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 속의 여성 :(김만덕, 윤희순)

2006. 11. 10. 오후 8:15:09

글자

(교리교안자료)

한국 역사 속의 여성 :

(김만덕, 윤희순)

 

임진선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대학원 교리교육전공)

지도교수: 김웅태 신부

 

1. 김만덕(1739~1812) : 굶주린 백성을 살린 사업가

   2 백년 전에 이 땅에서 사업을 한 여성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서야 바깥 출입하던 시대에 왕에게 벼슬을 받고 왕비를 만난 평민 출신의 여성. 그가 바로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사업가 김만덕(金萬德)이다.  정조 때 문신 채제공이 지은 「번암집」에 기록된 선행(善行)의 제주 여인 만덕은 아버지 김응열(金應悅), 어머니 고씨에게서 태어났다. 1750년 전국을 휩쓴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기녀의 수양딸로 갔다. 만덕이 일도 잘 하고 노래와 춤과 거문고도 잘 하자 기녀는 만덕을 역시 기녀로 만들려고 하였다.

부모 잃고 기생으로 전락

   기생 김만덕. 그러나 그녀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천성을 버리지 못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만덕은 자신으로 인해 집안이 천민으로 대우받는 것이 괴로웠다. 관가에 나가 본래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부득이 기녀가 되었으나 위로 조상에게 부끄러우니 다시 양녀(良女)로 환원시켜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 목사인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찾아가 만일 양녀로 환원시켜준다면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특히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목사와 판관은 그 진정을 받아들여 명단에서 제명해주었다. 그러자 지체 있는 집안에서 청혼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허나 만덕은 일찍이 결심한 바가 있어서 결혼하지 않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약간의 돈으로 객주집을 차렸다.

객주집 차려 큰 돈 벌어

   명기였던 만덕이 객주집을 차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육지 상인들이 즐겨 찾아왔다. 상인 뿐 아니라 관원들까지 투숙하여 객주집은 날로 번창하였다. 만덕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이익을 적게 남기고 많이 파는 것, 둘째, 적정한 가격 매매, 셋째, 정직한 신용본위가 그것이었다. 만덕은 기녀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양반층부녀자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 등을 염가로 공급했고 나아가서 관가의 물품까지도 조달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육지 상인들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자연 만덕의 객주집은 큰 규모의무역 거래소가 되었다. 몇 년만에 만덕은 제주의 거상(巨商)이 되었다.  이처럼 사업에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었으나 만덕의 일상생활은 언제나 검소하여 화려한옷을 입지 않았다.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하여 절약하고, 편안히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며 어렵게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하여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하였다.  1792년(정조 16년)에서 1795년(정조 19년)까지 제주에는 계속 흉년이 들어 식량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특히 1795년에는 국가에서 보낸 구호식량마저 풍랑으로 바다에 빠지자 제주 백성들의 곤궁한 처지는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 때에 만덕은 '바로 지금이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가까운 사람들에게 부탁하였다.  "보릿고개까지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야 하니 육지로 나가서 되는 대로 양곡을 사오세요."

흉년에 가장 많은 곡식을 헌납

   만덕은 곡물의10분의 1을 친척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주었다. 나머지 450석은 모두 관가에 보내어서 구호곡으로 쓰게 하였다. 당시 관가에서는 한양에서 구호곡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목숨은 만덕이 살렸으니 만덕은 우리 생명의 은인이다."사람들은 만덕의 후덕함을 칭송하였다. 제주 목사 이우현(李禹鉉)은 한양에 장계를 올렸다. "제주의 김만덕 여인이 곡식을 사서 450석을 냈고, 고한록(高漢祿)은 300석을, 홍삼필 (洪三弼)과 양성범(梁聖範)은 각각 100석을 내었으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정조는 목사에게 다음과 같이 명을 내렸다. "김만덕에게는 불러서 그 소원을 물어보고 어려운 일이더라고 특별히 시행하라. 그리고 고한록은 대정현으로 임명하고, 홍상필과 양성범은 모두 순장으로 승진 임명하라." 아마도 김만덕이 남자였다면 꽤 높은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목사는 만덕에게 왕의 뜻을 전하고 소원을 물었다. "다른 소원은 없사오나 오직 한 가지, 한양에 가서 임금님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 보고 천하 명산인 금강산 1만 2천봉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이루기 어려운 소원이었다. 백성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 통제되고 특히 여자의 육지행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제주도가 척박하여 인구 유지가 쉽지 않아서였다.그러나 만덕의 소원은 그대로 왕에게 보고되었다. 왕은 쾌히 허락하고 말을 하사하였다. 오는 지역의 관사에서는 만덕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라고 분부하였다.

의지의 자선사업가

   제주로 돌아온 후에도 만덕은 전과 다름없이 장사를 계속하였다. 검소한 생활로 자선사업에 주력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만덕은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무덤은 동문 밖, 성안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했다. 판관 이국표는 만덕의 행적을 오륜(五倫)의 바탕이라며 비문(碑文)을 지어주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조차 드문 시대에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로이 활동했다는 점에서 만덕은 특기할 만한 여성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업의 원리를 잘 파악하고 이를 적절히 활용한 점이다. 그리고 개인의 사리사욕을 떠나 나라를 위해 재산을 헌납했다는 사실이 더욱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김만덕은 요즘도 보기 드문 자선가이며 성공한 사업가로서 당당히 자리매김 되어야 할 인물이다.

