부분적이었고 불완전했으므로,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권력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능력보다 더 크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만일 이 세 사람이 네부카드네자르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무능함을 시인하는 것 되고 만다. 이같은 임금의 제안이 담긴 이면의 의미를 그들이 알고 있었기에 이들 세 명의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은 목숨을 불사하고 금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극구 거부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3장 15절에서 '내 손'에 해당하는 '예다이'(yedai)는 사실상 네부카드네자르 자신의 무소불위의 능력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위치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포함한  다른 모든 신들보다 높은 최고의 신적 위치에 올려 놓고 있다. 이것은 네부카드네자르 뿐 아니라 타인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큰 업적을 이루어낸 다른 인간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교만의 함정이다. 

세상에서 크게 성공한 자는 자신의 근본과 한계를 쉽게 망각해버리고 자신의 능력이 무한한 것인 양 착각하며, 자신의 존재를 종종 신격화하려는 과대망상과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의 그러한 오만방자한 신성모독적 언사가 세 젊은이들이 소유한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가마를 여는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다니3,19) '일곱 배' 해당하는 '하드 쉬봐'(had shibah) '칠 배'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가능한 한 최상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소에 불가마(풀무불)벽돌을 굽거나 금속을 녹이는 등의 용도에 맞게 일정한 온도로 가열을 했지만, 그 날 만큼은 이러한 용도와 관계없이 온도를 극대화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일곱 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킨 세 사람이 당할 혹독한 시련의 강도를 묘사한 것이며, 동시에 네부카드네자르의 내면에 불타오르는 극한 분노가 어떤 것인지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 역시도 자기 내면조차 다스리지 못하고 도리어 분노하는 파격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는 네부카드네자르를 신격화하고, 그가 가진 권세와 권력을 통하여 그를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 생활을 할 때 다니엘의 세 동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이러한 우상 숭배를 거부하다가 불가마 속에 던져지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자르야가 불 한가운데에 우뚝서서 공의로우시고 진실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인 것이다.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다니3,38~40)  

 주 하느님을 무시하고 배반하며, 황제를 신격화하여 우상으로, 신으로 섬기고 절하라는 명령에 대하여 주 하느님께 대한 절대 신앙과 충절을 드러내고, 순교할 마음으로 불속에 던져져 죽음의 극한에서 바치는 절체절명의 기도인 것이다. 여기에는 주 하느님을 위해 장렬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죽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남의 나라 땅 바빌론에 유배와서 불가마 속에서 하느님께 남부 유다 민족이 집단적으로 저지른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물을 바칠 수도 없고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으니, 자신들을 제물로 받아달라는 기도이다. 

특히 다니엘서 3장 39절은 시편 51장 19절의 다윗의 통회 시편을 인용하고 있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민족이 저지른 죄를 참회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는 자신들의 속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아자르야는 친구들을 아니 선민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자신들은 이렇게 순교해도  좋지만, 하느님의 이름과 권위를 무시하는 저 네부카드네자르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이름과 권위가 실추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과 권위 때문에 자신들에게 수치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시고, 참된 신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아니라 하느님 당신 밖에 없음을 드러내 달라는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이다. 

아자르야의 간절한 기도, 불가마 죽음 속에서 드리는 절체절명의 기도는 하늘에 닿아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조금도 상하지 않으며, 불가마 속에서도 세 젊은이는 한목소리로 하느님을 칭송하고 영광을 드리며 찬미하고(다니3,31~90), 드디어 온전히 구제받아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증거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 아니라,  다친 곳 하나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다니3,92)


제34주간 수요일 제1독서(다니5,1~6.13~14.16~17.23~28)

"나는 그대가 신들의 영을 지녔을뿐더러, 형안과 통찰력과 빼어난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드러났다는 말을 들었다." (14)  

벨사차르는 다니엘서 5장 14절과 16절을 '나는 그대에 대해 들었다'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표현법은 과거 네부카드네차르 임금의 어법(다니4,9)이나  태후의 어법(다니5,11)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나 태후는 다니엘의 그러한 초월적인 능력을 당사자들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바를 말하였다.  

