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첸시오 활동일기2

2004. 11. 26. 오후 2:53:37

글자

  불현듯 베드로 할아버지가 생각이 납니다. 할아버지는 청맹과니였었고 거리에서 구걸로 손자를 키우시던 분이었습니다.

  물론 빈첸시오 활동과 관련된 내용은 비밀을 지켜 대상자를 밝히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이제 그분이 주님께 가신지 어언 3년이 넘은지라 그분의 성함을 밝히는 게 큰 누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분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날,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를 처음 만나던 날은 전 직장의 천주교 신자들의 송환영회가 있던 초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직업 상 4년내지 5년마다 근무지를 옮깁니다. 그리고 옮겨간 직장에서 스스로 교인임을 밝히고 교우 모임에 들어갑니다. 설혹 교우회가 조직되어 있지 않다면 적극적으로 교우회를 조직하고 나름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합니다. 물론 그것은 제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교구장님의 사목지침에 따라야 한다는 신자로서의 소박한 의무감 때문이지요. 아시다시피 전임 교구장님에서부터 소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그 결과 각 본당에서 반과 구역이라는 지역 중심의 소공동체가 조직되고 나름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특성상 지역 중심의 소공동체는 한계가 있어(특히 남자의 겨우), 지역 소공동체와 더불어 직장 소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사목 현실입니다. 저는 신심은 적지만,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한 교구의 사목지침에 따라야 한다는 지식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어쨌든, 송환영회가 있던 날 저녁 저는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노원역 앞 횡단보도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횡단보도 옆에 어떤 걸인이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왜소한 체구에 너덜한 옷, 그리고 가난에 찌든 시커먼 얼굴 가운데에  초점 잃은 흐릿한 눈망울, 전형적인 걸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겁니다. 기껏해야 걸인을 저대로 방치하는 정부를 비판하거나 시설에 들어가지 않는 그 사람의 책임을 들먹거리며 “저런 걸인들에게 돈을 줘서는 안 되! 차라리 시설에 기부하여 체계적으로 저들을 관리할 수 있게 해야 되!”라고 했을 겁니다. 사실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날은 묘하게도, 그 걸인의 검지손가락에 빛나는 물체가 보였습니다.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직감적으로 묵주반지라는 걸 알았습니다.  교우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그러자 갑자기 묘한 감정이 저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나는 교우들의 모임에 내 배를 채우러 가고 있다. 그런데 또 다른 교우 하나가 거   리에서 굶주린 체 구걸을 하고 있다. 이건 뭔가 모순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는 평소와는 다르게 그 걸인 아니 교우에게 자선(?)을 베풀기로 하고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며 순간 머릿속으로 얼마를 줄 것인가를 계산했습니다.

 ‘동전은 너무 하고, 그럼 얼마? 천 원? 그래! 오천 원이면 될 것이다 - 당시 모임 회비가 5천원이었다.

 돈을 그분의 동전 바구니에 넣으면서 바람에 지전이 날릴까 염려되어 “할아버지! 이거 오천원 자리예요”라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황급히 돈을 뒷주머니에 넣으셨습니다. 그 순간에도 할아버지는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 일은 까마득히 잊혀지고, 몇 주가 지난 후 빈첸시오 주 회합일에 회원 중의 한 분이 대상자 가정의 도배 문제를 제안했습니다. 빈첸시오 활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중의 하나가 집수리 혹은 도배 봉사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단순한 돈이라는 물질이 아닌 우리 마음으로써 봉사를 한다는 차원인 것 같습니다. 물론 당시 빈첸시오회원들의 수가 적고 전문성이 없어 전문 도배사를 도와주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우리 빈첸시오회에서는 도배를 해 드리기로 하고 대상자 집을 방문하여 상태를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다음 주일날 우리 회원들이 도배 대상자  집 문을 여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문을 열고 나오시는 분이 바로 그 노원역 앞 횡단보도에 구걸하던 그 걸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순간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내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 저를 감쌌습니다. 지금까지의 내 신앙이 모두 거짓 같았고, 허왕된 자신의 성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심한 자괴감이 나의 낯을 붉혔습니다. 내가 그 순간 왜 순수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는지!

 ‘시설에 들어가지 않고 알랑한 자유를 찾아 저렇게 빌어 먹다니···, 진보주의자라는 김대중 정권은 저런걸 방치하고····’

이런 엉뚱한 마음으로 크게 선심쓰는 양, 돈을 내밀었던 제 자신이 참으로 싫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 할아버지에게는 아드님 하나가 있었답니다. 하지만 가난의 대물림으로 아들 역시 생활고 속에서 허덕거리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라는 직업은 있었지만 박봉에다가 그나마 교통 사고로 자기 앞가림조차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는 눈이 안 보임에도 불구하고 두 손자를 데리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시설 입소는 고사하고 정부의 지원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말입니다. 눈이 멀고 -원래부터 맹인이 아니라 가난한 살림으로 병이 들어 치료다운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눈이 멀었답니다 - 무기력한 몸으로 구걸 이외에 그분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쨌든 도배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몇 달 후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우리 회원들은 상가를 방문하여 연도와 함께 부조금 5만원을 고인께 드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할아버지와 저는 5라는 숫자에 인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동정으로 드린 돈이 5천원, 부조금이 5만원 그리고 제가 그 분을 만난 것도 4번이었으니 말입니다. 마지막 한 번의 만남은 훗날 주님 품에 안겨 이 세상에서의 노고를 위로 받고 계시는 그 분을 뵙는 것이겠지요.



  * 후기

 1. 이 할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저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분들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기로 했습니다. 아들 딸이 있다는게 경우에 따라 불리할 수도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사실 활동하다 보면 이런 경우를 종종 접합니다. 폭력,알콜중독, 무능력으로 부모의 삶이 더 고달프픈데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정부의 보조와 주위의 도움이 거의 없는 경우)

 2. 지금 우리 주위에 있는 분들이 바로 우리 형제라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새삼 깨닫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기도는 우리의 행동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상기합니다.


  “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호세아 6:6, 마태오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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