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첫 만남을 위하여

2006. 11. 10. 오전 8:22:02

글자

첫날 첫 만남을 위하여

6. 선택된 날의 의미:  오늘은 교회가 정한 날 중에서 ‘성모영보(聖母領報) 대축일(大祝日)1)’입니다.  더불어 여러분들이 함께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중요한 의미를 두자면, 오늘보다는 이 예비자 교리의 마지막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세례 받는 날에 일치해야 더 의미 있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을 전하는 천사의 말에 대하여 ‘몇 마디의 말이 오고 간 다음,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 주신다면 고맙고 좋겠습니다’라는 순응의 결과를 통하여 이 세상에는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가톨릭의 신앙인들은 받아들입니다.  물론 똑같은 ‘예수를 삶의 중심’으로 두고 있는 ‘개신교’는 강조점이 좀 달라서, 이 사실을 전혀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가톨릭과 같은 자세를 이단으로까지 치부합니다. <물론 개신교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안 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시작하는 이 날의 의미도, 오늘의 시작으로 인하여 얼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 여러분들의 삶의 모양을 바꾸어놓았다면, 오늘 그 출발점의 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신앙을 바꾼다?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말의 의미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믿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되었든, 미신이 되었든, 자신의 두 주먹이든 간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믿고 의지하는 그것 때문에 사람의 생활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우선 순위가 바뀌는 것이죠.  형체가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또는 그 반대로, 유한한 것에서 무한한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서 그렇지 않은 것으로,  그러나 가톨릭의 신앙을 한번 받아들인다면 죽기까지 충실을 다하라고 다짐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받아들이고 생활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결코 혼자만의 신앙은 아닌데도, 가톨릭의 신앙인들은 매우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삶과 죽음을 함께 보기 때문에 겁을 먹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정 없다는 소리도 들리고, 성당이라는 모임에 누가 왔는지, 모임이 끝나고 누가 가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바뀌어야 할 것인데도 아직은 그렇습니다.

종교를 한문으로는 ‘宗敎’라고 씁니다.  특별히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가르침에 해당되는 것이 ‘만사의 줄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쓰고 듣는 말 중에 종가(집), 종손, 종마 등에도 같은 종(宗)자를 씁니다.  사람이 서 있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새로운 탄생, 이전 것에서부터 완전한 죽음 등을 의미하는 말이 되고 또한 그렇게 하려면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한옥의 대들보를 바꿀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집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한번쯤 생각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 세계에는 힘들다 어렵다 할지 몰라도 그것이 꼭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믿음을 바꾸고 새것을 배운다는 의미 이상을 갖는 것이 바로 종교에 대한 것입니다.


8. 예비자 교리반의 과정 -- 초대받은 당신을 따라서.

오늘 짧은 이야기를 드린 다음에, 앞으로의 윤곽을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성서 중심적인 면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는 알아야 성서도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신앙의 근간이 된 인물,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룰 것입니다. 더불어 삼위일체(三位一體)로서 성부이신 하느님, 성령이신 하느님의 부분도 다룰 것입니다 -- 믿을 교리 편

사람은 이 세상을 살고 지내면서 여러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끼리의 도움을 물론이고, 하느님의 도움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을 가리켜,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서는 성사편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 성총(聖寵)을 얻는 방법 편

다음으로는 인간의 행동을 통하여 행할 삶의 지침을 이야기하는 지킬 계명(誡命)편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삶을 마치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신앙이 이야기하는 것, 우리 삶의 최종목적에 대해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일치하기 위해서 거쳐할 마지막 과정인 죽음-정화와 조명의 기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9. 부탁의 사항

저도 노력하겠습니다만, 기왕에 시간을 내서 시작하신 일, 한 분도 낙오되는 분 없이 끝까지 함께 같은 길을 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10. 지난 시간에 종교를 바꾼다는 말에 대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많이 알아서 드리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새로운 형태의 삶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 인간에 대한 피상적(皮相的) 관찰>

11.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存在)라고 생각한다.  남을 돕는 일로써 다른 사람에게 활기를 느끼게 하는 건설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든 말든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그 이념(理念)에 따라서 움직이기에 생명에 대해서 하찮게 생각하는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이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결코 혼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자기 중심적으로 일을 생각하고 처리하는 데에는 문제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자신만 대우받기를 원하지, 내가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귀중하게 여길 줄 모르는 마음이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런가?


