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일 권 제 칠 장
천주여 들으소서. 앙화로다, 사람의 죄악이여! 사람은 이리 말하고, 당신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그를 만드셨으되 그이 안의 죄악은 당신이 만들지 않으셨나이다. 그 누가 내 갓난잇 적 죄악을 내게 알려주리이까. “당신 앞엔 아무도 죄에서 깨끗한 자 없으오니 세상에 하루를 사는 아기라도 그러하거늘”(역주: 70인역 욥기 14,5. 갓난이의 죄에 대하여 냉엄하리 만큼 무서운 판단이다. 저자는 ‘율리아누스 반박’에서 “아무런 죄도 없다면 어린이들이 무엇 때문에 괴롬을 당하느냐? 전능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이렇듯 죄없는 이들에게 당치 않은 벌을 막으실 수 없다는 말이냐?”라고 말하듯이, 원죄의 결과가 어린이에게도 나타난다 하였다. 원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비참, 동시에 은총으로서 구원되는 인간의 초자연적 가치! 이것이 아구스띤 신학의 중심과제이다.) 그 누가 내게 알려주리이까. 내가 기억지 못하던 내 일, 그것을 지금 그 안에 내가 보는 앳된 어린이오리까. 그럼 그때의 죄란 무엇이더니이까. 울면서 젖통에 매달렸기 때문이었나이까.
만약에 지금 유방이 아니고, 이 나이에 맞는 음식에 그같이 매달린다면 비웃음과 꾸중을 당해야 마땅하겠기에 말씀이옵니다. 그땐 그럼 꾸중 당할 짓을 했나 봅니다. 그렇다 해도 나무라는 이를 알아보지 못하던 나를 나무란다는 일이란 풍속도 이치도 허용치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커감에 따라 이런 따위는 뽑아서 내던지게 되옵고, 한편 무엇을 청소하는 사람일지라도 알면서 좋은 것을 버리지 않사옵니다.
그럼 어리던 시절에 주어지면 해로울 것을 울며 달라던 일과, 매이지 않은 자유인들, 어른들, 심지어는 제 부모가 달갑지 않은대서 사납게 성내던 일과, 그리고 제 뜻대로 안해주던 슬기로운 여러 사람들에게 그들이 들어주어서는 안될 명령을 어긴다 하여 힘껏 때리며 곯려주던 일이 잘한 일이었나이까.
그런즉 어린이에 있어 순결한 것은 그 지체의 여림이지 그 심지가 아니옵나이다. 일찍이 나는 어린이가 질투하는 것(옛 사람은 질투를 어느 마력의 결과로 간주하였고, 이것은 부적이나 굿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음.)을 목격하고 체험하였습니다. 아직 말도 할 줄 모르는 것이 제 젖을 먹는 애를 보자 눈을 부라리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누가 모르겠삽니까. 어머니와 젖어미들 말로는 어떻게 달래는 수가 있다 하오나 무슨 방법을 쓰는지는 알지 못하옵니다. 젖통에 샘솟는 젖이 넘쳐흐르고 있고, 못 먹어 허덕이는 애가 있는데 한 가닥 젖줄로 목숨을 이어가는 놈에게 나눠먹기를 용납하지 않는 일이 어찌 죄스럽지 않다 하오리까? 그러나 이런 일은 쉽사리 눈감아주는 것입니다. 하치 않은 일,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서가 아니오라, 나이가 듦에 따라 없어지는 일들인 때문입니다. 그렇다고는 할지언정 이와 똑같은 일을 나이 든 사람이 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예사롭게 참아줄 일이 못되는 것입니다.
어린이에게 생명과 육체를 주신 내 주 천주여, 우리가 보거니와 당신은 그에게 감관을 붙여주시고, 사지백체를 단단히 짜주시고, 그 몰골을 아름다이 꾸며주고, 그 전체와 안전을 위하여 동물의 본능을 안겨주셨나이다. 이제 당신의 명이 나로 하여금 이런 일로 당신을 기리고, 지존이여, 당신께 감사하며 당신 이름을 거문고로 노래하라 하시나이다. 당신 아니시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이 일 하나만 하시었어도 전능하시고 좋으신 하느님이 당신이오시니 하나이시사 뭇 모습이 당신에게서 좇아 나오며, 모든 것을 만드시고, 당신 법도로 바로잡으시는 극히 아름다우심이여.
살아온 기억도 나지 않고, 남에게서 들었을 뿐, 여남은 아이들을 보는데서 나도 그랬으려니 짐작되는 그 시절, 주여, 그 짐작이 아무리 믿음직하다 할지언정 세상에 살고 있는 지금의 내 생애에 이를 간주하기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으오이다.
망각의 어둠에 속하는 것이야 어미의 태중에 살은 것이나 매한가지인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죄중에 배이었고, 내 어미가 죄중에 나를 복중에서 길렀다”(시편 50,7) 하오면 내 천주여 비노니, 어디 주여, 나 당신 종이 어디, 그 어디에 언제 죄가 없었겠나이까? 그러하오나 이제 그 시절은 생략하오리다.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에 참견하는 노릇이 새삼스럽지 않으오리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