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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조물로서의 인간 2.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3. 영과 육의 단일체인 인간 4. 남성과 여성인 인간. 5. 인간과 은총 6. 인간과 죄 7. 인간의 고통 8. 생활 적용 및 주의 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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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인간은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을 의해서 창조되었다.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갈망은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또한 인간이 하느님께로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열고 계신다. 그래서 인간은 진정한 진리와 행복을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1. 인간의 기원 (창조론과 진화론)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기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 기원의 물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대답'이다. 창세기 2장 7절은 첫 인간의 창조를 묘사한다. 즉 진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는 인간이 무기적인 흙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이는 인간의 생성, 진화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을 전하려고 했다기보다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창세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하느님과의 계약 역사와 인간 구원의 역사를 밝히려고 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알려 주려는 성서의 핵심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참고적으로 창세기의 저술 연대는 B.C.1000년경이며 인류의 기원은 150만년 전이다. 그렇다면 성서 작가가 어떻게 창조를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창조이야기에서 생물학적 관심사에 대해 기대해서는 곤란하기에 결국 성서에 나타난 창조론이 진화론의 비판의 장이 될 수 없다. 또한 진화론 역시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기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이론이 아니며 진화론자들도 궁극에 가서는 모른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하느님의 동반자인 인간 하느님께서 인간을 자기의 동반자로 선택하셨고 하느님의 창조 사업은 그분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 덕택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땅의 질료에서 유래하긴 했지만 근원적으로 다른 동물과는 구별된다. 이것은 동물도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하지만 인간과 구분되며, 이는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기원함을 알고 하느님께 응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창세기의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는 말씀으로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독특한 위치를 부여받았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imago, similitudo, Icon ; 형상)이다. 하느님의 '모상'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성서에서, 인간을 말하는 핵심 낱말이다.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라는 성서의 말은 인간과 하느님의 독특한 관계를 의미한다. 다른 피조물이나 짐승들을 만들 때와는 달리 인간을 만들 적에는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다. 이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맺는 특별한 관계이며, 또한 인간은 인간 이하의 다른 동물보다 이상의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는 아니며 하느님과는 구분되는 다른 존재임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다는 것은 외형적인 겉모습을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진선미의 원천이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다. 인간은 이성, 의지, 감성, 그리고 양심을 통해 그러한 하느님을 닮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하느님 모상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참 형상, 참 모습이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초래된 인간의 모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완성시키는 존재로서 표현되고 있다. 성서에서는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완전한 형상과 완전한 모상이며 창조의 중재자인 동시에 창조의 목표로 묘사되고 있다. 인간의 기원은 아담과 그리스도 두 사람이라고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첫번째 아담은 생명을 받은 인간 존재로서 창조되었고, 두번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영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오는 하느님 모상으로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다. 즉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상의 완전한 모습이며 그분을 통해서 태초의 하느님의 모상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닮고 있으며 또 닮아가는 가운데서 자기 모상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느님 모상(형상)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모상에 참여하게 되고,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똑같은 형상을 지니게 된다. 3. 인간 존엄성의 이유 모든 유형의 피조물들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창조주를 알아 사랑할 수 있으며", 인간만이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이며,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인간은 이렇게 창조되었으며, 이것이 인간 존엄성의 근본적인 이유이다. 또 이는 인간이 하느님과 결합되기 위하여 불리었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하느님과 더불어 대화하도록 하느님께로부터 초대받는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어 그분의 사랑으로 지탱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고, 하느님의 이 사랑을 자유로이 인정하며 자신을 창조주께 맡겨드리며 진리를 따라 살아가야 한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어진 인간의 인격은 육체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다.