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예비자 공부를 함께하고 세례를 받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같은 날 세례를 받았으니 (영적) 생일이 같은 사람들이지요.
그래서인지 그 분들을 만나면 언제나 각별하게 반갑습니다.
신부님도 총회장님도 함께 해주셨는데, 마침 '화이트 데이'여서 형제님들께 사탕선물도 받았고,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례 백일에는 번개팅을 하자, 돐 때는 우리끼리 잔치라도 벌이자,
함께 피정을 가자는 등 모두가 아이들처럼, 오랜 친구들처럼 좋아라 했지요.
그 분들에게 세례 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물었는데, 왜 그런 어려운 질문을 하냐며 그저 웃으시더군요.
얼마전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박완서, 한수산, 신달자등 유명 작가들이 인생의 굴곡과 고통을 겪고 난 늦은 나이에 세례를 받게 된
절절한 사연과 함께 자신들의 내적 변화를 고백한 글을 실은 책이지요. 책을 보면서 내게는 어떤 변화가
일고 있는지 돌이켜보았습니다. 제게 그 변화는 하나 둘 숫자로 셀 수 있는 것도, 자로 측량할 수 있는 것도, 영어공부처럼 초급반 중급반으로 나뉘어 계단처럼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게 달라졌다'고 할까요.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두셨다"(1코린 2.9)는 말씀처럼 내가 보고 듣던
수많은 것들, 그리고 살아온 모든 경험을 전혀 다른 마음과 생각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순간의 일이 었습니다.
매일 출근길 산복터널을 지나면서 바라보는 관악산의 풍경들도, 하루 두 번씩 건너는 한강의 물결도
이전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산과 물, 그 자연의 놀라운 변화를 감동하는 그 순간, 동시에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평화롭고 따뜻한 기운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 여기' 이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 숨쉬는, 나의 존재함이 놀랍고도 감사하게 생각됩니다.
이성과 인식, 그리고 상상으로는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과 공간 안의 점에 불과한
나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작고 유한한 나의 생명과 존재의 근원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을 믿는 것외에 어떤 이유로 말할 수 있을까요.
"내가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 못하는 그 무한하고 무량한 공간 속에 깊이 잠긴 조그만 공간을 앞서갔고
또 뒤따르는 영원 안에 흡수된 내 생애의 짧은 기간을 생각하면, 내가 저기 있지 않고 왜 하필 여기 있는가, 하고 놀라운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어찌하여 저기가 아니고 여기에 있으며 저 때가 아니고 바로 지금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지금 여기에 두었는가? 누구의 명령과 인도로 이 곳과 이 시간이 나에게 왔는가....사람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계에서 가장 약한 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파스칼, 팡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