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장-50장 (독서묵상)

2015. 11. 6. 오후 1: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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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장-50장 (독서묵상)

 제13주간 수요일 제1독서(창세21,5.8~20)

하느님께서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그래서 하느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가르를 부르며 말하였다. "하가르야, 어찌 된 일이냐?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에 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일어나 가서 아이를 들어 올려 네 손으로 꼭 붙들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7~18) 

여기서 '아이' 해당하는 '나아르'(naar)이스마엘을 가리킨다. 창세기 21장 17절에서 하느님께서 들은 소리아이의 목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창세기 21장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스마엘도 어머니 하가르와 같이 울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울었던 이유는 행복했던 환경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서러움과 갈증에 지친 나머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고, 또한 어머니의 대성통곡하는 울음소리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들으셨다'에 해당하는 '와이쉬마'(waishima; and heard)의 원형 '샤마'(shama)는 단순히 '듣다' 뜻만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다', 들은 바를 '이해하다', '응답하다'는 뜻도 있는데, 여기서도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이스마엘의 심정을 살피시고 어떤 조치를 취하실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두려워하지 마라'에 해당하는 '알 티르이'(al thiri; do not be afraid)'전율하다', '무섭다'라는 뜻의 동사 '야레'(yare)에 일회적인 금지를 나타내는 부정사 '알'(al; not)이 함께 쓰인 하느님의 은총과 위로의 말씀이다. 

계속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 두려움을 없애라는 말씀이다. 이 말은 성경에서 두루 사용되었는데, 깊은 절망과 슬픔 가운데서도 겸손하게 하느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지금도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께서 찾아 오셔서 위로해 주실 것임을 보여 준다.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원문에는 이유를 보여 주는 '키'(ki; for)라는 단어가 나오므로, '왜냐하면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로 번역된다. 이것은 바로 앞의 문장과 연결하여 하가르가 이스마엘을 계속 돌보아 주고 붙들어 주어야만 하는 근거가 된다. 

또한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의 장래를 약속하셨던 하느님께서(창세16,10; 17,20) 이 구절을 통해 이 약속을 계속 이행하고 계심을 보여 준다. 결국 후에 이스마엘의 후손들의 영역이 하윌라에서 수르까지 확장된 것 (창세25,18)을 볼 때 이 약속은 성취된 것이다. 이처럼 이 구절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하가르에게 자식의 장래가 번성할 것을 재확인시켜 줌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용기를 심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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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창세22,1-19)

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2)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3)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6)

'하느님께서'로 번역한  '웨하엘로힘'(wehaellohim)에서 하느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한 것은 하느님의 절대성 즉 전지전능하심과 인격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느님께서 전지전능 즉 절대 능력과 지혜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도 '엘로힘'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명칭은 하느님께서 창조주 되심과 구원 역사를 주도하심을 보여주는 명칭이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내면을 몰라서가 아니라 확인하여 더 큰 기쁨을 누리시기 위해 몸소 그의 믿음에 대한 시험을 주관하고 계신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은 '엘로힘' 앞의 정관사 '하'(ha)가 붙은 데서 더 드러나는데,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셨던 바로 '그 하느님'이 앞으로 전개되는 시험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시험해 보시려고' '시험해 보시려고'로 번역한 '닛싸'(nissa)에서 '시험하다'에 해당하는 '나싸'(nassa)구약에서 36회 나온다. 그런데 이 단어가 사람이 주어일 경우에는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시험했을 때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탈출17,2.7). 따라서 모세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은 인간이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로 규정하여 금지 시켰다(신명6,16).

하지만 이 단어가 주어를 하느님으로 할 때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당신을 경외하는지 '알아 보시다'(test), '입증하다'(prove)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따라서 여기서 '닛싸'는 상대방을 잘못 행하도록 '유혹하다'(tempt)는 의미보다는 무엇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하다'(test)는 뜻을 지니고 있다.결국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숙과 오롯한 순종을 몸소 확인하시고, 또한 확증하시고자 시험대 위해 그를 올려 놓으신 것이다. 

일찌기 하느님께서 가나안 땅에 남은 이민족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판관2,22; 3,1.4). 또한 바빌론 대신들이  히즈키야에게 사절단을 보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히즈키야를 돕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시험하셨다(2역대32,31).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이러한 시험의 목적은 시험받는 자를 엄밀히 단련하여 그가 하느님을 더 잘 알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다(탈출16,4; 신명8,2; 시편26,1-3). 