 

2. 윤희순(1860~1935) : 여성 의병 노래지어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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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시정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 주세.

  우리 나라 성공하면 우리 나리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안사람 의병가'

 

   한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독립하려는 운동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즉 의병 투쟁과 애국 계몽운동이었다. 의병투쟁은 주로 지방 유생과 농민을 중심으로 추진 전개되었다. 구국교육운동,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는 여성의 참여가 활발하였으나, 의병 투쟁은 죽음을 무릅쓰는 무력 투쟁이므로 여성의 참여는 불가한 것으로 믿었다. 게다가 의병의 지도자는 완고한 유생들이 주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데서 여성의 참여는 더욱 기대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같은 그릇된 선입견으로 역사를 보고 해석한 우리에게 윤희순의 항일구국적 생애는 여성의 역사적 위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윤희순은 나라가 기우는 비상시국에 처하여 여성들이 전통적인 안사람일만을 고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의병을 일으킨 시아버지를 따라 때로는 남장 의병이 되기도 하고, 또 "왜놈 잡는데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안방 여인들에게 의병 참여를 독려하는 의병가를 지어 부르게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던 여중군자(女中君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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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전체가 의병 투쟁에 참여

   윤희순은 1861년에 서울에서 윤익상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명민 효순하고 언행이 엄절하여 어른스러움이 있었다. 16세에 유제원과 결혼하였는데 그의 시아버지는 외당 유홍석이다. 외당은 을미의병(1895) 당시 유중악 유중락 등 춘천 유림과 더불어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 일본에 부역한 춘천부 관철사 조인승을 사형에 처하는 등, 의병작전을 전개한 인물이다.

   또한 윤희순은 타처의 의병들이 마을에 당도하면 식사 준비를 손수하여 주고, 마을 부인들을 모아놓고 의병을 돕도록 연설을 하였다. 그녀는  "구국의 의리에 남녀의 구별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의식이 투철하여 구국 참여에 대한 철저한 남녀 평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왜장에게 경고문을 보내 국모 시해의 죄를 극렬히 책망하고, '안사람 의병가' 등의 구국적 여성의병 노래를 지어 각가정 부인에게 돌리면서 토적(討賊)을 위해 궐기할 것을 읍소(泣訴)하였다. 또 의병을 소탕하려는 관군에게도 '병정노래', '병정가' 등을지어 보내어 동족상잔의 부당성을 효유(曉諭)하였다.

여자 의병 모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민종식, 최익현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고 1907년 해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이어 한국군을 해산시켰다. 그러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여 격렬한 의병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윤희순도 여자의병 3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의 취사, 세탁을 맡아 하고 동리 남녀 노유를 모아 쇠똥과 찰흙 등을 섞어서 화승총에 쓸 화약을 만들고, 의병투쟁장에 직접 참여, 활약하였다.  외당은 주길리(珠吉里)전투에서 부상한 후 치료를 받고 다시 의병을 조직하고자 패잔 의병과 청년들을 새로 모으는 중 1910년의 국치(國恥)의 민족 비극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외당은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면서 그녀의 남편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윤희순도 떠나려 하였는데, 왜경이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쳐 어린 아들을 매질하면서 시아버지와 남편의 행방을 캐어 물었다. 그때 윤희순은 당당한 태도로,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큰일하시는 시아버님을 죽게 알려줄 줄 아느냐? 만번 죽어도 말못하겠다."고 하였다. 왜경도 그의 의기에 눌리고 감화되어 그대로 돌아갔다. 이것으로 보아도 구국을 위한 그녀의 용기가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윤희순은 시아버지의 뒤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그러나 외당은 1913년에 사망하였고 1915년에는 시숙도 사망하고, 또 같은 해 10월 2일에도 남편이 왜경에게 잡혀 심한 고초 끝에 순사하는 비운을 당하였다. 그러나 윤희순의 구국 의지와 활동은 꺾이지 않았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장례를 손수 지내고, 곧 '의병군가', '부인의병가' 등을 지어 동분서주하면서 동지를 모아 병영을 도왔다.

애국투쟁 전하고자 '일생록' 저술

   그녀의 눈부신 활약은 독립군에게 큰 용기를 주었으며, 왜병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왜경의 야습(夜襲)을 받아 체포된 큰아들(敦相)이 왜병의 고문으로 1935년 7월 19일 사망하고 말았다. 3대에 걸친 의병활동을 뒷받침하고 또 스스로 참여했던 그녀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선대의 이 의로운 애국정신을 자자손손에게 가르쳐야 함을 절실히 깨닫고 자신의 「일생록」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그 말미에, "매사는 자신이 알아서, 흐르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살아가길 바란다. 충효 정신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느니라." 고 하는 충효의 교훈을 남기었다.

  1935년 8월 1일, 75세를 일기로 험난하며 위대한 일생을 마치었다. 그녀는 봉천성 해성현 묘관둔 북산에 묻히었다가 고국에 되돌아와 국군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충성된 의기를 기려 1977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상에, 다시 1990년에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2001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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