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내 말씀 들어보소
새김 이 땅에 어떻게 하느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끄셨는가?
말씀 천주 공경가('이벽' 지음)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집안에는 어른 있고 나라에는 임금있네
내몸에는 영혼있고 하늘에는 천주있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는 충성하네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이내몸은 죽어져도 영혼남아 무궁하리
인륜도덕 천주공경 영혼불멸 모르면은
살아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
천주있다 알고서도 불사공경 하지마소
알고서도 아니하면 죄만점점 쌓인다네
죄짓고서 두려운자 천주없다 시비마소
아비없는 자식봤나 양지없는 음지있나
임금용안 못뵈었다 나라백성 아니런가
천당지옥 가보았나 세상사람 시비마소
있는천당 모른선비 천당없다 어이아노
시비마소 천주공경 믿어보고 깨달으면
영원무궁 영광일세
배움 한국천주교회사
1. 평신도들이 세운 교회
한국천주교회는 조선말기인 1777년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당대의 정치계에서 소외된 남인(南人)학자들이 모여, 이조시대의 통치원리인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던 중, '이벽'으로부터 서학(西學)이라고 하는 천주학(天主學)을 전해 듣고는 이를 보다 깊이 연구하기 시작함으로써 태동되었다.
당시 이들이 연구하던 책은 중국에 와서 선교하던 '마태 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등으로서, 그 내용은 보유론(補儒論-유교를 보완하는 천주학)이었다.
2. 첫세례자와 신앙공동체
이들 중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정부로부터 중국에 동지사(冬至使)로 파견된 부친을 따라 북경까지 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 옴으로써, 한국 최초의 세례자(세례명: 베드로)가 되었으며, 이로써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를 하기도 전에 이미 교회의 모습을 갖추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지역교회(地域敎會)는 외국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와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한편 이 시대의 선교는 결과적으로 교회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유럽강국에서 파견된 선교사의 뒤를 따라 군대가 들어가 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동점서세東占西勢의 성격을 띄었다.)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은, 자신이 보고 온대로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정약용(세례자 요한)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중인계급인 김범우(토마)의 집(명례방-현 명동성당)에서 모여 미사도 드리고 성사를 집전하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하의 교회를 꾸몄다. 그러나 곧 그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는, 성사집전을 중단하고 선교사제(宣敎司祭)를 모시는 일에 충실하였다. 참고로 당시 고해 성사의 보속(補贖)을 보면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베풀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희생하기" 등으로 그리스도교 정신을 상당히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순교자들
1791년 전라도 진산군의 '윤지충'(바오로)이 모친장례에 그의 외사촌형 '권상연'(야고보)와 함께 가족들이 만든 신주(神主)를 불살라 버리고 천주교 식으로 장례를 치르려 하자, 가문과 정부에서 패륜아로 사형에 처했다.
이로써 신해(辛亥)년 박해가 시작되었고, 중국인 선교사제 '주문모' 신부와 '이 루갈다' 동정부부, 종교의 자유를 위해 서양에 원조와 지원을 청하는 백서를 쓴 황사영을 비롯한 300여명의 교우가 순교한 신유(辛酉1801), 정부의 척사윤음(斥邪漃音-천주교를 버릴 것)을 반대하여 상재상서(上宰相書-재상에게 교리로서 반박하는 글)를 냈던 '정하상'(바울로)과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안드레아)의 부친 '김제준'(이냐시오), 13세의 최연소 순교자 '유대철'(베드로), 조선교구 2대교구장인 '앵베르 범' 주교, '샤스땅 정', '모방 라' 신부 등 세명의 불란서 성직자를 비롯하여 약 150여명의 교우가 순교(이중 79분이 1984년 성인품을 받음)한 기해(己亥1841),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안드레아)는 1845년 8월 17일 상해 근처 김가항에서 사제서품을 받으시고 10월 12일 42일간 파도와 싸우다 강경 황산포에 입국하여 홀로 전교활동을 하시다, 3대교구장 '페레올 고' 주교를 모시러 백령도에 나갔다가 잡혀 1846년(병오)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다. 그후 함께 마카오로 신학공부를 하러 갔던 '최양업'(토마)신부가 1849년 4월 15일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 전국팔도를 다니시다 고주교님의 뒤를 따라 병사하셨고, 한국 최초의 '성 요셉' 신학교(배론)를 세워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고자 했던 4대교구장 '베르느 장' 주교님과 '브르트니에르 백', '볼리외 서', '도리 김', '푸르티에 신', '프리니콜라 박' 신부님들은 새남터에서, '최형'과 '전장운'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다블뤼' 주교님과 '위앵 민', '오메트르 오' 신부, '장주기'(배론 신학당 집주인), '황석두'는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대원군의 정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1866년부터 1873년까지 병인(丙寅)박해 속에서 순교하셔서 이 중 24분이, 그래서 총 103분이 1984년 요한 바울로 2세에 의해 성인품(聖人品)에 시성되셨다.
