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탐승기
-거기에도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더이다.
저 먼 남쪽 섬 제주의 서부두 방파제에서 이쪽 본토를 바라보며 ‘아, 이곳이 내가 올 수 있는 북쪽 끝이란 말인가!’ 하며 울부짖던 내가 이제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을 간다. 아니,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결코 가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북의 땅을 간다. 또한 大人은 앉아서 십만 리를 내다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공허한 자존심의 소유자인 내가 그 고집을 접어야 했다는 사실은 조급한 小人으로서의 내 자신을 드러냄이리라.....
이유와 과정이야 어쨋든 , 그리고 실제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금단의 땅의 일부인 금강산을 간다는 것에 평소와는 다른 설렘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쩜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설렘은 통일전망대에 있는 우리측 출입관리소 출입문 위의 현판을 봤을 때 미묘한 서글픔으로 바뀌었다. 현판에는 출경, 입경 지역이라는 낯선 단어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북을 국가로 인정치 않는 우리 법의 특수성 때문이리라! 보통이라면 출국, 입국이라는 말을 썼을 터인데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나라로 인정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 말이다. 분명히 상대가 그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지 않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우기는 타조의 어리석음을 보는 것 같아 우울하다.
지루한 기다림에 비해 비교적 간단한 출경 절차를 걸치고 드디어 비무장 지대 우리측 관할 구역을 넘어 북의 땅에 들어섰다. 나무가 다소 적다라는 느낌을 받으며 조금은 낯설은 땅을 눈에 담는 순간 북한군의 검문이 있었다. 그들은 승차 인원을 확인하고 수화물칸을 열어 혹시 있을지 모르는 밀입북자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에서는 나올 때나 들어갈 때 별다른 검문이 없었음을 본다면 남북의 자신감의 차이에서 오는 현상이리라. 북측 관할의 비무장 지대를 지나 그쪽 출입관리소의 간단한 절차를 거쳐 민간인 거주 지역을 지나며 집들이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유난히 자전거가 많으며 주민들이 무리지어 다닌다는 낯선 느낌을 갖는 순간 2박 3일 동안 숙식을 해결할 온정각에 도착하였다.
이번 연수에는 380여 명의 교직원이 참석하였다. 인원이 그렇다보니 일행 중에는 그 전 학교에서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분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나 역시 많은 知人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석에서 형님으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친했던, 그리고 부장으로 모셨던 수 많은 분들과의, 하지만 세월이라는 핑계 속에 묻혀졌던 정겨운 분들과의 만남. 이번 연수의 묘미는 이런 분들과의 해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울러 장소가 이국과도 같은 금강산이다 보니 그 정겨움이야말로 더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하여 서로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그리고 함께 근무했던 분들의 근황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들은 저녁 식사 후 자연스럽게 온정각 앞 야시장으로 향한다.
야시장은 이름의 그대로 시장은 아니었다. 간단한 주류와 안주를 파는 서너 평 남짓의 우리의 포장마차 같은 곳이었다. 원래 이름이 야시장인지 혹은 우리 중의 그 누군가가 명명했는지는 모르나 북쪽 주민을 마나고 싶지만, 내놓고 만나겠다고 할 수 없는 마음의 표현이라는 추측을 해 본다.
야시장에는 3명의 여성 판매원이 주류와 안주를 팔고 두 명 정도의 남성이 구이 등의 간단한 음식을 조리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의 애초 목적은 술을 안주삼아 이야기를 마시는 것이었지만 처음 접하는 북한 주민이라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관심은 그들에게 쏠렸다. 그들 모두는 옥류관에서 파견나왔다 한다. 이 정도의 소규모에 그 유명한 옥류관에 파견된 사람들이 장사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상하지만 여기가 사회주의 계획 경제인 북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어는 정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대화와 함께 우리는 술꾼답게 처음 접하는 북의 술을 이것저것 맛보았다. 평양막걸리부터 시작하여 평양소주, 도토리술, 솔꽃술 그리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각양각색의 술을 무슨 주류품평가인 것처럼 조금씩 마셔 보았다. 여러 품평의 말이 오갔지만 결론은 그럭저럭 마실만 하다는 것이었다. 즉 여기 남한에서 마시는 술과는 큰 차이가 없으면서도 나름의 독특한 맛이 난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남이나 북이나 같은 동포의 입인데 무슨 중국이나 서양의 술과 같은 큰 차이가 있으랴!