하지만 벨사차르 임금은 자신이 전해들은 사실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그가 들어서 그러한 사실을 알았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사차르는 다니엘에 대하여 풍문을 들은 듯한 표현을 거듭 사용해서 다니엘에 대한 자신의 불신을 은연 중에 나타내면서 이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앞에서 태후는 다니엘 안에 '거룩하신 신들의 영'이 있다고 말했지만(다니5,11), 여기서 벨사차르 임금은 '거룩하신'이라는 형용사를 빼버리고 다만 '신들의 영'이 있다고만 말한다. 

여기서 벨사차르 임금이 '거룩하신'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이라고 본다. '거룩하신'이라는 형용사가 문맥상 '초월적인'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인격적인 거룩한 순결, 흠없음'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사악한 벨사차르 임금이 그러한 뜻을 연상시키는 그 형용사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빼어난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드러났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네 안에 탁월한 지혜가 발견되었 ' (excellent wisdom are found in you)라는 뜻이다.  이것은 태후가 다니엘서 5장 11절에서 다니엘에 대하여 '신들의 지혜 같은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드러났습니다'고 한 말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다니엘의 지혜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그는  태후가 말한 것과 비교할 때 평가절하하여 표현하고 있다. 

한편 '빼어난'에 해당하는 '얏티라'(yathirah)는 차고 넘치는 상태를 나타내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넘치는' 또는 '탁월한'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탁월한 지혜는 보통 사람들의 지혜에 비해 비상한 지혜이기는 하지만, 신들의 지혜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으로 드러났다'에 해당하는 '히쉬테카하트 빠크'(hishythekahath bak;is found in you)는 문자적으로 '네 안에서 발견되었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표현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라는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다. 

벨사차르는 이처럼 태후가 사용한 표현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다니엘의 능력을 은연 중에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제34주간 목요일 제1독서 (다니6,12-28)

"저의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저를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서 무죄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금님, 저는 임금님께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23) 

메디아의 다리우스 임금은 밤새 잠 한 숨 못자고 단식하면서 기도하다가 동이 트기도 전, 어두움이 가시기 시작할 때 채비를 갖추고 급히 사자 굴로 달려갔다. 다니엘서 6장 14절, 16절, 18절에 이어지는 19절의 다리우스 임금에 대한 묘사는 다리우스 임금이 다니엘을 얼마나 극진히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죄인이 당연히 죽음이 예견되는 형벌을 당하면서도 밤을 지나 아침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그 사람은 사면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고 한다. 

다니엘서 6장 20절'새벽에 날이 밝자마자'에서 '새벽에'에 해당하는 '삐쉬파르파라'(bishiparpara)동녘에 해가 뜨기도 전 어두움이 가시기 시작하는 가장 이른 새벽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즉 다리우스 임금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꺼낼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간에 사자 굴에 찾아간 것이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안했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하느님께서 다니엘을 구원하셨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함을 가지고 발걸음을 서둘러서 사자 굴을 찾아갔을 것이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무려 8시간 이상 있으면서도 몸 하나 상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 나온 이 사건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설화라고 주장하는 비평론자들은 다니엘서가 B.C.2세기에 다니엘의 이름을 차용한 익명의 저자에 의해 서술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다니엘의 사자 굴 사건은 B.C.2세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치하에서 혹독하게 박해를 당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과 구원을 생생하게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고안한 문학적 창작이라고 주장한다. 비평론자들은 인간의 상식과 과학적 기준에 맞지 않는 기적적 사건들을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니엘의 사자 굴 사건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니엘이 사자 굴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학자들 가운데 다니엘이 사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이유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다. 전날 저녁에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기 전에 다리우스 임금이 비밀리에 여러 마리의 사자들을 배불리 먹였기 때문에 그 사자들이 배가 고프지 않아 다니엘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다리우스 임금은 다니엘을 살리기 위해 고민하던 전날 점심때부터 저녁 해 질 때까지 그런 술수를 시도할 여력조차 없었으며, 오직 다니엘을 살릴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을지에 대해서만 몰두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런 술수를 동원했다면, 그가 다니엘로 말미암아 그처럼 슬퍼하고 한 숨도 자지않으며 단식하고 새벽에 급히 나가 다니엘의 하느님을 들먹이며 그 하느님이 구원해 주었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다니엘을 고발한 자들이 그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에 그 사자들은 그들의 뼈를 모조리 부주어 먹어버렸다. 다니엘을 고발한 자들이 던져진 시간과 다니엘이 사자 굴 밖으로 나온 시간의 차이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이에 사자들이 갑자가 배가 고파졌을 리도 만무한다. 사자들은 다니엘이 굴 속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물지도 심지어 발톱으로 할퀴지도 않았다.  이것은 다니엘이 설명한대로 하느님께서 다니엘이 사자 굴안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천사를 보내어 그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33절에는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서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은' 조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다니엘이 그 사람이었으며,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도 해를 당하지 않고  살아 남은 사건은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을 인정하는 믿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천사를'에 해당하는 '말라케흐'(mallakeh; his angel)는 단수형으로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한 천사를 의미한다. 그 천사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사자 굴 안으로 보내졌는지, 아니면 비가시적 형태로 단지 영적 상태로만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유사한 예를 통해 당시 상황을 추정할 수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에 들어갔을 때, 밖에서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결박되지 않은 네 번째 사람을 보았고, 그 형상은 신의 아들과 같았다(다니3,92). 

