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키엘서(독서묵상)

2015. 11. 9. 오전 8: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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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서(독서묵상)

월요일 제1독서(에제1,2~5.24~28ㄷ)

"그들의 머리 위 궁창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어좌 형상이 있고, 그 어좌 형상 위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  내가 또 바라보니,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 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아래쪽은 불처럼 보였는데,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26~27) 

본문은 궁창 위의 한 아름다운 어좌의 형상에 대한 묘사이다. 어좌가 궁창 위에 있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나타낸다. 궁창이 모든 피조 세계를 하느님의 영광의 어좌 아래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존재의 초월성과 위엄성을 과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궁창 위의 세계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후서 12장 1~4절에 기록한, 그가 환시중에 다녀온 셋째 하늘이며, 사도 요한이 묵시록 4~6장에서 기록한, 열린 문을 통해 들어가는 천국과 동일하다.

에제키엘은 그 궁창 위에 어좌의 '형상'이 있다고 기록한다. 이 형상은 그것이 이 땅에 있는 왕들이 앉는 궁전의 어좌(throne)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이지 정확히 그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 어좌 형상의 모양이 마치 청옥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청옥'에 해당하는 '에벤 쌉피르'(eben saphir)라는 단어는 대부분 영역본에서는 푸르스름하며 투명할 뿐 아니라 광채를 발하는 보석'사파이어'(sapphire stone)로 번역하였다. 하느님의 어좌를 이 보석에 빗댄 것은 그 어좌의 거룩함과 순결성부각시켜 표현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한편 어좌 위의 한 형상이 있으며,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는 것은 정확하게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에제키엘이 목격한 존재가 이 지상의 사람의 모양을 닮았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 이 형상은 강생(육화; Incarnatio)하기 전, 천상에서 신적 신분으로 존재하셨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아담'(adam)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자신의 형상과 모습대로 만든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단어이다(창세1,26). 이 동일한 단어가 어좌 위에 계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다는 것그가 장차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강생(육화)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필리2,8). 

'내가 또 바라보니,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사람 모양 같은 형상, 즉 강생(육화)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다니엘티그리스 강가에서 보았던 그 형상과 외관이 유사하며(다니엘10,5.6), 에제키엘서 8장 2절에 기록된 주님의 권능의 현현을 묘사한 것도 유사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것은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하느님의 모습(1티모6,16)을 연상시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여기서 '불'에 해다하는 '에쉬'(esh)육신을 가진 인간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위엄과 두려움, 심판 등을 상징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사방이'란 표현은 그 사람 모양의 형상이 온통 불 같은 것으로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

또한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에 해당하는 어구 '케엔 하쉬말'(keen hashimal)에제키엘서 1장 4절에서도 사용된 어구로서, 문자적으로는 '번쩍거리는 호박 같은 것' (like gleaming amber) 또는 '이글거리는 금속같은 것'(like gleaming metal)이란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이것은 사람의 육안으로 감히 쳐다볼 수 조차 없는 하느님의 영광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를 그대로 묘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적 존재 자체가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도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서 본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태양이 힘있게 비치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서 엎드렸다(목시1,16.17).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에서 이처럼 눈부신 광채가 비추는 것은 그가 빛 되신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기 때문이다(히브1,3). 그 자신 역시 그 빛을 반영하는 빛과 동일한 존재이신 강생 이전의 성자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요한1,9~12). 이러한 하느님의 영광의 현현은 그분의 찬란한 영광뿐 아니라 그분의 빛으로만 이 세상의 어두움이 소멸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요한8,12).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에제17,22~24)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  (22~24)

에제키엘서 17장의 결론 부분인 22~24절은 지금까지 주어진 비유의 연장으로서 주 하느님 주권에 의해서 선민 회복 예언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은 앞에서 제시된 어두운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키고도 남을 만큼 밝고 희망에 찬 예언이다.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앞의 예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먼 미래에 있을 일을 말하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에제키엘서 17장 1~10절 비유에서는 향백나무 높은 가지를 꺾는다는 표현이 제시된 후, 그것을 냇버들처럼 버들잎 사시나무처럼 큰 물 곁에 심었고, 그것이 키가 낮은 포도나무처럼 되었다고 서술한다(3~6). 그런데 본 단락에서 향백나무가 또 다시 언급되지만, 버들나무나 포도나무로 바뀌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해서 혹자는 이 단락의 주제를 '메시아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복의 약속'으로 정하고, 이 모든 예언이 미래에 구세주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렇다면 여기 언급된 향백나무의 꼭대기다윗 가문의 후손을 상징하고, 높은 가지 영원한 왕좌를 차지하실 메시아를 상징한다.

겸손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를 상징하는 연한 가지 무성하게 성장하고  열매를 맺어 크고 아름다운 향백나무로 자랄 때,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고 그 그늘에서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 오셔서 모든 죄인들을 대신해 희생 죽음을  당하시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축복을 누리도록 길을 열어 주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어 영적 혜택을 받을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만민에게 주 하느님께서는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하느님이신 것을 자신의 비천한 출생과 죽음, 영광스러운 부활의 생애를 통해 분명히 알리실 것이다. 이러한 예언으로 본장이 끝마쳐지는 것은 남부 유다 왕국의 치드키야 임금이 비록 이집트를 통해 복을 얻으려고 했지만, 진정한 복은 주 하느님께서 친히 제시하시는 통로를 통해 온다는 사실을 교훈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한편 본문에서 '내가'에 해당하는 '아니'(ani)는 강조적 의미를 함축하는 인칭 대명사이다. 본절에서 주 하느님('내가')의 행위는 에제키엘서 17장 3~4절에서 큰 독수리가 향백나무 높은 가지를 꺾는다는 것과 대조된다. 

에제키엘서 17장 3절 이하의 경우는 이스라엘 자손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지만, 주 하느님께서 그 높은 가지를 꺾어다 심는다는 표현은 하느님의 백성이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메시아를 통해 복을 내리시기 전에 먼저 즈루빠벨(기원전 597년 제1차 바빌론 유배 때 끌려간 남부 유다의 마지막 임금인 여호야킨의 손자; 2열왕 24,8~17; 25,27~30; 하까이2,23)이라는 다윗의 후손을 바빌론 포로지에서 꺾어 이스라엘 고토에 심으시는 일을 행하실 것이다. 지만 즈루빠벨은 주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그 구원사업의 최종적 주역은 아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직도 그 높은 가지 끝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실 일이 남아 있으며, 그 연한 가지 즈루빠벨의 가계 혈통을 통해 태어나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지칭하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여기에서 주 하느님께서 친히 꺾어 옮겨 심으시는 '연한 것'에 해당하는 '라크' (raq)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나오는 햇순(새싹)같은 메시아 상징한다(이사11,1; 53,2; 즈카6,12).  이러한 '연한 것'이 하느님에 의해 심겨지는 '높고 우뚝한 산'에 해당하는 '하르 까보아흐 웨탈률'(har gaboah wethalul)은 그 위용이 다른 높은 산들과 비할 바 없이 탁월하며 높고 웅장한 산을 의미한다. 

이 산은 에제키엘서 17장 23절에서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으로 재차 설명되며, 이사야 2장 2절에서는 모든 산들 위에 뛰어나 종말에 모든 민족들이 모여들 하느님의 산(집)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지칭하며, 그 곳에서부터 성령 강림이 이루어졌으며, 본격적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소수의 무리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극히 미약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 하느님의 살아계신 아드님, 곧 결코 멸하지 않는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분의 교회는 영원히 번성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23ㄱ) 주 하느님께서 심으시는 이 가지는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하느님을 향하여 무럭무럭 성장하여 수많은 가지들을 내고 많은 열매들을 맺어, 위풍당당한 향백나무로 우뚝 설 것이다.

이것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수많은 백성들을 일으키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지닌 분으로 온 세상, 모든 사람 앞에 높이 서실 것을 상징한다(필리2,6~11). 여기에서 '훌륭한'에 해당하는 '앗디르'(adir)는 단지 외모가 아름다운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몹시 존귀하고 풍채가 위풍당당하며 강력한 상태를 모두 아우르는 표현이다. 이것은 부활 후 승천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면모가 어떠한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라고 할수 있다.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23ㄴ) 본문의 주어인 '온갖 새'에 해당하는 '콜 칩포르 콜 카나프'(kol tsipor kol kanap)는 문자적으로 '모든 날개가 있는 작은 새'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후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겨자씨 비유 통해 그것이 심겨져 자라 큰 나무를 이룬 후에 온갖 새가 와서 그 그늘에 깃들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르4,3; 마태13,32).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 그 분이 이루신 구원 사업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으며 참된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쉼을 줄 수 있는 이 큰 나무는 작은 겨자씨 하나로 시작하고, 높은 가지에서 취한 연한 가지 하나로 시작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천한 출생,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었던 그의 비참한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겪고 난 후, 예수님 자신과 그를 믿는 교회와 그의 복음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그를 믿고 선택받은 믿는 이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게 된다(마태11,29). 

