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악과 하느님의 전능
한은주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대학원, 교리교육전공)
지도교수: 김웅태 신부
1.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인간 구원이라는 신앙의 기본 진리가 여러 각도에서 의문시되고 잇다. 인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서 구원되었다고는 하나 그로 인해, 진실로 인간조건에 질적인 변화가 생겼는가? 인간이 진실로 구원되었다면 전장에서, 피난민수용소와 강제수용소에서, 가스 사형실이나 고문실에서 수천만명의 인간들에게 덮치는 죽음의 공포와 비구원의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전능하신 하느님이 왜 세계 안에 악을 존재케 하여 수많은 인간들로 하여금 무고하게 고통을 당하게 하는가?
2. 성서에서의 악
용어 : 구약성서에서 악을 나타내는 용어인 라아, 차르(혹은 차라)는 목표를 향한 적합성의 결여 또는 유익성의 결여를 의미하거나 특정한 대상의 목표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70인역은 그것을 카코스 또는 프네로스로 표현하는데 인간관계 속에서 야기된 악을 말하고 있는 프네로스가 많이 사용된다. 본성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을 구분하는 현대적인 사고는 성서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성서의 관심은 악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외에 성서에서 또 사용되는 악의 뜻은 사람들을 해치거나 제한하거나 억압하고 불행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존재들의 품성이나 행위보다는 인간의 현재 처해 있는 악한 상황을 의미한다.
본성 : 특히 자주 언급된 악들은 자연의 냉혹함, 질병, 곤궁, 환란, 재난, 고통, 학대, 절박한 상황, 나약함, 타락, 경거망동, 모욕, 수치, 불화, 불의, 억압, 박해, 죄이며 이러한 악에 의해 생긴 마음의 상태, 즉 굶주림, 목마름, 슬픔, 공포, 불안, 절망 등도 죄이다. 하지만 악의 성격은 행복을 향한 인간의 갈망에 장애물이 되기보다 신앙에 어려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만들고 하느님이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인상을 만들어 낸다. 인간이 겪게 되는 악보다 더 나쁜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악, 즉 인간의 불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 불신앙, 우상숭배와 같은 것들이다.
기원 : 본질상 악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신약성서 전체에 나타나는 새상과 하느님의 나라의 강한 대조를 보면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1요한 5,19)라고 말한다. 인간의 악의 원인이 아니다. 악의 기원은 인간 자신의 밖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 -즉 이 세상의 목적과 조화를 교란시키는 요인들의 작용- 은 인간의 죄가 없었더라면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결코 변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성서에서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간주되고 있다. 인격적인 사탄에 대한 신앙은 구약에서는 뒤늦게 나타난다. 또한 이것이 하느님의 창조 업적의 사상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성서 전반에 걸쳐 이 세상에서 사탄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신 분도 창조주 하느님이고 그 악이 발전되도록 내버려둘 뿐 서로를 억제하도록 하시는 분도 창조주 하느님이다. 하지만 사탄의 존재가 하느님의 목적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성서의 관점은 선과 악의 기본적인 차이점을 유지하고 있다.
권세 : 창조주 하느님의 통제를 받으며 악은 항시 존재한다. 구약의 이런 확신은 구원을 요청하는 수많은 기도에서 표현된다. 종국에 하느님은 모든 악을 섬멸하시고 완전한 조화의 상태 속에 살게 해주시리라는 사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신약에서도 하느님이 종말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런 희망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악의 실재가 진지하게 다루어졌다. 성서에서 악은 죄가 발견되는 곳마다 하느님에 의해서 의도되고 보내진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선한 의지가 항상 악으로부터 유래된다고 가르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성서는 악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선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악은 능력적인 면에서 선보다 열등하다. 왜냐하면 악은 선의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악이 하느님의 창조의 선함에 반대하여서만 존재함을 가르친다(창세 1,31). 그러므로 악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고, 개별적인 악은 '잠깐 동안' 지속할 뿐이다.