만일 다니엘이 말한 천사가 그런 존재였거나 유사한 존재였다면, 다니엘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 형태로 그 사자 굴 안에 있었을 것이다. 사자들이 감히 그 천사를 건드릴 수 없었다는 것은 그 천사가 신적인 존재 또는 초월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 천사는 하느님에 의해 특별히 파견되었으며, 다니엘이 사자 굴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사자들의 입을 막아 놓았다. '입을 막으셨으므로'에 해당하는 '우싸가르 품'(usagar pum)문자적으로 '입을 닫아 버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천사가 손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았다기보다 천사의 초월적이고 신비한 능력을 통해 사자들이 다니엘에 대해 전혀 식욕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다니엘에 대한 두려움을  품게 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천사를 통해 사자들의 입을 막으신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전부 다 이해될 수 없는 분이시다(로마11,33; 신명29,29참조). 

한편 다니엘은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신 것이 두 가지 이유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는 다니엘이 하느님 대전에 무죄하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다니엘이 다리우스 임금에게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그분 앞에서'에 해당하는 '카다모히'(qadamohi; before Him)'하느님 앞'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나의 무죄함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어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 대전에 의롭게 살아가는 신실한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여 주신다고 하는 다니엘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로 인간 임금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다니엘을 보호하는 것에 실패하였지만,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의롭게 사는 다니엘을 구원하시는 데에 결코 실패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신실하기 위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다니엘을 구원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살아계심과 다니엘의 의로움이라는 양면을 임금과 여러 고발자들 앞에서 분명히 입증하셨다.

 

 제34주간 금요일 제1독서 (다니7,2ㄴ-14)

"다니엘이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불어오는 네 바람이 큰 바다를 휘저었다.  그러자 서로 모양이 다른 거대한 짐승 네 마리가 바다에서 올라왔다."  (2-3) 

다니엘서 7장 1절은 벨사차르 제일년에 받은 일련의 환시에 대한 진술을 시작하는 말이다. 다니엘은 앞선 1절에서 밤에 꿈을 꾸고 환시를 보았다는 진술을 했기 때문에, 다니엘서 7장 2절에서 굳이 또다시 자신이 밤에 환시를 보았다는 진술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다니엘이 이렇게 중복 진술하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환시를 본 사실이 분명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새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으나, 원문은 '그런데 보라!' 라는 의미의 감탄사 '와아루'(waaru)로 시작하여 환시의 내용이 매우 주목할 만 것임을 강조했다. 그 다음에는 다니엘이 본 환시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술된다.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서 맨 처음 본 광경은 하늘 사방에서 불어온 바람이 큰 바다를 휘젓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하늘이 네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그 바람에 대조되는 바다가 나온다. 하늘을 기원으로 하여 사방에서 불어오는 이 바람에 대하여 하느님의 심판으로 보는 입장이 있고, 인간 역사에 끊임없이 개입하여 왕권을 세우고 폐하기를 반복하는 하느님의 주권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이 가운데 후자의 입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여기서 '불어오는'에 해당하는 '메기한'(megihan)이 능동태 분사형 단어로서 지속적인 활동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한편, '큰 바다를'에 해당하는 '레암마 랍바'(leamma rabba)는 문자적으로는 '큰 바다로' 혹은 '큰 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성경에서 '바다'는 하느님의 주권을 대항하면서 싸우는 악한 영적 세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많이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바다를 질타하시며(시편18,16), 바다를 꾸짖어 말려 버리시고(나훔1,4), 바다를 짓밟으시며(하바꾹3,15), 바다 괴물과 싸우신다(이사27,1). 그리고 사악한 자들은 포효하는 바다와 같다고 묘사된다(이사17,12.13). 