마찬가지로 여기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진정한 의도는 이사악을 죽이는데 있지 않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지를 알아보는 데 있다(창세22,12).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신앙을 얼마나 크게 성장시키고 또 얼마나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하시는가를 생각해야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그 명령에 긴장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만든 모든 윤리, 도덕, 인륜까지도 하느님의 말씀보다 앞세우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면 우리에게 닥친 모든 시험을 이길 힘을 갖게 된다(야고1,12).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서는 이런 시험의 도구가 될 이사악을 삼중으로 반복 강조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부성애를 깊숙히 자극하신다. '외아들', '독자'로 번역된 '예히드카'(yehidka)의 원형 '야히드'(yahid)는  구약에서 10번 나오는데, 8번이 '독자'라는 뜻으로, 2번이 '유일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편22,20; 35,17).

사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사악은 외아들(독자)이 아니었다. 그의 배다른 형 이스마엘이 있기 때문이다(창세16,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악을 '외아들'이라고 번역한 것은, '외아들'(독자)이라는 말이 '부모에게 소중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 3장 17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향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고 하셨다. 이것과 병행하는 요한 복음 3장 16절과 18절은 '외아들' 이라고 했다. 이처럼 '독생자' 또는 '독자'의 의미신구약에 있어서 모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부모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했던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려는 의도만이 아니고, 모리야 산에서 이사악을 죽여서 제물로 삼으시려고 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아들인 예수님을 갈바리아 산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아 희생제물로 죽이실 것을 미리 보여 주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었다(요한3,16). 

또한 '사랑하는'으로 번역된 '아하브타'(ahabtha)에서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아하브'(ahab)라는 말은 단순히 '좋아하다'는 뜻 이상으로 '바라다', '갈구하다'(시편40,17), '기뻐하다'(이사56,10)란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이 표현 속에서 이사악에 대한 아브라함의 지극한 부성애와 아들로 인해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던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 강조되어 있다.

하느님 당신 스스로가 이사악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약으로 주어진 유일한 후손인 그의 아들 이사악모리야 산에서 제물로 바치하고 하셨던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향하여 오직 당신만이 그들의 가장 큰 희망,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시편16,2).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원문의 '웨하알레후~레올라'(wehaallehu ~ leolla)를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그를 태우는 제물로 바치라'(sacrifice him ~as a burnt offering)가 된다. 하느님께서는 번제의 통상적인 제물인 정결한 짐승들과 새들(창세8,20)대신,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신 아들 이사악을 온전히 태워 번제로 드릴 것을 요구하셨다.

한편 '번제'를 뜻하는 '올라'(olla)'올라간다'를 뜻하는 '알라'(all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이것은 희생물을 태운 연기를 하늘로 올라가게 해서 하느님께서 향내를 맡으시도록, 하느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리는 제사의 한 방법이다(창세8,20).

창세기 22장 6절에 불과 더불어 칼을 준비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외아들 이사악을 죽여 목과 손과 발을 자르고, 각 부분의 각을 떠 번제단 위에 놓고 불을 붙여 바치는 번제의 과정을 조금도 차질없이 마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는 데서 드러나지만, 이것은 단순한 영적인 복종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이해와 상식을 초월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온전한 헌신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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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주간 토요일 제1독서(창세27,1~5.15~29)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29)  

'너를 섬기고'로 번역한 '야아브두카'(yaabduka)의 원형 '아바드'(abad)'일하다'(탈출20,9), '봉사하다', '섬기다'(1사무4,7)의 의미이다. 또한 '무릎을 꿇으리라'로 번역한 '웨이쉬타하우'(weishithahau)의 원형 '샤하'(shaha)'숙이다', '굽히다', '엎드리다'(이사51,23)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강조 재귀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경우 '샤하''하느님께 기도로 영광돌리다', '하느님께 경의를 표하며 절하다' (1열왕1,47)는 뜻도 있지만, '사람을 향해 존경과 경의를 표시하다'(시편45,12)는 뜻도 가진다. 따라서 이 구절은 장차 뭇 민족들이 야곱 후손들을 위해 노동과 수고로 봉사하며 또한 야곱 후손들이 이방 민족들로부터 크게 존경과 영광을 받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이 예언대로 야곱의 후손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다윗과 솔로몬 때는 이웃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크게 융성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혈육적인 야곱 후손인 이스라엘만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영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즉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된 것처럼 (탈출19,5.6), 야곱의 혈통을 이어받아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세력을 굴복시키시고, 우리를 임금의 사제단과 거룩한 민족,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삼으셨다(1베드2,9). 이런 차원에서 이 구절은 과거에 베풀어지고 끝난 축복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영적으로 야곱의 후손이 된 모든 하느님의 백성을 향한 축복의 약속이기도 한 것이다. 

