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독서묵상)
제7주간 화요일 제1독서(집회2,1~11)
집회서 1장 14절에서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라고 했다. 여기서 '경외함'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어른을 삼가 공경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말한다.
오늘 집회서 2장 1~11절 말씀은 모든 지혜의 기초요, 시작인 <주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전제 조건이요, 필연적 통과 과정인 시련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으며, 그 시련을 겪을 때 어떤 삶의 자세와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계시해 준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을 믿어라,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집회2,1~7)
거룩하신 주님을 경외하는 인간들이 먼저 자신이 갖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인간성의 찌꺼기와 본성적인 요소들이 걸러져야 하기 때문에 시련을 통한 정화의 작업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 단련의 과정이 인간 본성에 반하기 때문에 상당히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워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붙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동시에 그럴 때 마지막에는 번창하며(3절)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인 선물이 보상으로 주어진다(9절)고 말한다.
오늘 집회서 말씀은 신약의 야고보 서간 1장 2절이하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야고1,3)
먼저 여기서 '시험'으로 번역된 '도키미온'(dokimion)은 마치 금, 은을 뜨거운 불 속에 넣고 녹여 그 진위를 시험하듯이 믿음의 진위를 입증하거나 시험하는 단련(연단)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야고보 서간 1장 3절과 베드로 전서 1장 7절에만 나타난다.
즉 야고보서 1장 3절에서 이 단어는 시험 곧 단련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진위를 테스트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성도의 삶에 있어서 이것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되풀이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복적으로 닥치는 믿음에서의 시련은 그것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여기서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넨'(hypomonen)의 원형 '휘포모네'(hypomone)는 '~아래에' 란 뜻의 전치사 '휘포'(hypo)와 '머물다'(마태10,11)란 뜻의 동사 '메노'(me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문자적으로는 어떤 상황아래 흔들림없이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며 나아가서 '확고부동', '복지부동', '항구성'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휘포모네'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과 경건을 충실하게 지켜나간다.
결론적으로 여러가지 시련을 기쁨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이유는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자세를 온전히 구비하게 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시험을 당하는 그 당시는 비록 그것이 힘겨울지라도 결국 믿음으로 잘 인내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난의 시험없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영적 기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제7주간 수요일 제1독서(집회4,11~19)
집회서 1장에서 23장은 머리글과 지혜 찬미 및 집회서의 전반부에 해당된다. 집회서 1장 1절에서 21절은 집회서 전체의 서문뿐 아니라 바로 이어지는 전반부의 서문 역할을 한다. 집회서 2장에서 23장은 지혜에 관한 첫 번째 모음집으로 지혜로운 인간의 덕목들(2장1절~4장10절), 인생의 가치(4장20절~6장17절), 사회적 삶에서의 지혜 추구(7장1절~14장19절), 종교와 교리(15장11절~23장28절)가 세 편의 작은 '지혜 찬미'(4장 11~19절; 6장 18~37절; 14장 20절~15장 10절)와 서로 교차되면서 배열되고 있다.
오늘 독서는 집회서 4장 11~19절로서 '지혜 찬미'의 내용이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지혜'라는 단어 대신에 '예수(그리스도)'를 넣어 묵상해도 좋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지혜' 혹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계시된다.
인간인 내가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생각했을 때 내 자신에 대한 깨달음(생각 혹은 인식, 지혜)가 생긴다. 그러나 이 깨달음(생각 혹은 인식, 지혜)는 불완전한 인간의 것이기에 바람처럼 휙 지나가는 지성(지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한히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셨다고 가정하자. 그럴 때 이 생각(깨달음 혹은 인식, 지혜)은 너무나도 완전하여 성부 하느님과 똑같은 위격(persona)을 갖게 된다.
완전하고 충실한 표현일수록 그 본형(원형)에 가깝듯이 또 하나의 위격을 갖게 된다. 위격(persona; personality)이란 지성과 (자유)의지가 있는 실존으로서 자기 행위에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행위의 주체(subject)말한다. 그러니까 위격은 사람(인격)이상 마귀, 천사, 하느님께만 해당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깨달음 혹은 인식, 지혜)는 내적인 언어이다. 생각한 것이 말로써 밖으로 표현된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생각(깨달음 혹은 인식, 지혜)은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그래서 구약에서 천주 성자는 하느님의 '지혜' 혹은 '말씀'으로 표현되고 계시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혜 찬미'의 장인 집회서 4장 11~19절에서 '지혜' 대신 '예수(그리스도)'를 넣어 묵상해도 좋은 것이다.
