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독서묵상)

2015. 11. 2. 오전 8: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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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독서묵상)

화요일  제1독서 (욥기3,1~3.11~17.20~23)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1)  욥기 1~2장욥이 겪은 두 차례의 시련그에 대한 반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제 욥기 3장부터 37장까지는 욥기 겪는 불행에 대한 욥과 친구들 간의 본격적인 논쟁을 다룬다. 

욥기 3장 1~10절욥의 초기 독백 전반부로서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내용을 기록한다. 그중 3장 1절욥기 친구들과 이레 동안 밤낮을 보낸 후에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여는 장면에 대한 묘사이다. 

그런데 오랜 침묵을 깨고 욥이 입을 열어 처음으로 한 말들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저주하였다'에 해당하는 '와예칼렐'(wayeqallel; and cursed)속적 '와우'(wau; and)'가볍게 하다', '멸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칼랄'(qallal)의 강조 능동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이처럼 '칼랄'(qallal) 동사가 강조형으로 사용되면 '저주하다', '욕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제 생일을'에 해당하는 '요모'(yomo; his day; the day of his birth)'날', '해'를 의미하는 명사 '욤'(yom)3인칭 소유격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로서 직역하면 '그의 날'이다. 여기서 '그의 날'이라는 표현은 생일의 관용적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생일은 가장 행복하고 복된 날로 여겨지는데, 욥이 그 날을 저주하고 욕했다는 것은 욥의 고통과 번뇌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가슴 깊이 느끼게 한다.  

사실 욥은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할 뿐 아니라(3,3~9) 시련을 당했지만 거의 절대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헌신을 고백하던 초반의 자세 (1,21.22; 2,10)에서 약간씩 멀어지는 듯한 말조차 내뱉는다.

따라서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내용은 욥이 그에게 생명을 주시고  삶을 살게 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욥이 직면한 현실의 고통스러운 양상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한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반복적으로 되뇌이는 표현들그의 친구들에 대하여 한 말도 아니었고, 하느님께 대하여 한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즉 이것은 갑자기 밀려든 엄청난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여 탄식하는 욥의 절망스러운 독백으로 보는 것이 더 옳다.

당시 욥이 자신이 처한 참담한 현실과 견딜 수 없는 고통, 그리고 그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를 불안 속에서 내뱉을 수 있는 그의 말은, 그가 자신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하느님의 축복과 깊으신 뜻에 따라 주어진 생명을 누리는 것에 대한 탄식은 결코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욥이 그토록 처절한 고통의 현실, 말하자면 좌절과 번뇌를 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적극적으로 원망하거나 사악한 말을 내뱉지 않았다.

이처럼 계속되는 고통의 현실 속에서도 자신을 입술을 지켰던 욥의 자세는 그가 하느님을 향한 경건과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연중 제5주일 제1독서(욥기7,1~4.6~7)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1)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2)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3)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4)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6)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7)

욥기에는 욥과 욥의 친구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 규명에 대한 3차에 걸친 논쟁이 나온다(욥기4~31장). 그리고 엘리후의 중재 변론(욥기32~39장)이 나온다. 첫번째 논쟁에 해당하는 욥기 4~14장의 내용 중에서 엘리파즈의 첫째 담론 (일차변론; 욥기4~5장)에 대한 욥의 반박(욥기6~7장)의 후반부가 오늘 독서이다. 

욥기 6장에 이어 인생의 허망함에 대한 푸념섞인 탄식과 더불어 하느님께 대한 의문에 찬 불평, 그리고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욥의 애절한 호소가 소개된다. 여기서 욥은 자신의 담담한 형편을 인간의 상황 중 가장 고통스런 상황에 투사하고 있다. 즉 그는 인생을 징집을 당해 전쟁터에 나간 군인의 상태(욥기7,1ㄱ), 한낮의 더위가 가시기를 바라고 하루의 노력이 끝난 뒤 자기 삯을 바라는 품꾼이나(욥기7,1ㄴ) 종의 입장(욥기7,2)에 빗대고 있다.

이러한 표현 속에는 자신이 당하는 혹독한 고난의 상황이 들어있다. 그는 서늘하고 평온한 저녁을 고대하는 노예에 자신을 빗대었지만, 그러한 순간은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았음을 탄식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삶을 고대하는 품꾼에 자신을 비하였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고통스런 질병에 따른 끝없는 곤경과 고뇌뿐임을 탄식했다(욥기7,4~6).

