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독서묵상)

2015. 10. 25. 오전 6: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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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독서묵상)




 제16주일 제1독서(에레23,1~6)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1~2ㄴ)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될 심판의 원인과 결과를 강조한 12개의 단편 예언수록된 예레미야서 제2장~25장 중에서, 예레미야서 23장 1절부터 8절까지는 아홉번째 예언에 속한다. 즉 남부 유다의 왕가에 대한 예언이 수록된 예레미야서 21장 1절~23장 8절의 마지막 단락을 이루고 있다.

앞선 에레미야서 21장, 22장에서는 치드키야, 살룸(여호아하스),여호야킴, 콘야(여호야킨 혹은 여콘야)등 남부 유다 왕국 마지막 통치기의 인물들이 직접 거명되는데, 이들의 죄악상과 더불어 그들 각각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 심판의 메시지는 각각의 왕들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남부 유다 왕국과 유다 백성들 모두에 대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는 여호야킴의 아들 콘야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남부 유다를 다스릴 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예언되었다(예레22,30).  

이 콘야 왕은 당시 남부 유다 백성들에게 다윗의 계보를 잇는 정통성있는 왕으로 여겨졌으므로, 이같은 메세지는 남부 유다 왕국에 아무런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매우 절망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부 유다 왕가에 대한 예언을 마무리하는 예레미야서 23장 1절 이하 8절에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되어 남부 유다 백성들에게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예레미야서 21장, 22장과 달리  예레미야서 23장에서는 남부 유다 백성이 이제까지 백성들을 잘못 인도한 여러 유다 왕들과 공동 운명체로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심판은 유다 민중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각각의 왕들에게 주어질 것이며(1~2절), 포로로 잡혀간 선민들은 귀환하게 되고,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왕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예언된다(3~4절). 그리고 이어지는 예레미야서 23장 5,6절 단락에서는 이 새로운 왕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예레미야서 23장 7,8절 단락에서는 장차 도래할 포로민의 귀환과 남부 유다 왕국의 회복을 확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인간의 패역부도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주도적인 권한으로 역사하시고 자비와 은총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면모를 드러내 보여주며, 보다 거시적인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모든 성도들의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예표하고 있다고 하겠다.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버린 목자들!' 본문은 하느님의 저주와 심판의 대상을 밝히고 있다. 이것을 나타내는 '목자들'에 해당하는 '로임'(roim)은 '목자'라는 의미를 가진 '라아'(raah)의 복수형이다. 즉 '목자들'이라는 의미로서 남부 유다 말기의 왕들, 특별히 에레미야서 21장, 22장에서 언급된 네 명의 들과 더불어 예레미야 예언자 당대의 왕국 관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국가의 왕을 '목자'로 나타내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드문일은 아니었다. 

특별히 목축업과 상당히 많은 권력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자'라는 단어는 보호와 인도와 돌봄의 이미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치는 가축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을 잘 돌보는 역할을 하는 목자의 이미지는 하느님의 양 떼를 불행의 길로 인도한 남부 유다의 왕들과 대조되면서 그들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목자들이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인 목자들의 행태가 두 가지 동사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각각 '파멸시키고'와 '흩어버린'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중에서 '파멸시키고'에 해당하는 '메압베딤'(meabbedim)의 원형 '아바드' (abad)는 '죽다', '사라지다'라는 의미이며, 본문에서처럼 강조형으로 쓰일 경우 '죽게 하다', '멸망케 하다'라는 사역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흩어버린'에 해당하는 '우메피침'(umephitsim)은 '푸츠'(phuts)의 사역형으로서 '널리 흩어 보내다', '몰아내다', '쫓아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쟁에 패하여 뿔뿔이 흩어지는 것(2열왕 25,5)과 더불어 이방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느헤1,8)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결국 이 동사는 남부 유다 왕국의 왕들이 패전으로 인한 백성들의 죽음과 남부 유다 왕국의 멸망 및 남부 유다 백성들의 바빌론 유배의 원인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들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평가와 대조적으로 남부 유다 백성들을 상징하는 '양 떼'에 대해서는 '내 목장의'라는 표현으로 수식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1인칭 접미어 즉 '나의 소유'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은 남부 유다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5ㄷ) 본문은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에 새로운 왕을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은유적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싹'에 해당하는 '체마흐'(tsemah)는 나무 줄기나 땅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싹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이사야서에서 두 번 사용되었는데(이사4,2; 61,11), 특히 이사야서 4장 2절의 문맥에서 본문의 예언과 동일하게 장차 하느님의 나라를 이끄실 메시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즈카리야서 3장 8절과 6장 12절에서도 이 용어의 사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표현이 이상적인 왕 메시아를 나타내는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처림 메시아께서 한 싹으로 나신다는 비유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이전의 왕들과 전혀 다른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남부 유다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의 주도적인 능력에 의해 새로운 왕이 나타나실 것보여준다고 할 수 이다. 