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고 하는 성서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상징적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영과 육의 전인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성서에서 영혼은 인간의 생명이나 인간의 인격 전체를 의미한다. 영혼은 인간의 영적 근원을 가리킨다. 인간은 영혼에 의해 생명을 받으며 육체는 존엄한 하느님의 모습에 참여한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영혼과 육체가 단일한 전체적인 인간의 모습이 완성된다. 1. 인간학적 관점 몸이 아프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마음의 아픔이 몸에 전달되듯, 몸과 마음은 하나이며 인간은 하나의 존재이다. 즉 하나의 인간은 영적인 요소와 육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 몸과 마음이 하나이며 전인적인 것이다. 2. 구원론적 관점 영육의 단일체로서 인간을 이야기한다면, 인간의 구원 역시 단일체로서의 전인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전인으로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한다면, 전인으로서 인간이 구원된다는 것이다. 영혼만의 구원은 있을 수 없고 영혼만을 위한 천국도 있을 수 없으며 영혼을 무시한 육체만의 구원도 있을 수 없다. 3. 종말론적 관점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죽음을 알고 받아들이기에 알찬 삶을 살 수가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이 삶 속에 들어와 있다는 말이 된다. 또 이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나아가 죽음 역시 육체적인 죽음, 생물학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사후의 세계(부활의 세계)라 하는 것도 생물학적 죽음 이후에 오는 세계만은 아니었다. 하느님께서는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셨다. 즉 인격적인 면에서는 완전히 동등하지만, 그 존재의 특성면에서는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기를 하느님께서는 원하셨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고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 1. 아담과 하와의 일치로서 인간 1) 아담과 하와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은, 성서에서 '아담과 하와'로 나타난다. 아담이라는 말은 '흙'이란 뜻을 지니고 있으며,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비록 아담이 흙으로 빚어졌지만 하느님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다. 아담이 흙으로 빚어졌다고 하는 것은 인간은 지상의 소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취약하고 무상하고 죽음에 붙어져 있어 그 본성상 무덤으로 갈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 뿐 아니라 하와도 마찬가지이다. 육적인 존재 '아담'이 물질적인 것으로 볼 때는 허약한 존재이지만 그래도 하느님에 의해 생겨났다. 즉 신적인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지만 '흙'이 곧 인간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흙'이 생명으로 다시 난 것이다. 2) 흙적 존재와 생명적 존재 인간은 흙적 존재와 생명적 존재로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를 개체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등장한 것도, 인간을 아담적인 동시에 하와적인 것으로 봐야 함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이란 존재가 흙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와(생명)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는 본질적으로 남자의 본성과 존엄성을 똑같이 지닌 동등한 존재이며 더 나아가 하와는 아담 자신의 살이고 뼈이다. 즉 남성과 여성이 종속개념을 떠나 동등하다는 것도 아울러 강조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서로에게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까지도 이야기되어야 한다. 2. 남녀의 조화 아담과 하와는 뼈와 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인지 부부는 서로 닮아 간다고 한다. 배우자를 통해서 각자의 모습이 드러나며, 여기서 부부간의 사랑을 볼 수 있다. 또한 남편과 아내는 친밀성과 동일성을 가진 여러가지 차이점도 나타내고 있어 서로가 조화를 이루도록 창조되었다. 이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에 해당되는 하느님의 섭리이다. 우리는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던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아 동일성을 인정하고 성의 구별에 따른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자신의 생활 안에서 남녀의 동등한 권리와 존엄성을 가능한 한 촉진해야 하며 이것은 모든 사람, 가정, 교회, 사회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3. 서로가 서로를 위한 존재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둘이 서로를 위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다. 즉 '서로가 서로를 위한 존재'로서 그들이 '반쪽'이나 '불완전'을 뛰어넘어 서로 인격적으로 일치하도록 하셨으며, 이 일치 안에서 각자는 상대를 위한 '도움'이 되도록 하셨다. 따라서 남녀는 인격적으로는 동등하면서(내 뼈에서 나온 뼈...) 동시에 남성과 여성으로서 서로에게 보완이 된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혼인을 통해서 그들이 '한 몸'을 이루게 하심으로써 인간 생명을 전달할 수 있게 하시고, 후손들에게 인간 생명을 전달함으로써 배우자와 부모로서의 남녀는 독특하게 창조주의 사업에 협력한다. 1. 은총 은총은 인간에 대한 자비로우신 태도나 호의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놓으시는 것을 뜻한다. 1) 하느님의 인자하심 은총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인자하심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굽어보신다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을 말해 준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것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인자하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2)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최고의 선물로 다른 모든 선물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 선사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부어주신다"이다. 사랑이라는 선물의 첫 결과는 바로 죄의 사함이다. 성령의 친교는 교회 안에서, 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죄로 인해 잃었던 신적 유사성을 회복시켜 준다. 하느님의 순수한 호의와 자비로써 거저 베풀어진 혜택, 즉 은총을 '선물'로 이해할 수 있다. 