그리고 이어서 욥은 자신은 이유조차 모르지만, 이 일을 자신에게 허락하신 하느님께 지금의 형편에서 건져 달라는 비통한 소원을 올리며(욥기7,7~10), 원망섞인 탄식과 절규를 내뱉고 있다(욥기7,11~21). 여기서 우리가 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친 원망에 가까운 욥의 탄식의 말들이다. 

물론 이런 원망조의 말들은, 인간의 한계 상황에 이른 고난의 정도를 감안할 때, 인간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결코 합당한 것은 아니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와 선하심을 확고하게 붙잡지 못한 욥의 연약함 반영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욥이 겪는 고난의 무게를 감안하지 않으면 안된다. 욥은 적어도 하느님의 선하심과 그에 따른 자신을 향한 선하심 섭리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처한 현실과 그가 감당해야 할 고난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그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고난이 커지고 고난의 날이 길어짐에 따라,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탄식을 넘어 절망, 절망에서 더 나아가 원망조의 말까지 내뱉고 말았던 것이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1) 여기서 원문의 '레에노쉬'(leenosh)'인생은'이라 의역했는데, 원래는 '~에게'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레' (le)장성한 남자(장성)나 하느님께 비할 때 덧없고 연약한 '사람'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에노쉬' (enosh)가 결합되어 '생에게'로 번역해야 한다. 그리고 원문의 '차바' (tsaba) '고역'(hard service)라 의역했는데, '군대' 혹은 '전쟁'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

그리고 이 표현들 앞에 수사 의문문을 이끄는 '~있지 아니하냐' 란 뜻의 '할로'(halo)를 배치한다. 이런 의미를 살려 '할로 차바 레에노쉬'(halo tsaba leenosh)를 번역하면, '사람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란 의미도 가능하고, '장정에게 군대가 있지 아니하냐'란 의미도 가능하다.

전자는 하느님과 비교할 때 연약하고 초라한 인간에게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전쟁이 항상 가까이 있다는 사실, 즉 인생이 그만큼 고달프고 힘겨운 것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후자남자가 장성하여 징집을 당하는 것, 즉 의무적으로 강제성을 띤 고된 징집을 감수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된다. 욥은 여기서 인간이 당하는 어려움과 곤고함을 강제로 겪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다. 

욥이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처한 고통스런 현실이 마치 전쟁터와 같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그러한 고통을 하느님에 의해 강제로 당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날품팔이'에 해당하는 '사키르'(sakir)'댓가를 주고 고용하다'란 뜻을 가진 동사 '사카 '(sakar)에서 파생한 형용사로서 여기서는 명사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품삯을 받기로 하고, 일정한 시간 동안 의무적으로 무역을 감당하는 자들(품꾼)이었다. 이들은 매우 곤궁하고 빈한 자들이었다. 성경에서 품꾼은 당시 사회에서 고아와 과부와 더불어 사회의 최하층민에 속하였다. 

레위기 19장 13절에는 율법을 통해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를 명하였지만, 여타의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이들을 보호할 만한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조차 없는 상태에 있었다. 