이제 에제키엘서 17장 22절과 23절의 사건이 진행되는 가운데, 세상의 모든 나라들, 모든 민족들은 주 하느님께서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진정한 주권자이심을 분명히 보아 알게 될 것이 예언된다(24절).


제 19 주간 금요일(에제 16,1-15.60.63)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  지나가는 아무하고나 마구 불륜을 저질렀다.'(15) 

앞선 1~14절은 타락한 선민의 징계와 회복의 전과정을 조망하는 일련의 비유인 1~63절의 전반부이다. 여기서는 버려진 신생아처럼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이스라엘을 구하시고, 아름답게 키워 단장하시며, 왕후로 삼으셨던 주님의 은혜를 회상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15~52절은 본장 중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전반부의 긍정적인 내용과 달리 아주 부정적인 내용을 다룬다. 15~34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의 전적인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이에 보답하기는 커녕 그 은혜로운 결과를 악용하여, 남편되신 주님을 배반하는 가증스러운 일, 주님 보시기에 실로 구역질이 날만한 각종 더러운 죄악을 다른 이방 사람들 및 그 종교들과 결탁하여 범했다는 사실 다양한 비유로 매우 상세하게 진술한다.

여기서 '그런데 너는 ~믿고'에 해당하는 '왓티브테히'(wathibtehi)의 원형 '빠타흐'(batah)는 어떤 대상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로 인해 안정감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들이 믿는 대상은 바로 '네 아름다움'이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을 존귀한 존재로 삼아주신 주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아름다움과 명성을 의지하여 주님을 저버리는 배신의 죄악을 범했다.

그들은 자신에게 궁핍과 곤란을 겪던 자리에서 풍요와 번영을 누리는 자리로 옮겨 주시고, 수치와 굴욕의 자리에서 아름다움과 명성을 누리는 자리로 옮겨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기 보다 그들 자신으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를 맹신하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누리는 은혜의 결과물들로 인해, 하느님을 의지하는 자리에서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본문에서 '불륜을 저지르다' 해당하는 '왓티즈니'(wathizni)의 원형'자나'(zana)는 문자 그대로

유부녀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더불어, 또는 창녀가 남자와 더불어 간음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여기서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어, 이스라엘 자손이 남편되신 주님을 저버리고, 이방의 신들을 끌어들여,그 신들을 남편처럼 떠받들고 의지하는 죄를 범하였음을 나타낸다.

주님께서는 비천한 이스라엘에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자기 소유로 삼으셨지만(8절),  그들은 주님께 속하기를 거부하고 이방 민족처럼 되기를 바라며, 이방 민족과 교류하며, 그들이 섬기는 허망한 신들을 섬기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본문에서 '지나가는 아무하고나'에 해당하는 '콜 오베르'(kol ober)이스라엘에 큰 관심을 갖지도 않는 이방 사람들 혹은 그들의 우상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관심도 없이 그 주변을 지나갔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매혹되어 그들과 더불어 영적 간음을 저질렀음을 말하고 있다.실로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우상과 무차별적인 영적 간음(불륜)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60) 앞선 56~59절에서는 맹세를 멸시하고 계약을 배반한 예루살렘을 징벌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하실 것임을 강조했다. 이제 이어지는 60~63절은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영원한 계약을 세울 것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은 과거 어렸을때 맺었던 계약을 잊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를 철저히 배반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과 어렸을 때 맺으셨던 계약을 기억하고, 또한 당신의 은혜를 근거하여, 그들과 전혀 새로운 영원한 계약을 맺어, 그들을 새로운 백성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어렸을 때에 맺으셨던 계약은 사실상 8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혼인 계약이며, 이는 역사적 시각으로 볼 때, 시나이 계약(탈출19,5.6)이라 할 수 있다. 이 계약이 구원사적 발전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과 하느님께서 새롭게 맺으시는 계약으로 발전된다(1베드2,9). 

한편, '나는~기억하고' 해당하는 '웨자카르티  아니'(wezakarthi ani)는 22절과 43절에서 예루살렘이 과거 어렸을 때의 비참한 상황 및, 바로 그때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않았다고 한 진술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과거 자신들의 본래 상태와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며, 심지어 과거 하느님앞에 행한 맹세를 저버린 예루살렘은 계약을 배반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과거를 기억하시며 결코 이를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새로운 계약을 세우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소개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에는 '나는'에 해당하는 '아니'(ani)라는 단어가 강조되어 있다. 즉 앞선 59절까지는 이스라엘과 그들의 태도, 그들에 대한 심판에 강조를 두었다면, 이제 본절 이하에서는 주 하느님 자신과 하느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해 시각을 돌려 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영원한 계약'에 해당하는 '뻬리트 올람'(berith ollam)계약의 효력이 영원히 변치 않고 지속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에제키엘서에는 본절 외에 37장 26절 또 다시 나타난다. 

그곳 문맥에서 제시되는 영원한 계약은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무덤에서 나오게 한 후, 그들에게 새 영을 주어 살게 하신 다음, 그들에게 다윗이라는 이름의 왕을 세워 그들의 목자가 되게 하고, 주님의 법규와 규정을 지키게 할 것이며, 그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세우는 이 영원한 계약은 곧 '평화의 계약'으로 설명된다.  그 문맥에서 다윗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다윗의 계보에서 태어나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내어 놓으심으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가져 오시고(로마5,1.10), 그들과 당신 피로 세운 새로운 계약을 맺어(마태26,28), 영원히 그들을 통치하는 왕이 되실 것이다(필리2,9-11).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이 영원한 계약에 대해 예언한 바 있는데, 그 계약은 주님께서 과거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맺은 계약, 곧 돌판에 새겨져 계약궤 안에  넣어 두지 않고, 그 법을 그들의 가슴에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새겨 주어, 하느님께서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계약으로 제시된다(예레 31, 31-33; 33,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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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에제18,21~28)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1~23) 

에제키엘서 18장 21절에서 32절까지는 일시적 선악(善惡)을 불문하고 궁극적 선악(善惡)에 따라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함으로써 회개를 촉구한다.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하는 방도로서 '회개를 통한 구원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첫번째 단락인 에제키엘서 18장 21~24절은 사람의 과거가 현재나 미래를 지배할 수 없으며, 사람은 언제든지 새로운 운명으로 진보하거나 퇴보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의인은 더욱 의롭게 살고 악인은 악에서 돌이켜 회개할 것에 대한 기대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악한 죄를 저지른 악인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회개하고 주님 대전에  의(義)를 행할 경우, 심판을 모면하고 생명을 얻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 악한 삶에 빠져들 경우,과거에 행한 의로운 일은 주님 대전에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제기할 수 있는 공로가 전혀되지 못한다.

자신의 최종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는 주님 대전에 판단을 받는 당시의 영적 상태이며, 이것은 인간 자신이 과거에 행한 죄악의 족쇄를 풀 능력이 있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이와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으며, 누구에게든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허락하셨다. 그만큼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 회개를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돌아서서' 해당하는 '아슈브'(yashub)는 원래 가던 방향으로부터 완전히 돌이켜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슈브'(shub)의 미완료형으로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한 가정적 진술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가 어떤 것인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과거에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쫓아 행하던 그 길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향하여 걸어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 대전에 죄를 회개하고 돌아와 말씀대로 살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며,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고 하니, 그 얼마나 기쁜 소식이며 복된 소식인가?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실천한 정의'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과거에 저지른 죄악을 조금도 묻지 않으시고, 오직 지금 현재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만약 과거의 죄악을 따진다면, 현재 아무리 정의를 행한다 할지라도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과거에 죄악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서 정의를 행한다면,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이다. 결국 이러한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자 지금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과거의 죄악으로부터 돌이켜서 하느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보며 회개하여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악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24) 

앞에서 밝힌 대로 악인이 만약 과거의 죄악을 철저히 회개하여 심판을 모면하고  살 수 있다면, 이와 동일한 원리로 의인이 과거의 의로운 행위를 버리고 죄악의 길에 들어서 죄악을 행한다면, 그는 과거의 의로운 행위의 공로로 구원받지 못하고 현재의 악한 삶으로 심판을 받아 죽게 될 것임이 분명함을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과거의 공로는 현재의 심판에 그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함을 잘 드러낸다.

