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주님의 어머니, 신앙인의 어머니
-송희송 베네딕토 신부-
가톨릭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극진히 공경(恭敬)합니다. 하지만 개신교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마리아를 숭배(崇拜)하지는 않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숭배라는 용어 자체를 쓰지 않지요. 숭배라는 말 대신에 ‘흠숭(欽崇)’이란 단어를 쓰는데, 이 표현은 하느님께만 사용합니다. 가톨릭은 마리아를 흠숭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 할 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최상의 공경, 즉 ‘상경(上敬)’의 예로써 마리아를 대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엄격히 구분합니다. 예수님께는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성모님께는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오해와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왜 마리아를 공경할까요? 마리아는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을 받아(루카 1,30)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과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예루살렘을 성지(聖地)라고 한다면, 그분을 잉태하고 나아서 기르신 성모님은 성지 중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성모님이 단지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분을 공경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왕조 시대에 대비(大妃)가 왕을 낳아준 어머니이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자렛의 젊은 여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믿음으로 응답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께 단지 피동적으로 자신의 몸을 빌려드린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는 하느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믿음의 조상(로마 4,13-25)이 되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마리아도 처녀의 몸으로 구세주를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바로 이러한 탁월한 믿음 때문에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가톨릭교회는 엘리사벳의 칭송을 이어받아 복되신 성모마리아를 공경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구세주를 잉태할 때 보였던 그 믿음과 순종을 계속 견지하셨습니다. 미쳐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믿고 신뢰하는 자세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열두 살의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지 순례길에서 잃어버렸다가 사흘 만에 다시 찾고서 ‘왜 이렇게 부모의 속을 애태웠느냐’고 나무라듯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하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성모님은 아들의 대답이 무슨 뜻인지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루카 2,50-51)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아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변치 않고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여인이시어,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은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하고 당부하십니다. 여기서 성모님은 비록 아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도 그 아들을 굳건히 믿고 신뢰하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런 성모님은 신앙인들에 탁월한 모범이 되십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면 하느님을 원망하고 의심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이런 순간에도 주님께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이런 태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굳건히 믿고 신뢰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아들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간직하셨던 성모님은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보면서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루카 2,35) 고통을 당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거나 목숨을 바친 순교자를 존경심을 갖고 우러러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곁에서 그분의 고통을 함께 나눈 성모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런 성모님을 사도 요한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머니로 맡기셨습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느님은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큰 자비와 사랑을 전해주시는데, 인간은 여기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응답이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어떤 상황에서든 그분의 뜻을 따르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사랑에 전적으로 믿음과 삶으로 응답하신 분이고, 바로 이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성모님을 존경하고 공경합니다. 신앙의 길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에 앞서 훌륭하게 신앙의 길을 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면서 많은 도움과 힘을 얻습니다. 성모님을 아브라함에 못지않은 훌륭한 모범적인 신앙인이기에 가톨릭교회는 물론 약 3억 명의 동방 정교회 신자들도 그분을 존경하고 공경합니다.
1517년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는 당시 과도한 성모 공경을 날카롭게 비난하였지만, 성모님이 믿음과 순종으로 탁월한 모범을 보이셨다는 것은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 하느님을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에 대한 훌륭한 주석을 남기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루터 이후의 개신교에서는 성모 공경이 급속히 사라졌고, 오히려 성모 공경을 하는 가톨릭교회를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은 성모 공경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특히 성모님께 전구(轉求)를 청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왔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할까요?
카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성모님은 아들에게 도움을 청하셨지만,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은 아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거두지 않으셨고,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가톨릭교회는 여기에 근거를 두고서 성모님이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필요한 바를 청해서 얻게 해주실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습니다.
다른 한편, 가톨릭교회 신자들이 반성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성모 공경이 지나쳐서 마치 예수님이나 예수님을 기리는 것처럼 오해 받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 공경과 관련해 “어느 모로든 온갖 거짓 과장”을 피하고, “말로든 행동으로든 갈라진 형제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교회의 참된 교리에 대하여 오해로 이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힘써 막아야 합니다.”(교회헌장 67항)고 당부하였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중재를 청하지만,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성모님은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탁월한 믿음을 통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 앞서 우리와 똑같은 조건에서 신앙의 길을 가신 분이고, 아들 때문에 큰 고통을 감수하신 분이십니다.
이제는 그분은 하느님 곁에 계시면서 모든 은총의 근원인 하느님께 우리를 위해 간청하고 도움을 얻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모마리아는 “당신의 모성애로 아직도 나그넷길을 걸으며 위험과 고통을 겪고 있는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을 보시며 행복한 고향으로 이끌어 주신다.”(교회헌장 62항)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에서 성모님은 든든한 길잡이로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시대는 불신과 교만이 가득차서 아귀다툼을 벌이면서 불행에 빠진 이들이 많기에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 영광에 이르신 성모님이 더욱 돋보입니다. 5월 성모성월에 자주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님의 덕을 본받으면서 행복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