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해설] 13. 누룩의 비유

2005. 7. 28. 오전 8:37:38

글자

13. 누룩의 비유 (마태 13,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올랐다.

 

[해설] 고대 이스라엘 세계에서 누룩은 부패의 상징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누룩은 부패의 원조였고,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불결한 것, 비속한 것을 표상했다. 누룩 없는 빵은 거룩한 것과 성스러운 것, 축제에 걸맞는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누룩이 그토록 확실한 부패의 상징이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옛날에는 누룩을 만들 때 빵조각을 어둡고 습기찬 곳에다 썩어서 악취가 풍길 때까지 놓아두었기 때문이다. 서 말이라는 분량의 밀가루 이야기는 성서의 다른 대목에서도 나온다.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나무 곁으로 찾아온 세 천사를 대접하기 위해 아내 사라에게 밀가루 서 말로 떡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한나 역시 아들 사무엘을 성전에 봉헌하면서 서 말 밀가루를 제물로 바쳤다. 그러니까 이 분량의 밀가루는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출현과 연결되어 있다.

 

우선 이 비유는 무엇이 선하고 악한가를 쉽사리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청중의 안이한 사고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 점에서 이 비유는 계급화한 사회의 경계선을 극적으로 타파하고 있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거기서 이스라엘인들이 못된 인간의 전형으로 보는 사마리아 사람은 영웅으로 밝혀지고 있다. 예수께서 사회에서 버림받은 부랑자들과 한 식탁에서 어울리시곤 하던 관행을 염두에 두고 볼 때 하느님 나라는 소외된 사람들,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 나라가 거룩하고 성스럽고 두루 인정받는 장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예수께서는 당신의 표양과 가르침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하느님 나라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찾아라.  비유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언제든, 어디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마음 내키는 대로 나타난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예상이나 기대에 맞추는 일이 없으며, 우리의 요구에 맞추는 일은 더더욱 없다. 실제로 하느님 나라는 그 본질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하는 우리네 생각들을 지탱하고 있는 온갖 것들을 일부러 하나 하나 타파해 나간다. 일례로, 철저히 비인간적인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는 변화야말로 어느 성인의 시성식보다 더 위대한 하느님의 행위가 아니겠는가? 그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포기한 사회의 부랑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눔으로써 곧잘 당신 자신을 그들과 동화시키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그 자리에 분명히 현존하고 있었다.

 

물론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서나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가,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과, 우리가 지독한 악으로 규정짓는 사건들 속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한다고 암시한다. 돌처럼 굳은 마음에서, 우리가 감지할 수도 없는 한 방울의 눈물을 끌어내는 일은 창조계 전체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사랑이 지니는 힘에 경탄하며 기쁨에 떨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하느님의 나라는 다른 삶들과 연대하는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동정하는 속에서,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우리 눈에 어처구니 없는 부패로 비치는 그런 상황 속에서 가장 활발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활동무대는 일상생활이다. 비유에 따르면, 하느님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과 철저하게 연대하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이상적인 생활양식 속에만 파묻힌다거나 삶에 따르는 어려움과 문제점 안에서만 구제받는 것 양쪽 다 현세의 문제를 풀어내는 해결책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 해결책은 우리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 문제 안에 온전히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떠받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있다.

 

이 점을 가장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실례가 바로 하느님께서 죽음을 쳐이기기보다 오히려 죽음 안에서 우리와 결합하는 쪽을 택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경건한 신심의 표본이나 위대한 관상가가 된다든가 보다 높은 의식의 단계에 도달하겠다는하나같이 우리를 나날의 일상적인 걱정근심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교활한 목적을 지닌우리의 기대 어린 소망들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되지 못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오히려 우리의 실망, 실패, 문제점들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데 있다.

 

하느님은 종교의식 안에서도 현존하시지만 인간관계와 자연 속에도 현존하신다. 종교적 전례들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외적인 의식보다 내적인 자세 속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문제가 사라짐으로써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방법을 통해서 버림받은 이들과 우리 안에서 버림받고 있는 온갖 것들을 성화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랑자들과 죄인들, 버림받은 이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다. 실제로 그분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보다는 그런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 할 때가 훨씬 많았다. 어떤 사람들과 한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곧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된다는 것을 공적으로 표방하는 것이 되는 문화 속에서, 예수는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음으로써 당신의 윤리적 순결성의 상실을 자초하셨다. 그렇다면 이같은 의미심장한 행위는 그분이 공개된 죄인들의 부당한 착취와, 매춘을 비롯한 갖가지 형태의 부정행위들을 인정하셨다는 것일까? 아니다. 그분이 그런 사람들과 한 식탁에서 어울렸다는 사실이 악한 행실을 인정하셨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분의 행동이 나타내 보였던 것은 사랑으로 내뻗는 손길과 화해와 용서가 하느님의 눈에는 윤리적 부패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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