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해설] 12. 겨자씨의 비유

2005. 7. 27. 오전 9: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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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겨자씨의 비유 (마태 13, 31-32)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그것은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해설] 유다인의 세계관에서 보면 질서는 거룩한 것이고 무질서는 부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집안 텃밭에다 심을 수 있는 것들에 관해서도 아주 엄격한 규칙이 정해져있다. 다양한 종류의 랍비 율법은 한 밭에다 함께 심어서는 안되는 작물들을 규정하고 있다. 겨자라는 식물은 급속하게 퍼져서 다른 채소에 폐해를 입히기 때문에 텃밭에다가는 심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다. 그런 판에 이 사람이 자기집 텃밭에다 겨자씨를 심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중은 그가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는 예수의 안목은 깨끗하지 못한 심상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출발점이 부정적인 심상이라면 비유의 나머지는 훨씬 당혹스러운 것이 되고 있다.

 

식물학적 관점에서 겨자씨란 과연 어떤 것인가? 겨자씨는 급속하게 퍼지는 흔한 식물로, 다 자라면 키가 대략 1.2미터 정도 된다. 이 식물은 가지를 여러 개 뻗는데, 상상력을 십분 발휘한다면 그 그늘에다 새들이 초라한 둥지 몇 개를 트는 일도 가능할 수는 있다. 하지만 레바논의 거대한 삼나무 (이 나무들은 키가 60~90미터 이상을 똑바로 자란다. 그래서 온갖 새들이 이 나무에 깃들일 수 있다.)라는 문학적 심상에 푹 젖어있었던 그때 당시 유다민족의 청중으로서는,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상징으로 제시하신 겨자씨가 대대적인 사건이 될 만큼 자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요지는 정반대였다. 겨자씨는 자라봐야 덤불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하느님 나라를 높이 치솟은 레바논 삼나무로 그리는 생각들이 분명히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자기 집 텃밭에다 불법적으로 심은 겨자씨나 같다. 이것은 자라서 푸성귀가 되고, 그려면 몇 마리 새가 변변치 못한 가지들에다 둥지를 튼다. 그것이 전부다. 따라서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가 마지막에 가서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에 대한 거창한 생각들을 모조리 깔아뭉개고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인이 지닌 가장 확고한 기대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 나라가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최후 승리로 나타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학수고대하던 메시아가 나타나 하느님 나라를 예고하고 뒤이어 그 나라가 도래하면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에 굴종하는 비참한 처지에서 풀려난다는 것이었다. 이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미래에 도래할 나라였다.

 

하지만 예수의 비유가 시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만일 일상생활 속의 하느님을 받아들인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하찮고 볼품없는 푸성귀를 당신 나라의 표상으로 사용하신 의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는 하느님의 더없이 크신 일들이 거창한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 대성전에서, 높다란 건물에서, 화려한 대형 무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성전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영감의 근원이 되기보다 박물관 구실밖에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느님 나라는 부침하는 일상생활 속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찮은 일들 속에 내재한다. 그곳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네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리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누구나가 언제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은총이 우리 안에 심겨진 모든 씨앗 가운데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다고 주장한다. 이 씨앗은 자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레바논산 삼나무로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괜찮은 푸성귀가 되면 잘 되는 것이다. 예수시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승리에 찬 세상으로 보는 생각을 극복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복음사가들마저도 이를 어떻게든 위대한 것으로 바꾸어 보고자 노력했겠는가? 다시 말해서 비유가 신화에 먹히고 만 것이다.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데 의의가 있건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낡은 사고방식이 비유를 이전의 신화적 기대들과 일맥상통한 방식으로 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비유는 복음서에 네 가지 형태로 실리고 있는데, 그 가운데 셋은 공관복음에 나오고 나머지 하나는 토마복음에 나온다. 루가와 마태오의 경우는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고 기술하는데, 이는 갖가지 식물학적 자료와는 배치되는 주장이다. 마르코 복음에는 겨자씨가 가장 큰 푸성귀로 자란다고 나온다. 그런가 하면 토마복음에서는 겨자씨가 자라 수많은 새들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가지를 뻗는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이런 기대들은 모두가 사실과는 어긋난다. 겨자씨는 실제로 자라서 나무가 되지도, 푸성귀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되지도, 커다란 가지를 뻗지도 않는다. 따라서 구두전승은 점차 이전의 사고방식으로 경도되어 가면서 그 옛날처럼 웅장한 것을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감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는 가운데 비유가 제시한 진보적인 취지와 놀라운 자유는 소실되어 버린다. 실제로 이 비유는 우리의 선입견과 신화적인 믿음체계를 위협하고, 따라서 거기에 담긴 엄격한 사실성을 강하게 거부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특정한 종교, 국가, 윤리집단, 사회운동 등이 거대한 조직체로 크게 확대되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성공개념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장 놀라운 일들은 어디에서 벌어지는가? 바로 우리의 마음가짐 속에서 은밀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집 없는 이들, 굶주리는 이들, 노인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선행을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는 작고 수수해서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의 변화와 행실의 개선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지 겉으로 드러나는 거창한 성과들이 아니다. 예수께서 물으신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하느님 나라는 나날의 생활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과연 일상생활 속의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만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를 어려움에서 건져줄 어떤 대사건이나 사람을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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