3. 성서에서의 고통
구약의 고통 : 악은 고통의 원인이다. 성서기자들은 고통의 기원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고통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재난을 하느님의 진노의 표시로서 생각했다. 백성들은 왕의 사악함으로 고난을 받았고 후손들이 선조들의 죄로 고난을 받는다는 집단적 관점을 보인다. 의로운 이의 고통은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욥은 부정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에 자신을 맡겼다.(욥 42, 2-3) 시편 44편 저자는 하느님이 적대자, 압제자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신다는 생각 안에서 만족을 찾았다. 종말론적 사고 안에서는 미래의 야훼의 날을 고대하면 희망을 찾았다. 고통은 백성들로 하여금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하느님께로 되돌아오게 하고 무의식적인 죄를 포함한 죄로부터 복종에 이르게 하는 하느님의 교육으로 받아들이는 해석도 있다. 또한 하느님의 사자인 예언자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의 종은 그의 백성과의 연대성 속에서 그 나라의 형벌을 스스로 대속적으로 담당한다는 것으로 인도된다.(이사 53,2-12) 중요한 것은 무서운 고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코 비관적인 인생관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구약성서는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체험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서서히 형성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하시는 분으로 체험되었다. 그러한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도 덜어주어야 하는 윤리적 실천을 발생시켰다. '돌보아주고 가엾게 여기는' 실천이 있을 때 하느님은 거기 함께 계시고 인간 고통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신약의 고통 : 초대교회는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의 빛 안에서 구약의 고통관을 재해석했다. 고통의 대속적인 결과는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완전한 복종 속에서 죄없는 자가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고통의 필연성을 받아들여 사랑의 자발성으로 고통을 기쁘게 감당하였다. 모든 인간들의 죄에 대한 깊은 이해는 고통이 이 악한 세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마땅한 운명이라는 인식으로 발전되었다. 바울로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여 인류를 위해서 그의 고통을 지속시켰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로 1,24)을 채우면서 그리스도의 대속활동을 기다린다. 이같은 고통이 우리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자의 활동이 세상의 갈망과 권세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악한 자의 사악함을 노출시키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승리의 증거로서 이바지한다. 성도들은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해 반역하는 대신 인내심을 갖고 참으면서 두려움이나 불안감 없이 고통을 인내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모든 악의 세력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그 승리를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앙은 구약에서 도달될 수 없었던 차원인 고난의 즐거움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의 고난의 결과로서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한 깊은 동정을 느낀다. 성도들의 고통은 유익한 사랑 속에서 성장하도록 하신 하느님의 조치이다. 예수의 제자는 모든 적대행위에 대해서 사랑, 용서, 화해로 응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도의 모범을 건설적인 방법으로 닮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악의 권세는 이 세상에서 결정적으로 패망하게 될 것이다.
성서는 고통에 대한 교리나 지식, 가르침을 제공하지 않으며 고통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는 이론적분석이나체계적 설명을 시도하지않는다. 성서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발생시킨 삶의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3. 구원 은총과 악, 고통의 문제
고통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라이프니쯔(G.W.Leibniz, 1640-1716)이래 소위 변신론(theodicea)에서 집중적으로 취급된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물음은 전능과 사랑으로 세계를 창조하시고 은총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이토록 엄연한 고통의 체험과 어떻게 부합하는가이다. 전통적 신학의 해답은 무한한 사랑이며 선이신 하느님께선 고통을 원하시지는 않으시지만 이는 허용은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느님은 고통을 허용하시는가?' 아우구스띠노의 신학에 의하면 세계 질서 안에서 발견되는 악은 본시 선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고 세계질서의 아름다움은 상반되는 악 속에서 더욱 찬란히 빛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전능으로 어떤 종류의 불행이나 고통도 없는 세상을 만드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세계는 하느님이 만드신 이 세상보다 덜 풍요하지 않을까? 만일 전능하신 힘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손해를 끼치거나 혹은 손해를 입을 수 없게 한다면 우리의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이 훌륭한 것들이 있는 세계가 존재하겠는가?.... 또 어떠한 악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숭고한 성품이 있을 수 있겠는가?"1)
