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zy Love
나는 단일 민족으로서의 배달의 후예는 아닌 것 같다. 우리 민족은 자고로 음주가무를 줄겼다 하는데 이렇게 노래를 못 할 수 있나! 아니, 부르는 건 고사하고 노래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음주 후 이어지는 가무 즉 노래방 가는 건 무지 싫다. 그리하여 눈치껏 도망쳐 보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다. 마지못해 노래방으로 들어가지마는 그때마다 꼴이 말이 아니다.
노래방에서는 엉거추춤 어기적거리다 보면 속 모르는 놈이 꼭 있어 나에게 노래를 시킨다. 두어 번 사양해 보지만 분위기 상 아니 부를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여 이것저것 불러보지만 내가 들어도 영 아니다. 음정도 맞지 않고 박자도 어긋나기 일쑤다.
이러는 나도 조금 흥겨우면 불러보는 노래가 있다. 그건 Paul Anka라는 가수가 불렀던 Crazy Love라는 노래이다. 우리 가요도 헤매는 나 주제에 무슨 미국 꼬부랑말의 노래란 말인가! 역시 음정 박자 무시에다가 더더욱 영어인지라 가사까지 엉망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노래를 고집스럽게 부르는 것은 그 추억 속에, 까만 교복 까만 눈동자 그리고 까만 밤의 한 소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까망이라는 색깔이 참으로 순수하고 이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사실 요즈음 염색한 학생들의 머리에서 느끼는 역겨움은 이런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리라!
좌우간 소녀는 우리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니, 우리 남학생 모두는 그 소녀를 두고 연적 관계였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물론 누구도 드러내고 그 애를 좋아한다고 말은 못하고 스스로 상상속에 얼굴을 붉히곤 했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소녀가 팔등신의 미인은 아니었다. 키도 자그맣고 어쩜 평범하기까지한 모습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귀여운 면이 없잖아 있었으나 그것보다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스런 분위기가 우리 모두를 그렇게 이끌지 않았나 한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 분위기야말로 하느님의 부르심이었던 같다. 그리고 소녀는 그 부르심에 충실히 응했고! 어쨋든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 소녀는 당시 우리의 그런 마음을 몰랐을 것이고 지금도 모르고 있으리라.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애가 자취방 - 소녀의 고향은 어딘지 모르고 그리고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나 그 애는 자취생이었다. 이것 역시 소녀의 신비감을 더해 주는 요소였다 - 을 옮길 때 10여명의 우리 남자 동기들은 자기 일을 제쳐두고 모여들어 손수레에 매달렸던 사실말이다. 그리하여 옮긴 자취방에는 풋머슴아들의 체취로 한동안 고약했었고, 우린 설레임으로 며칠 동안 작은 착각 속에 살았었다. 그녀가 나만 보고 웃었다는 생각말이다.
그런 세월의 흐름 속에 그녀는 어는 날 갑자기 수녀원으로 가 버렸다. 여러 가지 추측의 말들이 오갔지만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드러내고 섭섭해 하는 놈은 없었다. 그러기엔 그 애는 너무나 고결하고 순결했으며 신비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슴아들 사이에 짧은 짐작 뒤에 스며들은 한동안의 침묵은 서로가 서로의 아쉬움을 증명하고 도 남았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사춘기의 풋사랑처럼 아련한 기억 속에 소녀의 영상이 가물가물거릴 때, 온나라의 노래방 열풍속에 추억의 말미에서 또다시 그 소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건 노래방 가사집에서 우연히 찾은 Crazy Love라는 노래에서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소녀처럼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 노래를 처음 부른 가수 Paul Anka라는 가수마저 소녀처럼 노래를 부르지는 못했다. 나 역시 추억 속의 노래를 그 애의 반만큼이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어디 어림 반 푼어치나 있는 말인가!!
이 Crazy라는 단어! 영한 사전에는 ‘광적인, 미친’이라고 풀이돼 있다. 그리고 어떤 번안곡은 ‘열정적, 서글픈’으로 번역하여 부르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결코 그런 단순한 뜻은 아니다. 무언가 정열적이면서도 우수가 깃들인, 그리고 그 어떤 순결함마저 느껴지는 조금은 고상한 의미로서의 Crazy인 것이다. 반드시, 이제는 수녀님이신 추억 속의 그 소녀만이 알고 있는, 그 애에게만 어울리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는 안 되는 신비적 의미로서의 Crazy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Crazy Love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오늘 전화선을 통해 귓가를 스쳐온다. 물론 세월의 흐름 속에 떨림마저 무의미하여 너무나 평범한 말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아! 오랜만이네요”라는 나의 말에 이어지는 목소리
“왜 그래! 말 놓아, 친군데~”
“그래도 수녀님인데, 어떻게....”
진작 내가 놓고 싶지 않은 것은 말이 아니라 소녀의 고결함의 추억임을 수녀님은 아실까!!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우정과 애정마저 혼미한 시절의 만들어진 내 기억 속의 시간의, 사실과는 무관한 이야기이므로!! 그러나 이것 역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오늘 추억 속의 여행을 떠나 오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이제는 잃어버린 낭만에 잠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제 오늘 저녁 동료들과 회식 후 내가 먼저 노래방 가자고 해야겠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멋들어지게 부르고 싶다. “크레이이이이지~~~~ 러~~~브!!!”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