사실 남부 유다 왕조의 역사는 패역부도한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로서 인간 왕에게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여호야킨이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바빌론 땅에서 그 삶을 마무리하고, 그나마 왕으로 세워진 치드키야 마저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 다윗 왕조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왕조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과거에 있었던 패역부도한 이런 왕들의 흐름을 끊고,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갈 진정한 왕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관련해 세례자 요한의 부친 즈카리야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다윗 집안에 일어날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한다(루카1,69.78.79).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예레23,5~8)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5ㄷ)  

본문은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에 새로운 왕을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은유적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싹' 에 해당하는 '체마흐'(tsemah)나무 줄기나 땅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싹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이사야서에서 두 번 사용되었는데(이사4,2; 61,11) 특히 이사야 4장 2절의 문맥에서 본문의 예언과 동일하게 장차 하느님의 나라를 이끄실 메시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즈카리야서 3장 8절과 6장 12절에서도 이 용어의 사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표현이 이상적인 왕 메시아를 나타내는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처림 메시아께서 한 싹으로 나신다는 비유 두 가지 의미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이전의 왕들과 전혀 다른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남부 유다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의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 새로운 왕이 나타나실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이다. 사실 남부 유다 왕조의 역사는 패역부도한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로서 인간 왕에게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여호야킨이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바빌론 땅에서 그 삶을 마무리하고 그나마 왕으로 세워진 치드키야 마저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 다윗 왕조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왕조가 완전히 끊어져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과거에 있었던 패역부도한 이런 왕들의 흐름을 끊고,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갈 진정한 왕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관련해 세례자 요한의 부친 즈키리야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다윗 집안에 일어날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한다(루카1,69.78.79). 

한편 본문에서는 이 '싹'의 속성을 '의로운'이라고 묘사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찻다크'(tsaddaq; righteous)라는 단어는 주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여기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 메시야가 주님의 속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실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로서 의로움과 공의에 기초해 그 통치권을 행사하신다(시편89,12; 97,2). 

또한 이것은 '정통성이 있는 합법적인'이라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린 모든 왕들 즉 주님께서 자신의 신정 왕국을 위해통치권을 위임하신 왕들은 그런 의로움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했다. 

가장 이상적인 왕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마저도 바세바를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등(2사무11,2~21) 의로운 임금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다윗에게서 나올 한 의로운 싹은 의로움에 있어 완벽할 것이며, 이 세상에 하느님의 공의를 세울 것이다. 또많은 학자들은 이 표현을 예레미야 예언자 당대의 임금인 '치드키야' '치드키야후'(tsidqiyahu)'주님은 나의 의'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드키야는 이러한 이름과 정반대되는 행실을 행했으며 또한 정통성이 없는 왕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유다 정통 족보를 계승한 여호야킨의 아들이 아니라 삼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께서 세우실 새로운 왕이 의롭다는 것은 당시 치드키야 왕을 보고 실망하고 절망하였던 백성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의를 세상에 온전히 구현하신다는사실과 더불어 정통성있는 왕을 세우신다는 사실을 당시 백성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30주일 제1독서 (예레31,7-9)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땅에서 데려오고, 땅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8)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행하실 구원을 선언하시면서, 먼저 그 백성을 북녘땅과 땅끝에서부터 구원하실 것을 밝히신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본문의 '이제'(혹은 '보라')에 해당하는 '히느니'(hinni)는  주의를 환기하는 표현인 '헨'(hen)1인칭 접미어가 결합 형태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주도하시는 내용이 제시됨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에서 '북녘땅' 은 선민이 포로되어 끌려가 흩어져 살던 곳으로서 주님의 백성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주었던 장소이다.(예레6,22.23) 그러나 주님의 권능은 그와 같은 세상 권세를 이기고도 남음이 있기에, 그의 백성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다 할지라도, 능히 주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다. 

또한 '땅끝'에 해당하는 '야르케테 아레츠'(yarkethe arets)'북녘땅'을 심화하여 나타낸 표현이다. 이것은 장소적으로 남부 유다 땅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나타낼 뿐 아니라 선민이 고국으로 돌아오기에는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대변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주님의 구원은 인간의 이러한 모든 불가능을 뛰어 넘는 구원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은 그 혜택을 받는 자들에게 관련해서 볼 때 차별이 없으며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을 지닌다. 

