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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영꽃.
얼마 전 아버지 기일 때문에 시골에 내려가게 되어
오랫만에 고즈넉한 고향 들녘과 만경강변을 걸었었다.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길이 매끄럽게 포장되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편리하고 좋겠다 싶지만
내 눈에는 거의 자연 파괴로만 보였다.
회색빛 건물 덩어리가 앞산을 가로막고 서 있고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강둑길은 질경이와 토끼풀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시골에서도 점점 흙 밟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설사 빗물이 고여 질퍽거린다 해도 나는 그 옛날 강둑길이 좋다.
그리고 막히지 않은 앞산의 예전 푸르른 모습도 다시 보았으면 좋겠다.
친환경적인 삶을 구호처럼 거창하게 떠들어대고 있지만
마구 파헤치고 메우고 자르고 쌓고 할 것이 아니라
흙은 흙으로, 산은 산으로, 강은 강으로, 풀은 풀대로
되도록 그냥 그대로 가만히 놓아두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편리함을 얻는 대신 우리는 그만큼의 자연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아버지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한 논두렁을 걷고 있으니
길섶에 울긋불긋하게 핀 기다란 자운영꽃 몇 송이가 풀 속에 보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봇물 터지 듯
기억 속에 숨어있던 자운영꽃들이 한꺼번에 가슴 가득 피어올랐다.
참, 아득한 옛날이다.
허리까지 자란 청보리밭이 파도처럼 출렁대던 따스한 봄날,
하굣길에 자운영 꽃밭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다가
주인의 고함에 놀라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던 시절이 생각났다.
꽃 때문이었는지 유독 벌이 많았었지만 벌에 쐬인 적은 없었고
먹잇감인 벌레를 잡기 위하여
제비들이 날렵하게 그 위를 어지럽게 날아다니곤 하였다.
발목 위로 차오르던 자운영 꽃밭은 잔디밭보다 부드러웠다.
우리들은 그 위에서 장난치며 뒹굴기도 하고 씨름도 하였다.
그러다가 벗어진 검은 고무신 때문에 꽃 속을 뒤지며 찾아다니고.....
넓은 들녘 안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그 자운영밭은
살랑이던 봄바람에 실려온 비릿한 풀냄새들로 가득 차있었으며
꽃과 함께 뒤섞여 놀았던 우리들의 작은 꿈들이 숨쉬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는 나도 친구도 벌도 제비도 하늘도
모두 자줏빛으로 물들은 고운 자운영꽃이 되었었다.
어쩌다 혼자 있을 때에도
그 논둑길에 우두커니 앉아 바람에 흔들거리는 꽃을 구경하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던 돌아갈 수 없는 그때 그 시절이었다.
자운영꽃은
아름답기는 하였지만 결코 화사하거나 고상한 꽃은 아니었다.
하얀 꽃잎을 위에서부터 절반쯤 물들인 자주 빛깔은
오일 장 보러 나가시는 옆집 아주머니의 수수한 한복 치마 색깔이었으며
아주 작은 꽃송이들이 모여 하나의 큰 꽃송이로 보이는 것도
토끼풀의 하얀 꽃과 비슷하거니와 논두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었다.
누가 씨 뿌리지 않아도
길 옆에 저절로 자라던 코스모스나 오밀조밀 모여있는 토끼풀처럼
그 때는 그냥 자라는 풀인 줄로만 알았었다.
돌아보면,옛날 거의 모든 논에는 보리를 심었었다.
그러나 군데군데 보리가 아니라 자운영을 심어놓은 논이 있었는데
가을 벼베기가 끝나고 그 텅 빈 논에 씨앗을 뿌리면
추운 겨울을 지나 봄에 싹이 나오고 그렇게 예쁜 꽃들이 피었다.
후에 알았지만
모내기할 때 그대로 갈아엎어 거름으로 쓰려고 한 것이었다.
인분을 보리밭에 뿌려주고 퇴비를 많이 사용하였던 시대이기도 하였지만
비료가 아주 귀하였을 뿐만아니라 그 값 또한 비쌌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움들이
그 논둑길 가득 들녘의 바람처럼 엄습해왔다.
땡볕이 쏟아지던 논에서 일하시던 아버지와 어른들 모습이 떠오르고
새참을 담은 무거운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걸으시던 어머니가 보이며
쭈그러진 주전자를 들고 물 심부름하던 생각도 났다.
갖가지 상념에 빠져 천천히 걷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하여 왔다.
길가의 조그마한 자운영꽃과 함께
문득 아주 먼 추억 여행을 다녀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이 들어야만 떠나갈 수 있는 그러한 가슴 저린 여행 속에서
방과 후의 텅 빈 운동장으로 희미하게 울려 퍼지던 풍금 소리처럼
기억 저 편의 아스라하게 잊혀졌던 많은 추억들과 사람들을 만났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아픔과 그리움은 그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논둑길,
삶의 질을 높힌다는 친환경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언젠가는 없어질지 모를 좁다란 논둑길이
눈에 익은 아버지의 흙 묻은 장화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걸었던 그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 피어있는 자운영꽃들이
봄바람에 하늘거리며
기울어 가는 햇살에 곱게 빛나고 있었다.
이상원이레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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