하느님의 심판 기준은 현재의 삶이지, 결코 과거의 삶이 아니다. 남부 유다 왕 우찌야 경우, 선견자 즈가르야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느님 대전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후에 왕권이 강화되자 교만한 마음이 들어 마침내 패악한 짓을  저지른 사건을 오늘 성경 본문을 이해하게 하는  실제적 사례로 들 수 있겠다. 그는 사제들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주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행하려다가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기는 벌을 받는다(2역대 26,1~21).

사도 바오로 코린토 2서 10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라는 말씀을 함으로써, 본문의 교훈을 상기시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영적 능력에 자만하지 말고,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가운데 겸손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주님이 제시하는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겠다.


  월요일 (에제 24,15-24)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조용히 탄식하며, 죽은 이를 두고 곡을 하지 마라.머리에 쓰개를 쓰고 발에 신을 신어라. 코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도 먹지 마라." 이튿날 아침에 내가 백성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 그다음날 아침에 나는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 그러자 백성이 나에게 말하였다."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일러 주지 않겠습니까?"(16-19) 

새 성경은 에제키엘서 24장 15절을 시작하면서,<아내의 죽음을 상징으로 삼다>로 제목을 달았다. 그러니까 예언자 에제키엘의 아내의 죽음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알면 오늘 말씀을 알아 듣게 된다. 

15절에 '네 눈의 즐거움' 21절의 예루살렘을 의미하는데(21절), 그것이 또한 에제키엘의 아내로 상징되었다(18절). 

여기서 '즐거움'(기뻐하는 것)으로 번역된 '마크마드'(maqmad)는 '원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영의 그리움'은 '마음에 아끼는'이란 뜻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힘의 영광이요, 그들의 눈에 원하는 바요, 그들의 마음에 아끼는 하느님의 성소 곧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실 것이며, 그들이 버려둔 자녀들을 칼에 맞아 엎어지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나 이제 너희의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의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  너희가 두고 떠나온 너희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21)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18)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17)는 것은 장차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할 환난이 거족적으로 일어날 것이니, 그때에는 죽음도 너무 흔하기 때문에, 누구나 그 죽음을 하나하나 애곡할 처지가 못되며, 그뿐만 아니라 그 환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만큼, 조의나 슬퍼할 필요조차 없는 심판인 것이다(예레 16,1-9 참조).

'이튿날 아침에 내가 백성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   그다음날 아침에 나는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18)에서 나타난 것처럼,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대변자였기에, 하느님께서 하라고 하시는데로 순종할 따름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대로 가감없이 그대로 백성에게 전하였으며, 예언자의 아내의 죽은 것은 예루살렘의 죽음을 상징한다.

여기서 보면, 예언자의 가족은 하느님의 일을 위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진리도 나타난다.

하느님의 종은 인정과 육정에 끌리지 말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그 가족을 아주 내 버린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일을 해야 한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외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바쳤다.    

"그러자 백성이 나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일러 주지 않게씁니까?'"(19) 유대인들이 에제키엘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남부 유다 백성을 살려 보려고 예언자의 아내가 죽게 되었다. 하느님의 지시와 명령으로 인한 그 사건에 대한 에제키엘의 순종이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남부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에제키엘 예언자의 예언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까지 사건을 발생시켰다.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의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 너희가 두고 떠나온 너희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한 것처럼 하게 될 것이다~ 

 콧수염을 가리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을 먹지도 못할 것이다.  머리에는 쓰개를 그대로 쓰고 발에는 신을 그대로 신은 채, 슬퍼하지도 울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죄 때문에 스러져 가면서 서로 바라보며 한탄할 것이다.  에제키엘이 이렇게 너희에게 예표가 되고, 그가 한 것처럼 너희도 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21-24) 

에제키엘이 하느님께 순종한 것처럼,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환난 가운데서 울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곧 그때에는 죽는 자들이 너무 많으니 만큼, 누구든지 그 죽은 자들을 하나하나 조의를 표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콧수염을 가리지도 못하고'(22)  유대인들은 슬퍼하는 표로 수염을 가리우는 풍속이 있었다. 수염을 가리우게 되면 입을 가리우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슬퍼하는 표적을 나타내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들이 가져온 빵을 먹지도 못할 것이다.' 곧 조객들이 가져오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뜻이다. 조상(弔喪)을 받지 말라는 뜻이다. 

'머리에는 쓰개를 그대로 쓰고'(23) 슬픔을 당한 자는 원래 쓰개를 푸는 것이었다. '발에는 신을 그대로 신은 채' 그 당시 슬픔을 당한 자는 맨발로 다니는 풍속이 있었다. '너희는 죄 때문에 스러져 가면서 서로 바라보며 한탄할 것이다.' 그들이 죄악으로 단하는 환난 때문에 쇠약해짐을 말한다.  그들은 슬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탄식할 뿐이고 울 수도 없다는 말이다.

'이 일이 일어나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24) 예언자의 예언이 성취된 뒤에는 백성들이 그가 누구였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제키엘은 하느님의 주권으로 소명을 받았고,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모두 '표징' 곧 하느님의 기이한 역사하심이란 사실을 그들이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예언의 성취는 위대한 일 중의 하나이며, 이같은 예언의 성취를 보는 자는 그 예언이 참되다는 것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에제키엘서 24장 <가마솥의 비유>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정결함을 원하신다. 하느님께서는 피흘린 도성, 녹슨 가마를 진노하셨다.남부 유다의 죄악은 음란함이었다. 우리는 영적이든지 육적이든지 음행을 버려야 한다(로마 1,24.26; 1테살 4,3-5; 잠언 5,18-21참조). 육적 음행은 영적 음행과 같이 간다. 하느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는 그의 계명도 지킬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꺽고, 하느님께 절대 순종해야 하며, 육적, 영적 음행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불결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빼앗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남부 유다 백성이 사랑하며 아끼던 예루살렘 성전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왜 그가 그 영광스러운 성전을 파괴시키실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죄와 불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이라도 하느님께서는 빼앗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아름다운 헤롯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셨다(루카21,5-6). 우리에게는 하느님보다 더 귀한 존재가 없어야 한다.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상이며 죄이다(마태10,37-39; 루카14,26-27.33참조). 우리는 하느님만을 만유위에 절대적으로 사랑하며 오로지 그의 계명을 순종해야만 한다.

세째로, 우리는 하느님을 미리 알아야 한다. 본문은 하느님의 징벌과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 유다 백성이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두번이나 말씀하셨다(24.27절). 하느님을 참으로 아는 자만이 죄를 버리고 의로움을 행할 것이다(1코린 15,34). 우리는 그의 징벌을 통해서가 아니고, 평소에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호세6,3.6; 요한17,3).  


화요일  (에제28,1-10)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2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사람의 아들' 이라는 의미를 갖는 '인자'(人子)에 해당하는 '뻰 아담'(ben adam)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을 지칭하는 말로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에제키엘로 하여금 하느님과 대조되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임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즉 에제키엘로 하여금 스스로의 유한함을 자극하고,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대변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에제키엘이 예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자가 '티로의 군주'로 제시된다. 여기서 '군주에게' 에 해당하는 '리네기드'(linegid)의 원형 '나기드'(nagid)는  직역하면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역대기 상권 12장 8절에서는 이스라엘 지파의 우두머리를 거리키는 '영도자'(족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역대기 상권 13장 1절에서는 다윗의 군대 장관(지도자)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고, 역대기 하권 28장 7절에서는 왕궁의 대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티로의 군주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왕'이라는 의미의 '멜레크'(melek)라는 단어 대신에, '우두머리'라는 의미가 강한 '나기드'(nagid)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티로의 군주가 진정한 왕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막대한 부와 근동에서의 영향력 있는 위치로 인해 교만해져,하느님의 자리에까지 오르려고 하는

교만한 티로의 군주를 폄하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티로가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비교적 규모가 작은 도시 국가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본문의 '나기드'(nagid)라는 표현은 티로의 군주가 세상 나라에서도 왕의 위세를 갖지 못한 일개 도시 국가의 우두머리에 불과하면서, 온 우주만물의 유일하신 통치자이시며 왕이 되신 하느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를 깨닫게 해주려는 목적으로 사용된 것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신이다.' 암몬과 모압과 에돔과 필리스티아에 대한 심판의 내용은 17절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의 에제키엘서 25장에 모두 함께 기록되었다. 반면에 티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내용에제키엘서 26-28장으로 무려 세 장이나 되는 많은 분량이다. 또한 이어지는 파라오와 이집트에 대한 심판의 내용29-32장으로 네 장이나 된다. 

