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여름은 다 가버렸나봅니다.
아침에 세수하는데 미지근한 물이 따스합니다.
이렇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한해도 가겠지요.
누군가 세상에 태어나면 어느만큼을 살다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게 되어있다는 것..
그래서 사는 동안만큼은 살아야 하는 것..
그러므로 즐겁고 기쁘게 살아야 하는 것..
아주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다시금 깨닫습니다.
눈뜨고 눈이 멀어있던 시간들..
내 분노로 내 욕심으로 내 심술로..
어느만큼 치우침으로 생긴 일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침 한번 꿀꺽 삼키고 다시 생각해보면
의외로 아주 작은 일들일 수 있는 것
이제야 이런 당연함들을 알아가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감사하기도 합니다.
내 사랑이 가르쳐준 것들입니다.
이 사랑은 참 이상합니다.
사랑이긴 한데 그리 들끓지 않습니다.
차라리 냉정합니다.
그리고 다른 일상 모두에 간여합니다.
'용서'라는 머쓱한 단어가 어색하고
'미움'이라는 단어가 너무 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이전에 해본 짝사랑처럼 아프지도 않습니다.
날 외롭게도 하지 않고 날 들들볶지도 않네요.
참 이만한 좋은 배필이 어디있을까요?
내 하나의 무게도 주체못하는 걸 알고
하느님은 사랑하는 딸을 위하여
이런 인생을 준비하셨을 것이라고
그리 어림짐작하면서 그저 지금을 편안해합니다.
속깊은 곳에 돌덩이 처럼 차게 굳어져있던 내 맘은
이제 온돌처럼 따스하게 온기가 도나봅니다.
26. 해묵은 숙제
해묵은 숙제를 하였습니다.
오랜 시간 내팽개쳐두었던 미움들
해결않고 도망쳐온 마음들..
그때는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그리고 더이상 생각할 수도 없어서
그저 나의 맘을 하느님은 알아주시리라
죽은 담에 하늘나라가서 따져보리라
그리 생각하던 문제였지만..
지금 이땅에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결하지 않는 문제니
결국 해 치웠습니다..가볍게..아니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필면 미워하던 사람이 신부님이었으니..
그것도 나에게 결정타를 먹여서 피해를 주었다고 생각한..
애증의 이십년을 가로질러 화해의 선물과 편지를
택배로 부치고 돌아서면서 내 맘엔 시원함과 섭섭함이
꿍치고 있었던 미움과도 정이 들었었나봅니다.
그저 성직자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것이 넘어가는 것은
좀 너무하지만..그 의도조차 무시하는 것은..
암튼 난 존중해 드리고..내가 입은 피해는 내탓이라
그리 여기기로 맘 먹었습니다..그런 부분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십년이 지난 지금의 내가 돌고 돌아서
이 자리로 오게 된 것은 그 시간의 시작이 있었기때문
아마도 그랬을 것이리라..그리 맘 먹습니다.
그리 난리를 쳐가면서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던 예수님의 맘
모든 것을 버리고 잊고난 후에 남는 것은 그것 하나니..
아마도 오랜 싸움에서 그 신부님이 이긴 모양인지요..ㅎ
이기면 어떻고 지면 어떻습니까?
은퇴하여 칠순을 맞으신 그 신부님 생각이 났다는 것..
그놈의 성질을 너무 부리시어 머리에 쥐가 나도록
두들겨패시던 기억을 하면 예수님이 아니라 하느님도 싫지만
한숨 머금고 다시 생각하면 고맙습니다.
이십년..짧은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내게도 말입니다. 살다보면 사는 것이 이런 거구나..
스스로 알때까지 고집을 부려서 돌아오는 길이
더 늦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제 성질도 한몫한 모양입니다.
현실에서 미움을 풀어준다는 것이 매끄럽게 넘어가기가
참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도 같습니다.
선물을 받고 이빨빠진 호랑이의 목소리로
전화를 주신 신부님..연민에 맘이 약해지지만..
다시는 그 현실감 없는 이야기에 휘둘리고 싶지 않은데..
산아래자락에서 찾아오는 이 아무도 없이
천주를 기억하면서 매일매일 제사를 드리는 칠순 노인네..
아마도 전화기 옆에 붙어앉아서 지내시는 모양입니다.
