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대한 여성(강완숙, 이항복의 모친 최씨)

2006. 11. 10. 오후 8:15:46

글자

(교리교안 자료)

한국의 위대한 여성

(강완숙, 이항복의 모친 최씨)

한은주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대학원, 교리교육전공)

지도교수: 김웅태 신부

1. 강완숙(1760-1801) : 천주교 전도에 앞장 선 순교자

   강완숙은 천주교 최초의 여성회장으로 한국 교회사의 여인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다. 강완숙은 충청남도의 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말재주가 있고 용감하였던 그녀는 덕산 사람 홍지영의 후처가 되었다. 그녀가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은 남편과 마음이 맞지 않아 우울하고 답답한 나날을 보낼 때였다. 그녀는 곧 천주교에 관한 책을 구하여 읽고 마음을 기울여 믿음을 갖기 시작하였다. 총명하고 부지런하였으며 매사에 열성적이었고 자제력이 뛰어났던 그녀는 먼저 가까운 친척과 가족들을 교화시키면서 이웃 여러 마을에까지 전도하였다. 진심을 다해 남편을 섬기면서 그에게도 전도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1791년 신해박해(정조 15년)로 고향이 소란해지자 그녀는 홀로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중국인 주문모신부가 밀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강완숙은 주신부 곁에서 교회의 일을 도왔다. 박해 때 그녀는 주신부를 자기 집의 나뭇관에 숨겨두고 보호하였다. 그녀는 여신도 회장으로서 주신부의 지시에 따라 교인들을 돌보며 지도했다. 박해가 지난 후 주신부는 그녀의 집으로 아주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6년간 자기 집에 주신부를 모시고 교회 내의 업무처리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체포되었다. 그녀를 혹독하게 고문하며 주신부의 종적을 캐어물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곧 그녀의 전도활동이 낱낱이 드러나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형장에서 강완숙은 형리들에게 말하였다. "국법에는 사형을 당하는 자의 옷을 벗기라고 명해졌으나 여인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소. 우리는 옷을 입은 채로 죽기를 청한다고 상관에게 알리시오". 강완숙은 옷을 입은 채 십자성호를 긋고서 참형을 당했다. 그녀의 나이 41세였다.

   신유박해 때 주신부와 함께 순교 당한 신도는 300여명이다. 이때 여신도들이 강완숙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에 대한 기록은 많다. 각계각층의 여신도들은 새로운 세계를 찾아 신앙활동을 했으며 이들을 이끌고 밀어준 것은 강완숙이었다. 또한 그녀는 왕가와 궁궐의 나인들에게도 선교했다. 강화도에 유배 중이던 은언군 이인의 아내 송씨와 그의 자부 신씨 부인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영세를 받게 했다. 그녀는 양반과 중인들, 동정녀와 과부들을 교육시켜 교회 활동을 함께 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

   한국 여성사 안에서도 강완숙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과감한 행동과 선교활동으로 개척적인 여성상을 구현하였다. 여성의 활동이 제약되었던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다.  그녀의 모습은 판관시대 때 압제 당하던 이스라엘 민중들을 구해냈던 여 지도자 드보라를 떠올리게 한다. 드보라처럼 강완숙은 꼭 필요한 시기에 지도자로서 용감하게 일을 수행하여 당시 뿔뿔히 흩어지고 어려웠던 신자 공동체를 재건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냈다. 드보라가 하느님의 훌륭한 조력자가 되었듯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의 조력자로써 당시에 남자들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냈다. 억압받고 천대받던 여성들에게 삶에 희망을 주고 활동의 장을 펼친 것도 그녀의 큰 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항복의 모친 최씨( ? ~ 1571)

