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해설] 9. 단식에 대한 질문

2005. 7. 22. 오전 8: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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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 단식에 대한 질문 (마태 9, 14-17)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금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금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금식을 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이 그 옷을 당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해설] 이 사건에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공격하고 나선다. 우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하는데 당신네는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는 말은 예수의 제자들의 수준이 요한의 제자들만큼 높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질문의 의미는 감히 너희가 어찌 우리와 비교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엄격한 규율은 뭇 사람의 시선과 선망과 갈채를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의 이런저런 사소한 약점에 대해서는 크게 관여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답변삼아 되묻고 계시는 질문, 혼인잔치에 온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는 요한의 제자들이 상황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그들은 거룩함을 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엉뚱한 곳에서 찾고있는 셈이다. 그분은 덧붙여서 말씀하신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때는 혼인잔치에 온 손님들도 단식을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 가운데 머물고 있는 그 현존이 하나의 잔치라는 사실과,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동안 슬퍼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점에 빗대어 말씀하신다. 혼인잔치에 와서 슬퍼하는 사람들은 결단코 하객으로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이같은 통찰력을 우리의 개별적인 은총체험에다 적용하자면 베푸는 능력 못지 않게 받아들이는 능력도 필요한 것이 잔치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신 동안은 금욕을 실천할 때가 아니다. 그것은 정과 사랑을 나누고자 찾아온 소중한 친척을 두고 우리가 잡다한 허드렛일로 분주한 것을 보고, 나중에 다시 오마. 하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 없다.

 

새 포도주는 성령을 나타내는 훌륭한 표상이다. 우리가 관상기도를 통해 의식의 직관적 차원으로 옮아갈 때 낡은 구조들로는 성령의 활력을 담아내지 못한다. 낡은 구조들은 필요한 만큼 유연하지 못하다. 따라서 새롭게 손질하거나 아예 치워버리거나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훌륭한 관습을 지니고는 있지만 단식이라는 규율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고 지적하신다.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이라는 포도주는 그들의 편협한 사고방식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라는 새 포도주는 그들에게 괴로움만 주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 대한 해결책 하나를 제시하신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다 담아라.

 

복음이라는 새 포도주는 성령의 열매, 곧 그리스도의 정신에 깃들인 아홉 가지 속성들로 나타난다. 새 포도주를 담으려면 낡은 구조보다 한결 적합한 새로운 구조를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낡은 구조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성령이라는 새 포도주를 잃고 만다. 새 포도주는 곧 복음의 관상적 차원이다. 그리고 그 토대가 되는 행위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받아들이는 동의이다. 이 동의가 향하는 방향은 우리 자신의 의중이 아닌 하느님의 능력이다. 이 포도주를 쏟아붓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령이다. 우리의 성덕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키거나 그분의 관심을 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새 포도주가 아니다. 그같은 태도는 율법적인 공로를 하느님의 총애를 얻는 필수적인 수단으로 보는 묵은 포도주에 속한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한없는 자비와 기쁨과 평화, 사도 바오로가 열거한 성령의 열매 (갈라 5,22-23)들을 통해 역사하시게 된다. 이런 포도주는 어떤 구조로도 담아낼 수 없다. 바오로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성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법도 필요치 않습니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모든 법의 목적을 실현하고 있는 까닭에 법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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