시편 104장 15절 '행복하여라, 이렇게 되는 백성!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백성!'이라는 말씀대로, 주님을 하느님으로 알고 하느님만을 참된 신(神)으로 섬기는 백성은 이렇게 영육간에 크고 풍성한 축복을 약속받는 자들이 된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로 번역한 '오르레카'(orreka)에서 '저주하다'에 해당하는 '아라르'(arar)마음으로 증오하고 입으로 저주하는 행위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저주를 이루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훼방하는 모든 행위를 다 포함한다. 더군다나 여기서 '오르레카'(orreka)는 능동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현재 행위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야곱의 후손을 망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집요하게 저주하고, 끊임없이 행동을 훼방하는 것을 말한다. 이사악은 이렇게 계약의 자손들을 훼방하고 저주하는 자는 하느님께서 대신하여

저주를 내리고 심판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들의 발이 비틀거릴 때 복수와 보복은 내가 할 일,  멸망의 날이 가까웠고 그들의 재난이 재빨리 다가온다.'(신명32,35) 

이러한 약속은 신약 시대의 계약의 계승자인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계속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12,19) '저주를 받고'로 번역한 '아루르'(arur)는 수동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과거적 의미를 담고 있어서, 직역하면 '저주를 받았고'이다. 

하느님의 백성을 저주하며 훼방하는 자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전능하신 능력과 절대적 권세로써 심판하시므로, 이런 자는 이미 하느님의 저주 아래 있으며, 저주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이미 저주 아래 놓인 자를 직접 대적해서 실수를  자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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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주간 월요일 제1독서(창세28,10~22ㄱ)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면서, 두려움에 싸여 말하였다.  (16)"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17)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을 가져다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18) 그러고는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즈였다. (19)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로 번역된 '아멘 예쉬 예흐와 빰마콤'(amen yesh yehwah bammaqom)에서, '아멘'(amen)'진실로', '참으로'라는 의미인데, 주로 두려움이나 감격을 나타낼 때 사용되며, '빰마콤'(bammaqom)'이 장소안에,' '이곳에'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진실로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도다'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에는 죄인의 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난 야곱의 두려움과 함께 낯선 여행길에 하느님을 만난 야곱의 넘치는 감격이 표현되어 있다. 야곱은 하느님께서 브에르 세바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들판인 이곳 베텔에도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격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근동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여러 신들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각 신들은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지역 신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 지역을 벗어나면 지금까지 섬기던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지역 신 개념에 익숙해져 있었던 야곱이 하느님께서 어느 곳에나 계심을 비로소 확인하는 감격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야곱은 지금까지 하느님을 알고 있었지만, 조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베텔에서 야곱 자신의 하느님과 일대 일로 접촉하게 되어 야곱 자신의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잠언 8장 17절'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나는 사랑해 주고 나를 찾는 이들을 나는 만나 준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야곱처럼 하느님과 일대 일로 만나 그 하느님을 나의 마음에 모심으로써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게 해야 한다. 

한편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로 번역된 '웨아노키 로 야다티'(weanoki lo yadathi)에서 1인칭 대명사인 '아노키'(anoki; 나는)가 독립적으로 쓰인 것야곱이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알지'로 번역한 '야다티'(yadathi)의 원형 '야다'(yada)지적으로  아는 것은 물론, 감정적으로 깊이 동조하고 있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까지 가리키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이며, 로'(lo)는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은 야곱이 하느님을 어느 지역에만 국한되어 계시는 지역신으로 알았고, 하느님을 마음속에 모시며 살아 오지 못했으며,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지 못했음을 베텔에서 하느님을 뵙게 되었을 때 깨달을 수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얼마나 두려운'에 해당하는 '마 노라'(ma nora)에서 '마'(ma)의문 부사로서 '어떻게', '얼마나 많이', '이 얼마나'란 의미이며, '노라'(nora)의 원형 '야레'(yare)'전율하다', '떨다'는 뜻으로 공포심에 사로잡혀 떠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하느님이나 부모, 임금, 성전과 함께 사용될 때는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고 크게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단순 재귀형 수동 분사로 사용되어 야곱이 현재 하느님을 뵌 것에 대하여 스스로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야곱은 죄인된 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보고 만난 것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즉 종교적 경외심에 사로잡혀 크게 떨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집'이라고 번역된 '뻬트 엘로힘'(beth ellohim)에서 '집'에 해당하는 '빠이트'(baith)는 '짓다'(욥기27,8; 코헬렛2,4), '세우다'(룻기4,11; 예레45,4)라는  뜻이 있는 '빠나'(bana)에서 유래하며 일차적으로는 '세워진 집'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단어가 임금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궁전'(2열왕21,18; 1역대14,1), 하느님과 관련될 때는 '성전'(2열왕16,18; 1역대29,3)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 야곱이 하느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곳은 당시 성전 건물이 세워져 있던 곳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빈 들판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그 장소를 하느님의 집, 즉 성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야곱이 바로 그 들판에서 하느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처험 하느님의 집, 즉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임재하시고 하느님께서 간택한 백성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아무리 훌륭하게 지은 건물이라도, 그곳에 하느님께서 임재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장소는 한낱 건물에 지나지 않을 뿐, 결코 성전이 될 수 없다(이사1,12). 그리고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신다면, 우리 몸도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음을 코린토 1서 3장 16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밝히고 있다. 

