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서(독서묵상)

2015. 10. 16. 오전 10: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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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제1독서 (요엘1,13-15; 2,1-2)


"사제들아, 자루옷을 두르고 슬피 울어라.  제단의 봉사자들아, 울부짖어라. 내 하느님의 봉사자들아, 와서 자루옷을 두르고 밤을 세워라.  너희 하느님의 집에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  (13)

요엘서 1장 13절은 선민 이스라엘 각 계층을 향한 애곡 권유 형식을 사용하여 메뚜기 대재앙의 참사를 묘사하는 요엘서 1장 5-13절의 마지막 단락으로서 사제들을 향하여 애곡을 권유하고 있다. 실상 요엘서 1장 13절은 1장 9절의 진술과 내용상 동일한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엘서 1장 9절은 단순한 사실을 진술하는 서술문이고, 요엘서1장 13절은 예언자 요엘이 사제들과 성전에서 일하는 봉사자들에게 명령하는 명령문이다.

예언자 요엘은 '술취한 자들''술꾼들'(5절), 그리고 '신랑을 잃고 자루옷을 두른 처녀'(약혼한 남자를 잃은 처녀; 8절)과 '농부들'(11절)에게 각각 예언의 말씀을 외친 후, 마지막으로 종교 지도자들인 '사제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자루옷을 두르고'에 해당하는 '히게루'(higeru; put on sackcloth)의 원형 '하가르'(hagar)'자루옷'<굵은 베(옷)>을 입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굵은 베로 허리띠를 만들어 허리에 띤다는 의미이다(탈출12,11). 

그런데 이와 동일한 단어가 구약 율법의 제사를 거론하는 문맥에서는, 사제들이 직임을 수행할 때 제복을 입고 그것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탈출29,9; 레위8,7; 16,14). 그래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영역본들 중에는 본문의 명령어인 '히그루'(higru)를 단순히 '띠를 띠라'(gird)는 의미로 번역했다. 요엘서 1장 8절과 비교해 보면, 그곳에서는 이 '하가르'(hagar)라는 동사가 '자루옷'(굵은 베)을 의미하는 명사 '사크'(saq)를 목적어로 취하였다.

이것을 고려할 때, 예언자 요엘이 '굵은 베'라는 명사 '사크'(saq)이곳에서 생략했다고 볼 수 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사제들에게 성전에서 직임을 수행하는 모든 제복을 갖추어 입고 회개하라는 측면에서 일부러 '사크'(saq)를 사용하지 않고, '띠를 띠라'라는 명령어만 사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슬피 울어라'에 해당하는 '웨씨페두'(wesipedu; and mourn; and lament)의 원형 '싸파드'(sapad)는 어원적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가슴을 치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이사32,12).

구약에서 모두 29번 사용되었고, 대부분 사람이 죽을 때 비탄에 잠겨 통곡하는 행위를 나타내며(창세23,2; 1사무28,3; 2사무1,12; 3,31; 예레16,5), 예언서에서 많은 경우 가슴을 치면서 회개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예레4,8; 22,18; 49,3).