티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내용과 이집트에 대한 심판의 내용에 이처럼 많은 분량이 할애된 것은 먼저 이 나라들이 당시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나라의 왕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특별히 신격화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 근동 중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서 왕은 신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존재로 여겨졌다. 신이 선택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 권위가 확보되었다. 반면 이집트에서는 왕 자신이 신적인 존재, 즉 신들의 집단 중에 속한 하나의 신으로 여겨졌다. 티로의 왕권의 개념은 본래 메소포타미아나 시리아와 유사했었으나, 이집트와의 밀접한 무역을 통해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무역을 통한 부와 영화를 얻게 되고, 국제 사회에서의 그 위상이 매우 높게 올라가게 됨으로 인하여 교만해져서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티로의 군주의 교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에 해당하는 '엘'은 민족들이 섬기는 일반적인 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탈출34,14), 구약성경에서는 거의 대부분 '하느님'(탈출34,14 ; 애가3,41)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티로의 군주는 민족들이 섬기는 신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신으로 선언하였을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를 당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은 오직 주 하느님 한 분 뿐이시지만(1코린8,4), 하느님께서 티로의 군주의 선언을 당신께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한편, 자신을 신으로 선포한 티로의 군주의 말은 하느님께 대한 도전이면서 동시에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당시 바빌론은 대제국 아시리아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형성해가는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바빌론은 고대 근동의 모든 국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개 도시 국가인 티로의 군주가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는 행위는 바빌론 제국의 왕의 통치를 거부하겠다는 의미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티로의 군주의 말은, 당시 근동의 사람들이 신의 거처라고 생각했던 장소를, 우가리트(Ugarit) 북쪽의 예벨 아크라(Jebel Aqra) 즉 페니키아 만신전에서 티로성으로 옮기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티로의 군주의 말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만족하지 못하고, 고대 세계의 정치,종교적 패권을 자신이 차지하겠다는 야심에 찬 공격적인 말이 된다. 이런 티로 군주의 교만한 언사는 곧 바빌론의 공격을 불러왔고, 이로 인해 티로는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며, 주변 나라들을 무시하고 교만할 뿐 아니라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선포하는 티로를 바빌론을 통하여 심판하신 것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 가운데에 앉아 있다' 티로의 군주가 본절 상반절에서 '나는 신이다' 라고 한 말은 자신을 신과 동등한 신분이라고 주장 것이고, 본문에서 '나는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 라고 한 말은 자신이 신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주장한 것이다. 즉 본문은 바다로 둘러싸여 어느 누구도 침략할 수 없는 완전한 곳으로서의 지리적 위치의 우월성만이 아니라 자신이 신적 존재라고 여겼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자리' 에 해당하는 '모샤브'(moshab)에는 역대기 상권 6장54절에서처럼 일정한 무리의 백성들이 거하는 주거지라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열왕기 상권 10장 5절에나 시편 107장 32절에서는 원로들이나 고위 관리들의 회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무엘 상권 20장 25절에서는 임금이 앉는 자리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경우 '모샤브'는 권력의 자리이고, 권력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는 자리란 의미이다.

또한 '모샤브'는 시편 132장 13절에서 주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이 경우 '모샤브'는 일개 나라를 다스리는 장소가 아니고, 온 우주 만물이 통치되는 절대 권력의 자리란 의미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좌정하실 수 있다. 

하지만, 티로의 군주는 자신이 앉는 일개 왕의 자리를 하느님의 자리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왕의 권력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위치에까지 오르겠다는 의미를 내포한 극도로 교만한 말이었다.

또한 티로의 군주는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 자리는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자리라고 했다. 여기서 '바다 한가운데에' 에 해당하는 '뼬레브 얌밈'(belleb yammim)이 27장 4절, 25절에서는 티로가 해상 무역의 중심지에 위치한 절대 강자로서 많은 부를 쌓던 자리를 상징하였다. 또한 이 자리는 요새와 같은 바위섬으로, 외세의 침략을 면할 수 있었던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27장 26절, 27절, 34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곳을 티로를 심판하시는 자리로 삼으셨다. 티로의 군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살 수 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과 군사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막강한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된 티로의 군주는 하느님의 자리까지 넘보았던 것이다.

티로의 군주는 바다 한 가운데에 있던 자신의 자리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왕의 자리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를 가졌었더라면, 그는 경제적 부흥의 원천이며, 군사적 방어막 역할을 했던, 바다 한 가운데에 있었던 티로 섬에서 왕의 자리를 잘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본문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레브'(leb)는 앞선 전반부에서 '한가운데' 라는 의미로 번역된 '레브'와 동일한 단어이다. 본절 상반절이 지적하는 티로의 군주의 죄는 자신이 거한 바다 '한가운데'(레브)의 자리를 신의 자리라고 한 교만이 죄였다. 

또한, 본문에서 지적하는 티로 군주의 죄는 자신의 '마음'(레브)신의 마음과 같다고 여기며 행동하는 교만의 죄이다. 이처럼 본절에서는 '레브' 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티로 군주의 교만을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성공과 영화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하느님처럼 여기는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에제33,7~9)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9)

에제키엘서 33장 8절에서는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경우일어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제시되었다.반면에 33장 9절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악인이 이것을 듣지 않았을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를 제시한다.

예언자가 악인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는데, 악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생명을 건질 수도 있고, 회개하지 아니하여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바로 여기에 예언자가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목숨을 걸고  악인들을 향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앞선 33장 8절과 9절의 결론예언자가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선포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죽지 않을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33장 7~9절에서 파수꾼의 비유에 대한 해석에제키엘에게 주시면서 예언자의 악인에 대한 회개의 메시지 선포 사명에 대해 강조하시는 것은, 다만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면 예언자의 목숨을 취하시겠다는 위협을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없으면, 악인은 회개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므로, 예언자는 반드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해서 악인이라도 회개할 기회를 갖게 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이라도 그가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자가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 이 악한 세상에 얼마나 절실한 일인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제1독서(에제34,1~11)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3)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4)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3)앞선 에제키엘서 34장 2절에서는 이스라엘 목자들로 비유된 남부 유다의 지도자들이 자신이 먹여야 할 양인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일면 소극적인 측면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어지는 본절(3절)에서는 남부 유다의 지도자들이 돌보아야 할 양인 백성들을 먹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잡아먹기까지 한 악행이 고발된다. 본문은 이스라엘 목자들이 살진 양을 잡아 가장 좋은 부분기름을 먹고 양털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지적한다.

양을 치는 목자가 양에게서 고기나 기름을 취하여 양식으로 삼고, 양털을 취하여 옷감을 삼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양으로부터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은 양을 성실하게 돌보는 목자에게만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목자들은 양들을 성실하게 먹이고 돌보지 않으면서, 양들로부터 자기들의 유익만을 취한 것이다.

이미 2절에 양떼를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고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3절 후반부에서 그 내용을 반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양들을 제대로 돌보아야 하는 목자의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 양들로부터 기름과 털을 취하는 목자의 권리만 행사하는 것이 문제이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불의인 것이다.

이런 악한 목자에 대한 비유는, 남부 유다의 지도자들백성들을 제대로 돌보고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연약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일을 행한 죄를 지적한 것이다(아모5,10~12; 6,4~6참조).

한편, 악한 목자들이 양으로부터 취한 '기름'에 해당하는 '헬레브'(helleb)희랍어 구약 성경 번역본인 70인역(LXX) 라틴어 번역본(Vulgata)'젖'이라는 뜻의 '할라브'(hallab)로 읽고 번역하였다.그래서 가톨릭의 새 성경은 '젖을 짜먹고'라고 번역하였다. 목자들이 양떼로부터 취하는 것이 주로 양털과 젖이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성경은 '기름'이나 '우유'(milk)로 번역한 것들이 많다.

어떤 학자는 원문에서 '기름'을 취했다는 내용이 살진 양을 잡았다는 내용보다 더 앞에 나와서는 안되기 때문에, 우리 가톨릭 새 성경처럼, 이것을 '젖'으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양을 잡아야 기름이나 고기가 나오는데, 그것을 먼저 취한 뒤에 양을 잡았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름'으로 번역된 '헬레브'를 '젖'이라는 뜻의 '할라브'로 읽든지 여부와 상관없이, 본문에서 잡은 양이 살진 양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문제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살진 양에게서는 털과 젖을 취할 뿐만 아니라 기름이나 고기까지 취하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본문을 가톨릭이 '젖'으로 번역하든, 개신교가 '기름'으로 번역하든, 이스라엘 임금들 또는 고관들이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그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세금으로 호의호식을 하였고, 많은 재산과 부를 가진 자들을 통째로 집어 삼키는 악행을 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4) 

이스라엘 거짓 목자들의 죄악을 고발하는 에제키엘서 34장 3~4절의 내용 중에서 34장 3절은 해서는 안 될 일을 범한 죄에 대한 지적이었다면, 34장 4절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에 대한 지적이 주로 제시된다. 

