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의 고개를 넘으며

2004. 7. 1. 오전 8:28:27

글자

어느덧 삶의 반환점을 돌아 인생의 골인 지점을 향해 가는 사십이다.
세상은 온통 새천년의 희망에 술렁이고 많은 사람들이 축제의 물결 속에 환호하고 있지만, 나는 반대로 묘한 공허감에 빠진 체 부질없이 허공만 응시한다. 이루어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루어야 할 것은 많은데 그것은 실체도 없이 너무나 아득해 보이고, 세월은 주마(走馬)처럼 달리기만 하고… .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이 아니냐라고 자위해 보지만 여전히 쓸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애꿎은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뿜는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여전히 젊다고, 아니, 어리다고 생각했었다. 새벽 도서관에서 꿈을 가꾸던 기억, 소주잔을 앞에 놓고 인생과 철학을 이야기하던 것이 바로 어제의 일 같고, 겨울 바다를 보며 주고받던 친구의 이야기이며 성당 앞 찻집에서 한 시간 넘게 들었던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의 선율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는 어느 사이에 청춘의, 세월의 강을 훌쩍 뛰어넘었던 것이었다.   
며칠 전 개인적인 일로 대학생 한 녀석과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녀석은 나를 대하기가 어려운지 뒤돌아 술을 마시고 담배도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어 밖에 나가 피웠다. 순간 허물 수 없는 세월의 벽이 그와 나 사이에 솟아 있음을 느꼈다. 벌써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나이인가!  
아아! 난 아직도 젊고 그들과 충분히 함께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나의 짝사랑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나를 구세대, 간세대 취급을 하고 있었고 그들 세계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고가는 대화 속의 조그맣게 느껴지는 간극들. 그 틈이 결코 조그만한 것이 아니라 요르단강처럼 좁히기에는 너무나 넓다라는 생각이 오늘 내 나이 사십을 떠올리며 문득 깨닫는다.
이렇게 세월은 흘러 간 것이다. 자신의 삶과 씨름하고 현실에 이리저리 채이다 보니 세상은 변하고 시간은 나를 변두리로 쫓아낸 것이다. 청춘의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꿈, 열정, 사랑은 사라진 지 오래다. 변치말자던 우정의 벗은 이제 연락조차 아득하고 톨속적이고 가식적인 만남만이 있을 따름이요, 불혹(不惑)이라는 허울만이 나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짙은 허무와 무력감을 떨치려 한참을 묻어두었던 옛책을 꺼내든다. 옛추억의 체취라도 찾아볼 속셈으로….
그때는 정말 많은 책을 읽었다. 헤세, 토마스만의 소설에서 칸트, 주역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고전을 한달에 몇 권씩을 읽곤했었다. 어떤 것을 밑줄을 긋기도 하고 책의 여백에 이것저것 메모해 놓기도 했다. 앎에 대한 동경과 자부심이 당시의 나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세월의 무게에 눌려 읽는다는 것은 겨우 신문 쪼가리와 일년에 통속적인 글 두어 개뿐이다.
꺼내든 책은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고 종이는 산화되어 누런색을 띠고 있었지만 오래된 벗을 만나는 것처럼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리고 책갈피 사이에서 잊혀졌던 친구의 쪽지를 발견하고는 그 설레임은 가벼운 흥분으로 바뀐다. 당시 그 친구는 나에게 무엇을 이야기했었을까하는 궁금중과 함께 말이다. 그 쪽지는 내가 군에 있을 때 보낸 것이었다.

… 친구, 너가 떠난 여기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네가 떠나면 더 이상 군대에 갈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구먼. 어쨋든  동문 시장은 똑같이 술과 이야기로 북적이고 겨울 방파제의 파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네.  난 또다시 젊음의 고독에 취한체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고 … 참 신기하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말야.…

그대로라니? 그래, 어쩜 모든 것은 그대로인지 모른다. 아니, 그대로인 것이다. 여전히 학교 도서관은 꿈을 찾는 이로 붐비고, 인생과 종교를 논하는 선술집이 있다. 그리고 서부두의 방파제에서는 여전히 파도가 치고 있다. 성당 앞 찻집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이 계속 흘러나오고 또한 그 누군가는 음악에 취해 눈을 내려 감고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 내가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게 그대로이다. 내가 없다고 그러한 것들이 변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 것이다. 친구의 말처럼 신기하게도.
불현듯 나는 그대로이고 세월이 흘러갔다라고 생각했던 지금까지의 생각이 오산이었음을 깨닫는다. 그건 삶의 무게를 벗어나고자 하는 비겁자의 자기 변명일 뿐이었다. 실상 흘러가고 변한건 내 자신이었지 세월이 아닌 것이다.
이제 언제까지 세월을 핑계 삼아 이렇게 허무 속에 안주할 수없다. 지나간 과거에 이룬 것이 없다고 여기서 세월을 탓할 수는 없다. 살아온 사십 년 이상의 시간이 또한 내 앞에 있다. 무기력의 옷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세월 속을 용감하게 걸어가야 한다. 이루어 진 것을 생각말고 이루어야 할 것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또 다른 사십년 후 나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지된 세월 속을 헤쳐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고, 그리고 최선을 다했노라고….

 

- 옛날 썼던 글을 옮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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