한편 야곱이 하느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집', '뻬트 엘로힘'이라고 부른 곳은 원래 '루즈'(luz; '편도나무'라는 뜻; 이 지방에 편도나무가 있었기 떄문에 붙여진 지명)지방이었다. 그런데 야곱이 이곳에서 하느님을 시중드는 천사들은 물론 하느님의 뵙고 하느님께로부터 계약의 말씀을 들은 이후로 '뻬트 엘로힘'의 축약형인 '뻬트 엘', 즉 '베텔'(bethel)로 불리게 되었다(창세28,19).

'기둥으로 세우고 ~ 기름을 부었다' (18) 히브리인들은 사람이나 물건을 거룩하게 구별할 때 기름을 붓는 관습이 있었다. 여기서 야곱은 자신이 하느님을 만나는  꿈을 꿀때 머리에 베었던 돌을 취해 성별(聖別)하기 위해 기름을 부었다. 야곱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고대인들에게 흔히 행해졌던 우상 숭배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임재를 기념하고 길이길이 기억하기 위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베텔은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과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이며(창세12,8), 직계 조상인 야곱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속해 있는 곳이다.


제14주간 화요일 제1독서(창세32,23~33)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다.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5~27)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의 삶을 청산하고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한다. 말하자면 지금은 타향 생활 20년만에 드디어 다시 고향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야곱이 집에 돌아가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제일 장애가 되는 것이 자신의 형 에사우를 만나는 두려움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야곱의 삶을 보면, 그가 한번 마음 먹은 것은 안되는 일이 없었다.  치사한 방법으로 기어이 장자의 권한도,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도 독차지했고, 마음에 둔 여인도 끝까지 참아서 결국에는 아내로 맞이했었다. 야곱은 목표를 한번 정해 놓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목표를 반드시 관철시키는 불패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제 귀향을 앞두고, 장애와 자기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야곱은 형 에사우가 복수의 칼을 들고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형 에사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소위 '뇌물'을 준비하여(창세32,14~23) 미리 보낸다. 야곱은 밤에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이끌어 야뽁 강을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낸 뒤(창세32,24) 이제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제일 먼저 형 에사우에게 전령을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고, 형 에사우의 마음을 떠 본다(창세32,4~6). 형 에사우가 장정 사백명을 거느리고 마중 나온다니까 야곱은 겁을 내어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 뒤, 인간적인 방법으로 형을 만날 준비를 한다(창세32,10~22).

형 에사우에게 바치는 뇌물의 양이 많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여차하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도망갈 준비까지 갖춘다. 뇌물을 종들의 손에 한 떼씩 나누어 들게 하는데, 그것을 거리를 두어 행렬지어 가게 하고, 레아보다도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아들 요셉을 제일 뒤에, 야곱의 자신의 곁에 배치하여 가게끔 해놓는다.

그렇게 해놓고는, 이제 야뽁 강가에 혼자남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분명히 형 에사우를 만날 생각에 불안과 초조에 떨며 고민도 하고, 기도도 했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야곱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당면 문제 뿐만 아니라 자신 안의 근본적인 내면의 문제까지 정직하게 들여다 보게 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순간을 준비하셨고 기대하셨으며,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신다. 

