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서(제1독서)

2015. 10. 20. 오후 1: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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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서(제1독서)

햇살맑은 가을날 오후 코스모스길따라 황금들녁 걷기

제32주간 월요일(지혜1,1-7)

1)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4) 간악한 영혼은 착하지도 순수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권능을 시험하거나 비뚤어진 생각을 가진 자, 하느님을 불신하는 자인 것 같다.(1,1-3참조) 동시에 4절을 보면, 죄짓는 자를 말한다.

요한 복음 1장 4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aletos)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dolos)"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희랍어 돌로스(dolos)란 단어는 영어로 guile(가일),subtility(서틸러티), deceit(디시트)로 번역되는데, 교활<狡猾-간사(奸邪)하고 음흉하다>, 엉큼, 간교, 기만, 책략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타나엘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안에 갈고랑이같은 낚시바늘이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것을 좋아하시고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2) 지혜는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으로 계시된다.(5) 그 영은 진실만을 찾으며, 어리석거나 둔하거나 융통성이 없지 않고, 정의만을 추구한다. 

3) 지혜는 <다정(多情)한 영>이지만, 신성을 모독하는 자를 내버려두지 않고 책임을 물으신다.  

4) 지혜는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으로 계시된다.  이것은 아니 계시는 데 없이 곳곳이 다 계신 편재성(遍在性)과 무량(無量: Infinitas,ubiquitas)을 드러내며, 동시에 모르는 것이 없이 사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시는 전지(全知:omniscientia) 를 말한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모두에게 순수한 진실하고 정의로운 마음을 주소서. 오소서! 성령님! 저희 모두에게 주님께 대한 두렵고 떨리는 외경심과 사랑도 허락하소서.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지혜2,1ㄱ.12~22)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런 죽음을 내리자."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18~22) 

지혜서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고, 칠십인역(LXX; Septuaginta; 희랍어로 쓰여진 구약 성경)에만 나오므로 제2경전(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한다. 제2경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어(희랍어; 헬라어)로 저작된 책 지혜서와 마카베오 2권뿐이다. 지혜서의 저작 연대는 B.C. 50~3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이 쓴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 사상가인 필로에 의하면, A.D.1세기 초에 이집트에는 100만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한다. 좀 과장된 숫자이겠지만, 이집트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다 백성들; 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대린 교포들이 사는 곳을 말함)유대인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것이 분명하다.

지혜서는 철학, 윤리, 신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된 갖가지 주제들을 다룬 소품 모음집이다. 저자의 집필 목적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헬레니즘 문화가 압도하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와 그 부근에 살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유대교의 정통교리를 다른 문화에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토착화(Inculturation)작업의 일환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혜서 저자는 유대교 전통을 거의 모르는 그리스인들과 저자 자신처럼 히브리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헬레니즘에 익숙한 유다인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사상과 비교하여 유대교 관습과 사상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헬레니즘에서 기원한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적 인생관에 맞서서 유대교의 전통적 믿음과 교리를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

지혜서는 크게 세 부분, 종말의 숙고(1~5장), 지혜의 찬가(6~9장), 역사의 숙고(10~19장)로 나눈다. 첫째 종말의 숙고(1~5장)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전지(全知)하심을 강조한다. 둘째 지혜의 찬가(6~9장)에서 임금과 권력자들에게 하는 권고, 지혜서 7장 22~23절에 나오는 지혜의 정신에 담긴 정신의 특성 21가지(완전을 뜻하는 7의 3배수; 매우 완전한 숫자), 지혜를 청하는 기도(9장)등이 나온다. 마지막 세째 부분(10~19장)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지혜서10장에서는 원조들과 성조들의 이야기, 10장 15절~11장 20절에는 이집트 탈출 사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높이 기리는 찬미가(11,26; 구원의 보편주의), 가나안 정복, 자연, 우상, 동물 숭배의 어리석음(13~15장),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에서의 시련(16~19장)을 두서없이 열거한다. 

지혜서에는 특히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돋보이는데 '의인들의 불사 불멸'과 '지혜의 의인화'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의롭게 살고도 현세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의인들은 비록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어 죽은 다음에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서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죽은 의인의 부활이 아니라 의로운 영혼의 불사불멸이다. 