오늘은 집회서 4장 12절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는 구절을 묵상해 보자.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가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시기에 모든 생명이 그로부터 발출되며 모든 생명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기에, 생명은 존엄하고 거룩하고 소중하며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날의 낙태와 같은 살인 문제, 어린이와 노인들의 존엄 문제, 경제적 약자와 피고용인, 여러 장애자들의 인권 문제등과 같은 생명 경시 풍조와 사상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반드시 제도적으로나 구조적으로도 시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는 구절은 마치 지혜서 6장 13~16절을 연상시킨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이다. 지혜를 앋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 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
말하자면,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홍해와 요르단 강 같은 바다가 앞에 가로막혀 있고, 예리고성과 같은 난공불락의 성벽이 앞에 버티고 있어도 시간의 주재자이신 주님, 인간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주님께 새벽에 일찍 일어나 간절히 기도를 하고 봉헌을 하면서 맡기면, 문제가 해결되는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지혜는 그렇게 고대하던 기쁨의 기도의 응답이요, 문제 해결의 마스터 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7주간 목요일 제1독서(집회5,1~8)
"재산을 믿지 말고,"넉넉하다."고 말하지 마라. 너 자신과 네 힘을 붙좇지 말고, 마음의 욕망을 따르지 마라."(1~2) "부정한 재산을 믿지 마라. 정녕 재난의 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리라."(8)
오늘 독서 말씀 집회서 5장 1~8절은 집회서 4장 20절에서 6장 17절 까지 '인생의 가치'라는 주제로 전개되는 말씀 중의 일부이다.
특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믿고,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죄를 짖는 자들이 하느님께서 자비하시고 분노에 더디시니~ 운운하면서 전혀 회개를 서두르지 않을 때,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의노로 징벌이 내림을 경고하고 있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 대전에 올바른 양심의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죄짓는 생활을 삼가할 것을 명하고 있다.
오늘 독서 말씀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복음이 루카 복음 12장 16~21절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말씀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에게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12,20)는 청천벽력같은 말씀이 내린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이렇게 해야지.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말해야지.'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루카 12,17.18.19참조)
이처럼 가진 자들은 한도 끝도 없는 자신의 마음의 욕망을 펼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 서간 4장 13~17절과 5장 1~6절에서 자만하지 말 것과 부자들에 대한 경고를 주고 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 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야고4,14~16)
복음적 권고의 하나인 청빈(淸貧)은 '맑을 청(淸)'과 '가난할 빈(貧)'의 합성어로서 '맑은 가난'을 말한다. 그런데 '빈(貧)'을 보면 '나눌 분(分)'과 '조개 패(貝)'의 합성어로 '가지고 있는 화폐를 나눈다'는 뜻이다.
그러나 '탐욕(貪慾)'의 '탐낼 탐(貪)'을 보면, '이제 금(今)'과 '조개 패(貝)'의 합성어로서 '지금 화폐를 움켜잡는' 것을 의미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우리 인생 살이,주님의 생명의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주님 대전에 주님이 주신이 주신 것을 잘 관리하고 보존할 뿐 아니라 주님의 영광과 교회와 이웃의 공동선을 위해서 주님 대신에 재화를 잘 쓸 줄 아는 착하고 충실한 관리인이 되어 하늘에 썩지 않는 보화를 차곡 차곡 쌓아 가라는 말씀으로 오늘의 집회서 말씀을 실천하면 좋겠다.
7주간 금요일 제1독서(집회6,5~17)
"친구를 얻으려거든 시험해 보고 얻되, 서둘러 그를 신뢰하지 마라. 제 좋을 때에만 친구가 되는 이가 있는데, 그는 네 고난의 길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 (집회6,7~8)
집회서 4장 20절에서 6장 17절은 인생의 가치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 오늘 독서 집회서 6장 5~17절은 성실한 친구와 원수로 변하는 친구의 대조를 통해 참된 친구와 그 우정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원수로 변하는 친구는 상대방 친구의 수치를 폭로하고, 잘될 때에는 군림하고 식탁의 친교는 즐기면서도, 결정적으로 상대방 친구의 고난과 비천의 날에는 함께 있어 주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본색을 드러낸다는 표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성실하고 참된 친구의 기준과 척도는 상대방 친구의 고난과 같은 어려운 지경에 끝까지 동참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가르쳐준다(집회6,7~9.11).
특히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요, 보물이며, 값으로 따질 수 없고, 어떤 저울로도 그 가치를 달 수 없는데, 이런 생명을 살리는 명약과 같은 친구는 주님을 경외할 때 얻을 수 있는 선물이며, 그러한 우정도 주님의 말씀과 기도안에서 바로 키워 나갈 수 있고, 이웃에게도 하나의 표양이 될 수 있음을 계시한다(집회6,14~17).