'어떤 사람이'라고 번역된 '이쉬'(ish)'한 사람' 혹은 '어떤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야곱이 그 사람에 대하여 어떤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씨름을 하였다'로 번역된 '와예아베크'(wayeabeq)의 어근 '아바크'(abaq)본래 '먼지에 쌓이다', '붙잡다'는 뜻이다. 이것은 땅에서 먼지가 일어나 쌓일 정도로 서로 붙잡고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로써 '씨름하다', '맞붙어 싸우다'라는 뜻을 지녔다. 

원문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야곱과 하느님의 천사와의 씨름이 매우 격렬했음을 보여준다. 야곱이 엉덩이뼈(환도뼈)가 실제로 다치게 된 것과(창세32,26)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종합해 볼 때(호세12,2~4) 실제로 하느님의 사자와 야곱이 씨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씨름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고, 야곱이 하느님의 사자에게 매달려 울부짖으며 처절하게 간구하는 기도까지 포함된 씨름인 것이다. 야곱은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사자인지 몰랐으나, 그가 곧 하느님의 사자임을 알게 되었고(창세32,27), 자신의 생애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께 복을 간구했던 것이다.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여기서 '이길'에 해당하는 '야콜'(yakol) '승리를 얻다', '해내다'(1사무26,25) 라는 뜻 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다'(창세13,6), '우세하다', '성공하다'(1열왕22,22)

라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패배를 당했다는 말이 아니라 야곱이 매달리는 것을 꺽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필사적으로 매어 달리며 간구할 때 하느님께서 외면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원문은 '와익가 뻬카프 예리코'(yaigga bekap yereko)로서, 직역하면 '그러자 그는 그의 넓적다리 바닥을 쳤다'이다. 여기서 '넓적다리' 해당하는 '야레크'(yarek)'넓적다리'(창세24,2.9: '샅'탈출28,42; 민수5,22: '허벅지')외에 '허리'(탈출32,27; 시편45,4)로도 번역된다. 허리나 넓적다리는 다같이 인간의 생식기관과 관련된 부분이며, 생(生)의 원천을 상징한다(히브7,5).

또한 손바닥으로 치는 것은 깊은 슬픔과 수치와 애절한 회개의 표시였고(예례31,19;에제21,12), 서약을 행할 때에는 넓적 다리 아래에 손을 넣고 서약함으로써 서약에 대한 보증과 신실성을 표현했다(창세24,2; 47,29). 그리고 '바닥'에 해당하는 '카프'(kap)는 '우묵한 곳', '바닥', '구멍'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넓적다리의 우묵한 부분'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의 엉덩이뼈(환도뼈)의 정확한 부위둔부 아래쪽에 있는 좌골 (坐骨)로 엉덩이의 골반을 형성하는 좌우 한 쌍의 뼈(창세24,2)이다.

한편 '쳤다'에 해당하는 '나가'(naga)'닿다', '만지다'(창세3,3; 레위5,3; 다니8,5), '건드리다'(잠언6,29)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사자가 야곱을 때린 것이 아니라 단지 만지기만 하셨음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사자가 만지기만 했는데도 야곱이 무기력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능력의 위대성을 보여준 것임과 동시에 인간의 무능과 한계를 다시 한 번 보여준 것이다.  

'다치게 되었다' '다치게 되었다' 해당하는 '왓테카'(watheqa)의 어근 '야카'(yaqa)기본 의미는 '찢어지다', '탈골되다'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뼈가 살을 찢고 빠져 나가 탈골된 상태나 뼈가 부러진 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다치게 하신 이유육신을 믿고 살아온 야곱에게 육신의 나약함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야곱이 하느님을 상대로 씨름할 때 버텨진 힘의 근원을 치심으로써, 더 이상 하느님을 경쟁자로 여기지 못하게 하셨고, 꺾인 다리를 통해 그가 붙들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또한 생식과 관련된 엉덩이뼈를 다치게 한 것 앞으로 태어날 야곱의 후손들, 즉 계약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나를 놓아 다오'라고 번역된 '샬레헤니'(shalleheni; let me go)는 직역하면 '너는 나를 가게 하라'는 뜻이 있는 '샬라흐'(shallah)강조 능동 명령형이다. 하느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자신을 보내 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명령한 것이다. 하느님의 사자가 얼마든지 야곱을 뿌리치고 떠나갈 수 있음에도 굳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육신이 망가진 야곱이 과연 하느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시험하시고자 함이다.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로 번역된 '로 아샬레하카'(lo ashallehaka)'절대 당신을 보내지 않겠다' 뜻인데, 강한 금지를 나타내는 '로'(lo)'샬라흐'(shallah)강조형 능동 미완료가 사용된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야곱은 축복하여 주지 않는 한, 결코 보낼 수 없다는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여 전달한 것이다.  