이러한 성경적 예들을 고려할 때, 여기의 바다는 하느님의 주권적 통치를 싫어하는 불신 세상의 세력, 혹은 세상의 왕국들의 배후에 역사하는 강력한 사탄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우기 세상의 거대한 왕국들을 상징하는 네 마리의 짐승들이 이 바다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이 바다가 세상 왕국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 

다니엘은 환시 가운데 거대한 짐승 네마리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다. 여기서 '거대한'에 해당하는 '라브레반'(rabreban ;great)다니엘서 7장 2절'바다'를 수식하는 '큰'에 해당하는 '랍바'(rabba)와는 다른 단어로서, 크기가 매우 거대하면서 기세와 힘이 엄청난 상태를 묘사한다. 그리고 '올라왔다'에 해당하는 '쌀레칸'(salleqan)은 '올라오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쎌리크'(seliq)의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거대한 짐승들이 바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다니엘은 7장 17절에서  '그 거대한 네 마리 짐승을 이 세상에 일어날 네 임금' 이라고 해석한다. 대부분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들이 다니엘서 2장의 꿈에 나오는 머리, 가슴/팔, 배/넓적다리, 아랫다리/발 등이 상징하는 바빌론, 메디아, 페르시아 연합국, 그리스, 로마 제국과 상등하는 것으로 본다. 하느님께서 세상 나라들을 그렇게 무시무시한 짐승들의 환시로 계시하신 것은 그 나라들이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 약소국들과 약한 자들을 향해 극악무도한 폭정과 착취를 일삼을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로 모양이 다른'에 해당하는 '샤네얀'(shaneyan)'바꾸다', '변경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셰냐'(shena)의 능동태 분사형이다. 이것은 그 짐승들이 모양, 크기, 성질, 속성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짐승들이 상징하는 상기의 나라들은 그 규모와 힘과 문화과 종교와 성격에 있어서 모두 다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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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천사 축일 제1독서 (다니7,9-10.13-14)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다니엘서 7장 9절부터 14절까지는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광경가운데 두번째 장면으로서 다니엘서 7장 2~8절의 벨사차르 제일년(원년)에서 보았던, 바다에서 나온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닌 큰 네 짐승의 환시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네 마리의 각각 다른 짐승들이 온 세상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 세상은 하늘에서 그 옥좌를 두고 앉아계신 하느님에 의해 심판되며, 사람의 아들(인자)같은 분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나라를 부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다니엘이 본장에서 본 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 및 그분의 궁극적인 심판과 승리를 예언하는 다니엘서 2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첫번째 꿈과 다니엘서 4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두번째 꿈과 그 기조를 같이하는 환시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은 이와같은 꿈의 내용을 성경에 기록함으로써, 당시 바빌론 벨사차르 왕의 통치하에서 현재와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고 있던 하느님의 백성에게 희망을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는 그 짐승같은 인간 통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진정한 통치자는 하느님 이시라는 사실 및 하느님께서는 언젠가는 당신 백성들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권세와 나라를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어두운 세상의 권력 하에 살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은 힘과 용기를 내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고, 하루하루를 승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옥좌들이 배치될 때까지 나는 응시하고 있었다'(I kept looking until thrones were set up)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놓이고'로 번역된 '레미우'(remiu)의 원형 '레미'(remi)'던지다', '배치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앞의 짐승들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옥좌가 던짐을 당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심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옥좌가 새롭게 배치된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제 짐승들의  때 특히 마지막으로 일어난 작은 뿔의 시대는 지나갔고,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것이다. 하늘의 영들은 하느님께서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앉으시도록 하느님의 옥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다니엘은 바로 그러한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옥좌'에 해당하는 '코르싸완'(korsawan)은 원형 '카레쎄'(karese)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옥좌'에 앉으시는 재판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따라서 수(number)가 호응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본문의 복수형은 문자 그대로 '옥좌'가 여러 개 있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높고 영광스러운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장엄 복수형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의 복수형 '옥좌'에 대한 타당한 해석을 정리해 보면, 이처럼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거나, 삼위일체 하느님 위격 각자가 동등한 심판자의 자격으로 앉을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 하느님의 우편에 인자같은 이가 동등한 자격으로 앉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마태26,64; 다니7,13), 하느님의 성도들이 심판자의 자격으로 하느님 곁의 어좌에 앉아 심판할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일 수 있다(묵시20,4).  