본문은 매일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고된 일을 쉼없이 감당하면서도, 무력하여 자기 권리조차 주장하지 못하는 날품팔이의 형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생이 고난과 불안으로 싸여 있고, 선택의 여지없이 무조건 인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2) '종과 같이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한낮의 작열하는 더위와 먼지로부터 해방되는 저녁을 고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이'라는 것은 그날 벌어 그날을 살아가는 품꾼들이 그날의 노동이 끝나는 시점에 주어지는 품삯을 고대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둘 다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의 반복일 뿐이다.  현재의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3) 앞의 욥기 7장 1~2절에서는 인생의 보편적 고달픔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피력했다면, 욥기 7장 3절이하 5절까지는 그 같은 상황과 형편을, 온 몸에 퍼진 악창으로 인해 고통하며 신음하는 자신의 처지에 직접적으로 대입시켜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나 역시 공허함의 달들을 할당받게 되었고, 고통의 밤들이 나에게 지정되었다' 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여기에 쓰인 동사는 강조 수동형으로서 욥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언가를 강압적으로 상속받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지금의 시점이 욥이 재난을 당한지 몇 개월의 기간이 지난 때임을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욥은 지난 몇달 동안 재산의 회복이나 육체적 건강의 회복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이 그와 같은 '고통'으로 번역된 '아말'(amal; '환난','고통','수고로움')을 당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4) 아무리 비천한 신분의 종이라도 휴식의 시간은 주어지게 마련인데, 욥은 전신에 퍼진 피부병으로 인해 밤 시간 조차 쉴 수가 없었다. 고통속에서 '저녁은 깊어가고'(원문: '밤의 치수를 측량하고')라는 말은 밤이 더 이상 쉼의 시간이 아니라 더 큰 고통의 시간이었기에 새벽이 밝아 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욥의 피부병은 '삐쉬힌 라흐'(bishihim rah), 즉 '악성 종기'의 의미인데, 욥이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격리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둥병은 아니다. 아마도 욥이 앓은 악창은 부스럼 또는 온몸 전체에 진물과 고름이 나는 궤양성 피부병으로 추측한다. 욥의 피부는 곪을대로 곪은 나머지, 구더기가 기생할 정도로 악화되었고,종기가 곪아터진 자리에 재(먼지)가 함께 뒤섞여 응고될 정도였다(욥기2,7~8).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6) 여기서 '베틀의 북'에 해당하는 '아레그'(areg)'짜다', '엮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 '아라그'(arag)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베틀','직기'라는 뜻이다. 

인생이 마치 베짜는 사람이 사용하는 북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찰나'와 같다는 의미를 나타태는 의역이다. 그러니까 세월이 빠르다는 의미와 더불어 위중한 병세에 그에게 남겨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7) 여기서 '기억해'에 해당하는 '제코르'(zekor)'기억하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 '자카르'(zakar) 2인칭 명령형이다. 여기서 2인칭은 절대자이신 하느님이시다. 또한 '한낱 입김'에 해당하는 '루아흐'(ruah)'호흡','바람', '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인생의 허무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표현이다. 욥이 고통중에서 자신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음을 반영한 표현이다. 이 호소는 7장 10절까지 계속되는데, 현재 당면한 비참하고 답답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는 연약한 자신의 생명을 반드시 기억해주시고, 속히 자신의 청원에 응답하여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길 간곡히 바라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행복','복된 것'에 해당하는 '토브'(tob)'선한','좋은'이란 의미의 형용사인데, 여기서는 명사적 용법으로 쓰였다. 겉으로는 '토브'(tob)그의 질병이 치료되고, 소유와 자손이 회복되어 재난이 발생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의 의미와 그것이 어떤 목적에서 주어졌는지와 관련해서 하느님의 뜻을 보다 잘 헤아리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나 본문에서 욥이 강한 부정어 '로'(lo)를 사용하여 현재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어조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욥이 극심한 고난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애절한 탄식을 감안할 때, 자신의 지금의 상태를 기억해 달라는 하느님을 향한 욥의 호소는 독자들에게 더욱 애절한 음조로 다가온다. 

오늘 이렇게 장황하게 주석을 하면서 욥의 이야기가 지금 고통중에 있는 모든 분들께 인간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위로와 치유가 되길 바란다.





제26주간 수요일 (욥기9,1-12.14-16)

"그분께서 내 앞을 지나가셔도 나는 보지 못하고,  지나치셔도 나는 그분을 알아뵙지 못하네."(11) 앞 5-10절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우주적 주권과 위엄에 대한 욥의 고백이었다. 이제 11-14절에서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스런 재난과 관련해, 하느님의 절대 주권과 그분의 역사하심에 전혀 깨달을 수 없는 자신의 답답한 상황을 서술한다. 