이러한 야곱의 억지에 가까운 요구는 자신과 씨름한 상대가 하느님의 사자이며, 하느님의 사자의 축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창세37,3-4.12-13ㄷ.17ㄹ-2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18~20)

'음모를 꾸몄다'에 해당하는 '와이트낙켈루'(waithnakellu; they plotted; they conspired against)에서 원형 '나칼'(nakal)'사기하다', '죽이다'(말라1,14), '유혹하다', '속이다'(민수25,18)는 뜻을 가진다. 여기서는 재귀형이 쓰였는데, 이것은 '악한같은 일을 꾀하다', '망나니같은 행동을 하다'라는 뜻이다.

요셉이 다가오기 전에 그의 형들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 이같은 뜻을 가진 단어가 쓰인 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의 생각이 악하며, 또한 그같은 일을 저지르기로 그들이 마음에 작정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살인하기 전에 화내지 말라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과 맥을 같이한다. 뿐만 아니라 고향으로부터 100km가 넘는 지역에서 동생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악한 계략을 먼저 마음에 떠올린다는 것은 요셉을 향한 그들의 미움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에 해당하는 '힌네 빠알 하알로모트 할라제 빠'(hinne baal hahallomoth hallaze ba; (Behold) here comes that dreamer!) 에서 '빠알'(baal)'주인'(탈출22,7), '남편'(2사무11,26), '소유자', '주인'(욥기31,39) 등의 뜻이 있다.

그리고 본문 끝에 나오는 단어 '할라제'(hallaze)는 새 성경에 번역되어 있지 않는데, 형용사로서 '저쪽에' 혹은 '이리로'(here; this)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보라 꿈들의 주인이 저쪽에 있다'이다. 이것은 형들이 요셉의 꿈을 언급하면서 그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다가오는 요셉이 들을 수 있는 거리에까지 접근했을 때, 먼 여정과 방황으로 인하여 지치고 초췌해진 동생의 형편없는 모습과 꿈 속에서 묘사했던 요셉 자신의 고상하고 당당한 모습을 요셉으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해서 스스로 자기 꿈에 대해 좌절과 불신을 갖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 37장 20절'자'에 해당하는 '웨앗타'(weathah)의 원형 '앗타'(athah)'시간'을 뜻하는 '에트'(eth)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과거나 미래와는 대조되는 현재(new), '지금'(여호14,11)이라는 시점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말하자면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죽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생각을 실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지금'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이야기하자'로 번역된 '레쿠'(leku; come) '오다' 뜻이 있는 '할라크'(hallak)의 복수 명령형으로서 '우리 ~을 합시다'라는 뜻을 가져서 앞의 '웨앗타'(weathah; new)와 어울려 매우 선동적이고 긴박감 넘치는 광경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 37장 19절에서는 이 행동의 선동자가 '서로'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볼 때 요셉의 형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저 녀석을 죽여서'에 해당하는 '웨나하르게후'(wenahargehu)원형 '하라그'(harag)'살육하다', '도륙하다', '죽이다'(창세20,4)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창세기 37장 18절'무트'(muth; '죽이려는')와 비교해 볼 때 사람을 죽임에 있어서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더욱 더 강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이것은 분노와 원망이 가득차 사람을 처절하게 죽이고자 할 때 사용하는 강한 단어이다.

창세기 37장 초반부터 형들이 요셉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미움이 억제되지 않고 오히려 크게 증폭되어 가고 있다가 결국 자신의 형제를 참혹하게 죽이고자 계획하는 데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첫 시점에서 동생 아벨을 미워하다가 동생을 살인하여 죄의 종이 되어 버린 카인의 악이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창세4,7; 갈라5,16참조).

그리고 '던져 넣고'에 해당하는 '웨나쉴리케후'(wenashillikehu)의 원형 '살라크'(shallak)'던져지다'(아모8,3), '쫓아내다'(2열왕24,20)의 뜻이 있다. 이 단어가 여기서는 사역형으로 사용되어 쓰레기를 버리듯이 구덩이에 요셉의 시체를 버리려고 하는 형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요셉에 대한 분노의 깊이를 짐작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최소한의 인간적인 양심과 도덕마저 바로 이 순간에 모두 사라져 버렸음을 보여 준다.

