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화답송).
“나는 죽지 않으리라.”는 이 한마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그 가족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죽음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죽지 않는 신들에
관한 신화를 만들어 냈는데,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는
천부적으로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 있음에도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 때문에 자신에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놓은 채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 차라리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안락사, 존엄사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결코 “나는 죽지 않으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삶을 사랑하지만, 늘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 안에서도 부활 축제를 기쁘게 지낼 수 있습니까?
삶의 의미를 잃고 절망 상태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와 같은 증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압니다.
세상이 자기들의 스승이신 주님을 죽였고,
자기 자신들마저도 죽일 수 있고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도 그들은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고 외칩니다.
부활하신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분을 만난 이들은 결코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됩니다.
그들 또한 이미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제2독서 참조).
부활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도 사도들의 마음처럼
빛과 생명으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간청해야겠습니다.
평소에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인격적으로 사랑하던 요한만이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에서 부활하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하는 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감상에 젖어 모성애의 시각에서
빈 무덤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베드로 사도처럼
가부장적인 위치에서 이 빈 무덤을 관찰합니까? 아니면 요한 사도처럼
인격적인 사랑의 시각에서 이 무덤을 바라보고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보이는 빈 무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
-출처 매일 미사-
♬ 빈무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