선물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에서 오는 것이고 이 선물 받은 인간은 내면적으로 새로 정리하고 창조하여 하느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게 된다. 즉 사랑의 선물은 하느님의 자비에서 오는 것이기에 이런 선물을 받고 인간은 이제 내면적으로 정리, 정돈, 창조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우신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다 (2고린 10, 18 참조). 은총은 선물이니 만큼 어떤 강요도 없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은총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상대방으로 삼으신 인간의 반응과 관계없는 하느님의 일방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 즉 은총은 한편이 상대방에게 줄 의사를 표시하고 또한 상대방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이라 할 수 있다. 2. 은총을 받는 존재이면서 구하는 존재 인간은 하느님 자녀임을 거부(하느님과의 관계)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에 의해 불림을 받았으며 여기서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난다. 하느님의 자녀인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용서하심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3. 은총의 내용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는 것이 은총의 내용이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인간을 굽어보시면서 은총을 내려 주시는 존재이다.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자체가 바로 은총이 된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계십니다'라는 말은 처음부터 주님과 함께 계신 존재,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처럼 삼위일체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은총의 최고 형태를 의미한다. 4. 은총의 분류 1) 도움의 은총 (助力恩寵) 이 은총은 우리 인간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은총이다. 외교인들에게는 눈을 열어 종교의 진리를 알아보게 하고 죄인들에게는 죄의 추악함을 알게 하고 의인들에게는 더욱더 덕행의 의미를 깨달아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도록 의지를 움직여 주는 것이 이 도움의 은총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으로 우리의 길을 비추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로 하여금 선행을 하고 악행을 피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 가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가 거부함으로써 이 은총을 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수용하려는 마음 가짐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이 은총을 잘 관리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될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2) 생명의 은총 (常存恩寵) 이 은총을 상존 은총이라고도 하는데 이 은총으로 우리 영혼은 거룩해지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 은총을 통해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말로 '의화 은총'(義化 恩寵)이라고도 한다. 생명의 은총은 우리 구원의 절대 조건이다. 이 은혜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생명의 은총은 대죄를 범하면 깡그리 잃어 버리게 된다. 그리고 대죄로 잃어버린 이 은총을 되찾기 위해서는 상등 통회나 고백성사를 받아 대죄를 씻어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선한 길을 따라야 한다는 내적인 요청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양심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행동 지침을 따르도록 명한다. 또한 사회법들은 인간 사회의 질서와 공동선을 위해 해당되는 법들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죄는 인간 역사 안에 현존하고 있다. 인간이 법과 질서를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과 편의만을 생각하고 그것들을 무시하고 침범할 때 죄가 형성된다. 죄를 단지 성장의 결함, 심리적 나약함이나, 일종의 잘못, 또는 부적합한 사회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연유하는 결과 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차원, 즉 하느님께서 창조된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자유를 남용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과 그분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에서 연유한다. 1. 구약성서의 죄 구약성서에서는 인간과 죄를 이야기하면서 죄 자체만을 말하기보다는 죄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하느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무엇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차원에서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 아담과 하느님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 '하느님을 벗어나서 피조물을 하느님보다 더 바라고 있는 것' 이것임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죄를 말하기 위해 여러가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하타(hata)'는 빗나가다, 화살이 빗나가는 것처럼 목적에 빗나가는 것, 엇갈리는 것, 길을 잘못 드는 것 등 도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또 '뻬사(pesa)'는 반역하거나 부수는 것, 파괴하는 것, 서약을 깨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아본(awon)'은 구부리다, 나쁜 길로 이끌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구약성서의 개념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죄의 의미와 근본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죄는 인간 존재로부터 벗어나서 나쁜 길로 들어서는 것으로 이것이 차츰 하느님과 관련된 의미로서 사용되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거부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 나쁜 길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2) 인간 공동체와의 관계 파괴 죄는 항상 공동체와 관련을 갖고 있다. 죄는 공동체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공동체에서 멀어지는 것도 포함된다. 