한편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혜'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요한 복음의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인격적 지혜'를 성령이나 성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시도이지만 어쨌든 지혜서에서 신약성경의 삼위일체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던지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하느님께서 전지(全知)하시고 전선(全善)하시고 전능(全能)하신데, 왜 이 세상에 악(惡)이 범람하는가? 전선(全善)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왜 악(惡)을 허락(허용)하시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참으로 법(法)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분이 너무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당하고,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으로 일찍 죽는지? 하는 것이다. 

동시에 끊임없이 나쁘고 못된 짓을 하며,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 (唯我獨存)처럼 살아 천벌(天罰)을 받아 마땅한 놈이 너무나 현세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잘되는 것을 보면, 신(神)은 과연 계시는가? 도대체 신(神)의 공의(公義), 정의(正義)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던지면서 불신앙과 회의를 품게 된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소위 신정론(神正論)이라 일컬었다. 

일찌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다 더 큰 善을 위해서, 보다 더 큰 惡을 예방하기 위해서' 전지(全知)하시고 전선(全善)하신 하느님께서 악(惡)을 허락하신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攝理)안에서 고찰할 것을 설파했다. 

오늘 지혜서 2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신정론(神正論)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지혜서 3장이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永遠; eternity)에 비교하면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점(點)에 지나지 않고, 잠깐 지나가는 이승의 삶을 마치면 반드시 심판이 있고, 그때에는 종말론적 자리바꿈(자리 전도)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공의(公義)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지상에서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 세워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당신의 말씀과 계명에 충실한 이들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상급을 반드시 주시며 의로운 영혼은 결코 불사불멸하지 않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선행에는 상급을 내려 주시고, 악행에는 벌을 주시는 공의(公義)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불의하고 죄짓고 자신이 신(神)이 되어 안하무인(眼下無人; overbearance)으로 이승에서 맘대로 산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영원한 심판과 지옥벌로 갚아 주시어 당신의 의(義)를 바로 세우시며, 당신의 생명의 말씀이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하시고, 당신이 천상천하(天上天下)의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잠깐 살다가 육신 생명을 마치지만, 불의와 불법, 거짓과 오류, 무지와 폭력에 맞서서 하느님의 진리와 의(義)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순교를 통해 그 목숨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 순교자들처럼,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불의와 절망과 억울한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천국의 영원한 복락과 내세(來世)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성으로는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고문과 박해와 죽음 속에서도, 믿음을 가진 의인들은 내세(來世)의 영원한 복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자에게 약속된 선물과, 하느님을 지복지관(至福直觀)하며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축복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연중 제32주간화요일  제1독서 (지혜2,23-3,9)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3,1-4) 

지혜서 2장 21-24절 불멸성의 중요성악인들의 그릇된 생각을 모두 강조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셨다(지혜2,23).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단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다(창세 3장 참조). 불멸성 또는 하느님께 사는 영원한 생명"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이며,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 이다(지혜2,22). 이것은 하느님께서 의인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악인은 이런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제 지혜서 3장 1-12절까지는 의인의 운명과 악인의 운명 사이의 대조가 계속된다. 악인이 죽음을 인간 실존의 끝으로 상상한다 할지라도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지혜3,1)는 확신에 근거한다.  사악한 물질주의자들은 의인이 고통, 죽음의 말로, 파멸과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의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3,4). 의인들이 견뎌 내는 고통은 시험이었다(지혜3,5-6).

의인들은 죽은 뒤에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그들은 빛을 내고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지혜3,7). 그들은 하느님께서 지배하시는 영역에 들게 되고,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고 하느님의 자비와 자비로운 돌보심을 받는다. 

이런 묘사(다니엘12,1-3참조)는 불멸성의 특성이 선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부활과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지혜서 3장 7절'찾아 오신다'는 단어는  최후의 심판을 가리키거나 적어도 의인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 개입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지혜서에서 계속 발전시키는 불사의 희망은 도덕적이고 신학적으로 큰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활동에 목적과 방향을 준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은 올바르게 산 데 대한 보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무죄하게 고통받는 문제에 해결책을 제공한다. 