다음은 안주다. 안주 중 특이한 것은 참새구이, 털게찜, 횟대고기구이 등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두부, 낙지, 새우구이, 꼬치, 등도 팔고 있었지만 여기 남한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참새구이는 비위가 약해 차마 먹어보지 못했고 다른 음식들은 조금씩 맛을 보았는데 으뜸은 털게였다. 값도 비교적 저렴하고 살도 포동포동 찐데다가 맛도 달짭지근한게 정말 술도둑이었다. 동료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털게는 남에도 파는데 여기처럼 실하지 않고 가격도 비싸다는 것이다. 사람의 입맛은 비슷한지라 털게는 금방 동이나고 말았다. 이튿날 그 맛을 못 잊어 다시 가 보았으나 초저녁부터 동나는 바람에 횟대고기구이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많은 주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새벽 일찍 눈을 떴는데, 창밖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돌려보니 누군가가 김일성 우상벽화 앞에서 비질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호기심으로 가까이 가보니 군인 둘이 정성껏 비질을 하고 있었다. 아니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은 공들여 비질을 하는데 또 한 사람은 뒷짐을 진 체 구경인지 감시인지를 하고 있었다. 김일성에 대한 그들의 충심을 묘한 감정으로 느끼면서도 그들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슬며시 식당으로 올라갔다.
식사 후 우리 일행은 금강산 탐승의 첫 코스인 구룡폭포로 향했다. 입구에서 북측 안내원의 간단한 해설과 함께 약 2Km의 산행을 시작하였다. 기암괴석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외설악과 참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삼록수라는 팻말 앞에 또 다른 안내원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삼록수(蔘鹿水)는 글자 그대로 산삼과 녹용이 섞인 약수로서 한 번 마실 때마다 10년이 젊어진다는 설명이다. 듣고 보니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저 가파른 골짜기 위에 산삼과 녹용이 있음직하다. 하여 안내하는 이에게 짓궂은 농담을 건네 본다.
“안내원 동무는 나이, 아니 춘추가 100이 넘었죠?”
“???????”
“그런데 이 물 마시고 지금처럼 이쁘고 젊어진거잖아요!”
안내원의 상큼한 웃음을 뒤로하여 다시 산행을 시작하는데 가는 곳마다 못(潭)이 눈에 들어온다. 어찌나 고운지 청자빛 물빛 아래 투명한 바닥이 드려다 보인다. 표석을 보니 깊이가 6M라 하는데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물이 적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이정도인데, 수량이 많은 다른 계절에는 얼마만한 장관이겠는가! 과연 ‘금강산의 물은 내리면 폭포요, 모이면 潭이요, 흩어지면 수정이요, 펼쳐지면 비단이 된다’라는 안내원의 말이 전혀 과장되지 않은 사실 그대로임을 새삼 느낀다.
그림 속을 홀로 걸어가는 착각 속에 어느덧 갈림길에 다다른다. 오른쪽은 가파른 봉우리에 하늘에 닿을 듯이 철제 사다리가 걸쳐져 있고 왼쪽은 구룡폭포로 가는 평지였다. 가파른 봉우리에 오르면 그 유명한 선녀와 나무꾼의 주인공 팔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상팔담(上八潭)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사다리에 발을 올려놓는다.
몇 번을 쉬고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정상에 오르니 저 아래 까마득한 곳에 실로 꿴 여러 수정 구슬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게 바로 상팔담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물이라는데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내 눈에는 수정 구슬로 밖에는 안 보인다. 저런 수정 구슬에 목욕할 수 있는 존재는 선녀 아니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하나하나를 세어 보니 아쉽게도 봉우리에 가려 다섯 개 밖에는 확인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눈을 들어 팔담 위를 보니 속살을 허옇게 드러낸 옥녀봉이 까마득히 솟아 있고, 그 뒤로 금강산 제일봉인 비로봉이 있다하는데 옥녀봉과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아아! 금강산은 과연 천하제일의 명산이로구나! 자신의 모습을 다 드러내기엔 산은 너무나 거룩하고 나는 너무나도 비천하구나! 얼마만한 덕과 인품을 갖추어야만 비로봉을 볼 수 있단 말인가! 훗날 내가 다시 여길 온다 해도 저 비로봉 당신은 나같은 범부에겐 결코 드러내지 않겠지!