오늘 독서의 집회서 말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이별하는 자리에서 하신 말씀과 더불어 이스가리옷 사람 배반자 유다와 관련된 구절 등등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15,13)
"제 동무들과 이웃들은 저의 재앙을 보고 물러서 있으며 제 친척들도 멀찍이 서 있습니다." (시편38,12)
겟세마니 동산에서 겉으로는 스승님을 부르고 입을 맞추면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유다처럼(마르14,42.44~46),
사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남들이 보기에 가장 친한 친구처럼 행세하던 자가 겉으로는 웃으면서 도와주는 것같이 시늉을 내며 나를 포옹하고는 칼을 뽑아 나의 등을 찌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시편41,10)
"원수가 저를 모욕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참았을 것입니다. 저를 미워하는 자가 제 위에서 거드름을 피운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그를 피해 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 내 동배 내 벗이며 내 동무인 너. 정답게 어울리던 우리 하느님의 집에서 떠들썩한 군중 속을 함께 거닐던 우리." (시편55,13~15)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6,3~4)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사랑으로 다윗에게 다시 맹세하게 하였다." (1사무20,17)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집회17,1~15)
집회서 15장 11절에서 23장 28절까지는 종교와 교리에 대한 가르침이 들어있다. 그중에 오늘 독서 집회서 17장 1~15절은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땅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는 사실을 계시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오관과 지성과 이성을 주신 궁극적 이유와 목적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과 놀라운 일을 찬양하기 위해서이며,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어 계약의 산물인 당신 뜻이 들어 있는 율법과 계명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섬기는데 있다는 것을 계시한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 주시어,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게 하시고, 그들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영원히 찬양하게 하셨다. 그들은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집회17,8~9)
"그들의 눈은 그분의 위대한 영광을 보고, 그들의 귀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집회17,13)
특별히 오늘 독서에서 위의 두 구절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찬양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 특히 집회서 17장 8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경외심'을 가지고 할 일이 바로 주님을 찬양하는 일임을 계시한다. 여기서 '경외함'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어른을 삼가 공경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말한다.
트라피스트수도회 신부였던 토마스 머톤(Tomas Merton; 1915-1968)은 <감사>란 <어떤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무감각하지 않는 것이며 새로운 경외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을 경배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남에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으로 안다고 이야기 했다.
<감사>란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찬양>(찬미,찬송)이란 이런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외적으로 드러내어 기리는 것을 말한다. 토마스 머톤은 이러한 <찬양>에 대해 놀라운 말을 한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참으로 인식하게 될 때, 그 분은 전능하시고 무한히 거룩하시며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행하고 계신 분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 인간은 자기 존재의 깊은 심층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히 크신 선(善)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소리가 되어, 환희의 외침으로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찬양에 대한 전(前)지식을 가지고 마니피캇에 나오는 성모님의 찬양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루카1,46)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로 하여금 구세사안에서 인류의 구원자이신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품도록 하셨다.
즉 인류구원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동참하고 협력하도록 하시기 위해 영원으로부터 마리아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 성혈의 공로를 미리 앞당겨 입게 하시어 원죄로부터 해방되어 거룩하신 주님을 품고, 사탄이 공격할 수 없는 여인으로 만드시어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셨다.
그리고 사도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서 인류를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게 하시는 성소와 사명을 다하도록, 교회안에서 교회의 영혼이신 성령님과 함께 성령님의 정배(짝)로서 그 역할을 하시는 마리아가 받으신 특은과 사명을 생각할 때 어찌 시골뜨기 여인의 입에서 찬양이 아니 나올 수 있겠는가!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도 하느님께 드릴 감사와 찬양의 재료를 찾아 찬양드려야 하겠다.
제8주간 월요일 제1독서 (집회17,24-29)
집회서의 신학적 주제들 중에 하나가 "자유의지" 에 관한 가르침이다. 동일선상에 있는 선과 악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구약 성경에서 집회서는 처음으로 인간을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라고 선언한다(집회15,11-20). 하느님께서는 인간 스스로 원하는 대로 살아가도록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으신다(집회15,14).
따라서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을 택할 수도 있고 악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주어져 있기에 집회서는 인간의 윤리적, 신앙적 책임을 강조한다(참조; 집회4,20; 17,25-32).
오늘 독서의 말씀이 집회서 17장 24-29절인데, 진리를 깨닫는 능력인 지성으로 지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바로 깨닫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 자유의지의 선용으로 깨달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오고 불의에서 돌아서라. 그분께서 너를 이끄시어, 어둠에서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너는 그분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을 혐오하여라."(집회17,26)
이러한 맥락에서 집회서가 가르치는 개념 중 가장 부정적인 것은 '죄'와 '악'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에 빠지는 무책임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집회13,8 ; 15,7 ; 19,11-12등등). 그러면서 집회서는 "예배"의 신학을 전개하는데, 참된 예배는 결국 지혜를 추구하는 일이기에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집회17,25 ; 39,12-35).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 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 (집회17,25)
"살아서 감사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누가 저승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찬미를 드리겠느냐?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죽은 이에게서는 찬양이 그치지만,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이는 주님께 찬미를 드리리라.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시며,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용서는 얼마나 크신가!" (집회17,27-29)
하느님의 절대적 생명의 말씀에 승복하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자비와 용서로 표출되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그것을 감사와 찬양의 기도로 드러내는 진정한 예배를 봉헌할 수 있음을 계시해 주고 있다.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집회27,30-28,7)-용서와 화해
집회서는 유다 지혜 문학의 총결산이라 부른다. 이 책의 원문은 기원전 180년경에 예루살렘에서 벤 시라(집회50,27)에 의해 히브리어로 쓰여졌다. 기원전 130년경에 벤 시라의 손자가 이집트에서 이 책의 히브리어 사본을 발견하고, 히브리어를 모른 채, 그리스어만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을 위해 그리스어로 옮겼으며, 이 그리스어 본문이 현존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집회서를 '리베르 에클레시아스티쿠스'(Liber Ecclesiasticus:교회의 책)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은 치프리아누스 시대 이후 서방 교회에서 새로 입교한 사람들을 교육할 때에 이 책의 가르침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집회서의 원저자 벤 시라는 율법서와 예언서, 그밖의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을 읽고 해독하는 일에 평생을 바쳐오다가, 배우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율법에 맞는 삶을 한층 더 진지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집회서는 인생과 관련한 온갖 실천적 주제들을 두서없이 다루는데, 편의상 5부분으로 나눈다.
