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싱크 유감

2004. 6. 29. 오전 8: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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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립싱크 유감 

 

 

  며칠 전 집에서 애들과 텔레비젼 쇼 프로를 보던 중에 화면 우측 상단에 무슨 원판 같은 것이 계속 돌아 가는 것을 보았다. 하도 이상하여 옆에 있는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에게 물어 보았다.  
  "명규야, 저게 뭐니? 오른쪽 위에 둥근 거 말야."
  "저거요? 립싱크 표시에요."
  "립싱크? 그게 뭔데?"
  "가수가 진짜로 노래 부르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누가 불러?"
  "누가 부르긴요. 테이프를 틀어 놓죠." 아들은 별 것도 아닌 것을 다 묻느냐 듯이 퉁명스럽게 답을 하였다.
  "그럼 제들은 가수가 아니고 무용수네?"
  "에이, 아빠는. 요즈음 다 그래요." 묻는 아빠가 오히려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
  하긴 저렇게 천방지축으로 뛰는데 실재 노래를 부를 수는 없겠지하고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이상한 생각을 지울 수 없어 계속 물어 보았다.
  "그런데 왜 마이크를 사용하지?  녹음된 걸 틀어 놓고 춤만 추는 것인데, 굳이 마이크 필요 없잖아. 어쩌면 더 불편할 텐데. 안 그래?"
  "아이 참. 그래야 진짜 노래 부르는 것 같잖아요."

  K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렇잖아도 마음이 여린 나의 마음이 조금 흔들린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 설 수는 없다. 벼르고 벼르던 순간인데…. 다시 모질게 몰아부친다.
  "K야, 여긴 학교이고, 너는 학생이잖니."
  여전히 K는 두 줄기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선생님,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 주세요. 흑흑."
  "그래, 이놈아. 대한민국의 학생이라면 한국의 문화에 적응해야 되는 게 아냐? 그렇게 화장을 하고 싶으면 차라리 미국에 이민 가, 미국에 말야. 미국에서는 고등학생이 귀거리에 화장하고 배꼽티 입고 등교한다는데 말야." 따발총처럼 쏘아 부친다.
  "엉엉, 선생님. 다신 안 그럴께요. 정말이에요."
  "이놈아, 너 언제 가짜라고 했니? 항상 정말이라고 했지. 벌써 몇 번째야? 안 돼. 이번에는 절대 용서 못해."
  "아니에요. 이번엔 진짜 정말이에요, 선생님. 엉엉." 울음은 이제 완전히 통곡으로 변한다.
  아아, 남자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인가 보다. 비록 상대가 학생이고 내가 그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안 돼, 종아리 맞고 내일 부모님 오셔야 해."
  강하게는 말하지만 모질게 먹었던 처음의 마음은 어느새 봄눈처럼 스믈스믈 녹아내린다. 또한 선생인 내 앞에서 저렇게 우는 걸 보니 이번은 애 말대로 정말 반성 한 것 같기도 하다.
  하긴 내가 또 어떻게 하겠는가! 종아리를 때린다고 말은 했지만 실제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신문 기사처럼 교사가 때린다고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또한 부모를 호출한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전자전, 모전여전이지. 아니, 자기네 딸이 무얼 잘못 했냐고, 예쁘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항의하면 더더욱 난감할 뿐이지.  
  "좋아, K. 정말 반성했니? 졸업하면 얼마든지 멋 부릴 수 있어. 그 누구 눈치 안 보고 입술 바르고  머리 노랗게 물들이고, 응!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학생의 본분에 충실해야지." 다소  나즈막한 음성으로  K를 달래본다.
  "예, 알고 있어요, 엉엉." 내 목소리에 무슨 감을 잡았는지 더한층 처량하게 소리내어 불쌍하게 운다.
  "그래, K야. 선생님 말 알겠지? 좀 학생다워, 응?"
  "예, 엉엉."
  "좋아, 네가 그렇게 울며 비니 다시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
  "엉엉,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절대 안 그럴께요."
  "그래, 됐어. 선생님이 어찌 네가 미워서 야단치겠니? 선생님 말씀 되새겨 보고…. 이제 눈물 닦고 가 보도록 해. 그리고 너무 늦었다. 집에 곧장 가야지."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라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까딱해 보이곤 재빠르게 교무실을 빠져나간다.
  기분이 찝찝하다.  학생을 야단칠 때면 항상 이런 찝찝한 기분에 사로 잡히곤 한다. 하지만 별 수 없다. 이런 게 교사의 의무이니 말이다. 담배를 한 개피 피워 물고 가방을 정리한다.

  다음날이다.
  복도에서 만난 K는 황급히 나를 피해 달아난다. 묘한 예감이 들어 불러 세워 보고 싶었으나, 학생을 항상 긍정적인 시각으로 대하라라는 교육학 이론을 떠올리곤 그냥 포기하고 만다.
  그래! 어제 그렇게 눈물 흘리며 담임인 나에게 용서를 청했는데, 설마 또 화장을 했겟는가? 그래도 한 달은 가겠지. 어제 진짜 반성 많이 한 것 같던데. 그리고 어제 따끔하게 야단쳤으니 오늘은 불러서 도닥거려 주어야지. 그래야 애가 마음의 상처 없이 바르게 성장하지. 그게 교사의 의무이기도 하고 말야.
  "고선생님"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든다. 옆반 담임인 가사 선생님이시다.
  "뭘 생각하세요. 우두커니 서신 체."
  "아, 아니에요. 그냥 좀. 어제 좀 늦게 잤더니, 영…" 일기를 틀킨 중학생마냥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는다.
  "그건 그렇고 아까 저기 뛰어간 학생 K 맞지요?" 가사 선생님은 말을 돌리며 K가 뛰어간 쪽을 가리킨다.
  "그런 것 같네요."
  "어휴, 정말 못 말리겠어요."
  "못 말리다니요?"
  "그렇게 꾸중을 해도 화장을 하고 학교에 오네요. 아이샤도우에 메니큐어까지 칠하고 말이에요. 어젠 고선생님께서 야단치시는 것 같던데….  담임이 야단을 쳐도 마찬가지이니,아니 더 진하게 칠해 왔더라구요."
  "그, 그럴 리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정신이 멍해진다. 옛날 마신 술이 갑자기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구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기도 하다.
  "고선생님! 이것도 문화일까요? 우리가 이해해야만 하는 그들만의 문화말이에요. 전 도저히 모르겠네요."
  "그, 글쎄요. 저도 모르겠네요."
  순간 며칠 전 텔레비젼에서 보았던 가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직접 노래라도 부르는 것 처럼 온갖 포즈로 감정을 잡으며 마이크를 입에 바짝 갖다대던 그 모습이…
 아아, 가수 자신이 알고 방청객이 알고 내 아들이 다 아는 그 립싱크를, 나만 몰랐으니,  나만이 정말 그들이 실제 마이크를 사용해 노래를 부르는 줄 알았으니 참 부끄럽다.
  "립싱크, 그래서 립싱크인가 보죠."
  "예?"
  "립싱크란 거 선생님도 모르시나 보죠?"
  "…?"
  영문을 모르는 그 여선생님을 뒤로 하고 총총히 교무실로 들어선다.

<2000. 1.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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