하느님의 정의는 죽는 순간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까지 늦추어진다. 의인들이 현재 겪는 고통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덕을 시험하시는 것이며 그들이 올바로 살도록 이끌어 주는 훈육의 원천이다.


 

위령의 날 셋째 미사 제1독서(지혜4,7~15)

"의인은 때 이르게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앤 세월을 채운 셈이다." (8.9.13) 

의인이 받을 상으로서 장수의 은혜를 상으로 받는다는 것십계명 (탈출 20,12; 신명5,16; 에페6,2~3), 그 밖의 곳(집회1,12)에 나타나 있다. 

이 세째 부분(지혜4,7~19)은 축복받아야 할 의인이것과는 달리 요절한 경우를 고찰한 것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구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이 난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대답한다. 

1) 인생의 참된 영예는 덕에 있으며 장수는 아니다(7~9절). 

2) 이 세상에서 타락의 위험에 빠지지 않은 깨끗한 상태에서 덕을 갖춘 채    빨리 죽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이다(10~15절). 

3) 변명할 필요없는 생활을 한 단명의 의인은 장수한 악인을 꾸짖고, 의인의 단명을 비웃은 악인은 언젠가는 하느님의 조소거리가 된다(16~19절).    


연중32주간수요일  제1독서 (지혜 6,1-11)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  만물의 주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누가 위대하다고 하여 어려워하지도 않으신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그러나 세력가들은 엄정하게 심리하신다.  그러니 군주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6-9)

지혜서 6-9장은 전체 지혜서의 2부에 해당되며,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그리고 지혜서 6장 1-11절시작 권면으로서 세상 임금들에게 주는 말씀이다. 이 책이 세상의 임금들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지혜1,1-15참조) 제1부 '정의와 불멸성'(지혜1-5장)에 관한 가르침을 마무리하고, 이어지는 "지혜"에 관한 제2부 가르침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불법과 악행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주의를 기울일 것을 임금들에게 호소한 뒤에 (지혜6,1-2; 5,23참조), 저자는 그들에게 권력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엄격한 심판을 요구할 것임을 상기시킨다(지혜6,3-8). 

통치자들은 자기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 통치자들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들을 엄정하게 심리하신다. 하느님께서 통치자들을 엄하게 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지혜서 6장 9-11절에서 그들이 지혜를 배우도록 초대하신다. 

항상 그렇듯이 지혜서에서 가르치는 지혜는 올바른 삶과 거룩함과 연결되어 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지혜6,10).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지혜의 본성에 관한 본격적인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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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주일 제1독서(지혜 6,12-16)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혜>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요한 복음의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인격적 지혜>를 성령이나 성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시도이지만,어쨌든 신약성경의 삼위일체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말>을 할때 먼저 <생각>을 한다. <생각>한 것이 말(언어)로 표출된다. 그러니까 <생각>은 <내적 언어>이다. 우리는 이것을 <지혜>라 부르고, 그것이 밖으로 표출된 것을 <말씀>이라고 부른다. 앞에서도 서술했지만, 우리가 성급하게 <인격적 지혜>를 <성령 하느님>이나, <육화된 말씀>이신 <성자 하느님>으로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어렴풋이 성삼의 신비가 드러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6,14) 

이 말씀은 새벽기도의 중요성을 이야기 할 때에도 인용했던 말씀이다. 새벽에 일찍일어나 말씀을 읽고 감사기도를 하면서(지혜16,27-28참조),  영과 진리안에서 영이신 하느님을 예배하면(요한 4,24참조)),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선물을 문간에 갖다 놓아 주신다는 것이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6,15ㄴ)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6,16)  

오늘 독서의 <지혜>는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기도의 응답>이요, 우리가 그토록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알고 싶은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삶에 동행하시는 <현존체험>이다. 