새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은 이 새로운 단락을 '보라' 란 뜻을 가진 감탄사 '헨'(hen)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헨'(hen)은 앞으로 말할 하느님의 절대 주권에 대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시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런데 '헨'(hen)은 문맥에 따라 '만일'(if)이란 조건 접속사로서의 역할도 한다.(욥기40,23 ; 이사54,15 ; 예레3,1 ; 다니2,5.6 ; 3,15.18) 본문의 '헨'은두가지의 의미를 다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감안하면, 먼저 본절은 자신 앞에서 절대자이신 하느님이 무언가를 행하시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여기서 '그분께서 지나가셔도', '지나치셔도' 란 표현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이루어진 모든 비극적인 일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자신에게 이루어진 이 모든 재난의 원인이 하느님께 있으며, 거기에 특별한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나타내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만일' 의 의미도 포함된다. 즉 만일 하느님께서 자신의 앞을 지나가시며 지나치신다 해도, 자신은 그것을 감지할 수 없으며, 더 구체적으로 지금 자신에게 이루어진 모든 일에 대해서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답답한 탄식의 말 내뱉는 것이다. 

이것은 본절에서 '나는 알아채지' 에 해당하는 '아빈'(abin)이 지닌 의미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단어의 원형인 '삔'(bin)'이해하다', '지각하다', '식별하다' 란 뜻을 지니며, '이해로 이끄는 분별력' 의 개념을 포함한다. 

그래서 이 동사는 단순한 자료 수집을 넘어선 종합적이고 체계화된 '지식'(knowledge)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성경에서 대개 '알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동사는 '야다으'(yadah)인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얻어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삔'(bin)은 이때 얻은 지식의 진위를 기리는 판단 능력과 예민한 통찰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욥이 '삔'(bin)을 사용한 것은 그가 하느님의 자기 현현 곧 그분의 계시를 감지할 만한 판단 능력이 부족함을 고백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본문에서 욥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오셔서 그가 당한 고난에 대한 비밀을 계시하려고 하실지라도, 자신에게는 그 계시를 받아 이해할 만한 능력이 없음을 한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욥이 하느님의 현현을 말하며, 그 계시에 관심을 두는 것은 자신이 왜 이같은 극심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음을 한탄하는 의미 지님과 동시에 친구들 역시 욥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당시 욥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재산의 상실이나 육체적 고통, 더 나아가 친구들의 몰이해가 아니었다. 사실 욥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왜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는지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즉 욥은 설혹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찾아오신다고 하더라도 깨달을 수 조차 없다는 표현을 통해,자신에게 이러한 재난을 내리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이지 모르는 자신의 답답한 상황을 친구들 앞에 호소하며, 그들이 자신을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합당치 못함을 증거하고 있다.


위령의 날 첫미사 제1독서 (욥19,1.23-27ㄴ)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5)"I know that my Redeemer lives,and that in the end he will stand upon the earth."

욥은 앞에서 자신의 사연이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23절, 24절)자신의 사연과 무죄함이 후대에라도 전해져 입증되기를 갈망하였다. 이어지는 본절에서는 욥은 구원자되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진실성을 변호해 주실 것이란 희망을 피력한다이러한 문맥의 흐름은 극한적 고통에 처한 답답하기 짝이 없는 욥의 심리적 상태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욥은 애타는 자신의 상황,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피력해 왔었다. 또한 누차 친구들의 말이 그릇된 것임을 지적해 왔었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친구들은 더욱 강도를 높여 자신을 단죄하고 비난하는 말을 내뱉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다시 무언가를 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변론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러한 자신의 사정을 의롭게 판단하실 하느님을 증인이요, 변호인, 재판관으로 청하면서, 그분이 자신의 말을 공정하게 증언하고,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의롭다고 판단하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욥의 상황이나 심경등을 감안해서 이해할 때, 본절의 내용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여기 본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표현은 '구원자' 이다. 본절에서 '나의 구원자' 에 해당하는 '꼬알리'(goalli ; my Redeemer)'구속하다','친족으로서 행동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까알'(gaal)의 분사형에 1인칭 소유격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 사용된 '까알'(gaal)은 타살당한 친척을 위해 대신 복수하거나(민수35,12), 가난하여 어려움에 처한 형제(친족)의 소유지(기업)를 되사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레위25,25.26), 또는 친족이 자식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잇는 등(룻기2,20)의 행위과 관련된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욥의 억울함을 하느님께서 구원자가 되셔서 해결해 주시고, 그 진실성을 증언해 주실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욥이 극심한 고난과 혼란 가운데서도 구원자의 등장을 염원하고 있다는 것 매우 놀라운 일이다. 욥은 인간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구원자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성숙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천주 성자 제2위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본절의 이같은 표현은 욥이 지금 자신을 누구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고, 막연하게나마 하느님께서 구원자로서 등장하실 것을 염원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의미는 후반절의 '그분께서는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표현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여기서 '그가 ~서시리라' 에 해당하는 '야쿰'(yaqum)'서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라는 의미를 지닌 '쿰'(qum)의 미완료형이다.

