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봉사를 낳는다.
유승학 마티아신부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다. 왜 그러한가? 인간은 스스로의 미래를 알 수 없다.
유승학 마티아신부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다. 왜 그러한가? 인간은 스스로의 미래를 알 수 없다.
또한 완전하지 못한 미숙함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는 두려움과 걱정,
자신의 불완전한 그 한계점 앞에서 모든 일들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대로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기도다.
기도는 정적이지 않다. 보통 기도는 조용하고 고요한 가운데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기도는 정적이지 않다. 보통 기도는 조용하고 고요한 가운데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적이지 않다는 것은 기도할 때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기도는 역동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에너지를 발휘하게끔 한다. 움직이지 않는 기도는 그저 빈 말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신적 존재가 혹은 누군가가 그 모든 것을 대신하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저 소극적인 기도에 불과하다.
적극적이며 참된 기도는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기도를 또 다른 표현으로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일컫는 것은 이 역동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화는 가볍든 무겁든 결과를 가져오고, 그 결과는 행동을 유발한다. 긍정적인 대화의 결론이든, 부정적인 대화의
우리가 기도를 또 다른 표현으로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일컫는 것은 이 역동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화는 가볍든 무겁든 결과를 가져오고, 그 결과는 행동을 유발한다. 긍정적인 대화의 결론이든, 부정적인 대화의
결론이든 대화 이후엔 서로가 약속이나 한 듯 그 결과를 행하게 된다.
그것이 대화를 했다는 증거다. 이렇게 본다면 피조물인 인간과 하느님과의 대화 즉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창조주인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드림으로써 인간 자신이 무엇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행하지 않고 바라는 기도는 일방적이며 이기적인 것이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삶,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을 기도로서 알 수 있다.
그 삶의 움직임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가 가르쳐주는 보편적인 행동은 타인을 위한 자신의 희생이요 헌신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말해서 이웃을 위한 봉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로사리오 기도를 매일 바치고 역동적으로 움직임으로써 봉사 생활을 한다.
로사리오 기도란 무엇인가? 로사리오기도 안에는 그리스도교 전반적인 신앙의 핵심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로사리오 기도는 전체적인 예수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묵상이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이 생각한다면 로사리오 기도를 하는 레지오 단원들은 그리스도의 총체적인 삶을 묵상하며
그리스도가 가르쳐주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성모님은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도움을 주시고자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봉사하시는 전구자로서 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로사리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 생애에 걸쳐 이루고자 했던,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는 삶, 다시 말해 타인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기도는 진정한 봉사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레지오 단원들은 진정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기도는 진정한 봉사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레지오 단원들은 진정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봉사는 실현 될 수 없다.
또한 봉사가 실행되지 않는 기도는 하느님과 올바른 대화를 통해 진정한 삶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와 봉사는 서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하나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레지오 단원으로서 또는 평범한 신앙인으로서 진정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또한 진정으로 봉사하고 있는가? 살펴봐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