나아가 공동체에 관한 구체적인 일일 뿐 아니라 무의식적 행위까지도 죄로서 인정을 하였다. 3) 죄와 인간 구약성서에서 죄를 이야기하고 그에 대한 벌을 묘사함으로써 인간은 끊임없이 죄의 운명을 지고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개인이든, 이스라엘 공동체이든지 죄를 지은 인간은 불행한 삶, 파멸의 공간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죄가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이라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을 포함한 멸망의 상황들, 각 개인이 지은 죄, 그 결과 등이 인간의 삶을 파멸로 이끌어간다. 결국 구약성서는 인간이란 항상 죄를 짓도록 되어 있는 상황에서 태어났으며 죄를 짓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죄를 강요받은 존재로, 인간은 죄의 운명에 처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장면을 이야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볼 때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의 운명 앞에 놓여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4) 하느님의 심판 하느님의 분노가 그분께 대한 이스라엘의 불경에 기인하며 그 결과를 이스라엘에게 집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개인이나 전체 백성의 악행을 하느님께서 다스리심을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심판은 어떠한 '규범'으로써가 아니라 그분의 절대적 주권으로서이다. 그리고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해서 벌을 받는다고 할 때, 인간의 잘잘못에 따라 벌을 받는 것도 사실이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책임을 묻는 인격신이라는 사실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5) 원죄 성서에서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죄 자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원죄는 하느님 계시의 빛을 통해서 밝혀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두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복음의 '이면 (異面)'이라 할 수 있다. 2. 신약성서의 죄 1)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이며,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 속에 빠진 아들이 하루 속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되기를 원하신다. 구원의 조건은 인간이 먼저 자기 죄를 살피고 하느님으로부터 등진 생활을 했던 상태에서 하느님을 찾고 그분과 함께 하려는 마음의 회복이다. 2) 죄를 뛰어 넘는 존재로서의 인간 창세기 3장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결과로 노동, 죽음 등의 비참한 상황이 초래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개인 인물에 관한 서술이 아니며, 또 아담과 하와는 역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첫 인간은 아니다. 즉 성서 저자는 현재 상황에 대한 진술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서 서술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우리 모든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창세기 3장의 의미는 당시의 죄의 원천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지금의 죄의 객관적인 원천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 원천은 하느님에게 있지 않고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악의 원천이고 이에 대해서 인간은 변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런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 성서에서 죄, 벌 등을 이야기한 것은 은총, 구원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며 은총받은 존재라면 '죄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고 '죄를 뛰어 넘는 존재'이어야 한다. 3) 은총을 필요로 하는 존재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죄라고 하는 것은 죄 자체에 대한 묘사보다는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이고, 신약성서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존재'를 말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하느님께서는 선하시면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가? 그리스도교의 십자가의 논리에서 볼 때 인간은 결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다. 십자가야말로 온갖 고통에 스며들어 있는 곳이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께서 고통에서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고통 속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1. 고통의 의미 1) 성숙한 인간으로 발전 고통은 우리 인간이 성숙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와주고,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성숙과 지혜로 자신의 삶을 빛나게 하고, 타인으로부터도 존경과 신뢰를 받고 온유한 인간이 된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과 고통을 모르고 자라는 사람들이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고통이나 번민 등 인간의 모든 갈등 요인들을 무조건 없애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세계는 비인간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정말로 하느님께서는 계시는가?'하는 것이다.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다. 너무도 대조적이다. 2)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부여 고통은 인간의 현실이며 인간은 이런 고통 중에서 태어나고 사실상 우리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큰 일들은 대개 고통 중에서 생겨난다. 고통 중에서 많은 의미있는 일이 일어난다. 나아가 고통을 모르는 인간은 성숙되고 깊은 사랑을 체험하기 힘들다. 그런 면으로 볼 때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고통의 한 단면이다. 즉 모든 고통이 무조건 없어져야 할 것도 아니며 무의미한 것이지도 않다. 3) 무의미한 고통 고통이라는 것이 인간을 성숙시키고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예외도 많다. 이 세상에는 무의미한 고통도 많다. 인간을 선으로 이끌고 성숙케 하는 고통 뿐 아니라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고통도 있다. 이런 고통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줄곧 있어 왔으며 고통의 이중적인 면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고통도 그것을 극복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다가오게 된다. 누군가는 '인간의 역사는 고통의 경륜이다'라고 하였다. 2. 고통의 극복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삶을 원하지, 죽음을 원하지 않으신다. 