본문에 진술된 네 종류의 사람들 즉 눈먼이,다리저는 이,아이를 밴 여인,아이를 낳는 여인모두 다 자기 힘으로는 귀환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짧은 거리의 여행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건장한 자들이나 장정들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연약하고 비천한 사람들까지도 구원의 대열에 참여케 하신다. 여기에 주님의 자비하심이 잘 드러난다.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면,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이들이 사회 재건에 별 기회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자비가 풍성하신 주님의 시각에서는 이들이 단지  주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자들이며,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창세1,26) 더없이 귀한 존재들이다. 

사회에서 천히 여김을 받으며 극히 약하고 무기력한 자들로 여겨지던 그들에게 주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것은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예언하는 바이기도 하다.(이사35,5,6; 미카4,6-8 ; 스바3,19.20) 

한편 구약의 성전 제사 규정 및 봉사와 관련하여 눈먼 이나 다리저는 이들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었다.(레위21,17-24) 또한 해산하는 여인도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정해진 기간동안 성소에 가까이 할 수 없었다.(레위12,1-8) 

그러나 앞선 예레미야서 31장 6절의 외침 즉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로 나아가자." 라는 외침은 여기에 예언되고 있는 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이것을 감안할 때, 본문은 주님의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시점에는  과거 그러한 모든 의식적 제한들이 다 해제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이 예언이 그리스도안에서 남자도,여자도,유다인도,그리스도인도, 불구자도,일반인도 없는 즉 그 모든 구별이 사라지는 신약 시대, 곧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과 성취를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로마10,12)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본문은 귀환하는 자들의 숫자가 많을 것임을 나타낸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이 주님 앞에 예배하는 큰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돌아올 것임을 암시한다. '무리'에 해당하는 '카할'(qahal)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주님 대전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종교적 공동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 단어이다.(레위4,14 ; 민수16,33) 

구약 시대의 그 회중은 정상적인 남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나,주님의 구원이 시행될 때에는 앞의 네 종류의 사람들까지 포함되며 여러 구약적 맥락의 제한 규정이 해제된다. 즉 본문은 장차 이루어질 구원의 포괄성을 예언하고 있다.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 길을 걷게 하리라."(9) 주님께서 남부 유다 백성을 이끌어 고향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에 그들은 울면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구원의 여정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울면서' 에 해당하는 '삐뻬키'(bibek ; with weeping)의 원형 '뻬키'(beki)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당할 때 매우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우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신명34,8; 2사무13,36) 

구원의 여정이 슬픔이 아니기 때문에 혹자는 이를 기쁨의 표시로 우는 울음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원어의 의미를 임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받아들이기 힘들다. 따라서 이보다는 뒤에 이어지는 예레미야서 31장 18,19절의 내용과 관련하여 과거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회개의 표시로 흘리는 눈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제 남부 유다 백성들이 회개하는 가운데 귀환의 길을 걸어 고향 땅으로 돌아올 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험한 곳으로 방치하지 않고,안전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주님 대전에 바른 존재로 서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강수량이 적은 근동에서 '물'이 있는 시냇가는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특히 광야에서의 삶은 물이 없을 경우 생명을 지탱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은 그 모습이 시냇가에 심겨져 사시사철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로 비유한다.(시편1,3) 

과거 선민은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물이 아닌 그들 스스로 저수 동굴(웅덩이)을 파서 물을 얻으려고 애를 썼다.(예레2,13) 다시 말해서 그들은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리고, 주님 밖에서 무언가 자신들의 심령과 삶을 충족시켜 줄 것을 얻기 위해 웅덩이를 팠다. 하지만 그 웅덩이는 물을 담아 두지 못하는 갈라진 웅덩이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실 때에는 과거처럼 허망하게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으며 주님께서 전적으로 채워주심으로 그들은 만족을 누릴 것이다. 이것을 구원사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본문에서 말하는 물이 있는 시냇가란 인간의 심령을 충만하게 채워 영적으로 기쁨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임재와 연결된다.(요한7,37-39) 

한편 '곧은 길'에 해당하는 '뻬데레크 야샤르'(bederek yashar)는  비유적 측면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원래 이 단어는 조금도 구부러짐이 없는 올곧은 상태를 나타낸다.(욥기1,1) 구약 성경에서 120회나 사용되는데, 대부분 주님께서 보시기에 의롭거나  인격적으로 정직하거나 올바른 상태를 가리킨다.(신명12,25; 32,4; 1열왕15,5; 욥기1,1) 

과거에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선민들이 자기 욕심대로 행하며 그릇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울며 회개하는 가운데 돌아오는 길은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며 그들의 인격과 행위는 의롭고 온전한 것으로 변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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