그러나 이 <지혜>의 축복을 받으려면, 오늘 말씀에 따라 조건이 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고, 감사 기도를 해야 하고, 영적으로 순결하고 흠도 티도 없는 삶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하느님을 기뻐시게 하고 감동시키는 맞갖은 생각과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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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32주간목요일 (지혜 7,22-8,1)

지혜서는 BC50-3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이 쓴 것으로 추정한다. 지헤서에는 돋보이는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의인들의 불사불멸과 지혜의 의인화이다. 지혜의 의인화 혹은 인격화는 이미 잠언 1-9장과 집회서 24장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지만, 그리스 철학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지혜서 저자는 지혜를 거룩한 영, 온 세상에 충만하여 만물을 총괄하는 주님의 영과 동일시하는데(1,5--7), 이것은 영을 우주의 영혼으로 인식하는 스토아 철학과 통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이 영은, 우주의 모든 실재에 만연하여, 그 실재에 생명을 주는 본질이다. 그것은 또한 우주의 이성적 원리인 로고스(logos:말씀 또는 이성)와 동일시되며 흔히 神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오늘 독서인 지혜7,22-8,1의 내용은 지혜의 본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 묘사와 많이 흡사하다. "~~지혜는 하느님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의 모상이다."(7,25-26) 

그러나 지혜서가 묘사하는 지혜는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와는 달리, 우주 만물안에 내재하는 神자체가 아니라, 초월적 신(超越的 神)과 우주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동시에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하느님의 예언자로 만든다."(7,27) 

잠언이나 집회서에서도 사람들을 하느님 마음에 들도록 변화시키는 지혜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지혜서만큼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묘사하지는 못한다.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헤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 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요한 복음의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 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내지 못한다.

지혜는 세상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7,28-8,1) 

하느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당신 아드님과 같으신 말씀을 주시고, 성령님과 같으신 인격적 지헤를 주시어, 항상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길을 걷게 하시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게 하시고, 악과의 싸움에서 항상 승리하게 하소서. 아멘,

2015.11.12.연중32주간목요일 제1독서

(지혜7,22ㄴ-8,1)


지혜서 7장 22ㄴ절 - 8장 1절까지는 '지혜의 본성'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묘사된다. 첫째, 저자는 지혜서 7장 22ㄴ절-23절에서 지혜의 21가지 속성(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등등)을 밝히고, 이어서 지혜를 세상의 영혼(지혜1,7참조)동일시하여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민첩하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라고 한다.

그 다음 지혜서 7장 25-26절에서 저자는 '숨결', '발산', '광채', '거울', '모상'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여 지혜가 하느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러고 나면 지혜서 7장 27-28절에서 "지혜는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라고 하면서 지혜가 사람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는 사실을 묘사한다.

그리고 지혜서 7장 29-8장1절에서 저자는 지혜가 지닌 우주적 차원을 다시 언급하면서 지혜는 해와 별과 빛보다 빼어나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라고 지적한다. 또한 지혜에는 도덕적 차원도 있다. 그래서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묘사들은 지혜를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위해 실천적인 조언을 주는 것 이상으로 부각시키고, 지혜를 우주적, 역사적, 도덕적, 신학적 의미를 가진 인격체가 되게 한다.

지혜는 분명 이스라엘의 하느님 외에 다른 어떤 여신이 아니다. 저자는 유일신 사상을 믿는 유다인이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주님이시며, 유일하게 참된 하느님이시라고 믿는다.

지혜는 정의나 자비처럼 기껏해야 하느님의 속성이다. 하지만 지혜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지혜가 여성의 특성을 갖는 것은 단순히 '지혜'를 뜻하는 히브리어 '호크마'(hokma)그리스어 '소피아'(sophia) 명사의 성이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지혜는 여신 '이시스'(isis; 많은 학자들은 지혜서 7장 22-24절에서 이시스의 속성에 해당하는 것을 제시한다고 본다)나 다른 여성 신들을 가리키는 유다인들의 용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의인화된 지혜의 속성들을 예수님께 부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콜로1,15-20; 요한1,1-18; 히브1,1-4참조).


