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랑의 이야기나 종교적인 이야기에서 ‘내 안에 살고 있는 너’를 감정으로 표현하면서 현세에서의 이별과 사랑을 고백한다. 얼마 전 많은 이의 시청률을 올렸던 드라마에서는 “내 안에 너 있다”는 표현이 애정고백으로서 유행어가 되었었던 적도 있었다. 너는 내 마음 속에 살고, 나는 네 마음 속에서 영원히 살거라는 이야기는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 애정을 나누는 애잔한 표현들이 되곤 한다.
이런 진한 감정들은 종교에서도 드러나니 가톨릭 미사에서 매주 하는 성찬식은 예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것이 예수가 우리의 몸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치 낮은 문화권인양 여기는 아프리카의 한 식인종 마을에서는 조상이 죽으면 그 시체를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다. 그것은 조상의 시체를 먹으면 그 조상이 자신의 몸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육을 먹는다는 것이 현대인에게는 낯설지만 그 문화의 근원을 따라가 보면 서구의 종교와 근본 의도는 다르지가 않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디에서나 비슷한 구석을 지니고 살아가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게 네 안에서 살고 네가 내 안에서 산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 감정일지라도 퇴색해버린 어느 감정의 뒷자락을 붙잡고서 그때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별을 했었지..싶은 기억을 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의 시간들은 그채로 마음이 붙잡힌 구석을 가지고 살아나가게 되는 것이니 그렇게 나이들은 사람들은 여기저기 얽매인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 마음이 묶인 곳들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문득 홀가분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책갈피 속의 예쁜 그림들, 마른 단풍잎, 굴러 떨어지는 목걸이의 알, 서랍 귀퉁이에서 아직도 얌전하게 잠자고 있는 묵주알.. 아니 셀 수도 없는 많은 것들이 내 삶 속에서 네 안에서 살고 있겠노라고 약속했었나보다. 이것들이 다른 이들의 마음 속에서도 내게 힘을 주던 것처럼 힘을 주라고 선물을 보내서 비워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쓸모가 없는 것들은 무심히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마음 속에서는 머물만큼만 머무는 것이지 영원히 살려면 더 부지런히 교감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이별이 마지막이 되지 않았어야 했다. 그렇게 마련한 마지막은 그래서 진정한 마지막의 예비연습이었다는 것을 이제사 깨닫는다.
결국 나를 웅켜잡고 있던 것은 내 안에 살던 것이 아니라 퇴색한 나의 감정들이었구나.. 시간들이 많이 지나고 나서 머리위로 생각이 떠올라오니 나를 놓아주고 있는 내 안에 살던 많은 것들이 이미 죽은 것들이었다는 것을 이제사 깨닫는다. 그것들이 살아있게 하려면 자주 영양분도 공급해주고, 자주 대화도 나누어야 했으며, 자주 현실 속에서 데리고 다니면서 지냈어야 했다. 현실 표면으로 드러내어 지내는 것이어야 했다. 마음 속 깊이 눌러 담고서 그것이 미움이건 사랑이건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시간의 흔적들이 스스로의 몸무게를 무겁게 만들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진작 가끔씩 마음의 서랍은 정리해주고 가끔씩 마음의 우물물은 소독해 주어야 했다. 햇볕을 쬐면서 말려줘야 했었고, 정성껏 공을 들였어야 했었다. 그래야만 아직도 살 수 있는 것이다. 독자적으로 영원히 스스로 사는 것은 없다. 인간사에 상호작용없이 진공 상태에서 독립적인 것은 없다. 조그만치는 기대고 조그만치는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미 쓸모없이 기억만으로 가득해져서 다른 것들이 들어갈 틈새가 남아있지 않은 나의 마음 속을 청소해준다. 벼라별 것들이 다있었다. 인간의 존재와 당위, 학문, 이론, 신, 예술, 우정, 애정, 자존심, 치기, 생존욕구.. 아니 이제는 쓸모도 필요도 없어져버린 것들이 지금 아주 중요한 것들처럼 순간순간 내 안에 있는 너의 모습이 되어서 그 곁에 사람들까지 따라다니니 참 바보같이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쑥스럽기만 하다.
처음부터 내 안에 들어가도록 넣으려면 욕심을 부리지 말고 정갈하게 꼭 필요한 것만 하나나 둘 넣고, 그 다음에는 꺼내어 널어 말려서 다른 곳으로 보내주는 지혜가 부족했던 것 같았다. 부지런한 노력은 자신의 자존감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내면을 끌어안고 자기연민에 감정을 소모하기 보다는 당차게 차고 일어나는 홀가분한 자신을 꿈꾸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