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해설] 8. 마태오를 부르심

2005. 7. 21. 오전 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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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태오를 부르심 (마태 9, 9-13)

 

예수님께서 그 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해설] 희생제사는 율법에 규정된 봉헌예식으로서, 사람들은 이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예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의 가장 큰 관심은 예식이 아니라 자비이다. 물론 거룩한 예식이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나는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말씀은 그야말로 엄청난 말이었다. 이 선언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심각한 질병을 깨닫기 위해 영적 여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이다. 관상기도는 이런 질병에 필요한 일종의 항생제이다. 나는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의 말씀에 담긴 대단한 역설에 주목하라. 사람은 모두가 인간조건이라는 질병(원죄)을 앓고 있으며, 따라서 모두가 다 죄인이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신이 병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스스로를 올바른 사람, 또는 자신은 인류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최고의 선물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라는 예수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된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만일 너희가 거짓된 자아라는 병을 흔연하게 인정한다면 나는 언제고 너희를 도우리라.는 뜻이 된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들과, 자신이 병자나 다름 없음에도 죄인인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나란히 배치한 비유가 여럿 있다. 우선 방탕한 아들을 보자. 이 탕아가 집으로 돌아오자 곧바로 마태오의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와 비슷한 잔치가 벌어진다. 화해의 성사는 비단 죄를 고백하는 자리일 뿐 아니라 우리의 죄가 용서 받았음을 경축하는 자리이기도 한다. 이것은 방탕한 아들이 축배를 들었던 것이나 마태오가 경축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사건이다. 독선적인 사람들은 하느님이 어떻게 해서 탕아와 사기꾼, 강도들이 마음을 새롭게 고쳐먹은 듯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귀가를 경축하실 수 있는 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아주 멋진 삶을 영위하고 있을 때 집착하기 일쑤인 이같은 사회적 체면 속에는 우리 자신을 남들의 권리와 필요보다 우선시 하는 성향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방탕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잔치가 벌어진다. 그런 다음에 늘 집에 머물러 있었던 충실한 큰아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우보다 더 큰 죄인임이 밝혀진다. , 자기의 아우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아우의 귀가를 축하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염소 한 마리도 내주지 않았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한다. 그가 드러내 보이는 시기와 질투에 주목하라. 이 충실한 아들은 겉으로는 흠 없이 훌륭하게 처신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 우리 역시 큰아들처럼 방탕한 사람들을 팔벌려 맞아들이고 잔치까지 베풀어주는 이유를 궁금해 할지 모른다. 이에 대한 답변은 그가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충실한 아들은 명실공히 하느님을 표상하고 있는 이 아버지의 동정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역시 영적 여정 중 내내 이런 태도를 보인다. 우리는 한동안 위안을 얻지 못하거나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과다하다 싶게 드러나면, 하느님의 자비에 몸을 던지기 보다는 뒤로 물러서기 일쑤다. 거기에 비하면 명백히 드러난 죄인들은 훨씬 처지가 나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밑비닥까지 내려갔을 때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는것 말고 갈 데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역시 치유가 필요한 죄인들임을 인정한다면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더라도 하는님의 자비를 찾을 수 있게 된다.

댓글 2

  • 2005년 7월 21일 오전 9:15

    존경하옵는 김우모 마태오 대표님! 예수님께서 불러주셔서 달님반에 오신 줄 알겠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2005년 7월 21일 오전 11:34

    저같은 죄인을 보살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짧은 다리로 학급을 위해서 열심히 다니게 해주소서!!! 2학기때는 총무님한테 얻어만 먹지말고 가끔 자장면도 사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