이십년전을 가로지른 시간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
불쌍하다는 연민에 맘이 마구 흔들렸지만
내 사랑은 나에게 가르쳐줍니다..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그렇습니다..날 사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강하고 너무 잘난 사람들은 약하고 못난 사람들을
때로는 잘 이해하지 못하나 봅니다. 구질구질하고 약한
내 모습을 감추고 싶어하던 것이 왜 그렇게 보였을까요?
아직도 이해할 수 없긴 하지만..그저 팔자였거니..
악연도 인연이거니..그리 맘 먹어봅니다.
그 시간엔 그것들이 다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또다른 시간을 맞이하여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잘 살아내고 있습니다..내 사랑과 함께..
고즈녁한 이 작은 동산을 악다구니로 침범당하고 싶지 않은데..
그거 내 작은 소망인데..적어도 지금은 말입니다..
길가다 만난 사람들이 동행을 하다가 이정표 앞에서
각자 자기갈 길로 갈라져서 갈때 서운한 맘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그저 잠시 스치는 기분으로 말입니다.
28. 우리 연구실 이야기
학교의 우리 연구실에서
이번 학기에 함께 일하게된 학생은
다른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입학한
스물일곱살 먹은 여학생입니다.
관상을 보니 죽이 잘 맞을 것만 같습니다.
사실 함께 지내는 학생과 호흡이 잘 맞지 않으면
내가 시집살이를 하게 되는데
이번 학기엔 황후대접을 받는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합니다.
학생들은 내 연구실이 카페인줄 아는지
차를 마시러 그냥 오기도 합니다.
물론 커피나 녹차 같은 것들은 준비해놓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짠순이지만 그런 맘은 열어놓았습니다.
담주엔 전임 근로학생, 신임 근로학생, 지망했다 떨어진
근로학생들이 모여서 짜장면과 탕수육으로 개강파티도 할것입니다.
학생들의 이야기주제가 나의 살을 뺀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경악..으악..
어깨가 작아졌다는 둥..팔이 가늘어졌다는 둥..
나쁜 녀석들 차라리 나더러 직접 이야기하지..그러나
무대에 선 사람이 그 정도의 뒷 소리는 감수하지 싶습니다.
학부모들의 나이가 나보다 어리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고는
나이들어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거 참 어렵습니다.
어른 노릇을 해야한다는 소리인데..쉬운 노릇은 아닌 듯..
좋은 일은 나쁜 일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나도 그것을 알기까지 쉽지만은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흰머리가 점점 늘어갑니다. 뽑거나 염색을 하지는 않으려고요.
그대로 하얀채로 다니려합니다. 늙어감도 즐기려고요.
지금 이 시간의 지지고 볶음은 나의 노년의 추억이 되겠지요.
그렇고 그런 시간들을 모아서 추억거리들을 만들어 나갑니다.
29. 조카의 선물
대학교 3학년인 조카가 방학중 인턴으로
화장품회사에서 일주일 근무를 한 기념으로
사제 화장품을 만들어다 주었습니다.
고급제품의 원료를 섞어 만든 것이라 설명을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는 못알아듣겠고 다만 향이 나고 진하다는 것
궂이 화장품을 이것저것 골라쓰는 취향이 아니니
주는 대로 고맙게 받아서 쓰고 있습니다.
반바지를 입은 몽실몽실한 엉덩이를 두둑거리던
그 어린 조카가 어느덧 수염이 까칠한 대학 3학년이 되어
고모에게 화장품을 만들어다줄 정도로 나이들어간다는 것은
나도 그만큼 늙었다는 소리이니..좀 서럽습니다.
앞으로도 화장품이 필요하면 남비하나 줄터이니
국자로 저어서 만들라고..ㅋㅋ 부탁을 하자
그 아이는 원료는 회사에만 있으니 남비만 주면 못만든다네요.
로션, 스킨, 수분크림, 팩 이렇게 갑자기 여러가지가 생겨서
화장대 위가 넉넉합니다..참 난 복도 많은가봅니다.
사실은 그 로션을 바르면 얼굴이 따끔거리긴 하는데
그래도 조카의 성의를 바르는 것만 같아서 즐겁습니다.
아마도 외로움의 또한 표현인지도..그러나 맘이 훈훈하네요.