또한 가나안 땅은 다양한 기후와 지형이 있어서 산악 지대, 평야 지대, 계곡, 사막등이 혼재하는 곳인데, 요셉이 형들을 찾아 떠난 헤브론에서 세켐까지의 거리는 대략 100km가 되며, 산지대로 연결된 지역으로 여러 종류의 짐승이 살았다. 

더욱이 여기서 '사나운 짐승'으로 번역된 '하야 라아'(hayah raah)'야생 동물'을 뜻하는 히브리어 관용구이다. 따라서 형들의 계획은 죽이려는 것 뿐만 아니라 살인을 행한 후 시신을 처리하는 것까지도 생각하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다. 끝으로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는 원문의 뜻은  '그의 꿈들이 무엇이 될지를'이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당돌한 꿈 이야기에 심한 분노를 갖고 있었기에 조롱하는 어투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요셉을 죽이면, 임금이  되겠다던 요셉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1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창세41,55-59 ;42,5-7ㄴ ;7-24ㄱ)

"그때 요셉은 그 나라의 통치자였다.  그 나라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이도 그였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하였다."  (42,6) 

'통치자'로 번역된 '핫샬리트'(hasshallit; the governor) '샬리트'(shallit)절대 권한으로 '지배하다', '차지하다'(코헬2,19), '통치하다', '다스리다'((코헬8,9)란 뜻을 가진 '샬라트'(shallat)의 명사형으로 '주권자', '통치자'(코헬10,5), '다스리는 자', '권세자'(코헬7,19 ;10,5)를 뜻한다. 이러한 명칭은 요셉에게 주어진 '통치자', '총리', '재상'이라는 직분이 파라오가 요셉에게 이집트를 다스리기 위한 절대적 통치권과 강력한 행정 권한을 위임해 주었음을 의미한다.

이집트 출신이 아닌데다 지난 13년동안 종과 죄수의 신분이었던 약관의 요셉이 이집트 전체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재상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섭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 고대 세계에서 최강국이었던 이집트의 재상 요셉이 직접 곡식을 팔거나 곡식을 사는 사람들을 일일히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곡식 판매는 여러 지역에서 많은 관리인들과 실무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다(창세42,25; 44,1). 

그러나 곡물 매매에 관한 모든 결재는 재상 요셉의 주관하에 진행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집트 사람이 아닌 외국인의 경우에 곡식을 사기 위해서는 요셉의 결재와 허락이 필요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하느님께서 미리 계시한 것처럼 근동 지역 전체에 흉년이 들자 자신의 형제들도 곡식을 사기 위해 이집트를 방문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미리 이것에 대한 계획 세워 놓았을 것이다. 

즉 국경 수비대에게 가나안의 헤브론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을 우선 자신에게 데려오도록 하였거나, 곡식 판매 실무자들에게도 이런 사람들이 오거든 자신에게 연락하라는 등의 적절한 지시를 해 놓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형들은 재상 요셉 앞으로 무조건 나아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과 요셉은 곡식을 사기 위해 엎드려 땅에 대고 절하는 자와 곡식을 판매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의 관계로 만나게 되었다. 

한편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 나아와 절했다는 것일찌기 20여년 전에 요셉이 꾸었던 꿈이 이제 성취되는 것이다(창세37,6-11). 밭 한가운데서 형들이 곡식 단들이 빙 둘러서서 요셉의 곡식 단에게 큰 절을 하더라는 꿈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요셉에게 큰 절을 하더라는 꿈 이야기말이다.

창세기 42장 6절'절하였다'에 해당하는 '샤하'(shaha) 창세기 37장 7절, 9절, 10절의 요셉의 꿈 이야기에 나오는 '절하였답니다'(shaha)와 같은 단어이다.

창세기 43장 28절에 나오는 '절하다'는 뜻의 동사 '카다드'(qadad)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샤하'(shaha)를 사용한 것형제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것우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요셉에게 주셨던 꿈을 철저하게 이루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하여 요셉의 꿈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성취되어 간다(창세43,26.28).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창세46,1~7. 28~30)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46,3) 

 '나'라는 뜻을 가진 일인칭 대명사 '아노키'(anoki; I am)주어를 강조할 때 쓰인다.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신다.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에서 앞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하엘'(hael)정관사 '하'(ha)를 동반한 단수형이며, 뒤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엘로헤' (ellohe)은 복수형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나는) 그 엘이니 네 아버지의 엘로힘(이다)'이 된다. 

