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어가다가 보면 앞에 그릇을 놓고 구걸을 하는 걸인들을 지하도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그들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보기가 좋거나 나름의 삶에 대한 의지가 보이지도 않는다.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자세의 삶을 경멸하고 비하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곤 한다. 그렇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때는 구걸을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구체적으로 구걸이라는 방식의 삶을 택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살다보면 궂이 앞에 그릇을 놓고 무엇을 달라고 구걸하지는 않아도 너무 힘겹고 버거워서 타인에게 구걸과도 같은 부탁을 하는 경우가 생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생존방식인지도 모른다. 그 방식이 초라하고 비굴할 때는 구걸이 되는 것이고, 높은 지능으로 타인의 사고를 교란시켜서 그의 것을 빼앗을 때는 사기가 되는 것이며, 폭력으로 타인에게 상해를 입혀가면서 빼앗을 경우에는 강도가 되는 것이다. 어쨌든 자신의 힘으로 노력해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이런 삶의 방식을 모두 비난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사기나 강도는 범죄가 되지만, 구걸은 상대방의 동정심이나 비하를 한꺼번에 받으면서 그릇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보편적인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아무리 점잖고 남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커다란 의미에서 구걸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의 바른 부탁의 형식으로, 도움의 형식으로, 아니면 종교나 자선단체의 힘을 빌어서 구걸은 어마어마한 강요가 되기도 하니 조금 허름하게 지하도에 앉아있는 걸인을 바라보면서 힐난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닌 것이다.
일전에 길가다가 걸인이 있으면 동냥을 해주는 것이 타당한지 아닌지 그런 문제를 종교적인 집단에서 논의해본 기억이 난다. 구걸을 하는 사람에게 동냥을 해주면 그는 자립하여 일어설 의지를 가져볼 의사가 생겨나지 않으니 해주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 일은 국가나 사회단체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걸인의 배후에 구걸을 강요하는 사람이 있으니 궂이 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도 동냥을 해주는 것은 주는 사람의 마음이니 해주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어느 것이 정답인지 잘 모르겠고, 그런 문제에 정답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걸을 할 때에는 스스로의 자존심과 존재감을 넘어선 어떤 존재감밖에 남지 않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구걸을 폭력적으로 하게 되면 도둑이라고 부른다. 사기나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상해를 입혀서 상처를 주고 목숨을 빼앗아가면서 구걸을 하게 되면 강도가 되는 것이니, 그런 경우에는 범죄가 되지만, 지하도에 앉아서 또는 지하철에서 다리를 절면서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구걸은 미관을 해칠 뿐 그런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아닌 일이니 말이다.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구걸이 조금 더 사회화되고 세련된 방식을 취할 때 협찬이나 도움이라고 표현하니 구걸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난만 할 것은 아닐런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타인에게서 얻어 먹는 일이 구걸이지 않은가?
타계하신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몽실언니라는 작품 속에서 몽실언니는 예쁘지도 않고 불구인 평범한 한국의 누이지만, 가난 속에서 동생들을 먹여 살리느라 구걸을 한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의 가난을 모두 알고 찬밥이나 남은 음식들을 몽실언니가 나타나면 남겨두었다가 주곤 했다. 정말로 따뜻한 구걸이었다. 몽실언니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살기 위해서 애쓰는 그 모습에 모멸과 자기 힘으로 노력해서 살라는 개인주의적인 윤리를 강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몽실언니는 애써서 열심히 구걸을 해서 동생들을 먹여 살렸다. 그것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모두 인정하는 구걸이니 훈훈한 인정이 깔린 일이라 느껴지지 노력없이 남의 것을 얻어먹는 게으름이라고 느껴지지가 않았다.
몽실언니가 살던 한국의 사회는 개인의 성취가 댓가로 주어지는 개인주의 사회가 아니었다. 권정생 선생님이 그려내던 사회는 간간이 한국 사회내에서 눈에 띄던 모습이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몰아세우던 사회가 아니었다. 공동체 내에서 가난이 허물은 될지라도 그것을 이용해서 착취하고 이용해먹으면서 상처를 주던 사람들이 살던 세상은 아니었다.
사회가 각박해지고 당연한 것이 무엇인지가 모호해진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훈훈한 구걸들이 사라지고 무엇인가 결핍된 사람이 있으면 나에게 사기나 도둑이나 강도가 되지 않을런지를 의심하는 세상이 되었다. 실제로 단 십만원을 훔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앞차가 너무 느릿느릿 운전을 한다고 운전하는 아주머니를 차에서 끌어내려 난도질을 해서 죽이는 세상이다. 그러나 아직도 구걸을 하는 사람들은 구걸을 한다. 그것은 세상에 구걸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들이 여기저기에 많기 때문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솔직히 외면하고 싶다. 보기 싫다. 그렇지만 생각해보게 된다. 구걸을 하고 싶어서 하는가? 내게 필요한 것이 없으니까 하는 것이지.. 구걸을 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결핍된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그리고 동정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도 사람이라는데 대한 분명한 인식이 서로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너무 복잡하다.
세상에 빵은 조금밖에 없는데 먹기를 원하는 사람은 넘쳐나니 말이다. 먹을 만치만 먹고, 남는 것은 나눠주는 그런 마음도 구걸을 하거나 주는 사람들에게 모두 필요한 아름다운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먹고 남은 것은 차라리 버릴지언정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세상이 이제는 무섭기까지 하다. 자신이 가질 만큼만 갖는 것, 그리고 남의 허기를 돌아볼 줄 아는 것.. 내가 너무 이상을 그리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