여기서 '일어선다'는 것은 특정 공동체에서 자기 의사 표명을 위해, 또 법정에서 누군가를 변호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욥은 장차 하느님께서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입증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친히 서실 것임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진술을 함에 있어, 욥은 '나는 알고 있다네' 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알고 있다네'에 해당하는 '야다으'(yadah)의 완료형에 1인칭 주격 접미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 사용된 '야다으' 동사는 주로 남녀가 동침하는 것과 관련해서(창세4,17,25), 실제적으로 사물을 보거나 생생하게 현장에 참관해서 듣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가장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 확실한 앎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욥이 본문에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은 구원자로서 하느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염원하는 바가 얼마나 간절한지를 부각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일면 자신의 무고함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확증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6) "And after my skin has been destroyed,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 

본절은 욥이 하느님을 뵙고 그분 앞에 설 것을 확신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본절의 표현 가운데 '몸으로'는 두 가지 해석이 갈라진다. 

이에 해당하는 '우밉베사리'(umibbesari; 내 몸으로; yet in my flesh)접속사 '와우'(wau)'~로부터'(from)란 의미를 지닌 전치사 '민'(min), 그리고 '몸'(살) 을 의미하는 명사 '빠사르'(basar; flesh)1인칭 소유격 대명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표현에 대해 첫번째 해석은 전치사 '민' 을 분리의 의미로 보고, 욥이 죽은 후에 육체의 장막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느님을 뵈올 것이라는 견해이다. 

또 다른 해석 '민'을 출발의 의미로 보아,그 자신의 몸으로부터 하느님을 뵈올 것이란 견해이다. 이것은 욥이 죽기전에 지금의 재난으로부터 해방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의 몸으로 하느님을 목도하게 될 것임을 나타내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이 두 가지 견해 가운데 전자의 의미를 취하며, '민'(min)을 분리의 의미로 본다.

이것은 본절의 상반절인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라는 표현과 어울리며, 욥이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 그것을 확신한 사실이 본서 전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측면을 감안할 때에도 전자가 더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앞서 9장 32절에서 욥은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뵐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것에 대하여 회의와 절망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분은 나 같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나 그분께 답변할 수 없고  우리는 함께 법정으로 갈 수 없다네." (욥9,32) 따라서 본절인 19장 26절은 이와 정반대되는 내용처럼 비쳐진다. 그러나 이것은 앞선 내용과 배치되는 내용으로 인식할 수만은 없다. 이것은 두 본문 사이에 그 전제, 즉 욥이 가정하는 상황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9장 32절은 육체가운데 있는 현 상태, 즉 이승에서는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과 만나 쟁론할 수 없다는 의미인 반면, 본절은 자신의 가죽이 썩은 후, 곧 내세에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다는 의미이므로, 이것은 결코 충돌되거나 모순되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욥은 특별 계시가 완성된 신약 시대의 백성들처럼, 죽음 이후 인간은 하느님의 최종 심판을 받고 천국과 연옥과 지옥으로 가며, 종국에는 천국과 지옥에서 영원한 삶을 산다는 등과 같은 내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욥기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욥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영속적으로 유지된다는 것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정도의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중 제12주일 제1독서 (욥기38,1.8~11)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말이다." (10~11)

'경계를'에 해당하는 '훅키'(huqqi; limits)의 원형 '호크'(hoq)는 '자르다', '그리다', '정하다' 등의 뜻을 지닌 동사 '하카크'(haqaq)에서 유래하여 '규정되거나 제한된 것','할당된 몫', '할당된 과업', '한정된 경계', '한계', '지정된 시간'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여기서 창조때 하느님께서 바닷물의 양과 바다의 위치 등을 정확하게 규정해 놓았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계가 나름대로의 '자기 몫'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긋고'에 해당하는 '와에쉬보르'(waeshibor; and I fixed; and I brake up)원형 '샤바르'(shabar)가 원래 '깨뜨리다', '산산히 부숴뜨리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산산히 조각을 내듯이 세밀하게 경계를 그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빗장과 대문'이라는 용어는 당시 가장 견고한 것으로 여겨졌던 성문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성문은 열리고 닫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성문에 빗장이 걸리면 어떤 사람도 출입할 수 없었다. 여기서는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을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이 하느님께서 바다의 한계를 정해 땅과 분리하신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는 것은 인간들을 향한 모든 일에 있어서도 하느님께서는 아주 세밀하게 계획하시고(욥기28,4) 역사(役事) 하신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이다.