그런데 이어지는 문맥만을 고려한다면,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날들의 고대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and the Ancient of Days took his seat)라는 의미로 거의 대부분 영역본들이 번역되었고, 어떤 것의 경우는 '가장 존경할 만한 한 분이 좌정하셨다'(one most venerable took his seat)의역하였다. 

그렇다면 '날들의 고대'(the  Ancient of Days)란 표현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일차적으로 너무나 오래 되어서 측량하기 어려운 긴 시기를 나타내며, 이차적으로는 하느님의 영원성(eternity;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영원 존재성)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연로하신 분'(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은 세상의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성부 하느님(God the Father)만을 단독으로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원래부터 하늘의 옥좌에 앉아 계시지만, 이제는 특별히 세상 왕국들 및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심판의 옥좌에 좌정하신 것이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마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께서는 흰 옷을 입고 계셨고, 머리카락 역시 흰 색이었다. '그분의 옷'에 해당하는 '레부셰흐'(lebusheh)의 원형 '레부쉬'(lebush)는 어원적으로 예복이나 긴 겉옷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느님의 옷이 마치 흰눈(white snow)처럼 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도덕적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둘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셋째는 하느님의 풍성한 앎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 

요한 묵시록에서 큰 환난을 겪어 내어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 역시 흰 옷을 입은  모습으로 제시되는데,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7,13~14). 만약 이들의 흰 옷이 그들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을 강조한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눈처럼 흰 옷 역시 그분의 거룩하심, 순결하심, 순수하심, 온전하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묘사된다. 양털처럼 흰(깨끗한) 하느님의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이해와 결부해 볼 때  하느님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서에 백발은 노인의 영광의 상징으로 나오며(잠언16,31; 20,29), 요한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털도 희기는 눈과 같고 양털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묵시1,14). 

이상의 의미를 종합하면, 본문은 하느님께서 존재론적으로 영원무궁하시고, 도덕적으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온전하시어 죄에서 완전히 떠나 계신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다니엘의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옥좌는 화염으로 휩싸여 있거나 화염 그 자체였다.  그 옥좌에는 여러개의  바퀴들이 있는데, 그 바퀴들 역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이거나 또는 그러한 불로 휩싸여 있었다.

이와같은 영상은 의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엄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이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휩싸여 계신다고 말한다(1티모6,16;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다니엘이 본 그 불꽃 혹은 이글거리는 화염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태우는 불이라기 보다는, 악인들을 심판하는 심판의 두려움을 자아내고, 하느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동반된 여러 현상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러한 화염이었다(탈출19,18).

또한 에제키엘이 환시가운데 본 하느님의 임재 및 그분의 옥좌 역시 불꽃으로 휩싸여 있었고, 또 그 옥좌에 여러 개의 바퀴들이 달려 있었다(에제1장). 하느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하늘로 끌어 올리실 때에도 불 병거와 불 말들을 사용하셨다(2열왕2,11).

다니엘이 후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본 환시 속의 한 분은 그 분이 횃불처럼 생겼고, 그 팔과 다리는 광을 낸 청동 같았으며(다니10,6),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역시 그의 눈이 불꽃같고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같이 생겼다(묵시1,14.15). 

다니엘서 10장과 요한 묵시록 1장의 주체는 성자 하느님을 묘사한 것이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와 성부와 동일한 본체이시며 동일한 영광과 위엄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철저히 불꽃에 둘러싸인 분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하느님의 위엄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장엄한 것인지, 죄스런 인간이 가까이할 수 없는 그의 거룩한 영광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면모 앞에 사람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두려움과 떨림 외에 어떤 태도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0)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의 옥좌에서는 이글거리는 불이 마치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본문에서 '뿜어 나왔다', '퍼져 나왔다'에 해당하는 '나게드 웨나페크'(naged wenaphek)두 단어 모두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이 하느님의 옥좌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모습을 강조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지속성을 임시한다.