한 없이 작아지는 내 자신을 우리 일행 중 그 누구도 금강의 제일봉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로 위로하며 구룡폭포로 가니 70여M의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떨어진다. 이 구룡폭포는 한국의 3대 폭포 중의 하나라 하는데, 안내원의 풍수학적 관점에서 그 까닭을 설명해 주었지만 풍수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불현듯, 폭포와 주위의 굴곡이 여자의 은밀한 곳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아까 옥녀봉이란 이름도 수상하다. 벌거벗은 여체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 말이다. 가만 있자, 금강산 초입에 있던 소나무의 별칭도 미인송이라 하지 않았던가? 쭉쭉 뻗은 미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하는데 그것 역시 여자의 벗은 몸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무꾼은 왜 여기까지 올라왔을까? 과연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서였을까? 주변에 지천으로 나무가 있었을 터인데 굳이 힘들여 이곳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혼자 얼굴을 붉히며 상상의 날개를 이렇게 펼치자 내가 설악산을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설악을 본 순간 숨이 막히는 충격으로 ‘아아! 절경이로구나! 천하에 이런 경관을 어느 곳에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금강산이 천하제일이라 하는데, 그 말은 와전된 것이고, 이 설악이야말로 천하제일임에 틀림 없어’ 라고 했을 때 옆에 있던 누군가가 고개를 살짝 저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었다.
“그건 금강산을 못 보아서 그런거지요. 설악이 옷을 입은 미인이라면 금강은 옷을 벗은 미인이라고 한답디다”
당시는 그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 못했었는데, 오늘 이 폭포를 보는 순간 스님이 화두를 깨치는 순간처럼 가슴이 다 시원하다.
버스로 숙소로 돌아오는 중에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인 신계사지를 둘러보았다. 이 절은 전쟁 당시 소실되었는데 근자에 남북 불교 당사자들의 힘으로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남에서 파견되어 온 젊은 스님의 설명을 듣고 정선의 금강산도의 소재가 된 능선을 사진에 담았다. 아울러 남과 북이 어우러져 함께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믓하고 통일이 결코 멀지 않았음을 깨닫고 실제 그런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축원하였다.
오후 곡예단 공연까지 두 시간의 여유 시간에 일행 중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삼일포로 향했다. 삼일포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담수호이다. 원래는 바다의 만이었으나 지반의 융기와 퇴적 작용으로 호수가 되었으나 신기하게도 바닷물이 아닌 민물이다.
예날 어느 왕이 관동팔경을 하루에 하나씩 구경하기로 하였었는데, 이곳에 이르러 절경에 반해 삼일을 머물렀다 해서 삼일포로 불리운다 하는데 실제 보니 삼일이 아니라 열흘 아니 한 달을 머물고 싶은 곳이다. 물론 절경이라서 그렇겠지만 물이 주는 포근함이 또 다른 이유이리라. 사실 금강산의 기암괴석은 경탄스럽기도 하지만 사람을 위압하는 위풍담당함으로 우리를 한없이 작게 하지만 물 특히 이 삼일포는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함을 준다. 여기라면 아기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평화롭게 쉬듯이 온갖 고민을 잊고 쉴 수 있을 것 같다.
이윽고 북한이 자랑하는 곡예단 공연이 시작되었다. 평양모란봉곡예단은 세계 곡예(서커스)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받은 세계적인 곡예단이다. 이곳에서는 서커스를 하나의 예술로 인식하여 당국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공훈배우로 인정받는 경우는 차관급, 그리고 최고의 배우인 인민배우인 경우는 장관급의 대우를 받는다 한다. 이번 공연에도 몇 명의 공훈배우, 인민배우가 출연했다. 총 단원은 500여명이라 하는데, 4개 조로 나누어 동시에 4 곳에서 세계적인 공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공연을 관람하면서 남한 사람들은 세 번 눈물을 흘린다 한다. 한 번은 같은 동포로서 너무나 자랑스러워서, 두 번째는 그런 곡예를 익히는 과정에서 배우들이 겪었을 고초와 노력을 생각하니, 그리고 마지막은 공연 중간 중간에 박수친 손바닥이 아파서.... 나 역시 세 번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공연은 한 시간 반 동안 이루어졌는데 숨돌릴 틈조차 없이 진행되는 무대에 한 순간도 눈을 땔 수 없었다. 어떤 선생님은 연수 시기 내내 이 공연이야말로 이번 연수의 백미요, 이 관람만으로도 금강산통일체험 연수는 성공적이라는 말씀을 하고 다녔다.
저녁 식사 후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고, 세종 대왕도 요양차 온천욕을 하였으며 이곳 마을 온정리의 유래가 된 온천욕을 하였다. 이 금강산 온천은 피부병과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하며 나 역시 왕이 된 것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숙소로 돌아갔다.