1부(1,1-16,23)~저자는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임을 천명한다. 여기서 '경외함'은 벌 받을까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어른을 삼가 공경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말한다.
2부(16,24-23,28)~하느님의 창조위업과 창조주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위치를 서술하고, 지혜로운 이와 어리석은 자에 관한 금언들을 나열한다.
3부(24,1-32,13)~지혜와 율법에 관한 가르침과 기타 금언들을 포함한다.
4부(32,14-42,13)~하느님 경외와 올바른 처세를 강조한다.
5부(42,15-50,29)~하느님의 영광과 조상들의 올바른 삶을 기린다.
부록~51장
오늘 독서는 3부에 해당되는데, 3부는 25장~32장에서 여러 가지 격언과 애인.장사.언행.정의와 신의.위선.원망.빚보증.자선.자녀교육.건강과 재산.음주와 잔치등과 관련된 구체적 처세 지침들이 나온다.
오늘 1독서(집회27,30-28,7)는 <분노와 용서>에 대한 말씀을 주신다. 우리가 복수와 적개심이 전제된, 마음속의 화인 분노를 풀고 용서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교리에서는, 분노(Ira;Anger)란 칠죄종의 하나로서, 복수(앙갚음)하고자 하는 무질서한 감정이라 정의한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상처받고, 모욕입고, 손해보고, 고통 당했을 때, 의로운 분노(화)가 일어난다.
이럴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인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에 따라, 그리고 박해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라는 말씀에 따라(로마12,9-21) 의지적 신앙의 행위로, 분노의 대상을 용서해 줄 수 있다.
내가 의지적으로 주님 말씀에 따라 의지적으로 용서한다.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렇다고 내 마음 속의 상처받은 감정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용서(Remissio;Venia;Forgiveness) 콤플렉스에 빠질 필요가 없다. 용서는 내가 상대방한테 찾아가 이러쿵 저러쿵 할 필요가 없다. 용서는 피해자의 특권이라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과 관계없이 내가 혼자 하는 것이라 쉬운 것이다.
그러나 화해(Reconciliatio)는 다르다. 화해란 상대방과 직접 만나, 진실과 사실, 잘잘못을 따지고 나서, 서로 수용하고 인정할 것은 하고, 용서하고 악수하는 것을 말한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한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치라고 예수님게서 말씀하셨다.(마태5,21-24참조)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한다고 너무 성급하게 화해해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에 겉으로는 형식적으로 화해가 이루어진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근본적인 마음의 상처 문제와 화해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지 않는다. 좀 시간을 가지고,작금의 문제를 복음적 관점과 자신의 영혼의 성화의 관점인 영성적 차원에서 깊이 성찰해 보아야, 본질적 문제가 해결된다.
Martin H.Padovani(신언회 선교사제,가정문제 전문상담가,정신요법가)는 이렇게 말한다. "때때로 우리가 화가 났을 경우, 안정될 때까지 우리 자신과 상대방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안정 체계 Cooling System 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안정을 찾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상처받고 화가 났을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이 잊어버리거나 치유하거나 안정을 찾을 시간을 줘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감정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입은 감정의 치유' P57-77참조, 백승치 옮김,분도출판사)
그리고 내가 화해를 청했을 때,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럴 경우 로마서 13장 8절의 말씀대로 그에게 필요한 은총이 내리도록, 그가 회개하도록, 기도와 희생 바쳐 줄 사랑(애덕)의 의무가 있다.
제8주간 화요일 제1독서(집회35,1~15)
집회서는 지혜와 이스라엘 전통 사상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집회서의 신학 사상 중 가장 주목할 내용은 하느님의 지혜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곳을 모세의 율법이라고 본 것, 즉 율법과 지혜를 동일시했다는 점이다(집회 24,23~34). 따라서 집회서가 제시하는 하느님을 가장 잘 섬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율법에 절대적으로 충실하게 사는 것뿐이다(집회1,26;6,37;19,20.24).
특히 오늘 독서의 말씀은 율법과 계명 준수를 감사의 제사와 자선의 행위와 관련지으면서 그것이 악과 불의와 거리가 먼, 의로운 영혼 상태에서 이루져야 함을 계시한다.