또한 '그분 앞에서'라는 표현은 불꽃이 하느님의 몸 속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좌정해 계시는 그 옥좌로부터 나온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 흘러나오는 불의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니엘은 마치 강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이렇게 흘러나오는 심판으로서의 불은 세상 나라들 특히 작은 뿔이 상징하는 적 그리스도를 심판하는 불이다. 이 불은 적 그리스도를 포함한 모든 악한 세력들에 대한 심판이 끝날 때까지 하느님의 옥좌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올 것이다.  

한편 '백만'과 '억만'에 해당하는 '엘레프 알르파임'(elep allpaim)'립보 랍베완'(ribbo rabbewan)은 고대 세계에서 형언할 수 조차 없는 많은 숫자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를 나타내는 데 이처럼 헤아릴수 조차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들고 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그 명령을 수행하는 소임을 맡은 존재들이다. 이 문맥에서는 특히 심판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대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문에서 '그분을 시중드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 '예샴메슌네흐'(yeshameshunneh)문자적으로 '그들이(백만) 그분을 시중들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이곳밖에 사용되지 않지만, 문맥상 수많은 천사들이 하느님을 시중들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본문에서 '모시고 선'에 해당하는 '예쿠문'(yequmun)은 문자적으로 '그들이(억만) 모시고 서 있다'라는 의미이다. 

천사들은 하느님과 나란히 옥좌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옥좌 곁에 서 있으면서 하느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동시에 그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숫자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위엄을 드높여 줌과 아울러 하느님의 권세와 능력, 그리고 그분의 역사하심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고 광대무변함을 암시한다.

한편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면서 책들이 펼쳐진다. '책들'에 해당하는 '씨프린'(siprin)은 어원상 '기록하다', '계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싸파르'(sapar)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펼쳐져 놓인 이 책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말들이 다 기록되어 있는 책이며,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책이다. 모세는 이 생명책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탈출32,32), 사도 요한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말하였다(묵시21,27). 또한 사도 요한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책으로서 그들의 행위가 기록된 책을 언급한다(묵시20,12). 

본 문맥에서는 이 두가지의 책 가운데서 행위를 기록한 책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심판이 행위를 기록한 책에 근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심판이 절대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매우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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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다니9,4ㄴ~10)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9~10) 

선민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다니엘이 바빌론 유배를 초래한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하여 3가지 단락으로 회개하는 내용이 다니엘서 9장 5~15절에 나온다. 그 가운데 첫번째 단락인 다니엘서 9장 5~8절에서는 바빌론 유배가 하느님의 공의(公義)와 심판의 실현으로 이루어졌음을 회상하며 회개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제 다니엘서 9장 9~12절 모세 율법에 규정된 내용이 실현되어 이루어졌음을 회상하며 회개하는 내용이다. 

다니엘서 9장 9절의 '그러나'로 번역된 접속사 '키'(ki)'~에도 불구하고'라는 양보의 의미로 번역하여야 한다. 즉 다니엘서 9장 9절은 하느님께서 크나큰  자비와 용서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선민 이스라엘이 주님께 크나큰 거역을 저질렀음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다니엘서 9장 9절에서 하느님의 속성 내지는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처신으로 소개되고 있는 '자비와 용서를 베푸심'에 해당하는 '하라하밈 웨핫쎌리호트'(harahamim wehassellihoth)둘 다 복수형 명사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정도를 매우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느님의 자비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고 그분의 용서하심이 매우 풍성하다는 사실을 이중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특히 '자비'에 해당하는 '하라하밈'(harahamim)의 원형 '라함'(raham)본래 어머니의 자궁(womb) 혹은 사람의 내장(bowel)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어머니가 자기 자녀에게 대해 나타내는 강력한 사랑의 감정과 이에 수반하는 행동을 나타낸다. 이처럼 선민 이스라엘에 대해 하느님께서 뜨거운 사랑의 마음, 자비의 심정을 품으셨기에, 이스라엘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다. 

