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 제조를 하는 무신론자가 선교사와 나란히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무신론자는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이 전하는 그 복음이 지금까지 한 일이 무엇이오? 자, 세상을 보시오! 죄악은 여전히 살아지지 않고 악한자도 변함없이 많지 않소?”
선교사는 아무 말 없이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도랑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흙투성이 꼬마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이때다 싶어 선교사가 말을 꺼냈습니다.
“비누도 뭐 별로 한 일이 없군요! 제가 보기엔 아직도 세상을 더럽게 하고 다니는 사람과 또 더러운 곳이 너무 많으니 말이오.”
무신론자가 반문했습니다.
“어허 참, 여보시오! 그러니까 비누는 사용할 때만 효과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선교사가 재빨리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것이오. 제가 전하는 복음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이 빛을 내고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복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복음에 따라 살아가고 복음을 전할 때야 비로소 세상 악들이 씻겨나갑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복음을 아낌없이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성경학자인 바클레이 박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연유는 신앙 이론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시 떠나는 이유는 성경 내용이나 하느님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신자들의 불친절과 추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실상 주의의 ‘냉담교우’들을 한번 둘러보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누구에게든 어떤 형태로든 마음에 상처를 입고 성당을 등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만 해도 사목자나 다른 신자와의 갈등으로 성당에 오기를 꺼리지 않습니까.
신앙인이 먼저 복음의 정신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도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복음 선포의 최우선적인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먼저 올곧게 살아야 합니다. 복음 선포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람을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복음 선포가 아닐까요. 우리 주위의 비신자들은 성당 건물이나 신문 광고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삶을 보고 있습니다. 결국 신앙인은 하느님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