"주님 앞에 빈 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사실 이 모든 것은 계명에 따른 것이다. 의로운 이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올라간다. 의로운 사람의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그 기억은 잊히지 않으리라.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네 손의 첫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라.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것 바쳐라. 주님께서는 갚아주시는 분이시기에,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집회35,6~13)
오늘 독서 말씀에서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라고 촉구하신다. 사실 소출과 수입의 열의 하나를 봉헌하는 것은 내가 수확한 것과 수입의 주권과 절대권이 우리 인간을 영육간에 늘 돌보아 주시는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내 자신이 땀흘려 일하고 지혜를 짜내고 해서 이만큼 힘겹게 얻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건강과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돌보아 주신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 십일조의 정신이고 봉헌의 영성이다.
그러니까 돈의 액수를 넘어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주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 봉헌과 십일조의 정신이며, 인본주의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 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십일조를 기쁘게 기꺼이 하면 갚아주시는 주님께서 일곱 배(집회35,13)로 갚아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일곱배는 백만원을 봉헌했으면 일곱 배인 700만원으로 갚아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안의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과 '충만'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주님 대신에 사람이 계속해서 주님 뜻대로 주님께서 주신 재화를 잘 쓰면 한없이 충만하게 그 이상으로 흘러 넘치도록 베풀어 주시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덮어놓고 십일조를 하면 일곱 배로 베풀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집회서 35장 8절과 9절을 보면 '의로운 이의 제물'이라고 전제 조건이 붙어 있다. 말하자면 대죄가 없는 은총지위에서 십일조를 봉헌할 때 일곱 배로 갚아주신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영이신데, 동물의 번제물과 그 향기를 왜 드시고 맡으시며, 돈이 왜 필요하시겠는가!
다만 제물은 인간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드리는 찬미와 감사와 속죄의 제사와 관련되기에 우리 인간을 거룩하신 주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만드시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늘 우리 인간들 자신의 삶속에 주 하느님을 참 주인과 참 부모로, 살아계신 주님으로 모시고 살으라는 하느님 중심의 사상(신본주의; 神本主義)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제8주간 수요일 제1독서(집회36,1~2.5~6.13~22)
"만물의 주 하느님, 저희에세 자비를 베푸시고, 모든 민족들 위에 당신에 대한 두려움을 그들도 알게 해 주소서." (1~2.5)
집회서 25장~51장은 집회서의 후반부(집회25~50장)와 부록(집회5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회서 25~50장은 지혜에 관한 두 번째 모음집으로, 사회 윤리(집회25,1~32,13), 사회 윤리와 관련된 다양한 규범들(십회33,7~42,14),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지혜(집회44,1~50,29)가 두 편의 지혜 찬미(집회32,14~33,6; 42,15`43,33)와 교차 배열되어 있다.
한편, 집회서 51장(부록)에서도 지혜 찬미(집회51,13~30)와 감사 기도(집회51,1~12)가 서로 교차되는 배열 구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역사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기리며 마무리된다.
오늘 독서의 집회서 말씀은 집회서 36장 1~2절, 5~6절, 13~22절이다. 이것은 사회 윤리와 관련된 다양한 규범들(집회33,7~42,14)안에 들어 있다.
여기서 집회서 저자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주님께 기도를 드린다.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당신 백성을 돌보아 주시어 하느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다른 민족들도 알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
'만물의 주 하느님, 저희에세 자비를 베푸시고, 모든 민족들 위에 당신에 대한 두려움을 그들도 알게 해 주소서.' (1~2.5)
사실 야훼 유일신 신앙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이스라엘은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북부 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부 유다는 B.C.587년에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망하고 유배를 가게 되는 역사를 겪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둘러싼 이교 강대국들은 항상 이러한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못알아 듣고, 자신들이 선민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하느님의 도구로 간택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항상 도를 넘는 힘을 행사하며 하느님의 벌을 자초했던 것이다.
따라서 집회서 저자의 기도는 선민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 유일신 신앙을 통해 다시 한번 구원의 질서와 축복의 통로를 재천명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노예 생활 430년에서 해방시킨 이스라엘을 부족 공동체에서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불러 주시고, 시나이산 계약을 통해서 다시 계약 공동체로 만들어 하느님의 뜻인 계명에 충실하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만유 위에 공경하고 섬기며 흠숭하는 예배 공동체로 만드신 것이다.
따라서 선민 이스라엘을 둘러싼 모든 민족들은 이 이스라엘의 모델을 통해서 구원의 대열에 들어설 수 있고,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서 축복을 공유할 수 있게 되는 신비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제8주간 목요일 제1독서(집회42,15~25)
"찬란한 태양은 만물을 내려다보고,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16) 집회서에서 '창조와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신학적 주제는 42장 15절에서 43장 33절에 묘사되어 있다.
저자는 하느님의 모든 업적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찬란한 태양은 만물을 내려다보고,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16)
참으로 아름다운 그분의 모든 업적(22)이 그분의 지혜를 드러낸다(21).