사실 다니엘이 이것을 진술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도 불구하고 범죄와 거역을 자행하는 이스라엘의 죄상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진술은 이처럼 하느님을 거역한 이스라엘이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외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니엘서 9장 10절과 11절의 내용 기본적으로 9장 5절, 6절의 진술 유사하며, 선민 이스라엘이 주님께 대하여 크나큰 범죄를 자행했음을 자백하는 기도이다. 다니엘서 9장 10절의 '듣지 않고'에 해당하는 '웰로 사마으누'(wello samahnu)'그리고 저희가 결코 듣지 않았습니다'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특히 '저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번역된 '뻬콜 예호와'(beqol yehowa)'주님의 목소리'로 번역되고, 이 표현은 선민 이스라엘이 단순히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태도 뿐만 아니라 아예 하느님의 말씀 자체를 싫어하는 태도를 취했음을 나타낸다.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주님의 종 예언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전파한 말씀뿐 아니라 (다니9,6) 하느님께서 그들의 손을 의탁하여 이스라엘 앞에 내놓으신 율법까지(다니9,10) 선민 이스라엘이 듣지 않고 행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주님께서 ~(부탁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에 해당하는 '나탄 레파네누'(nathan lepanenu)는 문자적으로 '그가 우리 앞에 주신'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처음 율법이 부여된 모세 시대에 관한 회상이 아니라 이미 부여된 그 율법들이 각각의 시대마다, 세대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통해 생생하게 선민 이스라엘에게 다시 각성되고, 그것에 대한 이행이 지속적으로 촉구되었음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본문에서 '법에 따라'에 해당하는 '뻬토로타이우'(bethorothaiu)의 원형 '토라'(thora)는 가르치는 행위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을 말한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십계명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규정들과 법령들 및 율법의 구체적인 조항들을 포함한다.

제33주일 평신도 주일 제1독서 (다니12,1-3)

"그때에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구원을 받으리라."(1)

다니엘서히브리서로 쓰여진 부분이 12장으로 끝난다. 다니엘서 12장은 그 중에서 후반부인 7-12장에 기록되어 있는, 다니엘이 직접 경험한 네 가지 환시 가운데 마지막 네번째 환시인 10-12장의 마무리 부분이다. 

본장은 다니엘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삼년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보았던 일련의 환시의 연속 부분이다. 그런데 앞선 10-11장에서는 페르시아 초기 네 임금과 그리스 왕국의 성립과 분열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와 관련된 예언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12장에서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대환난죽은 자의 부활과 심판 및 구원에 대한 신비직접적으로 계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때에'로 번역된 '우바에트 하히'(ubaeth hahi ; at that time)는 본장이 직접적으로  11장 36-45절의 내용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학자들은 B.C. 2 C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의 박해 말기에 국한된 예언이라고 해석하지만, 1-3절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때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2장의 주제 역시 다니엘서의 큰 주제와 병행한다. 다니엘서 전체에서 이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는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강력하게 제시되는데, 본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록 세상은 악한 통치자가 다스리고 있고, 그 통치하에서 하느님의 의로운 백성들은 고난을 당하지만, 이들 통치자들에 대한 절대적 주권은 궁극적으로 주 하느님께서 쥐고 계신다.

따라서 언젠가 하느님께서는 역사에 개입하셔서, 악한 통치자를 심판하시고, 신실함을 지킨 의로운 백성에게 큰 보상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제가 다니엘서 전체를 통해 면면히 흐르고 있는데, 본장에서는 종말의 때에도 이러한 일이 있을 것임을 예언한다.

즉 전례를 찾아볼 수 없던 큰 재앙이 있을 것이지만(1절),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며(1절), 악한 자들은 영원한 치욕을 당할 것이다.(2절)

이러한 메시지는 고난과 핍박의 환경 가운데 살아가던 다니엘 당시의 하느님의 백성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 모두에게 큰 희망을 줄 것이며, 그들 모두로 하여금 인내하며 최후 승리의 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격려한다.

한편 본문에서는 종말의 때에 대제후(the great prince) 미카엘이 나설 것이 예언된다. 미카엘이 특히 선민을 위해 싸우는 천사로 소개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네 백성의 보호자'에 해당하는 '하오메드 알 빼네 암메카'(haomed al bene ammeka ; who protects your people)는 문자적으로 '네 백성의 자손들 편에 서는 자'(who is standing up for the sons of my people)라는 의미이다.

다니엘서 10장 13절과 21절에도 나오지만, 세상 나라 페르시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탄, 가브리엘 천사를 21일 동안 막았던 악한 영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싸우는 천사가 바로 미카엘 천사이다. 본문에서 미카엘의 역할 역시 이스라엘 백성 편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소개된다. 그때에 미카엘은 주권자 주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일어날 것이다.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나라가 생긴 이래'로 번역된 '미헤요트 꼬이'(miheyoth goy)에서 '꼬이'(goy)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이방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로 많이 사용된다(창세10,5; 26,4).

