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마태 14, 13-21)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황량한 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 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 말하였다. “여기는 황량한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 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은 떠날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이르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이었다.
[해설] 제자들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인간적으로 곤란한 처지만 본 것이다. 예수께서는 물론 인간적인 처지뿐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의 현존도 보았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섬세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된다면 전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에 어려움을 주는 한 가지 치명적인 결함은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다는 듯이 기도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영적 여정도 전체적으로 보아 똑같은 치명적 결함을 지니기 일쑤다.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태도로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나날의 생활 또한 똑같은 결함을 안고 있다.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듯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면한 문제들이 말끔히 해소되기 전까지는 하느님을 찾고 기도 드리고 참회하는 일들을 줄곧 미루게 된다. 우리는 언젠가는 영적독서를 하고 훌륭한 지도를 받고 참회하고 성인이 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 살 때가 오리라는 헛된 꿈을 꾸며 어려운 상황들을 견디어 낸다. 피정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피정은 고독 속에서 한결 잘 이루어진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늘 피정 분위기 속에서 산다면 얼마나 멋질까?” 영적 여정에서 우리는 곧잘 이런 유혹에 걸려든다. 우리는 현재 처해있는 바로 그 자리나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거꾸로 이렇게 생각한다. “기도하기에 이상적인 환경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되면 늘 하느님 생각만 하면서 지낼 수 있을 테고 수도자들처럼 기도하며 살 수 있을 텐데…” 바로 이런 것이 하느님 현존 안에 사는 삶을 뒤로 미루게 하는 전형적인 유혹이다.
우리는 흔히 아이들이 자라고 나면, 남편이 병석에서 일어나면, 이토록 힘들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때가 오면 기도할 시간을 내야지… 바꾸어 말해서 당면한 문제들이 처리되는 대로 영적 여정에다 정신을 쏟아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순간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나서 하느님 현존에 정신을 집중하겠다는 태도로 눈앞에 닥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환상, 하느님이 바로 이 일상적인 어려움 속에 내재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환상에 매달리고 있다. 이런 인간적인 판단방식은 신앙이 결여되어 있다는 표시이다. 우리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말했던 필립보와 비슷하다. 그 말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만일 일상의 상황들이 우리에게 말을 해줄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대체 어째서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우리를 알아보면 하느님을 알아보는 것이다.”
하느님은 어려움 속에, 아주 난처한 상황 속에 현존하신다. 하느님 현존이 거기에 내재하고 있는 이유는 비단 그분이 어디에나 존재하시는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사건 속에서도 그분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굶주리고 지친 군중 속에서,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기적을 행하도록 초대하시는 하느님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을 감지하고 그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하느님의 동정심을 감지한 그분의 감수성이 그분의 인식력을 크게 높여주면서, 그분은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음식을 마련해주기 위해 무엇인가를 행하시리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만일 그분이 이 상황을 또 하나의 손쓸 도리가 없는 상황으로 보고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 보냈다면 인간적인 필요를 동정하시는 하느님의 관심은 표현되지 못하고 말았으리라.
나날의 생활 속에서 성령은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갖가지 모습으로 현존하신다. 인간의 비극 속에는 아버지께서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시기 위해 우리가 해주기 바라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복음의 관상적 차원은 이같은 감수성을 꾸준히 강화시켜준다. 우리가 성령의 영감에 따를 때 예상할 수 없는 결과들이 나타난다. 따라서 손쓰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들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감지하는 능력을 키워 나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제아무리 하찮고 평범한 일들 속에서 늘 작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