'그분의 업적은 모두 얼마나 아름다우며, 얼마나 찬란하게 보이는가!'(22)
'당신 지혜의 위대한 업적을 질서 있게 정하신 주님께서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같은 한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으며, 어떤 조언자도 필요없다.' (21)
이같은 명상의 내용은 자연 현상과 그 질서를 통해 심도 있게 표현되어 있다(집회43,1~26). 맑은 창공(집회43,1), 태양(43,2`5), 달(43,6`8), 별(43,9`10), 무지개(43,11~12), 눈(43,13.18), 번갯불(43,13), 구름(43,14~15ㄱ), 우박(43,15ㄴ), 이슬(43,22), 깊은 바다와 섬들, 바다의 온갖 생물과 용들을 기억하면서 결론에 이른다(집회43,23~35)
집회서 저자는 자연 현상을 묘사하는 데 '모든 피조물은 좋다'고 표현하고 있는 사제계 전승(Priest codex)의 창조 신학(창세1장)에서 그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과 완전하심이 들어있는 당신 피조물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 피조물 자체가 그렇게 나타내 보이지만,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그것을 아름답게 보는 인간내면의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인간이 먼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사랑이신 성령 충만으로 가득차 있을 때, 모든 것이 기적아닌 것이 없고, 그분의 손길 아닌 것이 없으며, 그분의 영광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제8주간 금요일 제1독서(집회44,1.9~13)
"어떤 이들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존재한 적이 없었던 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9)
집회서의 일곱 개의 논제가 '주님을 경외함', '우정', '영예와 부끄러움', '여자', '신정론', '죽음', '지혜'인데, 오늘 독서의 말씀은 집회서 38장 16~23절에서 다루는 '죽음'의 논제에 뒤따르는 '이름'에 관한 말씀이다.
벤 시라에게 '이름'은 '어떤 사람이 남겨 놓는 평판이나 기억'으로서 가장 중요한 불멸성의 한 양식이다(44,1~13). 죽음은 번성하게 산 사람에게도 환영이고, 비참하게 산 사람에게도 환영이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주님의 판결'이다.
'지존하신 분의 율법을 저버린 자들'인 '죄인들'은 자기들의 '혐오 거리가 된 자녀들'(집회41,5~10)을 통해 영원한 치욕으로 고통받는다.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부모의 치욕이 늘 함께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부모의 태도를 삶으로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고 유덕한 '이름'은 영원히 남는다(41,1~13).
그런 이름은 인간의 몸보다 더 오래 남고 황금덩이 천 개보다 오래 남으며, 행복한 삶은 그 날수가 정해져 있지만, 좋은 이름은 영원히 남는다. 그래서 집회서 44장 16절부터 50장까지 역대 선조들과 훌륭한 사람들을 칭송한다.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집회서 47,2-11)
집회서의 마지막 제5부 (42,15-50,29)는 하느님의 영광과 조상들의 올바른 삶을 기리고 있다. 첫 대목 (42,15-25)에서 저자는 말씀으로 이루어진 업적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업적, 곧 사건을 일으키신다. 본래 히브리어에서 <말씀>과 <사건>은 한 단어, <다바르(dabar)> 이다.
말씀으로 이루신 업적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은 자연의 창조이다. 43장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노래한다.
맑은 하늘, 끊임없이 열기를 뿜어내는 태양, 절기와 축제일을 알려주는 달, 궤도를 정확히 도는 별들, 하늘을 가로지르는 찬란한 무지개, 그밖에 번개, 구름, 우박, 눈, 이슬, 얼음, 안개, 바람 그리고 온갖 종류의 생물과 용들을 열거하며 그것들이 모두 주님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낸다.
저자는 44-50장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인물들을 하나하나 나열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임금, 현인, 예언자, 사제들이다. 집회서 저자는 사제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특히 아론(모세보다 더 길게 다룬다)과 대사제 오니아스의 아들 시몬에 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리고 역사의 인물들에 대한 평은 찬미의 권고와 기도로 마무리한다. (50,22-24)
이어서 저자는 세 민족, 곧 사마리아인들과 필리스티아인들과 에돔인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에게 혐오를 드러낸다. 그들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복구 작업을 벌이는 유다인들을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50장의 마지막 세 절(27-29절)은 집회서 전체의 결론이다. "나는 지성과 지식에 대한 가르침을 이 책에 기록해 놓았다. 예루살렘 출신 엘아자르의 아들, 시라의 아들인 나 예수는 마음으로부터 지혜를 이 책에 쏟아 부었다.
이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는 행복하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는 이는 지혜로워지리라. 사람이 그 가르침을 실천하면 만사에 강해지리라. 주님을 경외함이 그의 인생 행로이고 주님께서 경건한 이들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아멘. "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예루살렘 출신 엘아자르의 아들, 시라의 아들 예수라고 밝히고 자신의 가르침을 담은 이 책을 독자들이 주의 깊게 읽고 실천해 줄 것을 부탁한다.
