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일 권 제 육 장
그러하오나 나로 하여금, “흙이요 재”(창세 18,17)인 나로 하여금 당신 자비 앞에서 말하게 하소서. 내가 말하옵기는 나를 비웃는 사람 (역주: 아구스띤의 저서들과 이 책의 군데군데에서 원수들과 독자들의 “비웃음”이란 말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예민한 감수성에서인지, 성격의 소치인지 알기 힘들다. 어떻든 반대자들의 비양과 조소에 대한 관심이 전혀 무의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닌 당신의 자비에게 하오니 아뢰옵게 내버려두소서. 당신마저 나를 웃으실지 모르와도 돌이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오리다. 막상 말씀을 올리려니 주여, 나 어디로 좇아 이리로—죽음스런 삶인지 생명스런 죽음인지 알 수 없는 고장으로—왔는지 모릅니다. 할 따름이오이다. 나는 모릅니다.
당신 자비의 위로들이 나를 받아주셨다 함은 내 육친들한테 들은 바로, 한때 그들 안에, 그들에게서 당신이 나를 지어주셨사오나 나는 기억지 못하는 바로소이다. 인간의 젖의 위로가 나를 받았어도 내 어머니나 유모들이 유방을 채운 것이 아니었고, 오직 당신이 그들을 통하여 갓난이의 먹을 것을 주시었으니 이는 당신의, 만물의 뿌리까지 섭리하시는 (역주: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주, 통치자이신 까닭에 피조물,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섭리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당신은 또한 주시는 분량보다 더는 내가 원치 않도록 해주시고,유모들에게는 당신이 그들에게 주시는 분량만을 내게 먹이도록 하시었으니 그들은 당신으로 해 풍요한 것을 내게 주게끔 그 정이 고루어졌던 것이오이다. 그들한테서의 내 행복은 그들에게도—비록 그들을 말미암지 않고, 그들을 통하여 있는 것일지라도—행복이었사업니다. 님하, 모든 행복은 당신에게 좇아 오는 것, 내 건강 전부가 내 님한테 달린 까닭이옵니다. 이것은 당신이 안팎으로 베푸시는 행복으로써 내게 소리하시기 때문에 훨씬 다음에야 깨달았습니다.
그 무렵엔 고작해야 젖을 먹고 색색 자거나, 몸이 언짢으면 우는 것밖에 몰랐었습니다. (역주: 그의 생각으론 인간이 세상에 나오자 웃기보다 울기를 먼저 하고, 세상은 장미보다 가시가 그득한 귀양살이, 눈물의 골인지라, 즐거움보다 괴롬이 많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라고. 여기서부터 따라오는 장에 이르기까지 어린이에 대한 관찰과 묘사는 놀라웁다. 이 점 아동심리학의 창건자라도 대하는 느낌이다.) 차츰 나는 웃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자면서, 다음엔 깨어서였는데, 이 일조차 남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고, 다른 아이들이 그러는 것을 보고야 믿었을 뿐, 내가 그러한 줄은 전혀 몰랐었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를 조금씩 느끼게 되었고,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들을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싶었어도 되지 않았습니다. 생각은 속에 있고, 사람들은 밖에 있어 이들은 내 영혼 안으로 들어올래야 전혀 길이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사지를 움직거리고, 소리를 내어 내 맘에 있는 것들을 되는대로, 힘 있는 대로 약간 시늉을 냈으나 실상 그것은 어림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못 알아들어서 그랬는지, 해로울까 봐서 그랬는지, 그들이 내 맘대로 해주지 않았을 때, 나는 어른들이 숙이지 않는대서, 자유인들이 복종하지 않는대서 성질을 부리며 울음을 터뜨려 그들에게 앙갚음을 했던 것이옵니다.
아이들이란 이렇다는 것을 내가 겪어서 알게 되었삽고, 나도 그러하였다는 것은 나를 길러서 잘 아는 이들보다도 오히려 모르는 사람들이 가르쳐주었사옵니다. 그렇던 내 어린시절은 죽은 지 이미 오래이옵고, 지금 나는 살아 있으옵니다. 그러하오나 주여, 당신은 늘 살으시고, 당신 안에 죽는 것이라고는 없으옵니다 – 모든 세기의 시초 이전에, 그리고 “이전”이라 일컬을 수 있는 모든 것 이전에 당신은 하느님이시요, 창조하신 모든 것의 주님이시며, 이리하여 덧없는 일체의 원인, 또한 변전하는 삼라만상의 비르숨, 이성 없는 시간적인 피조물의 영원한 이법(理法)이 당신 안에 살고 있사오니—말씀하소서 하느님이여. 당신께 비는 나, 가엾은 당신 것에게, 가엾이 여기는 분이여 말씀하소서. 내 갓난이 시절이란 이미 없어진 어느 내 전생의 계속이었사온지요? 아니면 내 어미의 복중에서 지내던 그것이었는지요? 이에 대하여는 사람들이 몇 가지 내게 귀띔해준 것도 있고, 나 역시 몸가진 아낙네를 보기도 했습니다.