한편, 욥기 38장 11절은 욥기 38장 8절에서부터 언급되었던, 하느님께서 바다와 땅을 분리하고 경계를 그었음을 나타내는 내용이 결론이며, 동시에 바다가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바다가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명령 때문이다. 욥기 38장 11절에서 '~할 때에 말이다'에 해당하는 '와오마르'(waomar;and said)원형 '아마르'(amar)의 기본적인 뜻은 '말하다'이다. 여기서 이 단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단어의 주어와 그 말의 내용이 중요하다. 

본문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피조물인 바다도 이 말씀에 복종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여기서 '도도하다는 것'파도가 자기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 '넘쳐흐르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이상은 안된다'는 말과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말은 의미상으로 같은 말인데, 반복을 통해 그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출렁이는 파도, 그리고 그것의 한계를 정하시는 하느님의 역사하심, 그것에 복종하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모든 인간들에게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서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여기서 바다를 향해 '너희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욥과 욥의 친구들과 엘리후에게 이제 더 이상 무익한 변론이나 피조물로서 자신의 한계를 간과하고, 함부로 자신의 의(義)를 내세우거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과 뜻에 대해 판단하는 행동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사마리아여인과 대화하시는 예수님(요한복음4장)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제1독서(욥기42,1~3.5~6.12~17)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5~6) 

욥기 42장 5절은 하느님의 계시 말씀을 직접 들은 욥의 진한 감동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욥은 과거에 가졌던 불완전하고 관념적인 하느님께 대한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훨씬 정확한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가진 데 대해 감사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에 해당하는 '레셰마으 오젠 셰마으티카'(leshemah ozen shemahthika)는 직역하면 '내가 귀의 들음으로 당신을 들었습니다'(By the hearing of the ear I heard Thee)이다. 여기서 '귀로만'에 해당하는 '오젠'(ozen)이 사용된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하느님을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만 들어왔음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욥이 지금까지 조상들의 전통과 종교적 교훈, 그리고 친구들의 말, 신학적 이론을 통해서만 하느님께 대하여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지금까지 욥이 알고 있었던 하느님은 어떤 '매개체'를 통하여 아는 하느님이었고, 어떤 매개체를 통해 인식된 욥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불완전하고 관념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욥은 이제는 그 어떤 매개체없이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대면하고 있다.

여기서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 주는 '이제는'에 해당하는 '웨앗타'(weatha)는  문자적으로 '그러나, 지금은'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욥이 과거 하느님을 알고 경험했던 방법현재 하느님을 알고 체험하는 방법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라는 표현이다. 이에 해당하는 '에니 라아테카'(eni taatheka)'주시하다', '생각하다', '분별하다', '경험하다' 라는 뜻의 동사 '라아'(raah)'눈'을 뜻하는 명사 '아인'(ain)이 결합된 표현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제 눈으로 당신을 분별하다. 제 눈으로 당신을 경험하다'가 된다. 그러므로 본절의 '귀''눈'이 각각 의미하는 것은 욥에게 있어서 하느님께 대한 '간접적인 체험' '직접적인 체험'이다. 