12.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무엇을 많이 알아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보다 인생의 경륜이 더 많고 뛰어나고, 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이 자리에 함께 하실 것이다.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러므로 제가 이야기 드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자리가 형성된 과정을 먼저 떠올려야만 그 의미가 규정될 수 있다.


13. 이 자리는 여러분이 시간을 내서 함께 하신 자리이고, 시간의 주도권이 다분히 제게 있으므로, 제가 생각한 대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 시간이 마련된 목적은 다름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알려주고, 여러분들을 거기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구성은 종교와 신앙 지향적일 수밖에 없음을 미리 알려둡니다.


14. 첫 번째 순서로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너도나도 모두 다 인간이라 불립니다.  한자로는 人間이라 쓰는데, 사람을 설명하는 데에 사람인(人)을 쓰고 그 사이에 뭐가 있는지 또한 간(間)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홀로 살 수 없고 공동체(≠무리)를 이루어야만 제대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한다면, 첫 머리에 말씀드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가 조금은 축소되지 않을까 합니다.


15. 이러한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제기하고 신앙에서, 종교에서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오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목적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뛰어난 존재입니다.  태어날 때는 무척이나 약한 존재이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단 몇 순간도 견딜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 인간이 이 세상에 대해서 갖고 있는 자의식(自意識)이란 참으로 대단합니다. 이 지구상에서, 우주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알려고 하고, 해석하고 원인을 규명하고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방법으로 자꾸만 정리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그때뿐이지요?


16. 이런 사람이 갖는 첫 번째 문제가 삶의 의미를 묻습니다<16면>. 왜 사는지, 사는 목적은 무엇인지, 왜 그렇게도 정신없이 움직이고 먹고 배설하고 싸우고 쌓고 이름을 세우고 만들어내고 소비하고 사는지,  그렇게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 물론 이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기도 쉽지 않지요.


17. 대답은 없습니다.  쉽게 인간에게 그 응답이 주어지지를 않습니다.  ‘열심히 살고 그냥 아름답게 죽기 위해 산다’고 대답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런 심각한 내부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은 그래도 위대합니다. 비가 언제 올지 미리 알아내서 준비하기도 하고, 사람에게 해(害)가 되는 것을 피하려고도 하고, 지구를 지배하고, 자동차를 만들어서 쉽게 움직이기도 하고, 내 의지(意志), 의사(意思)를 전하기 위해서 전화, 팩스 등도 쓰고 만들어냅니다. 가끔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가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운동경기를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이런 요소가 위대함의 한가지 본보기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고 치죠. 그것으로 끝납니까?  사람이 찾는 다른 요소가 또 생기기 마련이고 그것은 지금까지 개발되고 나열된 것만으로는 해답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 뜻에서 또 다른 대답을 우리는 찾는 것입니다.


18. 이렇게 인간의 실상(實相)에 대해서 생각할 때, 더 안타까운 것은 ‘영원히, 내가 마음먹은 만큼 오래도록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 시편 90장 10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야 80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바라는 문제, 그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일만큼은 그 어느 인간도 지금까지 해결한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지구상의 인구가 50억 명이 훨씬 넘지요. 아마 유사(有史)이래 지금까지 있어왔던 사람의 숫자를 모두 계산한다면 천억 명이 훨씬 더 넘을 지도 모를 겁니다.  이렇게 많았던 인간들 가운데 오래 살고 싶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겠죠.  중국에 있었다고 하던 진시황이 그랬죠.  불로초(不老草)를 얻으려고 어쨌다나 그러나 결국 땅속으로 사라진지 오래됐죠.  혼자 죽기 안타까워서 수많은 사람들도 함께 매장하기도 했다고는 합니다만.


19. 이렇게 인간이 갖고 있는 최대한의 근본문제를 생각하면, 인간처럼 비참하고 안타까운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아는데 도대체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입니다.  뭔가 탈출의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직까지 해결을 위한 방법이 제시된 것은 없습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교리교안 32조목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