이러한 전통적 신학의 입장에 의하면, 하느님과 고통은 모순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전선(全善)에 대립되는 고통의 현상은 바로 하느님의 전선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통을 야기시키는 악은 본래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결핍'2)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찰이 성립된다. 즉, 악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봉사적 기능을 지닌다는 것이다. "악이 있는 세상이 있기 때문에 신은 존재해야 한다... 고로 세상에 아무리 큰 악과 재앙이 있어도 신의 존재에는 지장이 없다. 영상이 태양의 존재를 설명하듯이 세상의 죄악과 부조리에도 신의 존재가 부정되기는커녕 오히려 입증이 된다."3)
오늘날 이 전통적 신학 입장은 논란이 되고 있다. 이 해명은 엄존하는 거대한 악의 세력과 엄청난 고통의 실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고통은 원조 아담의 범한 악의 결과이고 누구나 악에 대해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오늘날엔 심리학이나 생물학, 사회학 등의 연구를 통해 인간이 짊어져야 하는 과실의 책임은 인간 외부로부터 다가온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닌 어쩔 수 없는 때 과오를 저지르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범한 과실의 정도에 비해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너무나 커다랗다. 이에 우리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위해 '전능하면서 전선한 하느님의 은총과 유한하면서 자유로운 인간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전능이란 그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전능하다고 하여 삼각형으로 된 원이나 나무로 된 강철을 만들 수는 없다. 하느님은 본질에 모순되는 일을 행하지 못한다. 하느님의 전능은 존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지 무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요컨대 하느님도 실현할 수 없는 개념구성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개념구성물들이 허구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는 창조된 유한한 자유이다. 그러므로 '전혀 고통이 없는 유한한 자유의 개념이란 삼각형적 원의 개념처럼 본질상 모순된다'고 본다. 따라서 하느님의 전능한 힘으로 조물적 자유를 창조하면서 동시에 고통마저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무리한 요청이다. 하느님이 조물적 자유를 원하시기에 이와 함께 고통의 가능성 또한 필연적으로 주어져 있다.
인간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내던져진 세계 내 존재이다. 인간은 세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자유는 조물인 인간과 조물주 하느님 사이에 사랑이 생겨나도록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조건없이 선물로 받는 '자기 전달의 사랑, 곧 은총'을 자유롭게 수락할 수 있도록 이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4)
사랑하는 두 사람은 절대 상대를 억압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둔다. 이처럼 인간이 하느님과 대하면서 자유로운 처신으로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창조된 사실은 전능한 사랑이 이룩한 기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유의지에 입각하여 조건없이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인 구원은총을 거부할 때 인간은 자신을 상실하게 되고 파멸시킬 것이다. 이 처지는 인간이 자유를 그릇 사용하였을 때에 어쩔 수 없이 고통을 초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인간을 자유로운 조물로 창조할 때에 이 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비구원에 이르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 가능성도 필연적으로 주셨다. 그렇기에 이 가능성이 인류의 역사 안에서 실제로 발생하게 되었다. 고통을 초래하게 되는 잘못된 자유결단을 개별인간만이 아니라 타인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개별 인간들이 그릇 내린 자유결단은 신체적, 사회적 인간구조에 상응하여 이 세계 내에서 구체화된다.
하느님의 전능은 그의 '사랑의 힘'이다. 이 사랑이 인간과 그의 세계에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두고, 인간의 자유에 의하여 하느님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두는 전능한 힘이다. 즉 하느님의 전능한 힘이란 인간과 세계를 자유롭게 두고자 하는 사랑의 행위이다.