본절에 의하면, 목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여러 양들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양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고대 근동의 양치기들은 막대기와 같은 원시적인 무기를 가지거나 양치기 개를 데리고 도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창세31,39; 1사무17,34.35; 예레33,13).

율법에서도 목동이 돌보는 중에 양을 다치게 하거나 잃거나 한다면, 그것을 주인에게 그대로 배상을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탈출22,12.13). 위의 구약 성경의 대부분의 용례를 보면, 양을 직접 치는 사람은 그 양의 주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양치기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양이나 주인의 양을 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본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스라엘 목자들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양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자기 재산을 보전하는 일에 태만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함부로 다루고 피해를 입힌 악행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에제키엘서 34장 6절과 8절에서 하느님께서 이 양들을 내 양 떼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 

남부 유다 백성들은 남부 유다 임금이나 지도자들의 백성이 아니고, 하느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부 유다 지도자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하느님의 소유인 백성을 함부로 대하고멸망하게 한 악행을 행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악행이 양들의 본래 소유자되신 하느님의 진노를 자극하여 심판을 초래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가장 먼저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로 제시된다. 그 다음으로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란 지적이 나온다. 여기서 '약한 양'에 해당하는 '한나홀로트'(hannaholloth)'아픈 양'에 해당하는 '하홀라'(haholla)는 수동형과 능동형이란 점만 다를 뿐, 모두 동일한 원형 '할라'(halla)의 분사형이다. 

'할라'(halla)에는 '약하다'라는 의미도 있고, '병이 들다'(아프다) 라는 의미도 있다. 수동형으로 사용된 '한나홀로트'(약한 자)선천적으로 병이 들어서 쇠약하게 된 양을 의미한다. 이 양에 대한 처방은 강하게 해주는 것이다.  

능동형으로 사용된 '하홀라'(아픈 자) 현재 병이 들어 있는 상태 의미한다. 이 양에 대한 치료는 지금 걸려 있는 병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치료해 주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제시되는 '부러진 양'에 해당하는 '니쉬뻬레트' (nishibereth)의 원형 '샤바르'(shabar)'부서지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다리와 같은 신체의 일부가 부러져 탈골되거나 없어진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이 양에 대한 처방은 싸매여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음에 '흩어진 양'에 해당하는 '한닛다하트'(hannidahath)원형 '나다흐'(nadah)에는 '흩어지다'라는 이미가 있다. 양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양은 목자의 보호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곧바로 맹수의 위협에 노출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 양을 다시 양 무리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무관심하였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양'에 해당하는 '하오베데트'(haobedeth)원형 '아바르'(abar)에는 '멸망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들은 양 무리에서 떠나 있을 뿐 아니라, 거의 죽음 직전에 가 있는 상태의 양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돌보아야 할 양들의 상태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병이 들거나 쇠약해진 양들이다. 둘째는, 큰 상처가 나(크게 다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양들이다. 세째는, 양 무리를 떠나 있는 상태로 5절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위험에 노출되어 생명이 위협받는 지경에 직면해 있는 양들이다. 

에제키엘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양들이 처한 위험의 정도를 점층적으로 강화시켜 묘사하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양들을제시하며, 이들을 돌보기는 커녕 포악으로 일관한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의 행위를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에제키엘서를 대하는 청중이나 독자들은, 본절에서 양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묘사가 점점 심화되면서,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정도를 더해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런 극한 어려움에 처한 양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오히려 가중시키는 악을 행하는 목자들의 악한 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를 통해서 그들에게 마땅히 심판이 내려져야 함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왕 대축일 제1독서(에제 34,11~12.15~17)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15~16)  

에제키엘서도 유배를 겪은 다른 예언서들처럼 바빌론 유배라는 민족적 재앙의 의미를 밝히는데 주력한다. 유배는 하느님의 공정과 자애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를 유배로 징벌하시지만, 징벌 기간이 끝나면 이스라엘을 유배에서 풀어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백성 가운데 남은 자들을 약속의 땅으로 다시 불러들이시고, 그곳의 중심부인 예루살렘 도성에 새 성전을 세우셔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드높이실 것이다. 

에제키엘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1~24장)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고, 둘째 부분(25~32장)이스라엘의 원수 이방민족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며, 셋째 부분(33~48장) 유배자들에게 보낸 구원의 말씀이다. 

에제키엘서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사상을 갖고 있다. 바빌론인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한 것은 하느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신 일이라는 것이다(8~11장). 그러나 이 사건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잠시 동안만 떠나 있을 뿐,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의 기간이 다 채워지면, 적절한 때에 그분의 영광은 새로 마련되고, 성별된 성전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누가 참다운 이스라엘을 형성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바빌론에 유배를 갔다가 돌아온 이들임을 밝힌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민족을 재건하고 회복할 것이라고 한다(11,14~21).  한편, 오늘 제1독서의 말씀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목자와 양떼의 비유로 묘사된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여기서 잃어버린 양울타리 밖을 벗어난, 보이지 않는, 목자의 시야에서 사라진 양을 말한다. 흩어진 양울타리 안에 있으나, 제 자리를 벗어나 목자의 시선을 피해 따로 혼자 놀고 있는 양을 말한다. 부러진 양혼자 까불거나 헛디뎌서 움직이지 못하는 양을 말한다. 아픈 것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양을 말한다. 

기름지고 힘센 양 자기 멋대로 자라나서 목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양, 다시 말해서 자신이 목자가 된 양, 교만한 양을 비유적으로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양을 없애 버리겠다고 말한다. 야고보서 4장 6절에도, 잠언 3장 34절에도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고 되어 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영적으로 철이 들지 못해 다시 과거의 어둠으로 돌아갔으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용서와 구원을 받았으면, 우리는 과거를 잊지 말고, 더욱 더 겸손하게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만왕의 왕, 우주의 왕, 마음의 왕이신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교회의 달력으로는 한해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면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의 영적 자세로 한 해를 봉헌하자.



목요일 제1독서(에제36,23~28)

"나는 너희는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 가겠다.(24)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25)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26) 

앞선 에제키엘서 36장 21~23절은 하느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하여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는 의지표명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이 하느님의 이름의 거룩함을 회복하여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에 있음을 밝혔다.

이제 에제키엘서 36장 24절 이하 36절에서는 당신 이름의 명예 회복을 위한 선민 이스리엘의 회복에 대한 일방적 약속이 선언된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본절은 포로 귀환에 대해 묘사한다.

그런데 유배로 끌려간 포로민들을 바빌론으로부터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오는 지리적 이동과 정치적 해방은 하느님의 궁극적 구원의 과정에서 볼 때는 서곡에 불과하지만, 영적 새로워짐을 통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새 창조에 대한 묘사가 36장 25절부터 에제키엘서 마지막 절까지 계속하여 기록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본절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나 경제적 부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과 하느님 이름의 명예 회복에 그 초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25) 에제키엘서 36장 24절에서는 포로된 선민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 약속되었다. 36장 25절 이하 36절에서는 고국에 돌아간 후, 회복된 모습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약속의 형태로 제시되는 회복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자세와 태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36장 25절에서는 정결 의식을 소재로 해서 선민의 변화된 모습을 언급하고 있다. 이 정결 의식은 레위인들이 제사 의식을 돕는 일을 하기 전, 즉 직무에 임명되기 전에 앞서서 레위인들에게 속죄의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고, 레위인들을 속죄 의식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식이다(민수8,7). 

이러한 정결 의식은 에제키엘서 36장 17~19절의 내용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에제키엘서 36장 17~19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 이유가 그들이 부정한 행위로 땅을 더럽혔고,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그들이 땅을 더렵혔던 행위를 했던 자들이기 때문에, 정결 의식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36장 25절 후반부에서 '너희의 모든 부정에서'에 해당하는 '믹콜 투메오테켐'(mikol tumothekem)의 원형 '투메아'(tumea)17절의 '마치 달거리하는 여자의 부정과 같았다'란 표현에서 '부정'에 해당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또한 36장 25절 후반부의 '모든 우상에게서'에 해당하는 '우믹콜 껄룰레켐'(umikol gllullekem)이라는 표현에도 36장 18절의 '우상들 때문에'라는 표현과 동일하게 '껄룰'(gllul)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결론적으로 본절에서 '~으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민'(min)과 함께 사용되어 정결의식을 행하는 목적으로 기록된 두 가지 내용, 즉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의 정결과 우상 숭배로부터의 정결은 모두 에제키엘서 36장 17,18절에 기록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게 했던 두 가지 죄악과 정확히 일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제시되는 정결 의식은 가나안 입성을 위한 정결 의식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본절에서 제시되는 정결 의식은 단지 과거에 행했던 부정한 일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행한 과거의 죄에 대한 속죄 의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는 그런 잘못을 행하지 않는 자들로 변화시키기 위한 새로워짐(거듭남)의 의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으로부터 구출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지만, 이것은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는 부정한 일을 행하거나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는, 에제키엘서 36장 26절, 27절이 말하는 새로운 영과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로 씻어 정결케 하는 본절의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전서 6장 1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지 못할 온갖 죄를 행하던 이방인들이, 코린토 교회의 성도라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행위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의 의미하는 것과 내용이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레위인들의 정결 예식 자체가 하느님께의 헌신과 새로운 직무를 맡아 출발하는 예식(봉헌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본절은 과거의 죄로부터의 속죄와 더불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사명에 충실한, 헌신된 새로운 삶을 출발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져 있다 볼 수 있다. 