또한 인간은 고통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고통을 극복하거나 제거하고자 한다. 고통 중에 구원을 체험했다는 것은 어떤 면으로 고통을 극복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의 극복 역시 고통 안에서 가능한 것으로, 고통을 옆으로 제쳐놓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십자가를 통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고통과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에게는 모든 시간적인 것, 불완전한 것을 제거해야만 신성이 남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분이 완전하기 위해서는 변하지 말아야 하고 고통과는 무관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신상은 그런 완전성, 불완전성, 무감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예수님께서 태어나 살았다가 죽고, 또 인간이 살고 고통을 받는 것에서 하느님께서 드러나며 십자가에서의 고통과 죽음이 하느님의 뜻이며, 이것이 예수님의 삶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삶을 통해 나타나듯이 처음부터 인간의 역사와 삶에 개입을 하시고 인간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죽은 것이 그대로 그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 왔다는 것, 하느님도 우리의 고통을 당한다는 것, 하느님과의 고통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 우리는 구원을 볼 수 있다. 1. 육체적 상태는 좋은데 정신적 상태가 빈약하고 피폐해지면 참된 구원적 상태가 될 수 없다. 또한 반대로 정신적 상태는 좋은데 육체적 상태가 건강하지 못하고 질병과 장애가 있다면 이것 또한 구원적 상태가 되지 못한다. 특히 정신이 황폐해지면 이기주의, 폭력, 무질서가 난무하고 자연을 파괴한다. 이는 음식물에 독성이 있는 물질을 가미한 것과 같이, 인간을 죽게 하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를 함께 소중히 여기며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하자. 2. 남성과 여성으로 만들어 풍요롭고 기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남성은 여성에게, 여성은 남성에게 서로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따라서 남녀는 서로 돕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모든 일에 상의하고 대화하고 계획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통해 하느님께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3. 인간의 고통은 그 자체로 보면 하나의 악의 경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결정적인 선, 즉 영원한 구원이라는 선의 가장 확고한 기초로 삼으셨다. 이는 창조주께로 회두한 세계, 죄에서 해방된 세계, 사랑의 구원 능력을 바탕으로 건설되는 세계의 지평을 점차로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이다. 현재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도록 하자. 4. 인간은 가능한 한 죄를 피하고 공동선과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죄를 범했을 때 회개하고 뉘우치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 받은 고해성사를 통해 죄의 사함과 용서를 받아, 다시 자신의 본모습을 찾고 이웃과 화해하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찾도록 해야 한다. 5. 우리 인간 각자는 누구나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애(自己愛)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윤리의 기본이 된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도로 높이는 교만심도 경계해야 하고, 또 자기 자신을 비하시켜 자포자기의 삶을 살아서도 안된다. 그리고 한 인간이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다른 인간의 인격을 무시하거나 짓밟고 수단으로 삼아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그 모상을 타고난 존재이므로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6. 예수님의 죽음 덕분에 우리가 구원되었다고만 볼 것이 아니라, 죽음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구원이 된다는 차원 높은 생각을 해야 한다. 이럴 때 이 세계를 좀 더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고 사람들을 폭넓게 대할 수 있고 남의 고통에도 동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참하는 차원에서 고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7. 오늘의 세계는 인종 갈등, 종교 갈등, 민족 분규 등 수없이 많은 이유로 전쟁과 폭력과 살인이 자행되며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고 있다. 아울러 개인주의를 넘어선 개인, 단체, 국가간의 이기주의로 한편에서는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데도 다른 한편에서는 사치와 낭비가 만연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 세계는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피조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불평등이 초래되고 수많은 재난이 일어나고 있다. 아울러 오늘날 우리의 삶의 환경은 온갖 공해와 생태계의 파괴로 지구의 종말을 우려하는 단계에 와 있고,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신앙 생활을 하고자 하는 우리는 앞으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는가? 8.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류는 개인, 문화와 민족의 풍부한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아야 하며, 인간의 유대와 사랑의 원칙은 모든 인간이 진정한 형제라는 것을 확신하는 데 있다. 9.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고 있는 인간은 그 육체적 생명을 천시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셨고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그 육체를 값진 것으로 여기고 존중해야 한다. 10.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다른 분이다. 그분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며 하느님께서는 성을 구별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영(靈)이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완전성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완전성, 즉 어머니, 아버지, 배우자의 완전성을 반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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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10. 31. 오후 12: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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