이 시절 이전의 나는, 내 감미 내 천주시여, 누구였으며 어디 있었겠나이까? (역주: 플라톤의 영혼선재설靈魂先在說을 빗대어 하는 말인 듯. 이 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어느 곳에 살다가 거기서 잘못을 저지른 벌로 인간 육체로 추방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아구스띤은 한번도 이 설에 타협한 바가 없었다. 다만 영혼의 기원문제에 관하여는 죽을 때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채, 하느님이 사람을 내실 때마다 영혼도 몸과 함께 만들어주신다는 창조설과, 어버이로부터 육체와 더불어 영혼도 전해받는다는 영혼 전이설의 중간에서 헤메었다.) 이를 내게 일러줄 아무도 없삽고, 아비 어미도 할 수 없사오며, 누구의 경험이나 내 기억도 이에는 무능한 까닭이옵니다. 이런 일 묻자옴을 우습다 하시니이까? 다만 내 아는 대로 당신을 기리고 당신께 나를 고백하라시나이까.
하늘과 땅의 임자시여, 당신께 고하고, 내 아지 못하는 갓난이 시절과 그 시초를 들어 당신을 기리옵나니 당신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일들을 남에게서 스스로 짐작하고, 자신에 대한 가지가지를 아녀자들의 권위로 믿으라 (역주: 제6권 제5장에서 믿음과 권위에 대하여 길게 다루어진다. 믿음이란 신앙세계에서뿐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불가결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무수한 일들을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런 부모한테서 태어났다는 것, 들어서 믿지 않고는 알아낼 수 없는 이 사실을 틀림없이 확신한다는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닌가….”) 하셨나이다. 그즈음 나는 있고 살아 있어 유아기가 끝날 무렵엔 내 느끼는 바를 남에게 알리고자 무슨 시늉을 더듬거리고 있었사옵니다. 주여, 당신 아니고 어디로 좇아 이런 동물이 나올 수 있겠나이까? 누가 제스스로를 만들 수 있사오며, 어느 핏줄이 있어 있음과 삶이 우리 안에서 흐르게 하오리까. 위없는 있음과 위없는 삶이 오직 하나이시사, 있고 살고가 따로가 아니신 주여, 당신만이 우리를 내지 않으셨나이까. 무극하시와 변함이 없으시니 당신에겐 “오늘 날”이 가지 않는 것, 그러하와도 당신 안에 가기는 이 모든 것이 당신 안에 있는 까닭이오니 당신이 안고 계시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그 옮겨갈 길을 지니지 못하오리다.
또한 “당신의 해[年]가 다함 없으니”(시편 101,28) 당신의 연연세세가 오늘 하루로소이다.(역주: 하느님께는 항상 오늘밖에 없음. 어제와 내일은 변화를 전제로 하나, 하느님껜 변화도 추이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는 하루만이 있기에 저자는 과거를 미래로, 현재를 과거로 표현하면서 “오늘 하시리이다. 오늘 하셨나이다”라 말하는 것이다. 다시 제 11권에서 시간에 관한 문제가 논의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우리와 우리 조상들의 날과 날들이 당신의 “오늘”을 이미 지나갔고, 그에서 양상을 빌려 저마다 존재하였나이까. 앞으로의 세월들도 그러하여 그같이 지나가고 빌리고 또한 존재하리이다. 그러나 당신은 매양 같으시사 내일 일 그 너머 모든 것과 어제 일 그 뒤의 모든 것을 오늘 하시리이다. 오늘 하셨나이다. 누가 못 알아듣는다기로 그게 무엇이오니까. 그도 또한 “이 어인 일이냐”하며 기뻐할진저. 이냥 이대로 기뻐할진저. 당신을 찾으며 못 찾느니보다는 차라리 못 찾으며 찾은 것을 즐거워할진저. (역주: 아구스띤의 독특한 표현법에 많이 쓰이는 말재롱을 옮겨보았다. 뜻인즉 꼬치꼬치 캐기만 하면서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느니보다, 따지지 않고 믿으려 드는 것이 더 낫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