오늘 독서는 47장 2-11절로, 역사의 인물중에 다윗을 언급하고 있다. 난 1월 17일부터 사무엘 상권 16장으로부터 어제까지 매일 미사를 통해 교회는 다윗을 조명했다. 그리고 오늘 집회서의 말씀으로 다윗의 업적을 칭송하며 종합 정리를 하는 모습을 보고, 가톨릭 교회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양치는 목동이 어떻게 기름부음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가? 사울로부터 떠난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내려 줄곧 그의 삶에 함께 한 이유가 무엇일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리스티아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여인들의 과대한 칭송으로 인해 사울의 질투를 받아 쫓기는 다윗, 오히려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 살려주는 다윗,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터에서 죽은 사울과 요나탄,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통일 왕국의 첫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 계약의 궤를 모시고 싶은 다윗, 주님의 궤 앞에서 춤추는 다윗,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장부 우리야를 살해하는 다윗, 나탄 예언자의 말씀 앞에 참회하는 다윗,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쫓기는 다윗, 그리고 시므이의 저주, 압살롬의 죽음에 슬퍼하는 다윗, 인구조사를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다가 가드 예언자를 통해 사흘동안의 흑사병을 받는 다윗,,,,
오늘 말씀을 읽고 지난 2주간 동안, 다윗을 <오늘 미사의 독서말씀>을 따라 묵상해 온 사람들은, 이제 주마등처럼 다윗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가지 않는가!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역사의 한 획을 긋고 가는 다윗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이 되니, 바로 이런 성경의 인물을 통해, 교회는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게끔 도와 주고 주는 것이다.
다윗은 수많은 전쟁을 치루고 많은 피를 흘린 용장으로 나오지만, 그는 윤리적으로 타락한 간음자요, 살인자이며, 자신의 궁중의 집안도 제대로 못 다스리는 무능한 자이고, 열왕기 상권 1장에 보면, 나이 늙어 수넴 여자 아비삭을 끼고 자야 몸이 유지되는 신체적으로 결함이 많은 자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왕으로 불리는 것은 자신이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하느님 대전에 솔직히 시인하고, 하느님 대전에서 벌을 받고, 하느님의 절대적 자비를 비는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집회47.8)
"주님께서는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그의 힘을 대대로 들어 높이셨으며, 그에게 왕권의 계약과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왕좌를 주셨다." (집회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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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48,1-14)
집회서는 유다 지혜 문학의 총결산이라 한다. 이 책의 원문은 히브리어로 쓰였는데(BC180년경), 원 저자의 손자가 이를 그리스어로 옮겼고(BC130년경), 이 그리스어 본문이 현존하고 있다.
그리스어 본문의 필사본들은 대부분 이 책의 제목을 '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라 한다. 불가타(Vulgata: 라틴어성경)에서는 '에클레시아스티쿠스'(Ecclesiasticus)라고 하였고,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리베르 에클레시아스티쿠스'(Liber Ecclesiasticus; 교회의 책)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치프리아누스 시대 이후 서방 그리스도교에서 새로 입교할 사람들을 교육할 때에, 이 책의 가르침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우리말 '집회서(集會書)'도 이 불가타와 서방 교회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오늘 독서 말씀은 하느님의 영광과 조상들의 올바른 삶을 기리는 내용중에 일부이다. 저자는 44-50장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인물들을 하나하나 나열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임금, 현인, 예언자, 사제들이다. 집회서 저자는 사제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특히 아론과 대사제 오니아스의 아들 시몬에 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역사의 인물들에 대한 평은 찬미와 권고와 기도로 마무리한다.(50,22-24)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48,1) '엘리야'란 이름은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다'는 뜻이다. '불','횃불'의 표상은 여기서는 '사랑' '열정' 혹은 '심판'의 의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 들였고"(48,27)란 말씀은 48장 3절의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와 연결이 되어 있다. 가뭄 예언과 관련된 말씀 (1열왕17,1 : 18,1-3. 참조:1 8,45)이다. 하늘 문을 닫고 여는 하늘의 신, 풍요다산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던 아합왕과 이스라엘의 변절된 신앙에 대한 질타로 가뭄이 예언되고, 그 결과로 기근(굶주림)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가뭄을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진짜 하늘(햇빛과 비)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48,2ㄴ)는 것은 카르멜산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키손천에서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사로잡아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1열왕18,40) 48장 3절에 "세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열왕기 하권 1장에 아하즈야왕이 자기 옥상 방의 격자 난간에서 떨어져 다친 후, 하느님을 찾지 않고 사자들을 보내어 에크론의 신 바알 즈붑에게 가서 병의 회복에 관한 문의를 하라고 명령한 것에 대한 벌(심판)의 이야기이다.