특히 하느님의 명칭 중 '엘'(el)과 그 복수형 '엘로힘'(ellohim)하느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특히 '엘'(el)은 '능력자'로 번역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너의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능력자 하느님이 바로 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시는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필요할 때 이렇게 친히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불안해 하는 야곱에게 능력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과 도움을 베푸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주시려는 사려깊은 배려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야곱의 아버지(이사악)의 하느님'으로 드러내시는 것은 이사악을 돌보시던 동일한 사랑으로 야곱을 돌보시겠다는 암시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로 번역된 '알 티라'(al thira)에서 부정어 '알'(al)바램, 소망(창세13,8; 판관19,23)이나 선택(잠언17,12)을 촉구하는 문장에서 사용되는 단어로서 권고적인 금지의 의미가 있다. 즉 강한 금지를 나타내는 '로'(lo) 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부정어이다. 따라서 '두려워하지 마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불신앙에 대한 책망이라기 보다 위로의 말씀인 것이다.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원문에는 '왜냐하면'으로 번역되어 이유나 근거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ki)로 시작된다. 본문의 서두에 '키'(ki; for)로 시작하며, 큰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는 말씀이 야곱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바로 그 이유임을 밝히고 있다.  이집트가 야곱의 눈에는 두려움의 땅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이집트의 풍부함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큰'으로 번역된 '까돌'(gadol; great)'강하다', '우람하고 크다'(신명2,10), '부유하다'(1사무25,2), '존귀하다', '위대하다'(2사무7,9)로도 번역되는 단어인데, 야곱의 후손들이 단지 그 수효가 많아지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실로 위대한 민족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과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창세12,2; 18,18) 이사악에게(창세26,4.24) 내리신 복이었고, 야곱 자신에게도 여러 번 확증시킨 적이 있는, 위대한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는 복에 대한 약속을(창세28,3.14; 35,11), 바로 지금 내려가게 될 이집트에서 이루실 것임을 다시 한번 알려주는 것이다. '그곳에서'로 번역된 '샴'(sham)'장소'를 나타내는 부사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 즉 이방인의 땅에서 430년간 나그네로 살게 될 것이지만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는 그 약속이(창세15,4.5.13.14) 성취될 장소가 바로 이집트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나안 지역의 남방 경계선인 브에르 세바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야곱에게 이집트가 바로 약속 성취의 장소임을 분명히 지적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야곱에게 있어서 큰 아픔을 주었던 요셉의 실종이나 기근이 하느님의 오묘하신 뜻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가 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믿는 이들은 어려움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발견해야 하고, 바로 '그곳에서'(샴) 하느님의 역사(役事)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연중14주간토요일 제1독서(창세49,29~31.33; 50,15~26ㄱ)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50,19) 

요셉과 형들은 아버지 야곱의 장례식을 마치고 이집트로 돌아온다. 대개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허탈하다. 죽은 사람의 유물과 흔적만 남아 있고, 남은 자들은 외로움을 느낀다. 장례식을 치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요셉의 형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아버지 야곱의 장례식이 끝나자 형들 마음에는 보호막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버지 야곱이 자신들의 보호막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느끼는 요셉과 자신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에 대해 안심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까 불안해졌다.

창세기 50장 15절에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보고, '요셉이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모든 악을 되갚을지도 모르지'라고 말한다. '되갚았다'는 것도 아니고, '되갚을지도 모르지~되갚지는 않을까?' 하며 고민한다.

그래서 창세기 50장 16절에 '아우님의 아버지'라는 표현에도 나타나지만, 아버지 야곱을 근거로 해서 보호를 받아 보려고 하고, 야곱을 통해서 요셉의 용서를 얻으려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형들이 보인다.

급기야 요셉이 모른는 사실 한가지, 즉 '너의 형들이 네게 악을 저질렀지만, 제발 형들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해 주어라'고 아버지 야곱이 유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유언을 진짜로 했는지 성경에 언급이 없으니 모르나, 만약 이런 유언을 정말 했다면, 야곱이 왜 요셉에게 말하지 않고, 형들에게 말했을까?

형들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렇게까지 하고, 직접 와서 요셉에게 엎드려 스스로 요셉의 종이라 고백한다.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지 못할 죄란 걸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들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운다. 아직도 자신의 형들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진정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래서 다시 창세기 50장 19절에 요셉은 형들에게 공식으로 용서를 선포하고, 이 모든 일들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고 안배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마음과 시선을 둘 것을 충고한다.그리하여 이제 요셉의 유골을 들고 가나안으로 향해가는 출애굽(Exodus)의 전망이 펼쳐진다(창세50,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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