바빌론에서 귀환한 남부 유다 백성들이 맑은 물로 뿌림을 받아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이전의 더러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는 의미이며, 아울러 선민으로서의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26)

36장 25절에서는 약속의 땅으로 귀환한 백성에게 행할 정결 의식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그들이 과거의 죄를 청산한다는 측면이 강조되었다면, 36장 26절과 27절에서는 새 마음과 새 영이 주어져 과거의 죄를 반복하지 않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점이 강조된다. '내가 너희에게 주고'로 직역되는 '웨나탓티 라켐'(wenathathi lakem)'내가 너희 안에 넣어 주겠다'로 직역되는 '엣텐 뻬키르 뻬켐'(ethen beqirbekem)에서 강조하는 것은 새 마음과 새 영을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이다.

36장 24절과 25절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능력이나 자질이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는데에서 나오는 죄악을 행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느님과 자신을 분리시켜 악의 세계로 점점 더 빠져드는 악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지난 날의 잘못을 용서받아 약속의 땅으로 귀환한다고 할지라도,자신의 힘으로는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없다.

따라서 하느님께로부터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아야만 하는데, 36장 26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본문에는 '새 마음'에 해당하는 '레브 하다쉬'(leb hadash)'새 영'에 해당하는 '웨루아흐 하다샤'(weruah hadasha)가 나온다. '마음'에 해당하는 '레브'(leb)판관기 16장 25절에서는 인간의 감정의 자리 제시되고, 열왕기 상권 3장 9절에서는 사리를 판별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의 자리 제시되며, 욥기 27장 6절에서는 사람의 윤리적 양심의 자리 제시된다.

구약 성경도 사람은 창세기 20장 5절 말하는 것처럼, 마음을 통해 하느님을  경배하고 섬길 수 있으며, 반대로 창세기 8장 21절 지적하는 것처럼, 교만한 마음 통해 하느님을 향해 대항하고 범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윗은 바쎄바를 범한 뒤에 예언자 나탄이 그의 죄를 지적했을 때 시편 51장 12절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의 내면에 정결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간구했던 것이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시편51,12) 또한 '영'에 해당하는 '루아흐'(ruah)숨이나 바람 혹은 하느님의 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본문에서는 인간의 기질이나 성질이나 정신과 같은 의미로서 마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루아흐' 창세기 41장 8절에서는 꿈을 꾼 파라오의 번민하는 마음으로 묘사하는 단어로 사용되었고, 여호수아 2장 11절에서는 예리코 성 사람들이 이스라엘 군대가 쳐들어 온다는 말을 듣고 정신을 잃었다는 표현에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의 용례에서 '마음'(레브)와 '영'(루아흐)이라는 단어가 본문처럼 한 문장에 함께 사용된 경우에는 서로 별개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기 보다는, 지(知), 정(情), 의(意)를 포괄하는 장소이며, 인격(人格)과 인성(人性)이라는 인간의 내면을 총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들어,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는 에제키엘 18장 31절의 내용처럼, 이 표현은 자신의 삶의 행동과 태도를 결정하는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느님께서 회복될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신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그들의 내면과 인격에 부어주시겠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서의 새로움은 이전 것들과의 단절된 새로움이 아니라 이전 것들과 연관된 새로움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반절에는 '돌로 된 마음'에서 '돌로 된'에 해당하는 '에벤'(eben)'돌'이라는 의미이고, '살로 된 마음'에서 '살로 된'해당하는 '빠샤르'(bashar)'고기'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돌로 된 마음'(굳은 마음)이란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지시하심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딱딱한 돌과 같은 마음이고, '살로 된 마음'(부드러운 마음)이란 하느님의 지시와 권고하심에 대해 민감하고 순종하는 삶으로 바뀐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선민은 새 계약의 백성이 될 것을 약속받은 셈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36장 27절에서는 하느님의 영을 넣어 주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하느님께서 선민에게 '성령'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말씀에 순종하는, 성숙하고 헌신된 인격과 인성을 구비하게 해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금요일  제1독서(에제37,1~14)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2ㄹ)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14)

에제키엘서 37장 12절 이하 14절에서 마른 뼈의 환시를 통한 새로운 확신과 희망에 근거하여 하느님께서 에제키엘로 하여금 회복의 약속을 선포하라는 명령이 주어짐을 보여준다. 그리고 에제키엘서 37장 1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환시를 받은 자들을 '내 백성아'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비록 현재 그들의 영육의 상태가 마른 뼈처럼 희망없는 가운데 있지만, 이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여기시고 그들에게 선민의 축복을 회복시키실 것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에제키엘서 37장 1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땅에서 포로로서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자신들의 상황자신들의 뼈가 말랐다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에제키엘서 37장 1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의탁하고 신뢰하며 살지 못하는 그들의 상황을 더 비관적으로 무덤 속에 있다고 표현하셨다.

하지만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무덤 속에 있는 그들을 무덤으로부터 끌어내어 나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무덤 속에 있다는 것죽었다는 의미이고, 무덤으로부터 끌어내어 나오게 하겠다는 것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겠다는 의미이다.

무덤의 비유넓은 계곡 한 가운데 가득하던 마른 뼈들이 힘줄과 살이 붙고 살갗이 붙은 후에 숨이 불어 넣어져 큰 군대가 되게 하신 환시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마른 뼈의 소생 비유나 무덤의 죽은 자들의 소생에 관한 비유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영육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른 뼈나 무덤 속의 시신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잃어버린 남부 유다 공동체의 영적인 죽음 상태를 의미하고, 마른 뼈에 숨(생기)이 불어 넣어져 큰 군대로 소생하는 것이나 무덤 속의 시신이 살아 나오는 것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신앙이 생겨 새롭게 변화되며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에제키엘서 37장 12절에서는 특히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는 표현이 사용되어 정치적인 해방과 국권의 회복을 보다 명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여기 에제키엘서 37장 12절에서 예언되는 바빌론 유배 포로 공동체의 정치적 해방은 그들을 억류하고 있던 바빌론 제국이 B.C.539년에 멸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그 후 세 차례에 걸친 포로 귀환( B.C. 537년, 458년, 444년)이 이루어져 원하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상속받은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적 회복은 그들이 다시 주님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 사건으로는  B.C. 516년에 이루어진 성전 재건과  B.C. 432년에 이루어진 느헤미야의 개혁 운동을 들 수 있다. 

한편, 에제키엘서 37장 14절이스라엘의 회복의 영적 측면을 보다 부각시켜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선민 공동체에 두어 살아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여기 에제키엘서 37장 14절'내 영을'에 해당하는 '루히'(ruhi; my spirit)원형 '루아흐'(ruah)는 앞의 '숨'(생기)으로도 번역된 단어이다. 여기서 사용된 '루아흐'(ruah)에제키엘서 37장 1절에서 에제키엘을 이끌고 계곡으로 갔던 것으로 언급된 '그의 영'에 해당하는 '루아흐 예흐와' (ruah yehwa)와 관련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주님의 영',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에제키엘서 37장 14절은 본 단락이 제시하는 선민의 회복이 단순히 포로 생활에서의 해방과 국권의 회복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선민들이 하느님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될 것임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전에 그들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하고 징계 받도록 한 이전의 잘못된 삶이 완전히 청산되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백성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선민의 회복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속하는 새로운 백성들이 될 것임나타내는 새성전과 새로운 예배와 새 땅에 대한 환시를 담고 있는 에제키엘서 40장 이하 48장 까지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에제37,21ㄴ~28)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1ㄴ~22) 

에제키엘서 37장 21ㄴ절, 22절남북 선민의 본토 귀환통일 국가 형성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중 37장 21ㄴ절은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 백성들을 바빌론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에제키엘서 37장 21ㄴ절에제키엘서 36장 24절에서 언급된 것과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단어들도 거의 비슷하게 다시 사용하고 있다.