두 차례나 엘리야가 예언한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인 대장과 부하 쉰 명을 삼켜버린 사건을 말한다.(2열왕1,10ㄷ.12ㄷ) 이 두 번과 450명 바알 예언자들과의 카르멜산 대결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린 사건을 말한다.(1열왕18,38)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48,9)라는 말씀은 엘리야와 엘리야 영의 두 몫을 청하는 엘리사의 이별이야기에 나온다.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갈라 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에 실려 올라간 사건을 말한다.(2열왕2,11) 여기에 대해서는 어제 독서 말씀에서 충분히 설명하였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8,10)
이 구절은 말라기 3장 1절과 23절에 있는대로, 죽지 않고 산 채로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예언자가 하느님이 세상을 심판하기 직전에 다시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고 열두 부족을 재건할 거라는 말씀이다. 엘리야는 종말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 메시아의 선구자(선주자)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세례자 요한에 이어 예수님이 활약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세례자(=엘리야)가 예수(=메시아)의 선구자(선주자)라는 입장을 취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말라3,1)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려치지 않으리라." (말라3,23-24)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집회48,1-4.9-11)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48,1)
'엘리야'란 이름은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다'는 뜻이다. '불','횃불'의 표상은 여기서는 '사랑' '열정' 혹은 '심판'의 의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 들였고"(48,27)란 말씀은 48장 3절의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와 연결이 되어 있다. 가뭄 예언과 관련된 말씀 (1열왕17,1 ; 18,1-3 ; 참조18,45)이다.
하늘 문을 닫고 여는 하늘의 신, 풍요다산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던 아합왕과 이스라엘의 변절된 신앙에 대한 질타로 가뭄이 예언되고, 그 결과로 기근(굶주림)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가뭄을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진짜 하늘(햇빛과 비)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48,2ㄴ)는 것은 카르멜산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키손천에서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사로잡아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1열왕18,40).
48장 3절에 "세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열왕기 하권 1장에 아하즈야왕이 자기 옥상 방의 격자 난간에서 떨어져 다친 후 하느님을 찾지 않고 사자들을 보내어 에크론의 신 바알 즈붑에게 가서 병의 회복에 관한 문의를 하라고 명령한 것에 대한 벌(심판)의 이야기이다.
두 차례나 엘리야가 예언한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인 대장과 부하 쉰 명을 삼켜버린 사건을 말한다(2열왕1,10ㄷ.12ㄷ). 이 두 번과 450명 바알 예언자들과의 카르멜산 대결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린 사건을 말한다(1열왕18,38).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48,9)라는 말씀은 엘리야와 엘리야 영의 두 몫을 청하는 엘리사의 이별이야기에 나온다.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갈라 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에 실려 올라간 사건을 말한다(2열왕2,11).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8,10)
이 구절은 말라기 3장 1절과 23절에 있는대로, 죽지 않고 산 채로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예언자가 하느님이 세상을 심판하기 직전에 다시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고 열두 부족을 재건할 거라는 말씀이다.
엘리야는 종말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 메시아의 선구자(선주자)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세례자 요한에 이어 예수님이 활약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세례자(=엘리야)가 예수(=메시아)의 선구자(선주자)라는 입장을 취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말라3,1)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려치지 않으리라." (말라3,23-24)
제8주간 토요일 제1독서(집회51,12ㄷ~20ㄴ)
"내가 아직 젊고 떠돌이 생활을 하기 전에, 나는 기도 가운데 드러내 놓고 지혜를 구하였다. 나는 성전 앞에서 지혜를 달라고 청하였는데, 마지막까지도 지혜를 구할 것이다. 꽃이 피고 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내 마음은 지혜안에서 기뻐하였다." (13~15)
집회서 51장 '부록'의 말씀은 1~12절의 '감사기도'와 13~30절의 '지혜 찬미'가 서로 교차되는 배열 구조를 가지고 있다.
행복과 번영을 위해 집회서 저자는 일차적으로 '지혜로운 행동'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주님께 대한 경외'이고, 하느님께 대한 경외야말로 지혜의 시작이요 완성이며, 하느님을 중심에 두는 삶이 가장 지혜로운 삶임을 줄곧 밝혔다.
이제 집회서의 마지막 부록에서도 '지혜 찬미'를 통해 지혜는 인생의 처음과 마지막까지에서도 줄곧 구해야 할 기도의 지향이며 내용임을 밝힌다. 말하자면, 지혜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사이며,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인생의 실패와 과오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은 삶에도 요령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 저것 모두 잘해보려고 욕심을 낼 때 삶은 산만해지고 핑계와 수다가 거품처럼 늘어난다.
우리 자신의 삶이 차분하지 않고 구름처럼 둥둥 떠 있는 듯 물 위에 떠 있는 듯 출렁인다면, 우선 내 자신이 하느님의 계명과 질서를 잘 지키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자신에게 배당된 삶의 몫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요긴한 삶의 지혜이며, 이러한 근본 질서를 거부할 때 삶은 언제나 피곤하고 꼬이는 것처럼 여겨진다.
세상과 이웃이 나를 특별히 대해 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 스스로가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성소와 운명을 특별히 받아 들이고 사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집회서가 제시하는 지혜의 기술로 마음을 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