이렇게 자기 생활에 충실한 것으로 자기 삶을 즐기는
나의 공대생 조카를 보면..괜히 오지랍넓게 사회를 보아야
뭔가 하는줄 알던 책임감에 등골이 휘던 나의 젊음이
기억나서 서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그 아이는 휘둘리지 말고 제 갈길로 열심히 갈수있는
그런 세상에서 작은 꿈들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30. 가을사랑
경솔하기도 하였던 시간들을 지나서
이제는 익어가는 삶을 맞이하게 됩니다.
나의 중년이라는 삶이 이리 좋다는 것을 아는 것은
땡볕아래서 눈물로 씨앗을 뿌려야했던
젊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지금을 좋아하는 것은 내 맘이 달라져서인지도..
여전히 불만을 가지려하면 불만스러워할 일들은
산재해 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살아가리라고
그리 맘 먹으니 뭔가 터널을 빠져나오는듯한
밝은 빛을 느낄 것만 같습니다.
내 맘속의 홀로서기..참 오랜동안 망설이던 것이지만
그리 안할 수는 없을지 갖은 방법을 다 궁리해보았었지만
다른 도리 없어서 홀로설 수 밖에 없던 것이지만
의외로 외롭기보다는 먹먹한 느낌의 또다른 사랑입니다.
상처를 웅크리고 자기 안으로 틀어박히는 것과는 다른
그러나 좀 더 익숙해지고 좀 더 훈련이 필요한 일인지도..
그리고나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더 자유롭고 풍부하네요.
내 사랑은 그걸 알려주었습니다. 더이상 부대끼지 말라고.
그리 내가 신음할때 함께 신음해주고
그리 내가 늘어져있을때 함께 늘어져계신 예수님
강하게 날 일으켜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이 이젠 더이상
두렵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궂이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어하고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그런 맘들을 접고 이제는 살아내고 싶어하는 긍정을 아니
예수님도 아픈 눈물들을 닦고 함께 긍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가을의 사랑은 나를 익어가게 하여줍니다.
하늘아래 혼자인 듯 하지만 더이상 난 혼자가 아니니
그것만으로도 넉넉함에 맘을 풀어봅니다.
댓글 10
정
😊2008년 10월 22일 오후 9:19
우리 클럽에 푸른 불이 계속 깜박거리게 하려구요
김
👍2008년 10월 22일 오후 9:58
에구구구... 그 놈의 푸른 불 땜시 손가락 부르텃겠시유. 암튼 감사허고 수고혔시유...ㅎㅎ
정
😄2008년 10월 22일 오후 10:53
섬세하면서도 편안함을 느낍니다...그에 비하면 난 아직도 들끓어 넘치니..ㅉㅉ
최
👍2008년 10월 23일 오전 5:57
스텔라 누님!! 친구분을 저희 클럽에 가입시키시죠?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
김
😊2008년 10월 23일 오전 9:53
헉..헉..아고 숨차라!!언니 내전에 언니 보담 쬐끔 똑똑한 친구야그 오면 한개씩 좀 잘라서 올리라고 부탁 드렸건만..이 고지식한 저는 한꺼번에 다 읽어야 하는줄알고..숨차 죽겄네..피아노 대신 컴퓨터 키보드로 푸른불 왕창 켜지말고 모습을 보여주어잉~ 김초혜 시인의 " 사랑굿" 시리즈를 읽는 느낌 입니다..편안함니다..
김
😊2008년 10월 23일 오후 7:13
맞다!!! 사랑굿 시리즈.. 기억이 도통 안 가지고서리... 비슷해요. '사랑굿' 에도 좋은 시 많았던 기억이 가물 가물...
정
😊2008년 10월 23일 오후 8:31
사랑굿은 제목만 들었지 읽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copy & paste로 올린것입니다, 저 그렇게 살신성인파 아닌 것 아실텐데 ㅎㅎ
정
😊2008년 10월 23일 오후 8:41
필진이 필요한 차원에선 가입을 시켜야겠고, 사생활 차원에선 좀? Let me think about it!
류
😊2008년 10월 25일 오전 9:27
미카엘라자매님, 반갑습니다. 스텔라를 통하여 지켜보는 자매님의 영적수행이 참 인상적입니다. 사진 속 풍경이, 요즘 제가 날마다 걷는 장성 불태산 산자락 아래 프란치스꼬요양원 가는 길과 꼭 닮았네요. 한참 바라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