 

에제키엘서 36장 24절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에게 직접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고, 에제키엘서 37장 21ㄴ절은 하느님께서 바빌론 유다 공동체에게 어떻게 말할 지를 가르쳐 주신 내용이기 때문에 주어와 목적어의 인칭만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에제36,24) 또한 회복된 남부 유다 백성을 우상 숭배 등의 죄에서 정결하게 할 것이라는 에제키엘서 36장 25절의 내용이 에제키엘서 37장 23절거의 동일하게 사용된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에제36,25) 이러한 유사성은 여기서 거듭 제시되는 내용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에제키엘서 37장 21ㄴ절에서 사용되는 주어는 '주 하느님'으로 되어 있는데, 관심을 촉구하는 표현 '힌네'(hinne; behold; '보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주어를 특별히 강조하는 1인칭 대명사를 '아니'(ani; '내가')가 사용되고 있다. 인도하고 모으고 돌아가게 하시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심을 강조하면서 이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본절에서 사용된 표현들 중에서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사방에서'라는 표현은 선민이 처한 현재의 암울한 상황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선민이 마땅히 있어야 할 삶의 자리를 잃어버렸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들의 땅으로'에 해당하는 '아드마탐'(admatham; their own land)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땅'(그들이 소유한 땅)이라는 의미로서 그들이 마땅히 차지하고 있어야 할 곳이라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결국 이러한 표현은 한편으로 그들이 본래 있어야 할 삶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면서, 하느님의 절대적 구원으로 다시 본래의 삶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쫓겨나게 된 원인을 상기시키는데, 이어지는 에제키엘서 37장 23절에서 이렇게 선민의 삶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없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정결 회복과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 예언된다.

에제키엘서 37장 22절에서는 단순히 고국에 돌아가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된 역사가 바로 잡아져서 통일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예언된다.  하느님께서 선민에게 베푸실 회복은 단순히 과거에로의 회귀가 아니라 그 이상의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것이 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회복의 면모는 에제키엘서 37장 25절'자자손손이 영원히', '영원히', 에제키엘서 37장 26절'영원한 계약', 에제키엘서 37장 28절'영원히'라는 표현에서도 거듭 강조된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2) 에제키엘서 37장 21ㄴ절에서 흩어진 남부 유다 백성이 바빌론으로부터 해방되어 고국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을 다룬데 반해서, 에제키엘서 37장 22절그들이 고국 땅에서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나뉘지 않고 한 민족, 한 나라를 유지할 것이라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에제키엘은 한 민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한 임금에 대해서도 강조하는데, 이것은 에제키엘서 37장 24절 이하의 내용에서 나오는 다윗 왕으로 상징되는 왕, 메시야가 다스리는 메시야 왕국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내용에서도 언급된다. 에제키엘은 이러한 온전한 하느님 나라의 회복을 강조하기 위해 에제키엘서 37장 22절 상반절에서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세워지고 한 임금이 다스리게 될 것임을 언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후반절에서 절대로 두 민족으로 나뉘거나 두 왕국으로 갈라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다같은 의미의 내용을 긍정문과 부정문으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그들을 ~ 만들고'에 해당하는 '웨아시티 오탐'(weasithi otham)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으로 만들 것이다'(and I will make them)가 된다. 하느님이 주어이고 선민들이 목적어가 되어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측면이 보다 강조되어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산악 지방에서'로 번역된 '뻬하레'(behare; on the mountains of)의미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산'공권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곳이며 우상 숭배의 자리로 언급되는 곳이고, 북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바로 '산'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서 원문상 복수로 되어 있는 '모든 산에서'에 해당하는 표현은 결국 이스라엘의 구석 구석까지 조금도 반역의 기운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고도 철저한 신정(神政)통치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완전한 신정(神政)왕국이 세워졌던 때가 이스라엘 역사에 결코 없었지만, 그때 가장 근접하다고 할 수 있는 때가 다윗 임금의 통일 왕국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가 온 이스라엘이 다윗의 영토 아래 통일 국가를 이루어서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하느님을 진정한 왕국의 통치자로 섬기던 때였다. 따라서 회복된 새로운 시대의 왕을 다윗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에제37,24).


 제20주간 토요일 제1독서(에제43,1~7ㄷ)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4)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5)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7)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4) 성전 동쪽에 임하였던 주님의 영광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에 관한 묘사이다. 주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한 문은 예루살렘 동쪽으로 난 문이었다. 에제키엘서 9장 3절에서 성전 문지방에 머물던 하느님의 영광이 10장 18절과 19절에서 성전 문지방을 떠나 커룹들 위에 머물고 있던 곳도 동쪽으로 난 문이었다.

또한 11장 1절 보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영으로 에제키엘을 데리고 와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신 장소동쪽 대문이었고, 이어지는 11장 22절~24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을 완전히 떠나는 장소동쪽 대문이었다. 

또한 새 성전에 대한 환시의 보도인 40장 6절 보면, 이 동쪽 대문은 천사의 인도를 받은 에제키엘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되었고, 주님의 영광이 성전 안으로 들어간 곳동쪽 대문이었다. 

에제키엘은 성전 멸망에 관한 보도에서 주님의 영광이 떠나시는 장소였던 동쪽 대문을 통해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강조함으로써, 새 성전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의 성격지닌 것으로 부각시킨다.  

이러한 장면 묘사를 통해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시고 시행하신 이후에, 다시 찾아오셔서 은혜의 회복을 선포하실 것임을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특별히 에제키엘 44장 2절에서는 성전 밖, 동쪽으로 난 대문을 영원히 닫을 것을 명령하신다. 이러한 동쪽 대문 폐쇄 명령은 이 성전에서 주 하느님께서 가장 높으신 분이심을 부각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이 성전에 주 하느님께서 영원 무궁히 임재하실 것임을 확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5) 하느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엎드려 있는 에제키엘을 하느님의 영이 데리고 안뜰로 들어가게 하셨다.  에제키엘서 40~42장에서는 천사가 에제키엘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의 각 건물들을 측량하고 설명하는 일을 하였고, 40장 1절 보면 주님의 영광이 임재하실 성전 밖, 동쪽 대문 앞으로 인도한 것도 천사, 40장 3절의 표현에 의하면 빛나는 구리와 같은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이 임재한 성전 안으로 에제키엘을 들어가게 하신 것더 이상 천사가 아니고 하느님의 영이었다.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것은 에제키엘서 3장 12절,14절 등에도 나온다. 거기에보면, 크바르 강가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을 때에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영의 강한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은 적이 있다.

에제키엘서 43장 5절 본문에서 '나를 들어'에 해당하는 '왓팃솨에니' (wathisaeni)는 (일반)능동형이고, '데리고 가셨는데'에 해당하는 '왓테비에니'(wathebieni)는 사역형이다. 따라서 엎드려 있는 에제키엘이 일어나게 된 것하느님의 영의 직접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고, 에제키엘이 동쪽 대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간 것성령의 인도나 강력한 역사하심에 의해 따라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영은 군대의 웅성거림과 같은 웅장한 소리와 온 땅을 밝히고도 남을 만한 강한 빛으로 압도되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현현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정신을 잃다시피 하였을 에제키엘에게 일어설 수 있는 강한 힘을 주셨고, 그 힘으로 인해 성전 안뜰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성전 안으로 들어간 에제키엘은 그곳에 가득 찬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가득 차 있었다'로 번역된 '말레'(malle)탈출기 40장 34절, 35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지시한 대로 만남의 천막(성막)을 다 지은 후에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한 사실을 묘사함에도 사용되었고, 열왕기 상권 8장 10절,11절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완성된 성전으로 주님의 계약궤를 옮겼을 때 주님의 영광이 성전에 구름을 통해 가득 참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용례에서 '말레'(malle)는 두 번씩 반복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에제키엘은 탈출기와 열왕기 상권 저자가 사용한 '말레'(malle)라는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여 새 성전에 충만한 주님의 영광이 탈출기에서 성막에 임했던 주님의 영광이었으며, 솔로몬의 성전에 가득하였던 주님의 영광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또한 탈출기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의 경우에도 주님의 영광이 가득찼던 것은 성막과 성전 건축이 모두 완결된 이후였다.

이것은 새 성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새 성전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천사에 의한 성전의 각 부분에 대한 측량이 마쳐진 뒤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찼다. 성막이나 성전은 모두, 그 건축물 자체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주님의 영광이 임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이것을 감안할 때, 새 성전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은 과거에 성전을 떠났던 주님의 영광의 회복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새 성전의 완전한 완성이라는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도 이해된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7) 성소로부터 들려온 하느님의 말씀이 본절인 43장 7절 이하 12절에 다시금 소개된다. 그 가운데 43장 7~9절의 내용은 주님께서 영원히 임재하신다는 약속과 더불어, 그 조건으로 성전이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처소이므로 거룩함을 훼손하는 죄악을 버리고 거룩함에 관한 성전의 법도를 지켜야 함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43장 7절은 성전이 거룩한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성전이 거룩한 이유는 먼저 성전에 하느님의 어좌(옥좌, 보좌)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전은 먼저 '내 어좌의 자리(처소)'로 소개된다. 여기서 '내 어좌'에 해당하는 '키쓰이'(kissyi)의 원형 '카싸'(kassa)권력의 자리를 의미한다.