사실 욥이 어떤 매개체없이 직접 하느님을 보고 대면한 것은 그가 엄청난 고난과 시련 속에서 간절하게 열망했던 원의(욥기 19,27)실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기꺼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 내리는구나." (욥기19,27)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직접적 체험은 그동안 욥에게 있었던 하느님께 대한 여러가지 부정적 의식들과 의구심들을 깨끗하게 털어버리고, 새롭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립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욥이 이렇듯 하느님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물을 소재로 하여 끊임없이 욥에게 말씀하셨던 질문 공세와 설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기 38장~41장에서 전개된 욥을 향한 하느님의 그 많은 물음과 권면의 말씀들은 마침내 욥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오직 하느님의 주권과 그 섭리에 절대 순명하는 일만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하였다. 즉 하느님의 이러한 선언적 말씀은 욥에게 정확한 신(神)지식과 함께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6) 욥기 42장 2절은 욥이 하느님의 섭리와 절대 주권에 대한 새로워진 믿음을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욥기 42장 3절은 욥이 무지한 말로 하느님의 뜻을 가리우고, 교만하게도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하느님의 행하심에 대해 함부로 말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욥기 42장 4~5절하느님의 계시를 직접들은 감동에 대한 고백과 하느님의 계속적인 교훈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내용에 이어지는 욥기 42장 6절은 욥의 진심어린 회개를 다루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욥의 직접적인 체험은 그로 하여금 온전히 자신을 부정하는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여기서 '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라는 의미로 번역된 '에므아쓰'(emas)의 원형 '마아쓰'(maas)'멸시하다', '가볍게 여기다', '거절하다'(이사7,15; 잠언15,22) 라는 뜻이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멸시하고 거절한다는 욥의 말은 그가 지난 날 하느님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에 근거를 두고 행동한 모든 일혐오하듯이 깊이 반성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굳은 의지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느님을 만난 사람이 경험하는 자아 부정(자기 부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 부정'은 곧바로 철저하게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먼지와 재' '비탄과 신음', '회개'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리고 직설적 어법이 사용된 '참회합니다' 에 해당하는 '웨니하므티'(wenihamthi)원형 '나함'(naham)문자적으로 '슬퍼하다', '애통하다' 라는 뜻이며, '마음을 바꾸다','의견을 뒤집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탈출32,12; 예레18,8; 아모7,3.6).

원문으로 볼 때, 이 단어에는 과거에 대하여 크게 슬퍼하고 애통해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철저한 각성과 변화에 대한 결단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욥이 회개한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욥의 친구들이 도식적 인과응보의 틀 가지고 지적하는, 특정한 행위와 관련된 구체적 범죄가 아니다. 

욥기 31장 전반에 걸쳐 욥 스스로 단호하게 부정했던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우선, 고난에 처한 욥이 지금까지 하느님 대전에 취한 태도를 들 수 있다. 과거에 욥은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잘 되는 현실적 모순 상황과 관련해서 하느님의 정의(공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해명해 달라고 하느님께 항변하기도 했다. 

인간적 입장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지만, 욥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욥이 하느님께 그 자신의 고난과 이유를 물으며 항변하기 이전에, 피조물로서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느님 대전에 절대 순명하는 자세를 가져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절대자이신 하느님 대전에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이에 대해 항변하고 원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죄의 유무(有無)를 가리시거나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언급하지 않으시고, 다만 당신의 절대 주권과 위대하고 섬세한 섭리에 대해 선언하시고 열거하시며, 욥으로 하여금 사람이란 초월자요 창조주이신 하느님 대전에서 자신의 유한한 사고로 그분의 무한한 섭리를 판단하기 전에 그분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그저 거기에 순명해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다음으로 욥이 참회했던 것은 욥 자신이 행해 온 의로운 행위에 대해 그 스스로 집착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욥하느님을 대면하기 전 자신의 도덕성과 의로운 삶을 상당히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의 변론에서 자신이 심지어 하느님 대전에서도 지금까지의 행실에 대해 당당히 변론한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변론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의 변론 말미의 윤리적 삶에 대한 회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욥기 31장 한 장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욥의 회상은 과거 자신의 삶에 대한 솔직한 부분이며 고백이지만, 지나치게 자기식의 의(義)(Self-righteousness; Self-justification)를 강조한 것으로 들려질 소지가 충분히 있다. 

욥의 윤리적 삶에 대한 회상 그가 극심한 고난을 당할만큼 자신이 직접적으로 특정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것에 근거해서 하느님 대전에 자신의 의로움을 증거하겠다고까지 한 것은 교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욥기9,34.35; 13,3; 31,35).

결국 욥은 하느님과 대면한 후, 하느님의 무한한 섭리 인간의 제한된 이성과 지식으로 함부로 판단한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그릇된 것이며, 자신이 내세웠던 도덕적, 윤리적 삶이 하느님 대전에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확고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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