   이항복의 어머니 최씨는 극진한 정선과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아들을 가르쳐 아들 이항복이 조선 중기에 명재상과 청백리로 이름을 날리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항복(1556-1618)은 고려 말의 유명한 학자 이제현의 후예로서 참찬 벼슬에 있던 아버지 몽량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9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 최씨는 아들이 버릇없이 자라지 않도록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최씨는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학문에 마음을 못 붙이는 아들을 독려하여 도덕적인 수양과 경제적으로 근검절약하는 정신, 그리고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가르쳤다. 하루는 항복이 대장간에서 버린 쇳조각을 주워 모아 집에 와서 그냥 뜰에 던져버린 것을 보고, "이 쇠는 귀한 것이다. 이렇게 적은 것이지만 송곳같은 것도 만들 수 있으며 만일 탄환을 만들면 나라를 위해서 크게 쓸모있는 것이니 버리지 말아야 한다" . 이후 항복은 대장간 근방에 버린 쇳조각을 계속 모아 3년만에 큰 독으로 셋이나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날 항복이 어머니에게 대장장이가 술과 도박이 심하여 밑천까지 날리고 불쌍하게 되었으니 저 쇳조각을 돌려주는 것이 어떠한가를 의논하였다. 최씨는 대단히 기뻐하며 찬성하였다. 그 후 대장장이는 감격했고 술을 끊고 열심히 일하였다. 또한 그 후에도 그를 존경하여 말년에 이항복이 정적들의 음모로 귀양갈 때 그가 무사할 수 있도록 극진히 호위했다고 한다. 이렇게 어머니의 감화는 아들 뿐 아니라 이웃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오성이 열 두세살 때의 일이었다. 밖에 나갈 때는 새 옷을 입고 나갔는데 돌아올 때는 옷과 신을 벗어 모두 남을 주고 돌아왔다. 이것을 본 부인이 어찌 된 일인지 물었을 때 오성은 태연히 "함께 놀던 옆집 아이가 좋은 옷을 심히 부러워하기에 벗어주고 왔습니다". 이에 어머니는 "네가 한 일이 결코 잘못된 일을 아니지만 반드시 잘한 일도 아니다. 그 아이가 의복이 없어 헐벗고 추위에 떨고 있다면 몰라도, 남의 새 옷을 탐내고 있었는데 그것을 벗어주면 습관이 될 수 있어 남을 도와주는 것이 잘못하면 도리어 도와주지 않는 것만 같이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 라고 지적하였다.

   항복은 어렸을 적부터 호방한 기질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장난이 심했다고 한다. 이를 걱정하여 타일렀지만 그래도 듣지 않자 최씨는 식음을 전폐하고 집안 사당 앞에 가서 칼을 앞에 두고 머리를 풀었다.  "아버지 없이 너를 기르는 동안 나 자신이 교육을 잘못한 탓이다. 자식을 잘못 기른 죄로 조상 앞에 갈 면목이 없어 죽지도 못할 죄인이니 머리를 삭발하여 조상께 사죄드리려 하는 것이다. 남자가 호탕하고 의리에 강한 것은 말할 수 없이 좋은 일이나 그 호탕함이 충분한 인격과 교양으로 받쳐지지 못하면 일개 한량으로 이름을 날릴 뿐 장래 사회에 공한할 큰 재목이 될 수 없다. "  항복은 잘못을 뉘우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과거에 급제하였고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의 강직하고 바른 정신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어머니 최씨는 항복이 16살 때 세상을 떠났지만 어머니의 가르침은 훗날 재상이 되어 임진왜란 때 국가적 위기에서 구국에 앞장서며 많은 업적을 남기는 데 초석이 된 것이다.  항복의 어머니 최씨는 아우구스티노의 어머니 모니카를 떠올리게 한다. 아들을 기도와 눈물로 돌보고 교육하여 훌륭한 교부로 키운 모니카의 노력은 훌륭한 인물을 만들어 내는 데 어머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확인하게 한다.

참고문헌 ----------

한국여성개발원, 한국 역사 속의 여성 인물(상), 1998

(2001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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