악을 절대로 원치 않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에게는 유한하긴 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이 가장 귀중한 존재이기에 악과 고통이 조성되는 가능성마저 열어두셨다. 그 분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고통의 책임까지 친히 짊어지셨다. 무수한 형태로 체험되는 고통은 인간들이 그릇 내린 자유결단의 누적으로 초래되었고 오늘날 역사 속에서 체험하는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전능한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인간을 대신하여 속죄행위를 이룩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위대함이 다시 한번 나타난다. 헌신적인 십자가의 죽음에서 사랑이 죽음의 공포와 고통보다 더욱 강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한계를 모르는 사랑의 자유가 바로 구원이었음이 부활로써 드러났다. 이리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인류의 보편적 구원에 대한 희망의 근거이고 여기서 비로소 고통은 궁극적으로 지양된 것이다.
4. 맺는 말
현대 신학자들은 악의 원인으로서 하느님을 보지 않고 악을 거스르는 인간 투쟁의 영역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다. 몰트만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땅에서부터 하늘로 나아가는 유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순, 고통,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악과 고통의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순간 실존적으로 부딪치는 문제이다. 실존적 문제를 이론적인 설명으로 온전히 답할 수 없다. 오히려 각자 처한 삶의 현장에서 고통과 대면하여 진지하게 그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답변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에게 계시된 하느님을 깨닫게 되면서 고통의 의미도 밝혀진다.
오늘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은 해방과 연민을 위해 우리의 투신을 촉구하는 제안으로서 함께 계신다. 하느님은 그 현존을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분이다. 악과 고통이 있는 우리 삶의 현장에 해방과 연민의 말씀과 실천을 발생시키는 현존이다. 하느님은 예수라는 사람 안에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베푸심의 진리로 계셨고, 우리의 실천은 예수의 삶을 우리 안에 재현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오늘 우리에게도 구원자이다. 선하신 하느님에 입각하여 예수의 실천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생시킬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고, 하느님의 함께 계심은 인간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이다. 하느님께 회개하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 자비, 용서를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한국의 역사와 사회 속에 실천할 때 신앙인은 자신의 고통의 문제로부터 벗어나 타인에게 개방될 수 있으며, 타인의 고통까지도 끌어안음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예수의 삶을 보고 실천하면서 인간 고통의 역사에서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는 종말론적 전망을 갖게 된다. 바로 예수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 각자를 통해 세상의 온갖 악과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나 궁극적인 승리를 이룰 것이다.
참고문헌-------------
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기독교문사, 기독교대백과사전.
심상태, <그리스도와 구원> - 전환기의 신앙이해, 성바오로출판사.
강영옥, <고통, 신앙의 단초>, 우리신학연구소.
각주--------------
1) R.로울러 외, <그리스도의 가르침>, 오경환 역, 서울(성바오로 출판사), 1977, p. 89.
2) 제48문 : 사물들의 종적인 구분.
1. 악이 무엇인지는 그 대립물 선을 통해 알려진다. 선이란 그것을 추구하는 자의 존재를 완성하는 한에 있어서 '원욕될 만한(apppetible)'것이다. 선는 그러므로 '존재성'을 지닌다. 그 대립자인 악은 '선의 결핍', '존재성의 결핍'이다.
2. 사물들 간의 비동일성(47.2)은 우주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불멸의 사물들도 있고 멸망할 사물들도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 멸망할 것들은 멸망 또는 결함에 지배받지 않는다면 '가멸적'이 아닐 것이다. 이 '가멸성'은 상대적 선의 결핍 즉 '악'과 더불어 일어난다. 그러므로 '악은 우주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3. 상대적 선의 결핍은 어떤 주체 속에서 발견된다. 그 주체는 어떤 '존재성'을 지니고 있는 한 '선'이다. 그러므로 악은 선 속에서 발견된다.
(G. 달 사쏘-R.꼬지 편찬, 이재룡, 이동익, 조규만 옮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요약,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3, 1부 창조).
3) 변갑선, "토마스 아퀴나스의 악에 관한 신학"<가톨릭대학 논문집> 3(1977), p. 31.
4) G. 그레사케, <은총 : 선사된 자유>, pp. 11-36, 80-94.
(2001년 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