천주교 교우들에 대한 당시 정부의 박해원인을 아래와 같이 볼 수 있다.
1)정치인들의 당쟁(黨爭)속에서, 정권 탈취와 통치 기반 안정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다.
2)남, 여, 노, 소, 양반, 중인, 상놈의 구분이 명확한 신분사회인 이조사회(지배 기득권층)의 눈에는 천주교인들이 '하느님만이 왕'이심을 믿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 자매" 로 받아들이고 함께 어울림으로써, 왕권과 사회통치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비추었다.
3)각 선교단체들이 당시 동양의 전래 문화 풍습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에, '조상제례'(祖上祭禮)인 제사(祭祀)를 금지함으로써 무리한 박해를 초래했다. 지금은 오히려 존중하는 추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순교자(martyr)들은 기꺼이 죽음으로써 하느님을 증거(martyr)하였고, 박해 속에서도 신자들은 교우촌(敎友村)을 형성하여 선교를 계속했다. 한편 박해의 현장을 확인하고 '한국천주교회사'를 집필한 달레의 글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모든 재산과 권리를 몰수 당하고 쫓겨 다니면서도 서로 먹을 것을 나누었기에 굶어 죽은 사람이 없었다" 이 기록 안에서 우리는 순교자들이 주님을 진정으로 알아 믿고 섬기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4. 신앙의 자유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교우들은 신앙을 굳건히 증거하였고, 1886년 한불조약(한국과 불란서)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렇게 순교자들의 피가 씨가 된 우리 교회는, 개화기엔 문화(출판, 문맹퇴치), 교육(초, 중, 고, 대학교 및 기술훈련소), 의료(병원, 조산소, 무료병원, 산재병원), 자선(고아원, 양노원, 무료급식소, 장애인 공동체), 사회사업(노동상담소, 근로자 기숙사, 노동자 사목 센터, 정의 평화 위원회)등으로, 70년대엔 인권과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노력으로 한국사회 안에 빛이 되었다. 이제 우리 후손들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우리 삶으로 증거함으로써 이 땅에 빛이 되어야 하겠다.
나눔 초기 한국교회사를 읽고 나서 느낀점을 나누어 봅시다.
관찰 나나 우리 주위에서 신앙을 삶으로 증거하는 이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판단 순교자들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최고의 방법이 죽음으로써 증거하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 않고, 오히려 주님을 만나뵈올 기대감으로 기꺼이 순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실천 '판단'에서 나눈 여러가지 방법 중에서 내가 해야겠다고 느낀 것은 무엇이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요한 12,24-26)
낱말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정식으로 성직을 수행하려면 적법한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단지 그 성직제도만을 본따 운영했다.
교구장敎區長 지역교회인 교구의 사목 책임자로서 원칙적으로 주교이다.
시성諡聖 죽은 신자들 가운데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의 모범으로 본받으라고 공식적으로 기적조사를 통해 장엄하게 성인으로 선포하는 예절. 기적조사는 그 죽은 신자에게 기도하여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는지를 확인하는 조사이다. 이 조사는 죽은지 100년 후에 시작하며, 성인품에 오르기 전에 복자품 때 1차로 그 후에도 계속 성인품에 올릴 필요가 있을 때 역시 100년 후에 다시 조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