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이트장에서

2004. 6. 27. 오후 7:38:17

글자
  스케이트장에서
  
 오늘도 작은애가 이른 아침부터 스케이트장 가자고 보챈다. 그 동안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차일피일 미루어 왔는데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을 것 같다. 더 이상 핑계도 없거니와 이제는 큰애와 처까지 합심하여 나를 조른다.
  " 아빠, 응! 한번만..."
  " 그래, 여보! 한번 갑시다."
  "……"
 사실 나는 눈과 얼음이 관련된 운동을 무조건 싫어한다. 싫어한다기보다는 두려워 한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 모른다. 내 고향은 눈과 얼음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 남쪽 지방이다. 당연히 이 나이 되도록 스케이트는 고사하고 눈썰매 한번 타 보았겠는가? 그러니 애들 앞에서 뒤뚱거리고 넘어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싫은 마음이 앞설 수밖에 없다.  더욱 가정 교육상 애들은 아버지를 아주 유능한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스케이트장 가자는 막내놈의 열화를 거절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막내놈의 성화를 거절할 수 없었다. 방학이라 바쁘다는 핑계도 못 대고, 돈이 없다는 것도 더 이상 먹히지 않눈다.   또 어찌보면 우리 부부와 달리 서울이 이미 고향이 되고만 녀석들에게는 스케이트타기를 배우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아니 드는게 아니다.
 그리하여 큰맘먹고 가까운 스케이트장으로 가기로 한다. 오뎅국물과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담고, 김밥을 싸고 돗자리를 챙기는 등 부산하게 준비하고 집을 나선다. 스케이트장이라야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로 그다지 멀지 않다. 여기 오기가 그렇게 힘들었나 하는 생각도 잠시, 벌써 스케이트장이다. 스케이트장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생각외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되고 있었다.
  스케이트화를 두 켤레 빌려 애들에게 신기고 얼음판 위로 간다. 물론 나와 처는 돈이 모자라다는 핑계-사실

은 자신이 없어서다. 내 처도 고향이 나랑 같다.-로 얼음판 밖에서 집에서 가져온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다.
  "증거를 남겨야 되, 증거를…. 그래야 커서 부모 핑계 안 대지!"
  "그래요. 또 언제 이런데 와 볼런지도 모르고요."
 아내의 뼈 있는 농담에 멋적게 웃어보지만 영 체면이 말이 아니다.       
 잘난(?) 부모 덕택에 난생 처음 밟아보는 얼음판 위를 큰애와 작은애는 아니나 다를까 뒤뚱거리며 엉성하게 움직인다.아니 움직인다기보다 숫제 긴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두어걸음이 고작이다.
  ''자식들, 나를 닮아 운동 신경이 없나.''
 내 속을 아는지 녀석들도  내쪽을 보고 웃는다.
  ''그래, 녀석들. 그냥 집에서 텔레비젼이나 보지 뭐하러 와 가지고서…''
  안스러우면서도 조금은 고소한 마음으로 녀석들을 보며  웃어준다.
  하지만 녀석들은 묘하게도 다시 일어선다. 실망하는 표정도 없이 그냥 일어선다. 넘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또 일어선다. 서로 경쟁이나 하듯 넘어지고 일어선다. 그러기를 한 시간 남짓, 그 동안 녀석들은 백 번도 더 넘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빙판 위에 서 있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또 한 시간이 지나자 거의 넘어지지 않고 얼음판 위를 걸어 다닌다. 물론 아직도 많이 어색하지만 말이다. 그 모습이 대견스러워 아내의 옆구리를 살며시 찌르며 말을 건넨다.
  " 여보, 저 녀석들 제법이네. 그렇게 넘어지더니만 어느새…"
  순간 학창 시절의 어느 선생님의 말씀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지나 간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엄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아가때 입 속에서 수천 번 그 말을 뇌아렸고, 한 걸음을 걷기 위해서 수천 번을 넘어져야 했었어.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뭐야. 해 보지도 않고 못한다 하고, 아니 숫제 해볼 생각조차 갖지 않으니말이야. 우리 모두 우리가 아기 때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야 해. 우린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래, 그것이야. 내가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창피하다고 머뭇거릴 때 저 녀석들은 용기를 갖고 덤벼들었어. 물론 많이는 넘어졌지만 결국은 해냈고, 나는 여전히 그대로가 아닌가. 넘어지는 것은 결코 창피한 게 아니야. 우리가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은 넘어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 내 자신인 것이야. 넘어지면 그만큼 다시 일어서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나는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자식들아! 지금 이 모습대로 너희들의 인생을 살아가려무나. 살다 보면 많은 어려움이 닥치고 결정적인 선택을 하여야만 할 때가 있을꺼야. 그 때는 용기를 가지고 지금처럼 해야 돼. 넘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보다 일어선다는 생각을 먼저하는 그 마음을 갖고 말이야.

  "정말 용하네. 신기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녀석이 오자고 했나봐요. 그런데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무슨 생각하세요?"
  " 아, 아냐. 그냥 애가 대견해서 그래. 그건 그렇고 여보. 우리도 한 번 스케이트 타 볼까? 애도 하는데 명색이 어른인 우리가 못 하겠어."
  "뭐라구요? 당신이 웬 일로 그런 말을…. 알다가도 모르겠네."
  아내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다음에는 스키장도 한 번 가 봐아겠어."
  "예? 아니 여기도 마지못해 온 사람이…"
  "아냐, 이제 생각을 바꿨어"
  "…"  
  
  저녁 노을 속에 어우러진 은빛이 여전히 얼음판을 열심히 제치는 두 자식놈을 잉어의 비늘마냥 감싸고 있다.

 

 

-옛날 썻던 글을 옮겼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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