연중 제16주일 제1독서(지혜 12,13.16-19)

오늘 지혜서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연중 제16주일 복음 말씀이 밀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시의 비유, 누룩의 비유이기 때문인 것 같다. 겨자씨나 누룩이 처음에는 작지만 나중에는 크게 성장되는 것처럼, 하늘 나라도 반드시 보이지 않는 힘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렇게 자라나게 된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작은 것이 크게 되는 이런 비유를  <대조의 비유>라 한다. 그리고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처럼,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시고 심판하지 않으시지만, 추수때 열매를 맺은 밀과 아무 열매도 없이 하늘로 치솟는 가라지처럼, 확연히 구분될 때는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의인을 구원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1독서에서 <만물을 돌보시는 당신; 당신의 힘; 정의의 원천: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 당신의 완전한 권능; 힘; 하느님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 당신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처럼 <힘>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지혜서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고 칠십인역(LXX; Septuaginta; 희랍어로 쓰여진 구약 성경)에만 나오므로, 제2경전(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한다. 제 2경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어(희랍어; 헬라어)로 저작된 책은 지혜서와 마카베오 하권뿐이다. 지혜서의 저작 연대는 B.C. 50~3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이 쓴 것으로 보인다. 

유다교 사상가 필론에 의하면, A.D.1세기 초에 이집트에는 100만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좀 과장된 숫자이겠지만, 이집트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다 백성들; 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다 교포들이 사는 곳을 말함)유다인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지혜서는 철학, 윤리, 신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된 갖가지 주제들을 다룬 소품 모음집이다. 저자의 집필 목적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헬레니즘 문화가 압도하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와 그 부근에 살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유다교의 정통교리를 다른 문화에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토착화(Inculturation)작업을 한다.   

지혜서 저자는 유다교 전통을 거의 모르는 그리스인들 저자 자신처럼 히브리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채 헬레니즘에 익숙한 유다인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사상과 비교하여 유다교 관습과 사상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헬레니즘에서 기원한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적 인생관에 맞서 유다교의 전통적 믿음과 교리를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   

지혜서는 크게 세 부분, 종말의 숙고(1~5장), 지혜의 찬가(6~9장), 역사의 숙고(10~19장)로 나눈다. 첫째, 종말의 숙고(1~5장)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강조한다. 둘째, 지혜의 찬가(6~9장)에서 임금과 권력자들에게 하는 권고, 7장 22~23절에 나오는  지혜의 정신에 담긴 정신의 특성 21가지(완전을 뜻하는 7의 3배수=매우 완전한 숫자), 지혜를 청하는 기도(9장)등이 나온다.

마지막 세째 부분(10~19장)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10장에서는 원조들과 성조들의 이야기, 10장 15절~11장 20절에는 이집트 탈출 사건,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높이 기리는 찬미가(11,26; 구원의 보편주의),가나안 정복(12장), 자연.우상.동물숭배의 어리석음(13~15장),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에서의 시련(16~19장)을 두서없이 열거한다. 

오늘 1독서는 마지막 세째부분의 <가나안 정복>에 관한 말씀이다. 하느님은 가나안 민족들을 천천히 징벌하시면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저들은 끝내 그 뜻을 저버리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가나안 민족들이 벌을 받아 멸망한 이유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생명을 거슬러 온갖 불경한 짓들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애로운 분이시지만, 잘못을 그냥 보아 넘기지는 않으시는 공정한 분이시다는 것이다. 

가나안인들이 벌을 받는 것은 그들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우상숭배는 지혜서 12장 3~6절에서 섬뜩하리만큼 상세히 묘사된다. 가나안 땅에 "하느님의 자녀들인 훌륭한 이주민을 받게 하신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었다(지혜12,7). 그러나 하느님은 가나안인들을 한꺼번에 모두 파멸하시는 대신,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먼저 말벌들을 보내셨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런 벌로도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은 것 같았다. 

하느님이 가나안인들에게 보내신 경고는 하느님의 주권과 자비를 드러낸다(지혜12,12~18). 하느님이 이 민족들을 창조하셨고 온 백성을 돌보시기 때문에 아무도 하느님을 비난할 수 없다. 자기들의 힘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달리(지혜2,11) 하느님의 힘은 '정의의 원천'(지혜12,16)이다. 하느님은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신다(지혜12,18) 

하느님의 행위 방식은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지혜12,19-22). 하느님의 행위 방식은 의인이 인자해야 한다는 것과 하느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선함과 자비를 기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동시에 하느님의 행위 방식은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들을 설명해 준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일시적으로 가르치거나 단련시키지만,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는 훨씬 더 엄한 벌을 내리신다(지혜12,22).  바로 이러한 내용이 오늘 복음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나오는 세상 종말의 심판 때 의인과 악인이 달라지는 운명의 말씀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른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0-43)  

지혜서에는 특히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돋보이는데, <의인들의 불사불멸>과 <지혜의 의인화>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의롭게 살고도 현세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의인들은 비록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어 죽은 다음에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서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죽은 의인의 부활이 아니라 의로운 영혼의 불사불멸이다. 