예언자 요엘은 '사크'(saq)라는 명사를 쓰지 않고 단순히 관복을 입어야 한다는 의미만 전달하고 있지만, 그 사제들이 현재의 상황을 마치 남부 유다 왕국 전체가 장례식을 치르는 것처럼 느껴야 하며, 그같은 상황 인식을 전제로 가슴을 치면서 하느님 대전에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점을 촉구한다.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 대해 한탄하며 그토록 비통한 심정으로 회개해야 하는 것은 종교 지도자로서 백성들의 신앙을 바로 잡아야 할 책임을 그들이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나오는 '제단의 봉사자들'이나 '내 하느님의 봉사자들'은 앞의 '사제들'을 부연 설명하는 어구일 수도 있고, 성전에서 제사에 관계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제와 구별되는 레위 지파 사람들을 지칭하는 어구일 수도 있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이들의 공통점은 일반 백성들과 달리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성전을 관리하는 일에만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내 하느님'에 해당하는 '엘로하이'(ellohai; my God)는 번역 그대로 예언자 요엘의 하느님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상당히 독특한 표현이다. 이에 대해,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배반할지라도 예언자 요엘 자신만큼은 그 하느님께 끝까지 순종하겠다는 결심의 표현으로서 '나의 하느님'으로 칭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주 하느님께서 단지 예언자 요엘만의 하느님이 아니며 모든 유다 백성의 하느님이시지만, 당시 사제로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올바로 지키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언자 요엘은 자신만큼이라도 하느님을 바로 섬기겠다는 일종의 다짐에서 하느님을 그렇게 칭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후반절에서 예언자 요엘이 '너의 하느님의 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나의 하느님'과 '너의 하느님의 집'이라는 표현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대조를 유념하면, 사제들이 예언자 요엘을 비롯한 백성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중재자의 사명을 갖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으로 칭했을 수 있고, 그 사제들은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라는 측면에서 '너희 하느님의 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본문에서 '자루옷을 두르고 밤을 세워라'에 해당하는 '리누 밧삭킴' (linu bassaqim)'굵은 베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워라'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자루옷을 두르고'에 해당하는 '밧삭킴'(bassaqim)분명 회개를 촉구하는 표현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금식을 하거나 하느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릴 때 이 자루옷<굵은 베(옷)>을 입곤 하였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나봇을 살해한 사실 때문에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을 선언받은 아합왕이 금식하면서 진심어린 회개를 할 때 바로 이 자루옷을 입었으며(1열왕21,27), 바빌론 포로 귀환 이후 이방 사람들과 혼인함으로써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는 표시로 자루옷을 입었다(느헤9,1). 그리고 '밤을 새워라'로 번역된 '리누'(linu; lie all night; spend the night)의 원형 '룬'(lun)은 원래 기본적으로 여행을 떠난 사람이 야영지 혹은 여관에서 유숙하는 것을 나타낸다(창세19,2; 24,54; 31,54).

본 문맥에서는 사제들이 회개하면서 성전 마당에서 밤을 지새워야 함을 나타낸다. 성전 마당에서 잠을 멀리하면서까지 회개해야 한다는 촉구는  당시의 상황이 참으로 비참했다는 것과 이를 타개하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하여 회개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사제들의 회개가 선행될 때 일반 백성들의 회개 또한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요엘2,12-17)

'너희 하느님의 집에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  이 본문은 요엘서 1장 9절 상반절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나 요엘은 여기서 단어 몇 개를 바꾸어 진술한다. '너희 하느님의 집에 ~ 떨어졌다'는 의미로 번역된 '니므나으 밉베트'(nimnah nibbeth; are withheld from the house of your God)는 문자적으로 '너희 하느님의 집으로부터 금해졌다'라는 의미가 된다. 

'니므나으'(nimnah)의 원형 '마나으'(manah)는 어원상 막아서 어떤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민수24,11; 1사무25,26). 본문에서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었고, 이것은 제3의 힘에 의해 곡식 제물과 제주를 드리는것이 금해졌음을 나타내며, 그 의미상의 주체가 바로 하느님이심을 암시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께 더 이상 가증하고 타락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곡식 제물과 제주를 메뚜기 재앙을 통해 제거하셨음을 암시하는 것인데, 이같은 사실은 요엘서 1장 5절과 9절에서도 제시되었다. 그리고 여기서의 '집'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한다. 구약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은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상징적 장소로 인식되었다(1열왕8,13).

그런데 바로 이러한 성전에서 하느님과의 친교의 상징인 제사가 그것도 예배의 대상이신 하느님에 의해 폐지되었다는 사실은 신정(神政) 왕국의 정체성을 상실케 하는 일이며, 선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요엘4,12-21)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18)

요엘서 4장 16절과 17절에서 장차 도래할 주님의 날에 큰 파괴가 있을 것이지만 선민 이스라엘은 보호받는다는 사실이 예언되었다. 이제 요엘서 4장 18절과 19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의 날에 선민 이스라엘의 복락은 회복될 것이지만 이방인들은 멸망할 것이 예언된다. 요엘 예언자는 주님의 날에 하느님의 백성과 이방 민족들에게 이루어지는 극히 대조적인 상황을 예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남쪽에 위치한 이방 민족을 대표하는 이집트동쪽에 위치한 이방 민족을 대표하는 에돔각각 황무지와 황량한 광야로 변하고 말 것이지만, 하느님의 백성이 사는 곳에서는 새 포도주와 젖과 물이 풍성하게 흐르는 등 하느님의 무한한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요엘서는 주 하느님의 혹독한 심판의 예언으로 시작했지만, 그 마지막 부분에서는 회복과 축복의 예언이 주어진다.