'카싸'창세기 40장 40절에서는 왕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무엘 상권 1장 9절에서는 사제가 앉는 자리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시편 94장 20절에서는 재판관이 판결을 위해 앉는 자리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런 용례를 보면, '카싸'(kassa)는 왕이나 재판관이나 사제가 갖는 정치, 사법, 종교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에제키엘에서는 '카싸'(kassa)가 총 5회 사용되었는데, 세상 왕의 왕좌를 묘사한 26장 16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환시 중에 본 하늘의 보좌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내 어좌의 자리'와 병행되어 제시되는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라는 표현은 역대기 상권 28장 2절, 시편 99장 5절, 이사야 60장 15절에서 모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때 성전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는 장소로 언급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발'은 어떤 존재가 살아가기 위해 딛고 살아가는  자신의 거주지와 땅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라는 것하느님의 발만이 아니고, 발이 상징하는 바 거주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새 성전을 가리켜 '내 어좌의 자리'라고 한 것이나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라고 한 것은 모두 하느님의 임재(현존)가 새 성전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 두 표현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댓구를 이루는 반복이다. 

'내 어좌의 자리'라는 표현에서 어좌는 모든 권력의 근원인 하늘의 어좌를 의미하므로 하늘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라는 표현에서 발은 거주하는 장소로서의 땅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또한 '내 어좌'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모든 정치, 종교, 사법적 권력을 아우르는 온 우주적 권력을 상징하고, '내 발(바닥)'이라는 표현은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결국 본문은 성전을 하늘과 땅, 즉 온 우주, 혹은 우주에 대한 통치의 축소판으로 그리고 있다. 이를 통해 성전은 모든 이들이 와서 경배해야 할 만유의 절대 주권자이며 통치자요, 심판자가 계신 거룩한 장소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표현은 주님께서 새 성전에 영원히 현존(임재)하실 것이란 약속이다. 즉 이것은 앞으로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 단절없는 완전한 하느님의 통치와 백성들의 경배가 계속되는 곳이 될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에제키엘서 43장 7절의 의미를 종합하면, 43장 7절의 표현은 단순히 하느님의 임재가 그분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새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모든 나라와 백성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실 뿐 아니라, 인간의 사언행위(思言行爲)의 심사와 그 의로움과 불의함에 따라 심판을 단행하실 권력을 갖고 계심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의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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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일 월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제1독서 (에제47,1-2.8-9.12)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8)  

에제키엘서 47장 8절주님의 집(성소)에서 발원한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서 그 바다를 살릴 것이라고 천사가 에제키엘에게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천사는 그냥 '물'이라고 하지 않고 '이 물'이라고 표현했다. '이 물'에 해당하는 '함마임 하엘레'(hammaim haelleh)에서 정관사와 지시대명사가 결합된 '하엘레'(haelleh; these)와 더불어 '함마임'(hammaim; water)에도 정관사 '하'(ha)가 있다.

이것은 사해 바다를 살릴 물이 에제키엘서 47장 1절에서 묘사된 주님의 집 (성소)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고, 또한 에제키엘서 49장 7절에서 묘사된 강가에 수많은 매우 질이 좋은 나무들을 만들어낸 물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천사가 강조하는 것은 단지 죽은 바다가 살아날 것이라는 기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그 기적을 일으킨 그 물이 주님의 집(성소)에서 흘러나온 사실에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제키엘서 47장 8절의 '이 물'하느님의 현존과 임재가 회복된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할 땅을 하느님의 첫 창조와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의 축복을 모두 향유할 수 있는 낙원으로 탈바꿈시킬 물이라는 두 가지 사실이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드러내는 '이 물'하느님께서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백성들이 하느님을 떠나게 했던 모든 죄악으로부터 떠났음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백성들의 관계를 회복시킬 것을 상징하는 '화해의 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물은 백성들이 돌아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먹기에 좋은 열매와 약재료가 될 만한 푸른 잎과 풍부한 고기(수자원)를 보장하는 축복의 물이요, 생명의 물이다. 즉 에제키엘은 '이 물'축복과 풍요를 상징한다는 구약 성경의 일반적인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공존하는 온전한 하느님의 나라이루게 하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강조한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 '이 물'은 창세기 2장 9~17절에서 묘사된 에덴에서 발원하여 생명 나무를 비롯한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한, 첫 창조의 동산에서 흘러나온는 물의 개념과 관련된다. 또한 에제키엘서에서 제시되는 '이 물'요한 묵시록 22장 1~5절에서  '새 예루살렘'에서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으로 표현된다. 

에제키엘서의 물하느님의 현존과 임재가 회복된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처럼, 요한 묵시록의 물하느님과 어린 양의 어좌로부터 나와서 흘렀다. 그리고 에제키엘서의 물이 강가에 무성하고 풍성한 나무를 자라게 한 것처럼, 요한 묵시록의 물강 이쪽 저쪽에서 생명 나무를 자라게 하고, 다달이 열두번 열매를 맺고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이게 한다.  

또한 이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새 예루살렘에는 다시 저주가 없고, 하느님만이 영원토록 왕으로 다스리시는 온전한 하느님의 나라가 유지된다. 요한 묵시록에서 에제키엘서의 '이 물'을 종말론적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물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에제키엘서에서 사용된 '이 물'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물이라는 신학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에제키엘서의 '이 물'은 하느님과 관계의 회복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첫 창조사업을 회복하는 물이면서 동시에 재창조 사업을 완성하는, 즉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물이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단지 옛 고향으로 돌아오는 정치적 해방이나 민족적 회복에만 관심을 가지고 무너진 성전 건물을 다시 지어 옛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다시 이루려는 외형적 번영에만 마음을 기울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에제키엘서 47장 8절의 '이 물' 개념을 통해 새로운 메세지를 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앞으로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나 외형적 발전과 성장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온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영광 회복과 그 분을 신뢰하고 따르는 온 세상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의 풍요와 거움을 맛보고 체험하며 살도록 하는, 하느님 나라의 건립에 있음을 알리고 있다.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간다' 에제키엘서 47장 1~5절은 주님의 집(성소)에서 흘러나온 물이 일반 성인(成人)의 키를 훨씬 넘길 정도록 깊고 넓은 강을 이루었다는 내용이었다. 에제키엘서 47장 8절은 그 물이 동쪽으로 계속 흘러가 아라바를 지나 사해로 흘러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아라바'(arabah; 구약에서 평지, 사막, 나룻터로 번역)는 이스라엘의 땅 중에서 남북 방향으로 가로질러 형성되어 있는 저지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아라바는 남북으로 가늘고 길게 뻗은 모양을 하며, 60% 이상이 지중해 해면보다 더 낮은 극저지대를 형성하였다.

예루살렘의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은 자연스럽게 고지대인 서쪽의 예루살렘에서 저지대인 동쪽의 요르단 계곡 쪽으로 흘러갔을 것이고, 다시 사해 인근의 아라바 저지대를 지나 사해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에제키엘서 47장 8절의 상반절은 주님의 집(성소)에서 흘러나온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이고, 후반절 바다로 흘러 들어간 물로 인해 그 바다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다. 

한편 '되살아난다'에 해당하는 '웨니르페우'(wenirpheu)원형 '라파'(rapha)'고치다' 혹은 '치료하다'의 의미이다.  

특히 '라파'창세기 20장 17절에서 아비멜렉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했다가 그의 가문의 대가 끊어질 위기에 놓였는데, 아브라함이 그를 위해 기도한 뒤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태가 열려 다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고쳐 주었다'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에제키엘서 47장 8절은 죽은 바다가 되살아났다는, 즉 무생물이 생물이 되었다는 뜻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생명체가 잉태되거나 번식되지 못하는 바다가 생명이 살 수 있는 바다로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 '라파'(rapha)의 이런 의미를 살려 본문을 의역하면, '그러자 그 물이 고침을 받아 생물이 살게 되었다'가 된다.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나온 물이, 염분이 많아 생물이 도저히 살 수 없었던 죽음의 바다를 고쳐서 생물이 살 수 있는 생명의 바다로 변화시킨 것이다. 여기서 요한 복음 4장 13~14절의 말씀이 떠오른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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