이튿날 그러니까 이번 연수의 마지막 날, 새벽같이 눈을 뜨는 순간 미묘한 갈등이 일어났다. 어제의 산행, 그리고 통일 토론과 북한 문화 체험을 빙자한 과도한 음주로 인한 피로가 남아 있어 경사가 급해 쉽지 않다는 만물상 코스 대신 삼일포와 해금강총석정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삼일포는 전날 갔다 왔고 총석정은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며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올라 가야지, 다음에는 지금보다 더 힘들 것이라는 동료 선생님의 눈물어린(?) 충고에 마음을 다시 바꿔 만물상을 선택하였다.
버스로 이동하는 중간에 창 밖으로 보이는 정경은 어제 구룡폭포 코스 못지 않는 절경이었다. 대체 만물상이 얼마만한 절경이기에 여기를 그냥 버스로 스쳐지나간단 말인가! 다소 엉뚱한 불만을 품으면서 주위의 정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데, 버스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고갯길을 지나 만물상 입구의 주차장에 우릴 내려놓는다.
순간 여기저기 짧은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어제의 절경도 여기에 비하면 너무나 평범하다.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글로 형언키 어려운 절경이 이어진다. 기암 하나를 보아도, 기암 여럿을 묶어 보아도, 여럿을 또다시 묶어 보아도,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옆을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위를 보아도 그저 감탄의 탄식이 절로 나온다. 어떤 것은 신선의 모습을, 어떤 것은 사람의 모습을, 어떤 것은 도끼의 모습을, 어떤 것은 부처의 모습을, 어떤 것은 연꽃의 모습을, 그리고 어떤 것은 이름도 모르는 그 무엇의 모습을..... 이 만물상을 보는 사람은 그 누구든 결코 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리라. 조물주가 없다면 이런 형상들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곳에서 미리 연습을 했으리라.
종종 풍경 사진의 장소를 큰 기대를 갖고 가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실망하고 만다. 그건 아마도 구도라든가 광선 효과 등의 실경 외적인 면 때문에 그러하리라. 하지만 만물상은 달랐다. 여기 오기 전에 온정각에 걸린 사진에서 보았지만 실제 만물상의 모습이 그 열 배 스무 배의 감동으로 다가왔다.
만물상 탐승을 마지막으로 2박 3일의 주요 일정은 거의 끝났다. 여자의 벗은 몸을 훔쳐보는 짜릿함과 쾌감이 어우러진 감흥을 가슴 깊이 고이고이 간직한 채 우리 일행은 아쉬운 귀경 채비를 하여야만 했다.
이제 여기 남에서 2박 3일의 연수를 회상해 본다. 과연 나는 2박 3일 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천하제일의 명산이라는 금강산의 절경.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쪽 북에도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깨달은 점이다. 사실 북에 가기 전에는 과연 북은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라는 점을 보려 했었다. 그러나 다른 점은 하나도 없었다. 만나본 북의 사람은 내 이웃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소박하게 화장을 하고 흑단같은 머리를 뒤로 넘겨 묶은 자연 미인으로서의 안내원과 접대원의 모습은 지금 남에서는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원형일는지 모른다. 그들의 메니큐어 없는 손에서 느낀 정겨움은 비단 나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귀경길에 보았던 학교 운동장에서 꼬맹이의 제기차는 모습에서 내 어릴적 시절을 떠올린 것은 결코 낭만만은 아니리라. 또한 그들의 말씨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물론 조금은 어색하게 들린 것이 사실이지만 그건 내가 처음으로 서울에 왔을 때 느꼈던 차이만큼은 아니었다. 고장난 TV를 고치러 온 그들이 리모콘을 보고 막대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서구의 말에 오염된 남의 언어 현실이 오히려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음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수 기간 내내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처럼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고생한 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렇잖아도 비만인 내 몸무게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또한 산이 조금 헐벗었다고 해도 그게 우리와 다른 증거는 아니다. 시간이야 다소 걸리겠지만 나무는 심으면 된다. 그리고 우리 역시 6,7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던가! 또한 버스 이동 중에 보았던 나무전봇대와 침실의 어두침침한 조명 역시 다른 점은 아니다. 북의 물자 부족을 우리가 가슴 아파 해야 할 사항이지 결코 남과 북이 이질적이라는 사실과는 무관하다.
통일이란 둘이 하나가 되는 결혼과도 같은 것이다. 결혼이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여만 이루어지듯이, 우리가 진정 통일을 원한다면 애정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사소한 차이는 커다란 동질성의 이름으로 포용하고 녹여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번 연수의 결과 보고를 다음과 같은 한 줄로 요약할 수밖에 없다.
북 거기에도 여기와 같은 산하에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