이런 차원에서 요엘서는 메뚜기 떼의 재앙으로 혹독한 고난을 겪고 있던 남부 유다 백성에게 죄를 멈추고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명하는 준엄한 말씀죄를 회개했을 때 주어질 벅찬 희망의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예언의 말씀이 잘 어우러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요엘서 4장 18절의 서두에 나오는 '그날에는'에 해당하는 '웨하야 바이욤 하후'(wehaya baiyom hahu)는 문자적으로 '그날에는 ~이 있을 것이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와 대명사의 표현은, 없어도 의미 전달에 전혀 이상이 없지만, 이처럼 사용된 것은 주님의 날이 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문구는 요엘 예언자가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구이다.

그는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선민 이스라엘의 복락 회복과 멸망 예언이 주어지는 요엘서 4장 18-19절주님의 날에 선민 이스라엘의 평화 정착과 복수의 종결을 예언하는 요엘서 4장 20-21절로 이루어지는 요엘서의 마지막 예언을 시작하면서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놀라운 상황에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이같은 문구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날에 하느님의 백성이 경험할 것으로 제시된 이러한 축복들은 요엘서에서 메뚜기 떼의 재앙과 가뭄의 재앙으로 폐허로 변했던 남부 유다 땅이 완전히 온전한 상태로 회복될 것임을 조망하게 된다.

특히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는 예언은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들어갈 때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소개되었음을 (탈출3,8; 신명6,3) 연상하게 한다.'젖이 흐르리라'에 해당하는 '텔라크나 할라브'(thellakna hallab; will flow with milk)는 가축들이 내는 젖의 양이 엄청나게 많을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서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심지어 본문은 언덕마다(작은 산들이) 젖이 흐르리라고 묘사하는데, 이것은  과장법적인 표현이지만, 심판 후 회복의 축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클 것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다.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앞의 전반절에서는 포도주와 젖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장차 주님의 날에 선민 이스라엘이 누릴 복락을 예언한 반면에, 후반절인 본문은 샘물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주님의 날에 선민 이스라엘이 누릴 복락을 예언한다. 즉 본문에서는 하느님을 근원으로 하는 생명의 물이 흘러 넘칠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진다.

본문에서 예언되는 주님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구원사적 측면에서 네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지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그곳에서 하느님께 합당한 예배를 회복할 때, 그들은 그 성전으로부터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경험할 것이라는 의미이다(하깨1,5-11).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성전의 진정한 원형이신데(요엘2,21; 히브8,5),그분은 모든 성도들을 위해 축복의 진정한 근원이 되신다는 것이다(요한7,37-38).

셋째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궁전으로서 그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물을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1코린3,16; 에페2,21).

넷째는 종말론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서 구원을 받은 모든 이들이 생명의 물을 마실 것이라는 의미로 압축될 수 있다(묵시21,6). 

이 네 가지 경우는 다 하느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이란 의미로 압축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집에서는'에 해당하는 '밉베트 예흐와'(mibbeth yehwah)라는 표현을 통해 잘 드러나는데, 이것은 회복될 성전과 관련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 에제키엘의 환시 가운데에도 회복된 성전의 문지방 아래로부터 물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제시된다(에제47,1.2). 요엘 예언자의 묘사와 에제키엘 예언자의 묘사는 이와 같이 일치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이 주님의 집(성전)은 사실상 주 하느님 자신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주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물은 모든 생명을 살리는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한다. '샘'에 해당하는 '마얀' (mayan)은 어원상 물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솟구쳐 나오는 을 의미하는데, 본문에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물을 중단없이 지속적으로 흘려보내실 것을 암시한다. 

한편 그 물은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고 예언된다. '시팀'(shittim)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아카시아 나무'로 볼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요르단 강 동편에 있는 고대의 성읍 명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카시아 나무는 흔히 알려져 있듯이 자생력과 번식력이 매우 강하여 가문땅에서도 잘 자란다. 만약 '시팀골짜기'가 다른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아카시아 나무만이 자라는 가뭄의 땅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면, 본문은 하느님의 생명의 물은 그와 같이 바싹 말라 있는 땅에까지도 흘러 들어가 비옥한 땅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예언한 것이 된다.

또한 여기서 '시팀골짜기'는 요르단강 동편의 한 땅으로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사해 바다까지 이를 것이라는 에제키엘서 47장 8절의 진술과 유사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은유적 표현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이 완전히 죽어 있는 것들에게까지 흘러 넘쳐 그들을 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시리라'에 해당하는 '웨히쉬카'(wehishiqah; and will water)의 원형 '샤카'(shaqah)물을 들이키거나 토지에 물을 충분히 공급하는 것을 의미하며(창세2,10; 19,32), 본문에서는 사역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강한 의지로그런 불모지에까지도 물을 적시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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