한편,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혜>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요한 복음의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인격적 지혜>를 성령이나 성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시도이지만, 어쨌든 신약성경의 삼위일체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풍성한 초가을 농촌풍경

연중32주간 금요일 (지혜 13,1-9)

지혜서의 마지막 부분 10-19장은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반성을 담고 있다. 10장에서는 원조들(아담,카인과 아벨, 노아)과 성조들의 이야기를, 10,15-11,20 에서는 이집트 탈출 사건을 다룬다. 그 다음 가나안의 정복 사업을 언급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전능과 사랑,구원의 의지를 높이 기리는 찬미가가 나온다(11,21-12,2). 이 대목에서 구원의 보편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11,26) 그러나 이어지는 가나안 정복 이야기는 구원의 보편주의와 충돌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 저자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느님께서는 가나안 민족들을 천천히 징벌하시면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저들은 끝내 그 뜻을 저버리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가나안 민족들이 벌을 받아 멸망한 이유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생명을 거슬러 온갖 불경한 짓들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자애로우신 분이시지만 잘못을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는 공정한 분이시다.13-15장은 자연 숭배와 우상 숭배와 동물 숭배의 어리석음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오늘 독서 지혜서 13,1-9은 잘못된 자연 숭배에 대한 경고와 꾸짖음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노예생활에서도 이교 민족의 그릇된 우상에 빠진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나안 정복 이후도 가나안의 영향을 받아 그릇된 자연 숭배와 우상 숭배, 동물 숭배에 빠질 수 있고,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라고 말씀을 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 즉 인간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는 피조물들을 볼 때, 그것들의 제일원인(第一原因)과 제일동인(第一動因)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인과률(因果律)에 의해 깨달을 수 있는 이성(理性)을 주셨는데, 인간이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우둔함이요 무지라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匠人)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불이나 바람이나 빠른 공기, 별들의 무리나 거친 물, 하늘의 빛물체들을 세상을 통치하는 신들로 여겼다."(13,1-2) 

오늘 말씀인 자연 숭배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말씀이 로마서 1장 18절-25절에 잘 나온다. 인간이 만유위에 하느님을 영적으로 공경하고 섬길때, 인간의 품위도 신적인 거룩한 품위로 올라가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인간을 포함해서 자연과 동물 숭배,우상 숭배를 하면, 인간들은 속화되고, 타락하고, 비인간화의 극치를 달리게 되며, 비참하게 되고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피조물들을 통해, 그것들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드리자.


  가을이 찾아오는데 중년의 감성은.

연중32주간 토요일 (지혜 18,14-16; 19,6-9)

지혜서 16-19장에서 저자는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에서의 시련을 두서없이 열거한다. 

오늘 독서에서는 240 만명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이렇게 묘사한다.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 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19,7-8)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수 있게 해 주신 기적적인 현상들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자애로운 돌보심을 받는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자각을 가져야 하고, 이런 구원의 체험을 통해,이스라엘은 지금부터 미구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새 세상을 준비해야 한다. 

지혜서의 마지막 절은 당신 백성에 대한 주님의 한없는 자애를 기리는 찬송으로 되어 있다. 

"주님, 당신께서는 모든 일에서 당신 백성을 들어 높이시고,영광스럽게 해 주셨으며,언제 어디에서나 그들을 도와주시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19,22) 

이 찬송에는 이스라엘의 과거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자애가 현재와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리도 믿음의 여정에서, 항상 과거의 삶에 있어서,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으로 나의 삶에 들어 오셔서 구원을 체험케 하신 사랑의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나의 삶속에서 어려운 시련과 어둠과 고통의 현실이 계속될 때, 옛날의 자애로운 하느님의 사랑스런 개입의 사건이 또 다시 재현되라는 희망을 갖고, 기도하고 매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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