본문에서는 정관사없이 단수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이것은 어떤 한 민족(a nation)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고, 어느 민족이든지 관계없이 보편적인 민족(any nation; nations)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전자일 경우는 선민일 것이지만, 후자일 경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민족일 것이다. 보통 학자들 가운데는 후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재앙과 유사한 재난에 대해 예언하시는 예수님의 올리브 산 설교 가운데 있는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고 결코 없을 것이다'는 표현(마태24,21)과 더불어 그 환난이 세상 모든 곳에 걸쳐 나타날 것임을 증언한 사실을 고려할 때,  본문의 '꼬이'(goy)는 단순히 선민만을 제한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보편적으로 포괄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환난은 선민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민족들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대 환난(the great tribulation)이 될 것이다.  그 환난의 고통은 너무나 커서, 하느님께서 그 환난의 날수를 줄여 주지 않으시면, 구원받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마태24,22).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구원을 받으리라.' 본문에서 '그때에' 문맥상 종말의 대환난이 끝나는 때를 지칭한다. 그때는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서는 간접적으로 드러나지만, 2절에서는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네 백성(중) 책에 쓰인 이들'이란 표현은 간접적으로 '책에 기록되지 않은 백성'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구원은 오직 '그 책에 쓰인 백성' 에게만 주어진다. 여기에서 '그 책'(빳 쎄페르; basepher ; in the book)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구속함을 받은 자들의 명단이 기록된 생명책이다(묵시록20,15; 21,27).

그런데 '그 책에 쓰인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지금까지 다니엘은 시종일관 선민과 관련된 예언을 했기 때문에, 본문의 '네 백성'(암메카;ammeka; your people) 역시 선민을 우선적으로 지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구원사적 측면에서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묵시21,27) 여기의 '네 백성'은 보다 포괄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된 신실한 모든 그리스도인들까지 다 포함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다니13,1~9.15~17.19~30.33~62)

"수산나는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 (44~45)

"그러자 온 회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다니엘이 그 두원로에게, 자기들이 거짓 증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저희 입으로 입증하게 하였으므로, 온 회중은 그들에게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이웃을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낸 그 방식대로 그들을 처리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에 무죄한 이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 (60~62) 

 다니엘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1~6장)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빌론과 메디아 왕궁에서 겪는 공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둘째 부분(7~12장)은 다니엘이 혼자 환시를 보는 사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부분(13~14장)은 13장의 '수산나 이야기'와 14장의 '벨 신상과 큰 뱀 이야기'다. 이것은 그리스어 성경에만 나오는 내용이며, 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여 나오지 않는다. 이 세 이야기는 다니엘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했다는 공통분모 때문에 그리스어 성경 다니엘서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다니엘서 13장은 정숙한 한 유다 여인 수산나가 욕정에 눈이 어두운 두 원로의 모함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다니엘 예언자의 지혜로 구출된 이야기다. 수산나는 무죄하면서 고통받는 사람이다.

신앙심이 깊고 아름다운 여인인 수산나가 음욕을 품고 탐하려 한 재판관인 두 원로의 거짓 증언에 의하여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는 명망을 짓밟혔고 간통죄로 사형을 받을 뻔하였다. 그가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원로들의 음욕에 동조하는 대신 '주님 앞에 죄를 짓느니'(23) 하느님의 정의를 확고히 신뢰한다.원로들이 법정에서 수산나를 거짓 고발하자 수산나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우러러 본다(35). 

두 원로는 자신의 욕심이 실패하자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수산나를 사형에 처하게 한다.수산나는 사형이 선고되었을 때에도 하느님께 기도하며 다시 한번 자신의 무죄를 확인한다(42~43). 그러자 주님께서는 다니엘 예언자를 통해서 진실을 밝히시고 수산나를 구해 내신다.

이 이야기에서 완전한 전환점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수산나의 외침에 응답하는 데서 비롯된다.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셨다.'(44) 그리고 다니엘은 수산나의 결백을 입증하고 그를 죽음에서 구하여 가족에게 돌아가게 하는 도구로 드러난다. 

수산나의 이야기는 고통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가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다니엘이 받은 지혜의 은사를 이용하신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여기서 저자는 이교도들의 땅 바빌론에서도 모세의 율법은 지켜야 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율법에 충실한 의인들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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